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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동아일보 사람들- 이정석

Posted by 신이 On 12월 - 26 - 2018

 

이정석(李貞錫, 1932~2008)은 평북 정주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1954년 조선일보에 수습 1기로 들어가 1963년까지 근무했다. 1963년 동아방송 개국 때 입사해 정치부 차장, 방송뉴스 부장을 역임하며 보도프로그램을 이끌었다. 1971년에 KBS로 옮겨 공영방송으로 새로 출범하는 한국방송공사의 초대 보도국장이 됐고, 대한언론인회 13대, 14대 회장을 맡았다.

 

이정석(李貞錫) (서울, 1932~ ) △ 1963.5 기자(방송뉴스실), 방송뉴스부차장, 정치부차장, 사회부차장, 방송뉴스부장대리, 방송뉴스부장, 방송뉴스1부장, 1971.7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3권, 동아일보사, 1985)

 

 

 

다시 찾은 자카르타

10년차 기자였던 나는 조선일보사에서 동아일보사로 옮겼다. 1963년 개국한 동아방송(DBS)의 보도요원으로 스카우트된 것이다. 처음 해보는 방송은 모든 것이 신기했다. 신문 마감은 하루 2, 3번인데, 방송은 매 정시에 나가는 뉴스마다 새 뉴스로 채울 수 있으며, 시간 아닌 초침을 의식해야 하는 새로운 생활이었다. 아나운서가 뉴스 낭독 중일 때도 긴급뉴스가 들어오면 스튜디오에 들어가 아나운서에게 넘겨주고, 그대로 방송되었다.
뉴스 개국 요원은 여러 신문사 현역에서 선발되어 왔는데, 평기자로는 내가 제일 고참이었다. 서울신문에서 신상현 박미정, 연합신문에서 이석렬 노상국 등 일선 취재 베테랑들이었다. 뉴스부장은 고재언이었고, 이원재(경향신문), 박정하(민국일보) 선배가 차장이었다.
박정희 장군이 아직 현역으로 최고회의 의장이던 시절이며, 군사독재를 외치는 대학생 데모가 끊이지 않았고, 민정이양 후에는 한일협정 반대가 거센 가운데 DBS 보도는 동아일보의 후광을 입어 야당 방송으로서 군사정부와 타협 없는 굳건한 비판을 퍼부어 댔다. 그래서 군사정부는 서울에서 나오는 ‘평양방송’이라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녹음 종합뉴스 ‘라디오 석간’에 이어 ‘라디오 조간’을 신설했으며, 내가 1번 타자로 그 제작 프로듀서가 되었다. 라디오 조간은 아나운서 아닌 동아일보 편집국 부장급이 진행하는 포맷을 도입했으며, 그 진행자–요즘 말로 ‘앵커’를 사양하는 바람에 내가 1번 타자가 되었다.
DBS 뉴스에 대한 청취자 평가는 높아만 갔다. ‘DBS 리포트’라는 녹음구성 뉴스 프로도 주목받았다. 녹음으로 구성하는 다큐멘터리였던 것이다. 방송국과 신문(동아) 쪽에서도 DBS 보도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방송과 신문의 해외취재 기회가 있으면 양쪽을 다 할 수 있는 기자를 보냈는데, 방송 뉴스부 기자에게 그 기회가 주어졌다. 그 덕에 나는 동아일보로 옮긴 후 1965년의 중국­인도 국경분쟁에 특파되었다.
서울을 떠나 홍콩에서 인도행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고 있는데, 서울 본사로부터 인도네시아에 정변이 일어났으니 자카르타로 들어가라는 긴급 메시지를 받았다.
인도네시아에는 1962년 아시아 경기대회 때 한 번 다녀온 경험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와 국교가 없는 가기 힘든 나라에 나는 두 번째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때 인도네시아에서는 공산당의 친공 쿠데타가 일어났고, 반공 육군장성 7명이 공산당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는 큰 사건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자카르타 공항이 폐쇄되었다. 언제 홍콩­자카르타 간 항공운항이 재개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나는 장기태세에 들어갔다. 여비절약을 위해 호텔에서 여인숙으로 옮겼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영사관에 비자를 신청해놓고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며 독촉, 마침내 비자를 얻었다.
이번에는 항공편이다. 홍콩에는 인도네시아로 가려는 인도네시아 국민과 보도진 등 수백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항공운항이 재개돼도 좌석이 문제였다.
취재는 운이 따라야 한다. 인도네시아 항공사 가루다 홍콩지점장 부인이 한국 여인이었다. 어렵게 연락되어 첫 비행기의 대기번호 13번을 얻어 예약했으며, 운 좋게 자카르타 공항 폐쇄 10일만에 운항 재개된 가루다기를 타고 홍콩을 떠나 인도네시아 입국에 성공했다.
당시 자카르타에는 코트라 연락사무소의 관장 한 명만이 유일한 우리나라 주재원이었다. 항공기 안에 (예상치도 않았는데) 자카르타 코트라 사무소에 부임하는 직원 3명과 그들의 가족이 있어, 코트라 사무소 주소를 얻게 되었다.
자카르타 공항에서 택시로 코트라 사무소로 직행했다. 사무실 문을 열고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하니 그는 놀란 표정이었다. 정변이 나고 공산당의 우익 인사 살육이 시작된다는 소리에 그는 사무실을 폐쇄하고 100km 떨어진 산속에 피신했다가 그날 돌아온 상황이었다. 그는 남한에서 온 나를 자카르타 거주 북한 대사관원으로 의심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기자임을 확인한 코트라 관장은 크게 반기면서 나의 취재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에서 1965년 9월 30일 일어난 ‘9․30사건’이라고 약칭한다. 생생한 이 현지 보도는 동아일보의 큰 특종이었다.

(이정석, ‘미니회고- 현장에 가서 확인해야 한다’, 관훈저널, 2004년 6월 15일)

 

 

한국에서 방송 저널리즘의 발전은 더뎠다. 최초의 방송이 국영으로 출범하면서 오랫동안 방송이 보도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 국영 중앙방송국은 나름대로 보도 활동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기자들이 공무원이라는 신분에 묶여 본격적인 활동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부산문화방송, 동아방송, 동양방송 등 민영방송이 생기면서 방송 저널리즘이 서서히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1973년 3월 3일 문화공보부 산하 서울 중앙방송국이 한국방송공사로 바뀌면서 KBS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KBS가 공사화됐을 때의 초대 보도국장이 바로 이정석이었다.

신문기자 출신으로 KBS 초대 보도국장

그는 신문기자로 출발해 민영방송 기자를 거쳤고, 국영방송과 공영방송의 보도책임자를 지냈다. 국영시절의 KBS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인물이 아닌 그가 한국방송공사의 초대 보도국장이 됐다는 사실은 방송 저널리즘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또한 그는 드물게 미 국무부 기자 연수와 니만 펠로 기자 연수를 동시에 경험했고, 이를 기반으로 10년 가까운 해외특파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와 유사한 경력을 지닌 다수의 언론인들이 정계나 관계로 진출한 것과 달리 그는 끝까지 언론계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는 방송 민주화의 파동 속에서 KBS를 떠나고 말았다. 그의 삶을 통해 방송 저널리즘의 성장과 방송 민주화의 역사를 조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정석은 193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신의주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45년 이후 부친의 전근으로 청주, 춘천, 대구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는 1950년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에 입학해 1954년에 졸업했다. 그는 1954년 5월 수습기자 1기로 조선일보에 입사하며 언론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입사과정에서 영어로 면접을 했는데, 홍종인과 고정훈 외에 영자지 편집고문인 미국인이 면접을 실시했다. 면접을 끝내고 나와 수험자 대기실에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홍종인 주필이 “영어 어디서 배웠지?”라고 말을 건넸다고 한다. 그의 영어실력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것이다.
견습기자 출근 당일 이규홍 정치부장은 그에게 중앙청과 외무부 출입을 명했다. 중앙청 출입 기자는 경무대 출입까지 겸했다. 당시 경무대는 기자회견이나 성명서 발표 외에는 취재가 허락되지 않는 곳이었다. 당시의 그에게 가장 큰 일은 대통령 담화를 기사화하는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문은 비서가 이 대통령의 발언을 그대로 받아 쓴 속기록 같은 것이어서, 내용이 길고 산만해 핵심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어느 날 우연히 영문판 대통령 담화문을 입수해 읽어 보고, 이것이 간결하게 잘 정리된 것을 알게 된 그는 이후 이 영문 담화문을 기사 작성에 적극 활용했다. 외국 기자들에게 나눠 주기 위한 영문 담화문을 활용해 효과적으로 기사 작성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홍종인 주필은 견습기자들에게 뉴욕 타임스 번역을 과제로 주고 영어학원 수강료까지 대주었다. 다른 기자들이 대부분 수강료를 받아 술값으로 전용했던 반면 그는 계속 영어학원을 다녔다. 이때의 영어공부가 그에게 미국 연수라는 기회를 가져왔다.
그는 1957년 미 국무부 지원의 3차 연수기자로 선발됐다. 3차의 경우 3월에 각 사가 추천한 후보자 60명을 대상으로 미국 대사관에서 시험을 거쳐 10명을 선발했다. 미 국무부 기자연수를 다녀온 기자들이 추축이 되어 1957년 1월 11일에 창립한 관훈클럽에 참여했던 것도 그가 미국 연수를 가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1957년 9월에 미국으로 떠나 일리노이 주의 노스웨스턴대학교 메딜 신문대학원에서 2개월가량 강의를 들었으며, 테네시 주의 내슈빌 배너(Nashville Banner)지에서 현장 실습을하고, 미국 전역을 여행하기도 했다.

큰 꿈을 품고 방송기자로 변신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그는 조선일보에 복귀했다. 정치부로 출발했던 그는 이후 외신부, 사회부, 체육부를 거쳤다. 그는 어학 실력 때문인지 1959년부터 1961년 사이에 외국 기자들과 접촉이 많은 판문점 취재를 자주 했다. 또한 그는 해외 취재 기회도 자주 가졌다. 1962년 8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의 취재는 그의 기자로서의 능력을 잘 보여준 사례였는데, 그 내용이 ‘조선일보 사람들’(광복이후 편)에 나와 있다. 사진기자도 없이 혼자 취재를 하러 간 그는 자카르타 공항에 내리자마자 공항 여직원에게 선물을 주면서 ‘파우치’(우편 배낭)를 통해 필름과 기사를 한국으로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다음날 수카르노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초청으로 선수단, 기자단과 함께 대통령궁을 찾은 이정석은 자신이 대통령에게 인사를 건네며 악수하는 모습을 타사 사진기자에게 촬영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한국선수단 동정과 교포들의 생활 등 그때까지 취재한 기사와 사진을 신속하게 공항으로 보냈다.
며칠 후 함께 간 기자들은 한국에서 걸려 오는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조선일보 이정석은 계속 기사를 보내오는데 너희는 뭐하는 거야? 수카르노와 회견도 했잖아.” 수카르노 대통령이 한국선수단을 만나는 장면을 생생하게 스케치한 기사는 ‘내가 만난 수카르노 대통령’이란 이름으로 큼지막한 사진과 함께 실렸다. 다른 기자들은 이정석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조선일보에서 다양한 취재 경력을 쌓은 그는 1963년 동아방송으로 옮겨 방송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중앙청에 함께 출입하며 친하게 지낸 신동준 동아일보 정치부 차장이 동아일보사가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는데, 방송기자로서 활동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자신에게 제의해 왔다고 한다. 그는 자신과 친한 기자들이 조선일보에서 많이 떠나자 “나는 친구 잃은 외톨이 신세가 되었던 차에 월급 많고 보너스도 주는 동아일보사로 가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최창봉 동아방송 편성부장과 최두선 동아일보 사장을 면담한 후 동아방송 뉴스부 기자가 됐다. 1963년 5월 동아방송이 개국하면서 방송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이후 방송뉴스부 차장과 부장을 지냈다. 동아방송의 초대 방송뉴스실장과 방송 뉴스부장을 지낸 고재언은 방송기자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초기에 신문기자를 방송으로 끌어오기가 어려웠는데, “오직 한 사람 이정석만이 ‘방송에의 큰 꿈’을 품고 자진 희망해 와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신문기자에서 방송기자로 변신하면서 그는 ‘방송뉴스 문장’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방송기자의 작업이 초침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동아방송 입사 후 DBS를 적성국 대하듯이 하는 관청 분위기가 싫어졌다. 그래서 ‘라디오 석간’ 타이틀의 저녁 종합뉴스 책임 PD로 내근을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1964년에 진행자의 개성 있는 전문성이 프로 성패의 관건인 ‘뉴스쇼 라디오조간’의 진행을 직접 맡아 뉴스 방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이정석은 방송 저널리즘을 제대로 익혀 나갈 수 있었다. 또한 그는 한국기자협회 초대(1964.8~1965.3) 집행부의 보도자유특별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다.

국영방송 보도체제 혁신에 기여

그는 동아방송에서도 해외 취재 기회를 자주 가졌다. 그에 따르면 “동아일보 편집국은 해외 취재에 기자를 특파할 계획이 있을 경우 기왕이면 일석이조를 할 수 있는 방송뉴스부 기자를 선택하여 나는 몇차례 그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했다. 그의 조선일보에서의 해외 취재 경험도 감안됐을 것이다. 그는 1965년 사고로 순직한 동아일보 주월 특파원 대신 월남에 특파원으로 파견됐다. 갑자기 투입된 40일간의 특파원 생활이었지만, 그는 미군 특수부대와 동행 취재하는 등 생생한 종군기를 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곧 인도네시아의 쿠데타를 취재하러 가기도 했다. 그의 취재 내용은 동아방송은 물론 동아일보를 통해서도 보도됐다.
그는 당시 동아방송이 “비판 정신이 강한 동아일보의 우산 밑에 있는 덕분에 뉴스에 대한 청취자의 기대가 대단했다”고 회고했다. 또한 실제로 동아방송은 “뉴스가 빠르고 비판적 기사가 많아 한동안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평가되기도 했다. 1964년의 ‘앵무새 사건’은 바로 이러한 동아방송의 특성을 잘 보여 주었다. ‘앵무새’는 시사적인 문제를 5분 정도에 재미있게 엮어낸, 신문의 시사만평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앵무새’ 프로그램의 방송 내용을 문제 삼아 최창봉 방송부장 등 6명을 연행해 갔다. 이 사건은 1969년 고법에서 6명에게 무죄가 선고되며 5년 반 만에 종결됐다. 이런 동아방송에서 이정석은 방송뉴스 부장까지 지내며 비판적인 보도 프로그램들을 이끌어 나갔다.
그는 1971년에는 아직 국영이었던 KBS로 옮겨간다. 그를 이끌어 주었던 최창봉이 1971년 6월 동아방송을 퇴사하고 KBS로 옮겨가자, 이정석도 1971년 7월에 퇴사를 하고 9월 KBS에 입사했다. KBS로의 이직을 그는 “당시 윤주영 문공부 장관과 최창봉 KBS 국장의 강권에 가까운 설득에 내가 지고 만 결과”라고 표현했다. 또한 그는 “두 분은 일본 NHK를 모델로 하는 KBS의 야심찬 공영방송 체제 구상을 귀띔하면서 자신을 끌어들였다”고 했다. 그는 현직 언론인으로는 드물게 부이사관급으로 KBS 보도부장이 됐다. 그는 월급이 동아방송 시절에 비해 반으로 줄어들었지만, KBS의 보도 체제를 혁신한다는 보람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변화를 시도했다고 한다.
첫 번째로 정각을 알리는 시보 뒤에 대통령, 영부인의 동정과 함께 총리, 장관 등 계급 순으로 진행된 뉴스의 로열박스를 모두 없애고 뉴스가치에 따른 편집을 시도했다. 두 번째로 날씨 정보에 북한의 주요 도시를 추가했다. 이것은 실향민의 망향을 달래주는 의미 외에도 한반도의 대표방송은 KBS라는 자긍심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세 번째로는 보도기획팀의 제안을 받아들여 ‘정부와의 대화’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한 것이다. 이 프로를 통해 KBS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6년간 워싱턴 특파원으로 활동

이정석은 1973년 3월에 KBS가 공사체제가 되면서 보도국장이 됐다. 그는 “공영방송에 맞게 KBS의 보도수준을 일방적 정부홍보 기능에서 일반 언론기관과 동등한 ‘언론 대열’로 끌어올리기 위해 최창봉 국장으로부터 적극적인 권한 위임을 받아 인적 자원의 확보, 기자의 재훈련 등을 강화해 나갔다”고 한다. 이런 노력으로 KBS의 보도 질이 높아지자 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또한 KBS 기자들은 공무원 신분으로서 공사화 되기 전에는 기자실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는데, 이정석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KBS 기자들이 각 출입처의 기자단에 가입하고, 기자협회의 회원사가 되는 데 그는 나름대로의 역할을 다했다. 이렇듯 공영으로 새로이 출범한 KBS 보도체제의 기초를 다졌던 그는 1973년 9월에 갑자기 보도국장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니만펠로 기자연수를 떠나게 됐다. 그는 갑자기 떠나게 된 이유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이 단지 성곡재단의 이지웅 이사장이 적극 권했다고만 밝혔다. 그의 후임은 경향신문 편집부국장이던 최서영이었다.
그는 1년 동안의 기자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1974년 7월 런던 특파원이 됐고, 1976년 12월부터는 국제국장으로 활동했으며, 1979년 5월에는 워싱턴 특파원 겸 미주 총국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6년 동안이나 그는 워싱턴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1983년 11월에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단독 회견을 하기도 했다. 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워싱턴특파원을 했기 때문에, 그가 워싱턴 거리에 서서 “지금까지 워싱턴에서 KBS 뉴스 이정석입니다”라고 마무리 발언을 하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있을 정도다.
그는 1985년에 서울로 돌아와 올림픽 방송본부장을 맡았다. 역시 국제적 감각이 필요한 자리였기 때문에 그를 기용했을 것이다. 그가 워싱턴 특파원과 올림픽 본부장을 맡고 있던 동안 그와 비슷하거나 또는 다소 늦게 신문사에 기자생활을 시작했던 이원홍, 박현태, 정구호가 KBS 사장을 지냈다. 이들은 신문사 간부 출신으로 관계나 정계를 거쳐 KBS 사장이 됐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성공적으로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경기 방송을 마치고 난 후 1988년 11월에 기획조정실장을 맡았다. 그는 흥사단 이사장을 지낸 서영훈이 사장이 되면서 비로소 기획조정실장이 될 수 있었다. 이미 정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을 감안, 촉탁으로 기용됐던’ 것이다. 노태우 정권에 의해 서영훈 사장이 물러나고, 그 후임으로 서기원 사장이 오는 과정에서 이정석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정석은 국회에 불려나가 서영훈 사장의 사퇴 과정에 문제점이 있었다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 서기원 사장 취임 과정에서는 잠시 사장 대행을 맡아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한 적도 있었다. 그는 1995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KBS에서 서기원 사장을 모시고 있을 때에 기자들이 내가 말한 얘기를 엉뚱하게 쓸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릅니다”라고 답한바 있다. 그럼에도 그는 1991년 3월에 KBS를 퇴직했고, 얼마 뒤에 자회사인 KBS제작단의 사장이 됐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자세강조

1993년 이후 그는 방송위원회 위원, 언론중재위원회 위원, 한국방송개발원 이사장, KBS시청자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았다. 김성호는 이정석이 “퇴임 후에도 그의 인품과 경륜을 높이 사 방송계 안팎에서 모셔가고 예우하는 자리를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그는 2002년부터 대한언론인회 회장을 맡았고, 중도보수를 표방하는 ‘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회의’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가 회장이 되면서 대한언론인회는 ‘한국언론 자유상황 보고서’를 발행했다. 한국의 언론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갈수록 언론자유가 후퇴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는 이후 보수단체의 발기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고, 노무현 정권의 언론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는 2007년에는 ‘오라뉴스’(www.oranews.co.kr)에 노무현 정권의 언론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남겼다.
노무현 정권의 언론정책에 대한 그의 비판적이 입장에 대해 이동식은 “다년간 워싱턴과 런던에서 있으면서 경험한 미국과 영국 언론을 통해 다져진 것임은 자명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2005년 “한국 언론은 아직도 ‘자유와 통제의 중간 수준’에 있다”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의 언론을 자세히 지켜보았다는 그가 언론의 자유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인정되는 언론의 책임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렇다고 그가 반드시 한국의 언론에 대해 후한 평가를 한 것은 아니다. 1995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대신문은 있으나 양질의 신문은 없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그는 2003년의 한 대담에서 “아직도 방송은 권력의 ‘눈치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권력에 대한 비판은 언론의 기본이다. … 비판정신을 잃는 순간 언론매체는 생명을 잃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

그는 2007년에 쓴 글에서는 “군사독재건 민주화 정부건 역대 정권들은 청와대 코드 맞는 사람을 사장에 앉혀 놓고 방송 써먹기만 하고 모두 ‘나몰라’라 비겁하게 도망쳐 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언론에 대한 이러한 인식 때문인지 그는 언론계 후배들에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고고한 기자정신, 윤리의식”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요구했다.
이정석은 2009년 3월 27일에 6회째를 맞는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김성호는 이정석에 대해 “방송 저널리즘을 개척하고 초석을 다진 품격 높은 기자였다”고 평가했다. 그가 공영 KBS의 첫 보도국장이었다는 점을 감안한 평가일 것이다. 또한 그가 그와 비슷한 경력을 지닌 동년배 언론인들이 정계나 관계를 기웃거릴 때 오로지 언론인 외길을 걸었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하다. 그는 40여 년 동안 신문, 민영방송, 공영방송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그처럼 다양한 입장에서 언론활동을 한 인물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따라서 그의 언론인으로서의 활동과 그의 언론에 대한 인식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한국 현대 언론사 연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이런 그가 생애 말기인 2007년 7월에 쓴 글에서 KBS가 ‘정치적으로 엄정중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의 경력에 비추어 볼 때 갈수록 곱씹어볼 대목이다.

이정석 일화- “정확한 우리말 못하면 방송기자 하지 마라”

방송사에서 아나운서가 아닌 기자가 방송언어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흔한 것은 아니다. 이정석은 자신이 신문기자에서 방송기자로 변신한 후 가장 먼저 방송언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정확한 우리말’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런 노력의 덕택으로 나름대로 정확한 방송언어를 사용하게 됐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나는 신문에서 시작하여 방송에 몸담으면서 방송언어가 내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방송전파를 타고 나오는 국적불명의 ‘말’이 가히 산업 쓰레기보다 더한 공해라고 본다. ‘우리말’의 기본이 되는 정확한 고저장단의 발음, 이를 갈고 닦아 아름다운 우리말을 물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는 1994년에는 방송위원회 방송언어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1996년에 ‘방송언어연구위원회 종합보고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는 1995년의 한 인터뷰에서 “언어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은 마이크를 잡으면 안 되는 겁니다”라고 하고는, 대형사고 현장에서 생방송으로 보도하면서 “방송기자들이 평상시에 갖고 있던 언어 훈련 부족이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그는 ‘우리말을 잘하는 사람’만이 방송기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기자가 되려면 우리말 국가고시라도 쳐서 여기에 합격한 사람만이 마이크를 잡고 기사를 쓰게 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2000년에 KBS 시청자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있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방송언어에 특히 관심이 많습니다. KBS의 방송언어가 영국의 BBC나 일본의 NHK처럼 모국어의 교과서가 되길 바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아름다운 우리말의 ‘국민교육’에 더욱 힘씀으로써 남북통일에 대비해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KBS가 앞장서서 한반도의 규범이 되는 한국어를 보급하는 일에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2007년에 쓴 글에서 방송보도에서 잘못 쓰이고 있는 단어들을 지적하고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특유한 표현이 양산되어 방송에 의해 확산되고 있다. 잘못된 말이 그대로 정착될까 걱정이다”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시청자를 위하여 방송기자는 정확한 방송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확고했다. 그런 만큼 방송기자들의 잘못된 언어사용은 항상 그의 귀에 거슬렸던 것이다. 여전히 잘못된 방송언어를 버젓이 사용하고 있는 기자들이 적지 않은 현실에서 그의 주장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박용규 상지대 교수, ‘현대언론인열전 32- ‘워싱턴 특파원’으로 기억되는 방송기자’, 신문과방송, 2009년 9월호)

 

 

曉巖 李貞錫(1932~2008)

○1932년 3월 11일 평북 정주 출생, 2008년 1월16일 별세
◇학력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졸(50)  / 미국 노스웨스턴대 신문대학원 이수 / 하버드대 니먼펠로 이수(74)
◇주요경력 조선일보 정치부, 사회부, 외신부, 체육부 기자 / 동아일보 기자, 방송뉴스부 차장 / KBS보도부장, 보도국장, 런던지국장, 국제국장, 워싱턴 총국장 겸 특파원, 미주총국장(79), 올림픽 방송본부장(85), 기조실장, 제작단 대표이사(91) / 한국방송본부 이사장 / 대한언론인회 회장 (2002~2006)
◇수상 한국방송대상, 서울언론인클럽 한길상, 중앙언론인문화상(방송부문), 체육훈장 백마장

그는 타고난 기자(Journalist)였다

2008년 1월 16일 아침, 집으로 전화가 왔다. 이정석 회장(대한언론인회)의 목소리 였다.
“남중구가 돌아갔대.”
“네?”
이 전화가 필자가 15년 이상 동아일보와 워싱턴, 그리고 언론단체에서 함께 일하고 배운 효암(曉巖) 이정석 회장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그리고 바로 이날 저녁 그는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부인 박소현 여사가 이정석 추모문집‘거인의 작은 이야기’에 쓴 ‘내 남편을 그린다’에 의하면 그날은 영하의 날씨로 몹시 춥고 또 결혼 주례 등으로 며칠을 계속 외출한터라 전 동아방송 사우들의 ‘동수회’ 모임에 나가는 남편을 만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평북 정주 출신으로 웬만한 추위는 추위로 여기지 않은 이회장은 모임에 나갔다가 저녁 7시 조금 전에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 입고 거실의 TV 앞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부인을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여보! 여보! 119 좀 불러줘! 119…”그 소리에 부인이 곁으로 달려갔더니 이회장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지더니“산소 호홉기, 산소 호홉기…”라며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고 한다.
119로 가까운 병원의 응급실로 옮겨졌을 때는 이미 급성심근경색으로 운명했다는 의사의 진단이었다. 그 마지막 순간을 듣고 필자는 “돌아가는 순간에도 그는 기자로구나…”하고 생각했다.

아이디어 풍부, 수많은 에피소드 남겨

이정석, 지금도 돌아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고 프레스 센터 어디에선가 전화로 불러낼 것 같은 그는 진정 타고난 기자(Journalist)였다. 필자가 지난 40여 년 간 언론 현장에서 일해 오는 동안 만난 많은 훌륭한 선배들과 동료들 가운데 외람된 표현이지만 그의 번득이는 기지와 풍부한 유머, 그리고 순발력은 단연 뛰어 났다.
또한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선배였다. 이해심이 많았고 또 포용력이 있어서 그에겐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아마도 사회생활 속에서 ‘적’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혹시라도 안 된 일이나 불쾌한 일이 있어도 그가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회장과 동아방송(DBS), KBS에서 함께 일하며 가깝게 지냈던 천승준 전 동아일보 편집위원은 그를 가리켜“로맨티스트와 휴머니스트의 풍모가 역연했던 효암은 항상 주변을 풍요롭게 가꾸었다”고 추모했다.
193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 난 이정석 회장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한 1954년 그 해 조선일보 수습 1기로 입사해 반세기가 넘는 언론계 생활을 시작했다. 1963년 동아방송(DBS)이 개국하면서 동아일보 방송뉴스부로 자리를 옮긴 그는 방송과 동아일보 정치부, 사회부에서 일하는 동안 숱한 특종과 일화를 만들어 냈고 그런가하면 1957년 18명의 언론인들이 만든 대표적 언론 친목단체인 관훈클럽 창립 멤버였다. 1971년 중앙방송국(KBS) 보도책임자인 보도부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으며 1973년 공영방송으로 전환한 한국방송공사(KBS)의 초대보도국장이 됐고 이후 KBS 국제방송국장, 제작단 사장, 방송개발원 이사장, 대한언론인회 회장으로 53년간 언론계에서 활동했다.이회장이 아까운 향년 76세로 별세하자, 그의 625전쟁 참전 경력으로 임실의 국립호국원에 안장됐으며 평생 언론계에서 활동한 공로를 기려 방송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이제 그에 얽힌 몇 가지 일화들을 전하며 그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 보려 한다.
조선일보와 동아방송, 동아일보, 그리고 KBS에서 취재보도 활동을 하며 그는 남이 미처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와 기지, 그리고 순발력으로 수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내고 주위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었다.
아마도 쓸 수 없는 얘기들까지 모두 모은다면 한 권의 책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앞서의 기록대로 조선일보 수습기자 1기생인 그는 1963년 동아방송이 개국하자, 보도요원으로 스카우트돼 동아일보로 옮겨와 신설된 방송 뉴스부에서 일하게 된다. 당시 정확한 보도와 날카로운 비평으로 최고의 청취율을 자랑하던 동아방송에서 그는 아침 7시 종합뉴스인 ‘라디오 조간’(이 종합 뉴스는 박정희대통령의 영부인 고 육영수 여사가 꼭 챙겨 듣고 여론을 청취하는 프로였다고 한다)과‘DBS 리포트’의 앵커를 맡아 진행하며 방송 뉴스보도의 새 지평을 열었다.

‘내가 만난 수카르노 대통령’기사 특종

1962년 조선일보 시절, 인도네시아 제4회 아시안게임 취재지시를 받고 자카르타에 들어 간 이정석 기자는 아시안게임 취재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그는 자카르타에 체류하는 동안 인도네시아인들이 애창하는 민요‘Polong Bebek Ansa’를 배웠다. 그리고는 인도네시아 공보관리를 만나 수카르노 대통령과의 인터뷰를 요청했다. 반미노선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비동맹 그룹의 지도국임을 자처하던 수카르노는 서방 언론과는 거의 만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기자는 그가 얼마나 인도네시아를 좋아하는지를 잠깐 배운 이 인도네시아 민요를 공보관리 앞에서 부르며 보여 주었으며 마침내 공보부서를 움직여 수카르노 대통령을 인터뷰하는 특종을 했다. 조선일보는 8월 31일자에‘내가 만난 수카르노 대통령’기사를 대서특필 했다.
그는 동아일보에서도 1965년 인도-중국 국경분쟁 현지 취재 중 당시 인구 20만의 작은 왕국, 시킴(현재는 인도의 한 주로 편입)의 수도 강토크에 들어 가 남걀 왕과 호프 쿡 왕비를 회견하는 특종을 올렸다. 이 회견이 화제가 된 것은 미국 여성인 왕비 호프 쿡이 미국 부호의 딸로 명문 사라 로렌스대학 재학 중 당시 18세인 시킴의 남걀 왕자를 만나 로맨스를 피웠고 결국 결혼, 세계적 화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회견기사는 1965년 12월 4일자 동아일보에 크게 게재되고 회견 내용은 녹음되어 DBS를 통해 방송됐다. 이 특종 회견도 사전에 회견을 신청하고 준비했던 것이 아니라 인도-중국 국경분쟁 지역인 티베트의 나툴라 패스(해발 4310m 협곡)로 취재를 간 길에 강토크에서 즉석 아이디어로 왕궁을 찾아 가 회견을 신청, 이루어 낸 것이다. 대단한 순발력이었다.

“지금 평양에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그는 남쪽 기자로 처음 들어간 북한에서도 순발력을 발휘해 대단한 특종을 뽑아냈다. 1972년 8월 30일부터 9월 2일 까지 제1차 남북적십자 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남북한이 분단된 지 27년 만에 이루어진 회담이었다.
그는‘대한민국 신문 통신 공동취재단’의 방송기자로 이 역사적 사건에 참가하게 됐다. 평양에 도착한 8월 29일 그는 전화선을 통해 남쪽에 이렇게 제1신을 통해 보냈다. “지금 평양에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 대표단 일행은 무사히 평양에 도착해 평양 교외의 문수 초대소에서 여장을 풀고 내일 대동강회관에서 열릴 역사적인 남북 적십자회담 1차 회의의 개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한 기자의 이 평양 첫 생방송은 KBS와 다른 방송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북한 정주 출신인 그는 그때의 순간을 후일“일생일대의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평양 첫 취재에서도 특유의 순발력으로 김일성 주석의 외숙인 강량욱 조국통일민주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 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과의 노상 인터뷰로 특종을 뽑아냈다. 당시 얘기를 그의 ‘내가 걸어 온 언론의 길’에서 옮겨본다.
우리 기자들은 회담장 밖 길가에서 이범석 우리 측 수석대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와 함께 있던 남측 기자단의 정도현 기자가 멀찌감치 서 있는 북측 요원을 가리키며 강량욱 목사라고 귀띔해 주었다… 나는 녹음기를 들고 그에게 다가가 다음과 같은 일문일답을 녹취하는데 성공했다.

– 강량욱 목사시지요?
  “네, 그렇습니다.”
–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남측에서 온 기자입니다. 우리 일행이 판문점에서 평양에 오기까지 그리고 평양시내에도 교회가 눈에 띄지 않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625 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다 부서졌습니다.”
– 강선생은 목사일도 보십니까? (예상치 않은 질문이어서 인지 말이 없다) 북한에 지금 기독교인이 있는지요?
  “지방에는 있습니다.”
– 성경책은 부족함이 없는지요?
  “많이 있습니다.”
– 목사님은 집에서 예배를 보시며 기도를 하시는지요?
  “아침과 저녁에 기도 합니다.”

이날 강량욱 목사의 인터뷰 내용이 서울로 방송되자, 외신이 이를 받아 전함으로써 강목사의 입을 통해 나온 북한의 기독교, 기독교인에 대한 소식이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특히 서방측 기독교 국가들은 공산주의 체제 북한에 기독교가 존재하느냐에 관심이 많던 시기였기 때문에 나의 인터뷰 내용이 서방 신문에 대서특필 되고, 북한의 기독교 돕기 운동이 싹트는 듯 했다.

기지와 위트로 언론계에 많은 일화 남겨

그의 기지와 위트는 언론계에 많은 얘깃거리들을 남겼다. 조선일보에서 약 6년간 출입한 판문점에서도 일화가 많은데 그중 덜 알려진 얘기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판문점을 출입하는 북한 기자들과 처음엔 입씨름도 많이 했지만 차츰 친해지기도 했다는데 한 번은 자꾸만 남쪽 소식을 묻는 북한 기자가 차 있는데 까지 따라 오자“어이, 이 차를 타면 남쪽으로 갈 수 있는데 우리 같이 탈래?”하고 농담조로 말했더니 이 북측 기자 얼굴이 하얘지며 줄행랑을 치더라는 것이었다.
또 한 번은 어느 날, 취재 막간에 친하게 된 북측 기자를 좀 한적한 데로 데리고 가서“여기선 아무도 듣지 못하는데 우리 한 번 나는 박정희○○○라고 소리 칠 테니 당신은 김일성○○○라고 소리쳐 보지 않을래…”하고 제안했더니 이 북측 기자 역시 혼비백산해 도망치더라는 얘기였다.
그 전 판문점 회담장에서 만난 북측 기자들이 “기왕 오셨으니 평양 구경이나 하고 가시지…”하고 섬뜩한 초청을 한데 대한 대갚음이자 긴장감도 풀기 위한 장난이었던 같다. 물론 그는 평양 구경 초청을 거절했다.
사진기자와 함께 공수부대 산악작전 취재를 한다고 낙하산을 타고 뛰어 내리다 삼간 초옥을 박살낸 사건도 재미있는 취재기다. 그런데 부인의 ‘내 남편을 그린다’글 가운덴 이회장이 1961년 공수부대 산악작전 취재 중 대위 복장에 낙하산을 메고 베레모에 검은 안경, 여기에 담배를 물고 찍은 한 장의 사진이 실려 있는데 1969년 연애시절, 이 사진에 영어로‘with love’라고 사인을 해 부인에게 주었으며 부인은“담배 피우는 모습이 참 멋있었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마도 추측컨대 이 한 장의 사진이 큰 효과를 내지 않았나 보여진다.
1950년대 조선일보에서 함께 일하고 아주 절친했던 송건호 기자(후일 동아일보 편집국장, 한겨레신문 사장)가 한국일보로 옮겨 간 후 송건호 기자에게 우연히 전화를 걸었다가 못 알아보는 송 기자에게 미국 대통령 급서라는 급조 가짜 기사를 보내 한국일보를 발칵 뒤집어 놓은 얘기, 그리고 동아일보에서 절친했던 신의주, 정주 고향 친구인 오상원(작가, 수염이 많아 애칭 오스트로), 김중배 차장 세분의 통칭‘삼바…’(三羽鳥;삼총사란 뜻)의 우정과 술에 얽힌 갖가지 에피소드들은 지금 또 들어도 재미있고 옛날을 회상케 한다.
필자가 1980년대 워싱턴에 근무하던 때 미국을 방문한 송건호 선생을 다시 만나게 됐다. 마침 이정석 선배께서도 KBS 총지국장 겸 특파원으로 워싱턴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송건호 선생을 만난 이선배께서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밤늦게 까지 얘기들이 끝이 없었다.
오상원 위원도 워싱턴을 방문해 필자 집과 이선배 댁에서 하루 밤 씩 묵고 멕시코로 떠났는데 이선배 댁에서 묵으며 일어난 기막힌 에피소드는 기록으로 옮기기보다 구전으로 전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을 것 같아 넘어가려 한다. 워싱턴 특파원들 간 두고두고 화제에 올랐던 얘기다.
이제 ‘타고 난 기자’ 이정석 회장을 돌아보며 그가 얼마나 언론 정도를 걸었고 또 언론 자유가 위협받는 상황에선 과감한 비판과 항의의 목소리를 냈는지를 기록하려 한다.
사실 그의 숱한 특종과 일화보다 더 강조되어야 할 것은 그가 한국언론 산증인의 한 사람으로 불의나 언론을 통제하려는 권력의 기도에 대해 조금도 굴하지 않고 침묵하지 않았으며 서슴없이 비판을 가했다는 사실이다.

역사적 ‘한국언론자유상황보고서’

그 대표적 활동이 이정석 회장 주도로 2003년 대한언론인회에서 처음 발간한 ‘2002 한국언론자유상황보고서’다. 대한언론인회가 언론상황보고서를 발간한 것은 군사정부도 아닌 이른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국민의 알 권리가 정치권력에 의해 유형무형의 형태로 침해되는 사례가 잦을 뿐 아니라,‘ 참여정부’에선 정부 각 부처 기자실 폐쇄, 급기야는‘신문 등의 자유와 기능 보장에 관한 법률’이라는 이른바 언론개혁법(신문법)을 제정, 공포함으로써 언론으 자유가 심각하게 위협받기에 으렀기 때문이다.
‘2003 한국언론자유상황보고서’는 한국의 언론자유도를 7점 만점에 4.2점(100점만점으로 환산하면 60점) 하위로 ‘자유와 통제의 중간`으로 평가했다. 2004년의 한국언론자유도는 전년보다 0.38점 떨어진 3.82(100점 만점으론 54.6점)으로 더욱 떨어졌다. 국제신문편집인협회(IPI)에서도 2002년 한국을 언론자유감시대상국으로 올려놓았으며 ‘프리덤 하우스’의‘언론자유보고서 2002’는 한국이 언론자유룰 누리는 국가들 가운데 2군에 속한다고 분류했다.
‘참여정부’가 ‘오보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각 부처 기자실을 폐쇄하자, 대한언론인회는 즉각 성명을 내고“국민의 알 권리를 근본적으로 침해하는 이 같은 자유 제한조치를 당장 철폐하라”고 요구했으며 또 언론개혁법에 대해“이 법은 조,중,동 등 특정 비판지들을 겨냥해 언론에 족쇄를 채우기 위한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언론탄압법이다”고 강력한 반대 성명(2004.10.18)을 냈다.
이 같이 언론자유상황보고서 발간이나 반대 성명을 낼 때마다 이 회장은“한국언론발전에 크게 기여할 보고서를 만들도록 모두 최선을 다하자”고 격려했다.
평생을 기자로 활동하고 스스로도 언론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겨 온 그에게선 권위 의식이나 자만 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없었으며 어느 때 보아도 여유가 있고 푸근했다. 지금 그는 하늘나라에서 다정했던 친구 송건호 선생이나 오스트로와 함께 언제나처럼 껄껄대고 있을 것이다.

(문명호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曉巖 李貞錫’, 한국언론인물사화 제7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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