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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동아일보 사람들- 이종모

Posted by 신이 On 12월 - 26 - 2018

 

이종모(李鍾模, 1900~1998)는 경남 의령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29년 11월 동아일보 기자로 언론계 입문, 1931년 7월까지 동아일보 부산지국 기자로 활동했다. 1932년부터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일했고 해방 후에는 조선통신 편집국장을 지냈다. 조선신문기자회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이종모(李鍾模) (의령, 1900~ ) ▲ 1929.11 기자(부산지국근무), 1931. 7 퇴사.〔조선통신편집국장〕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명복을 빕니다] 원로 언론인 이종모 씨

원로 언론인 이종모(李鍾模)씨가 4일 0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8세. 경남 의령 출신인 고인은 28년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 졸업한 뒤 동아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와 차장을 역임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통신 창간의 산파역을 맡았고 조선통신 편집국장을 지냈다. 조선기자회 초대회장으로 활동하며 대통령 언론공로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저서로는 ‘나의 기자 시절’ ‘퇴역 기자의 회상기’가 있으며 노년에도 한일관계에 대해 일본잡지에 투고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유족으로는 장남 장호(長浩) 차남 성호(誠浩) 딸 정호(貞浩)씨 등 2남1녀.

발인은 6일 오전 9시반 건국대 병원 영안실이며 장지는 경기광주군 광탄면 돈암동 성당묘지. 

(동아일보 1998년 5월 5일자 19면)

 

 

한국신문백인(韓國新聞百人)의 얼굴 (7)

▲이종모(李鍾模) (주암(珠庵·1900~) 와세다대 졸(早大卒). 【前】「동아(東亞)」「조선(朝鮮)」외근기자(外勤記者). 【後】「조선통신(朝鮮通信)」편집국장(編輯局長). 「호남신문」편집고문(編輯顧問)

(동아일보 1964년 4월 20일자 3면)

 

 

8.15 해방(解放)과 신문(新聞)

이종모(李鍾模)

8월 15일은 한국민족의 가장 기쁘고 또한 영구히 기념할 날이다. 36년 동안이나 기나 긴 세월에 제국주의 일본지배자들에게 구속되어 왔고 또 갖은 찾취와 약탈을 당하여 신음하고 있던 우리 전체민족이 일시에 해방된 날이다… (…)

해방직후 처음으로 신문기자대회가 열렸다. 1945년 10월 23일, 24일 양일간에 걸쳐 서울 종로기독교청년회관에서 전조선신문기자대회가 열리었다. 전국 각지의 25사로부터 2백50명의 신진기자들이 출석하였다. 미군정청으로부터 공보담당관이 참석하였고 조선호텔에 묵고 있던 이승만도 출석하여 감격한 언조로 장황한 축사를 하였다. 가끔 우리나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는 대목은 사회자 이종모에게 물어서 이야기를 계속하였었다. 신문기자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은 이러하였다.

一, 우리는 민족(民族)의 완전독립(完全獨立)을 기(期)한다.

一, 우리는 언론자유(言論自由)의 확보를 기(期)한다 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언론의 자유를 확보하자는 것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신문의 중요한 표어였다. 이것은 신문인으로서는 꼭 쟁취하여야만 될 과제라고 생각한다.

(경향신문 1963년 8월15일자 5면)

 

 

내가 겪은 20세기世纪 (52)  題字·珠庵 李鍾模 씨

사회의 첫 발을 신문기자로 출발해서 언론계를 마지막으로 사회적 활동을 결산하는 인사는 극히 드물다.  무형, 유형의 탄압과 시련 또는 유혹을 물리치고 언론과 동고동락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언론인의 외길이요, 긍지인지도 모른다.
초야에 묻혀있는 퇴역언론인 주암 이종모씨(74)는 “신문기자는 입신양명에 끌려서는 안되며 본연의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고 7순 노구답지 않게 지난날을 회고했다.

기자 기본자세는 지켜야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신문기자의 활동영역이 바뀌고 가치관이 많이 변한 것 같다”고 서두를 끄집어 낸 이옹은 “아무리 시대적 여건이 변했다 하더라도 신문기자의 기본자세가 변질돼서는 안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풍운이 감도는 구한말 경남 의령군에서 이동세 씨의 외아들로 태어난 주암은 고향인 의령군 지정면에서 선친이 설립한 일신학교를 다녔다. 일신학교를 다니면서 신학문 서적이라 할 수 있는 ‘초년필독(初年必讀)’, ‘대한지리(大韓地理)’ 등을 탐독, 시대적 조류에 적응했다.
일신학교를 졸업하자 단신 서울로 올라와 중동학교(현 중동중고교) 속성과에 입학, 당시 교장은 서울대학총장을 역임하다 납북된 최규동 씨였다.
“중동학교 시절에는 게으름도 많이 피웠지만 이때 배운 학문이 후일 사회부 기자로서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데 밑거름이 된 것 같다”고 말을 이은 주암은 최규동 교장의 권유로 YMCA에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영어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며 총독부 관리인 유만겸 씨가 담당했는데 얼마나 발음이 정확하고 엄했던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주암은 삼일운동으로 충격을 받아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1920년 일본에 건너가 2년동안 일고(一高) 입학을 위해 공부했으나 번번이 낙방했다.
궁여지책으로 입학이 수월한 명치대(明治大) 법학과를 1년간 다녔지만 교풍이 마음에 안들어 자퇴하고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으로 전학했다. 당시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은 비교적 진보적 교풍이 있었고 민본주의를 구가하는 낭만적 기풍이 있었다는 것.

조도전(早稻田)에서 대학 생활의 아카데믹한 분위기에 젖으면서 ‘대중공론(大衆公論)’이란 한글 주간시사지를 발간했다.
동경에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동성사’(인쇄소)가 있었는데 ‘대중공론’은 동성사에서 인쇄, 한국 유학생에게 배부했다.
20호 가량 발간하다 일본 경찰의 발행중지 권고로 중단했다고 밝힌 주암은 타블로이드판에 체제가 빈약한 주간신문이었지만 논단 등은 반일적 색채가 강한 알맹이가 있는 신문이었다고 말했다.
“‘대중공론’에 관계했던 일이 결국 언론을 천직으로 삼게 된 인연이 된 것 같다“고 과거를 상기한 그는 ”근대화의 물결로 현대의 직장인들은 자기 직장을 버리고 다른 분야의 직업을 택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개탄조로 말했다.

요시찰(要視察) 리스트서 빠지려

주암은 귀국하자 일본 고위경찰간부로부터 “조선인으로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는 경남에서 당신을 포함해 몇 명 안되니 식산은행에 입행하든지 경찰에 들어와 같이 일하자”고 회유를 하더라는 것.
집요한 회유를 피할 겸 동경 유학시절 신문에 관계했던 인연을 거울 삼아 주암은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주암은 신문기자가 된 동기를 “일본 경찰의 요시찰 리스트에서 빠지려는 피신 겸 취직의 동기도 있었지만 단순히 기사를 쓰고 싶은 충동이 크게 작용했다”고 술회했다.

사회부의 올챙이 기자로 사회부장인 현진건 씨로부터 많은 기합(?)을 받았고 경찰 출입을 할 때 기사를 빠뜨리면 현 부장이 노발대발, 라이벌 신문인 조선일보 기자가 열심히 뛰고 있는 시간에 무엇을 했느냐고 엄한 추궁을 받아 만회하기 위해 특종을 해야 한다는 자세로 일선 기자생활을 열심히 했다고 한다. 그러던 때 마침 경남도지사와 경남평의회 간에 알력이 극심하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래서 주암은 최초로 부산에 출장을 갔다. 당시 도지사는 일본인 수또(須藤)인데 일방적으로 수또가 도평의원을 집단 해촉한 사건이 기자의 취재감각을 자극했다.
지사는 액수는 기억이 안나나 교육비를 토목비로 전용했는데 도평의회가 지사의 조치를 거부한데서 발단됐다는 것. 자문기관에 불과한 도평의회가 지사의 예산 승인요청을 거부하자 화가 난 지사는 전격적으로 도평의원을 해촉한 것이 이 사건의 개요라는 것이다.

쌍방 입장 공정하게 보도

이 사건의 전말을 소상히 취재, 본사에 송고했더니 사회면 톱기사로 크게 취급됐다. 신문기자 6개월만에 톱기사를 쓰게 되니 사기는 크게 올라 수또 지사를 만나고 도평의원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쌍방의 입장을 공평하게 보도했다.
취재에 전력하느라고 타신문도 보지 못했는데 현 부장으로부터 ‘특종축하’라는 전보를 받고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는 안도감도 갖게 됐다. 본사에서 계속 부산에 남아 취재하라는 연락을 받고 도평의원인 김병규를 접촉, 취재와는 거리가 먼 꾀를 제공했다. 일본중의원에도 소위 지선파가 있을 것이니 이들에게 경남도평의회사건 전말서를 보내라고 권유했다는 것.
김병규는 교육자로서 수또 지사의 처사에 크게 흥분해 있던 때라 올챙이 기자의 제의를 증석에서 수락, 전말서를 일본중의원에 보냈다. 일본중의원에서 경남도평의회사건이 정치문제화되어 수또 지사는 결국 해임되는 사태를 초래했다.

주암은 “당시의 신문기자는 항일지사로 사회에서 존경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당시 딴 신문에서 취급하지 않던 사건을 문제점을 추출, 취재해 보도했더니 특종이 되고 타신문에서 따라왔다고 밝혔다.

여직공 기숙사까지 잠입

그는 조일(朝日), 매일(每日) 등 일본의 유력지들이 동앙일보 기사를 전재했다고 회상하면서 정의의 필봉이 서술이 퍼런 일본인 지사를 해임시키도록 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주암은 일선 기자생활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1929년 가을 삼릉재벌(三菱財閥)이 경영하는 조선방직에서 파업을 했을 때 취재하던 일이라 했다. 이 파업은 원산부두 노조파업 다음으로 규모가 큰 파업이었는데 파업에 참가한 1천여 명의 종업원 중 85%가 여성이었다. 파업의 요구 조건은 ①임금인상 ②근로조건 개선(적정취업시간요구, 후생시설개선) 등이었는데 도하 각 신문이 크게 취급했다.

취재란 사건의 전개상황을 체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밑바닥을 훑어봐야한다는 현 부장의 평소의 지론에 따라 여직공의 기숙사에 잠입해서 살펴봤다. 기숙사의 침구뿐만 아니라 모든 시설이 불결함을 목격했다. 이렇게 종합취재를 끌어낸 후 임금인상, 취업시간도 중요하지만 위생시설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고 기사를 정리했다. 이 기사를 계기로 사에서 사회부 기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사건 자체의 취재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이런 사건이 재발되지 않게 하기위한 문제점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후배 기자들에게 당부하는 것도 주암은 잊지 않았다.

(경향신문 1973년 7월 11일자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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