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77. 동아일보 사람들- 이웅희

Posted by 신이 On 12월 - 26 - 2018

 

이웅희(李雄熙, 1931~ 2014)는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서울대 공대를 나와 미국 노스웨스턴대 신문학과에서 수학한 뒤 1953년 자유신문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했다. 1959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1980년 퇴사할 때까지 정치부장, 외신부장, 기획부장, 논설위원, 주미 특파원, 편집국장 등을 맡았다. 논설위원 재직 당시인 1972년에는 남북적십자회담을 취재하기 위해 북한을 다녀오기도 했다. 1980년 전두환 정부에서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 겸 청와대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1982∼1986년 문화방송(MBC) 사장, 한국프레스센터 이사장을 거쳐 1986년 8월부터 1년 6개월간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역임했다. 13대, 14, 15대 총선에서 내리 당선돼 3선 의원을 지냈다.

 

이웅희(李雄熙) (용인, 1931~ ) ▲ 19 59. 8 기자(정치부), 정치부차장, 정치부장, 외신부장, 논설위원, 심의위원 겸, 워싱턴특파원(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부고] 47년간 言-官-政 활동 이웅희 前의원 별세

이웅희 전 의원이 오랜 투병 끝에 3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경기 용인 출신인 이 전 의원은 중앙고와 서울대 공대를 나와 미국 노스웨스턴대 신문학과를 수학한 뒤 1953년 자유신문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했다. 1959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정치부장,외신부장,기획부장,논설위원,주미 특파원,편집국장 등을 역임했다. 동아일보에서 이 전 의원과 함께 재직했던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고인은 언론인으로서 굉장히 부지런해서 현장 취재에 특히 강한 발군의 정치부 기자였다”며 “남다른 필력(筆力)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평소 본인의 소신을 서슴없이 얘기하는 스타일이었다”라고 평가했다. 논설위원 재직 당시인 1972년에는 남북적십자회담을 취재하기 위해 북한을 다녀오기도 했다.

1980년에는 전두환 정부에서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 겸 청와대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1982∼86년 문화방송(MBC) 사장,한국프레스센터 이사장을 거쳐 1986년 8월부터 1년 6개월간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냈다.

1988년 13대 총선 당시 민정당으로 용인에 출마해 처음 금배지를 달았다. 13대에 이어 14,15대 총선에서 내리 당선된 고인은 3선 의원으로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민정계로 분류되며 한국 정계의 ‘킹메이커’로 불린 고 허주 김윤환 전 민주국민당 대표,이한동 전 국무총리,이만섭 전 국회의장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하지만 1999년 용인시장 보궐선거 공천을 놓고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 갈등을 빚어 탈당하기도 했다. 당시 이 총재 측이 강력히 밀었던 구범회 후보는 득표율 3위에 머물러 보궐선거 이후 공천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당시 비주류 측에선 “이웅희 의원이 추천했던 후보를 내세웠다면 손쉬운 선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고인은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올바른 정치개혁과 정치발전을 바란다”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47년간의 언론계,관계,정계 활동을 마감한 것이다.

고인은 1988년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를 지냈고,의원 시절에는 한일의원연맹 부회장으로 한일 관계의 막후 역할을 맡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구계옥 씨와 아들 석배(주러시아 공사) 시배 씨(삼흥개발 상무),딸 희숙 씨,사위 윤주원 씨(아이드림안과 원장)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발인은 7일 오전 7시,장지는 경기 용인의 선산이다.   이재명 기자 

(동아일보 2014년 6월 4일자 23면)

 

 

동아일보 편집국장,문화방송사장,문화공보부 장관,국회의원 등을 지낸 이웅희 동우가 오랜 투병 끝에 지난 6월3일 별세했다. 향년83세.

경기 용인 출신인 고인은 중앙고와 서울대 공대를 나와 미국 노스웨스턴대 신문학과를 수학한 뒤 1953년 자유신문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했다. 1959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고인은 정치부장 외신부장 논설위원 주미특파원 등을 역임했다. 부지런하고 치밀했던 고인은 정치부 기자시절 발군의 필력으로 지면을 빛냈으며 논설위원 재직당시인 1972년에는 남북적십자회담 취재를 위해 북한을 다녀오기도 했다. 1980년에는 전두환 정부에서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 겸 청와대 대변인으로 활동했고 1982년 문화방송사장,한국프레스센터 이사장을 거쳐 1986년 8월부터 1년6개월간 문화공보부장관(현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을 지냈다. 1988년 13대 총선 당시 민정당소속으로 경기 용인에 출마해 처음 금배지를 달았다. 13대에 이어 14,15대 총선에서 내리 당선된 고인은 3선의원으로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민정계로 분류되어 ‘킹메이커’로 불린 고 허주 김윤환 전 민주국민당대표,이한동 전 국무총리,이만섭 전 국회의장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또 고인은 1988년 한국야구위원회(KBO)총재를 지냈고 의원시절 한일의원연맹 부회장으로 한일 관계의 막후 역할을 맡기도 했으며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올바른 정치개혁과 정치발전을 바란다”며 불출마를 선언,47년간의 언론계 관계 정계 활동을 마감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구계옥씨와 아들 석배씨(주 러시아 공사),시배씨(삼흥개발 상무),딸 희숙씨,사위 윤주원 씨(아이드림안과 원장)가 있다.

(‘이웅희 전 편집국장 별세’, 동우회보, 2014년 8월 20일)

 

 

[이달의 얼굴] 문화방송 사장 이웅희 씨

外道1 年 10個月…… 다시 言論界로
「格調 높은 放送」표방… 經營者로 새 솜씨 期待

李雄熙 사장은 1년 10개월 만에 청와대 대변인 자리에서 언론계로 복귀했으니 뻐꾹새가 다시 둥지로 돌아온 셈이다.
그것도 이번에는 신문인이 아닌 방송인이 돼서 돌아왔는데, 그렇다고 그가 과거에 방송과 전혀 무관했던 것은 아니다. 東亞日報 재직시, 지금은 없어진 東亞放送이 전성기였을 때 청취자가 많았던 DBS 뉴스쇼의 퍼스넬리티로 이름을 날렸으며 駐美특파원시절에는 대체로 이틀에 한번씩은 DBS 전파를 통해 워싱턴 소식을 생생한 육성으로 방송했다.
비록 MBC는 라디오 보다는 TV 쪽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李 사장으로서는 TV 경영이 새로운 분야이기는 하겠지만 3년이상 미국에서 크롱카이트 쇼 같은 좋은 프로들올 지켜본 안목으로 TV의 존재 양식이 어떠해야 하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도 평소 확고한 지론을 가지고 있다. 李 사장의 신선한 감각에 방송계가 기대를 걸어 보는 것도 그의 언론인으로서의 이같은 풍부한 경험에 점수를 주는 탓일 것이다.
李 사장은 성격이 차분하고 두뇌가 명석한데다, 무엇보다도 균형잡힌 판단력이 그의 장점이라고 해도 과찬이 아닐 것이다. 평소에 그를 가깝게 접해 본 사람이면 그가 좀처럼 사람의 면전에서 화룰 내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는 온화하고 인내심 많은 성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가 뜀박질을 해도 그만은 천천히 갈 줄도 알고,  옆도 보고 뒤를 돌아볼 줄도 안다.
李 사장은 취임사에서 r格調높은 방송」의 지향을 역설하고 이를 위해서는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균형과 조화를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에 뿌리를 두면서 모색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는 소식이다. 그는 또 「均衡있고 신속하고 公正한 보도」룰 특히 강조했다고 하니, 무슨 말인지 대충 짐작이 간다. 그가 문제의 핵심올 보고있는 것은 여기서도 나타나고 있다.
李 사장은 31년 1월 京畿도 龍仁, 영동고속도로 근처의 수백년된 큰 느티나무가 서 있는 작은 농촌에서 태어났다.  舊制 中央中(6년제), 서울대 공대 기계과를 나와 53년 自由新聞에 입사함으로써 언론계에 첫 발올 디뎠다. 
그후 平和新聞, 京鄕新聞에서 정치부 기자로 이름을 날리다가 京鄕이 페간된 59년에 東亞日報로 옮겨 정치부장 논설위원 주미특파원 편집국장 등의 요직울 두루 거쳤다. 일선 기자시절에는 與野비밀협상장소의 책상 밑에 숨어들어가 토의 내용을 엿듣기도 하고 李承晩 전 대통령의 하와이 망명기사를 특종하여 聲價를 올렸다.
직후에는 기사 때문에 멀리 越南의 사이공 출장 중에 호텔에서 당시 某 실력자와 마주쳐 뜻밖의 수난을 당하는 언론 투쟁 경력도 간직하고 있다.
그는 데스크로서는 일선기자가 쓴 기사를 간결한 명문장으로 만드는 솜씨를 발휘하여 그가 데스크를 보는 기사는 누구보다도 기사를 쓴 기자 자신이 안심이 된다는 부하들의 평을 받았다.
李 사장은 80년 8월 당시 全斗煥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崔圭夏 대통령의 사임에 이어 대통령 자리에 오르자 청와대 대변인을 맡아 양대 선거를 치르고 제5공화국을 출범시키는데 기초를 다졌다. MBC의 성격이 성격인 만큼 앞으로 방송사장의 위치에서 그가 정부의 언론시책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매사에 치밀하고 책임감이 강한 성격이지만 李사장은 술좌석에서는 구수하고 밀도짙은 농담도 곧잘 하는 성격이다. 뿐만 아니라 술이 거나하면 디스코는 물론 각종 최신 미국 춤을 서슴지않는 쾌활한 면을 지니고 있다.
부인 具癸玉 여사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두고 있으며 취미는 다양하나 바쁜 일과 탓으로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휴일이면 시골에 자주 내려간다.

(‘이달의 얼굴- 문화방송 사장 이웅희 씨’, 신문과방송, 1982년 6월호)

 

 

[記者會見論] 李承晩 大統領에서 張勉 總理까지 

記者像에 이어 記者會見論은 初代 大統領 李承晩 博士와 尹潽善 大統領 그리고 張勉 總理時節의 中央廳 出入記者 몇 분을 모시고 그들의 新聞觀과 會見 분위기 등을 들음으로써 代替하기로 한다(編輯者註) .

李雄熙 (東亞日報社 論說委員)

– 두분께서 말씀하신 것은 아마 6.25前 또는 建國直後의 景武臺상황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6.25가 일어나고 釜山政治波動을 겪고는 53年에 還都하자 벌써 執權者가 新聞記者를 만나는 것을 忌避한다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제가 이 무렵부터 景武臺를 出入했는데 일년에 한두번 그것도 특별한 계기가 있어야 2,3번 정도의 記者會見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렇게해서 大統領과 記者와의 接觸이 소홀해지니 한쪽에서는 記者會見 자체를 상당히 權威있는 것으로 格上시켜 위엄을 加하려는 인위적인 操作이 大統領 側近에 있던 것같고 記者들은 記者대로 大統領과 자주 만나지 못하니까 한번 만난다는 그 자체에 威壓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고 봅니다. 또 그 분은 역시 老人이어서 일종의 존경심 같은 것도 있었어요. 57년으로 기억되는데 당시 東亞日報 某 記者가 物價上昇에 관해 질문하면서 行政府의 失政을 따졌습니다.
그러니까 李 大統領은 화가 나서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며 그 사람이 어느 회사에 어떤 記者인가를 알아두라고 위압을 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해서 결국 還都後 下野할 때까지는 일년에 한번 아니면 특별한 경우에 2回정도의 記者會見을 갖는데 머물렀습니다.

– 李博士는 오랜 美國生活을 통해서 西歐式 民主主義가 몸에 밴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물론 그러한 一面도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反面 東洋에서 자라났다는 傳統意識이랄까 權威意識이랄까 하는 그려한 意識構造도 가진 兩面性의 所有者였다고 생각됩니다. 가령 權威意識面으로 본다면 관계 長官을 卽席에서 불러 卽決處分式의 對策을 강구하는 것이라 볼 수 있고 記者를 理解하는 面에서는 57年인가 記者會見때 한 사람씩 握手를 하며 人事를 하는데 『東亞日報에  李雄熙입니다』라고 하니까 『美國에 있을 때부터 東亞日報 이야기 많이 들었네. 新聞이 民族을 살리는 거야. 젊은사람들이 잘해야 해』라고 말하는데 굉장히 체온이 전달되고 感情이 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한 「제스추어」는 역시 西歐的인 그러한 行態의 표현이 아닐까요?

– 결국 한사람의 힘을 가지고 올바른 政治 또는 民主主義를 실시한다는 것은 判斷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가령 李博士 혼자만이 民主主義的 思考方式과 民主政治를 하려는 의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側近에 있는 사람들이 民主主義 「룰」에 어긋난 術策을 쓴다면 李博士의 意志는 관철이 되지 않을 것 입니다. 그러한 例가 初期에는 자주 記者會見을 하다가 차츰 횟수가 줄어져 1年에 1-2희로 한 것이 그 하나라 하겠읍니다. 周圍 사람들의 人爲的인 造作도 있지않았나 생각합니다. 또 하나의 例는 三代 國會때 實力者인 某氏가 議長에 出馬했으나 확실한 得票 전망이 서지 않자 一定한 額數의 수표를 넣은 봉투를 議員들에게 전달한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大統領 記者會見時에 당시 黨幹部의 질문을 말아 달라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平和新聞의 某 記者가 그 內容을 질문했읍니다. 그러자 李博士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것은 民主主義에 어긋나는 行動이라면서 관계長官에게 眞相을 調査하라고 指示한 일이 있읍니다. 그러나 狀況은 거꾸로 되어 그 記者가 所屬社에서 解任되었을뿐 사건은 흐지부지되고 말았읍니다. 그때의 李博士의 意思가 偶近者에 의해 올바르게 처리되었다면 民主主義는 機能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側近者들이 그것을 逆으로 作用시킨 셈이었읍니다.

– 제가 景武臺를 出人한것은 대체적으로 第二.~三期라고 하겠읍니다만 記者에게 大統領 隨行에 따른 事前 通知는 없었읍니다. 이러한 태도는 末期까지 계속되었는데 가능하면 大統領과 記者틀 接 近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中間官吏層의 操作이 加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 大統領 스스로도 오랫동안 執權하는 사이에 여러가지 失政도 없지 않아서 記者를 만나는 것이 괴로왔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렇게해서 大統傾을 접근하기는 거의 불가능했고 一年에 한두번 體面 차리기 비슷한 會見이 있었을 뿐입니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 중의 하나는 3.15선거 直前 李博士가 三浪津驛에서부터 당시 內務長官 등 高位官吏와 記者를 수행하고 驛頭遊說를 한적이 있읍니다. 그때 三浪津에서 記者會見이 있었는데 제가 不正選擧 計劃說이 東亞日報에 보도되었으며 그것은 內務部에 의해 全國 警察에 지령되었다고 하는 그러한 質問을 했읍니다. 그러니까 李大統領은 머뭇머뭇 하더니 『그련 事態는 重大한 거야 즉시 是正되야지 內務長官 어떻게 된거야』라고 하더군요. 그때 內務長官이 『그것은 野黨 記者들이 操作하고 民主黨이 모략 선전한 것을 新聞이 報道한 것입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읍니다. 閣下께서는 안심하십시요』라고 말하며 記者들을 向해 우리 저쪽에 가서 맥주나 듭시다 하며 會見을 막았읍니다. 제 생각에 그때의 李博士는 記者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눈치였습니다.

– 아마 執權 後期에 「히스테릭」한 反應은 있었던 것 같아요. 앞에서도 씀드렸지만 物價暴騰 問題 質問에 『어느 社의 누구인가를 알아둬』라고 한 것이라든가 4.19直前 일부 長官更迭說을 報道했더니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長官更迭說을 가지고 政局을 騷然케하는 言動을 하고 있으니 그 배후를 철저히 알아서 관계자로 하여금 엄중 처벌토록 하라』는 談話가 나온 것은 그려한 例라 하겠읍니다.

– 大統領과 國會와의 관계 그리고 大統領과 記者와의 관계라는 두 側面을 보면 얼마나 民意가 政治에 反影되는가를 측정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後期에  그 兩者의 경우가 疏遠해 진것은 좋게 해석한다면 美洲에서 西歐式 意識을 배웠으나 國會나 言論이 하는 짓이 유치해서 問題視하지 않았거나 또는 나쁜 側面에서 본다면 오랜 執權에서 누적된 여러가지 失政이 國會와의 對話나 言論과의 對話에서 해결될 수 없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間隔을 넓히는 감정적인 對立이 조성되기 때문에 스스로 멀리하지 않았나 생각 됩니다. 그런데 李博士는 그가 부리는 사람들이 사실을 이야기 해주는 것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싶은 눈치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가령 A를 만나면 『나는 자네만 믿어…』 했고 B를 만나도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孤立化되는 것을 피하려 애썼던 것이 아닌가도 생각해 봅니다。

– 저희들때 역시 50年代 후기쯤 몸수색을 하려는 것을 記者團에서 會見을 거부하니까 中止한 일도 있었읍니다. 質問書 역시 사전에 제출하기를 요구 했으나 대략 어느어느 것을 質問할 것인지를 요구 했을뿐 具體的인 것은 하지 않았어요. 그것이 大統領에게 사전에 보고 되었다고 합니다.

– 民主黨때는 尹潽善 大統領과 張勉 國務總理가 各各 記者會見을 했읍니다.
처음에 張總理는 議員內闇制이므로 記者에게 國政을 「브리핑」 하기 보다는 國會에 直接 하는 것이 原則上 妥當하다는 見解가 있어 論難이 있었지만 당시는 言論의 放縱時代라 할만큼 言論의 힘이 세어 原則論을 어기고 週例記者會見이 있었고 尹大統領과는 月1回 정도의 會見을 가졌읍니다. 그야말로 行政首班과의 討論이라 할 수 있을만큼 言論活動이 활발했습니다.

– 대개의 큰 部分을 口頭로 알리는 정도였읍니다. 張 總理역시 特別한 準備가 없이 會見에 臨했던 것으로 기억 됩니다.

– 尹大統領은 象徵的인 位置여서 그런지 기회만 있으면 記者와 접촉하려고 앴던것 같습니다. 실제로 尹大統領은 國政을 超然한 立場에서 鳥職할 수 있었기 때문에 記者를 대하는 태도가 자유스러웠다고 할까요. 이에 비해 張總理는 언론하고 너무나 빈번한 접촉이 있었습니다. 中央廳 記者團과는 1주일에 한번씩 全長官을 옆에 배석시키고 會見을 했으며 거기에 아침 저녁으로 어디서나 記者에게 시달리는 형편이었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半島호텔 8층의 執務室에는 많은 記者들이 모여 政治問題 당시 데모 行列에 대한 質間이 오갔으며 登廳하면 中央廳 복도에서 記者와 만났고 또 國會에 나가 答辯 전에 記者들의 質問攻勢에 당면해야하는 日課의 계속이었던 것이 아닐가 합니다.

– 저 자신도 후회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읍니다. 어떤 間題인가 張總理에게 質問하고 本社에 送稿하였는데 夕刊를 펴보니 『張 總埋 또 食言』이라는 標題가 톱으로 다뤄 졌더군요. 제 생각에도 記事의 性質上 그러한 標題가 붙여질 수 없는데도 그렇게 됐어요. 그러니까 張總理로서도 政治人의 義務로 記者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괴로와 했던 것은 틀림이 없을 것 같아요

– 張總理의 경우 그 期間이 짧아서 어떤 기준을 이야기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려나 新聞記者를 대하는 태도가 성실했고 가능하면 사실을 그대로 알기를 원하고 그 자신도 알려주려고 애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許政首班의 첫 會見은 성설하고 진지해서 당시 合格品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읍니다. 그련데 우리의 경우 張總理나 또는 다른 경우도 그렇지만 執權 하자마자 言論이 攻駿에 나섰어요. 李博士의 첫 執權期도 言論이 마구 공격 했었지 않습니까? 우리도 한 政權이 들어서면 3.5개월 기간을 두고 力量을 평가하는 訓練된 言論姿勢가 확립되었으면 합니다. 제 생각에도 過渡政府 初期나 第二共和國 初期에 記者들이 團合하여 蜜月期間을 두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것을 行動化 하기에는 너무나 周圍가 앞질러 變하고 있었고 그런 생각을 하는 記者는 수적으로 적은데 다른 많은 記者가 過激한 비판을 성급하게 들고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 일부 新任長官이 오면 施政에 관해 記者의 의견을 묻는 일도 있었으나 大統領과 記者 사이에 어느정도 體系있는 그러한 對話는 별로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해 요. 물론 大統領. 會見에서나 또는 다른 경우 에서라도 記者 자신의 反省은 하지않고 攻較만을 했던 報道態度에도 反省의 여지가 많다고 봅니다.

– 尹大統領이나 張總理는 개별적인 揮毫는 써준 일이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李博士의 最後 會見은 60년 3.15 直前 列車會見이었고 張總理는 61년 5월15일 밤 11시까지 記者들에게 둘러싸여 일일이 質問에 답변했읍니다. 물론 그때 革命에 관한 루머가 있었지만 張內閣으로서는 그 情報에 대한 確認, 追跡, 膺懲할 能力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記者會見論- 李承晩 大統領에서 張勉 總理까지’, 신문과방송, 1974년 1월호)

 

 

이 기자(李記者)를 특파(特派)… 한일예비회담(韓日豫備會談)에

본사(本社)에서는 25일(二十五日)부터 동경(東京)에서 개최(開催)되는 한일예비회담(韓日豫備會談) 상황(狀況)을 취재보도(取材報道)하기위하여 정경부(政經部) 이웅희 기자(李雄熙記者)를 특파(特派)하게 되어 이 기자(李記者)는 24일 정오(二十四日正午) 동 회담(同會談) 한국측 대표단(韓國側代表團)과 함께 향일(向日)하였다.

(동아일보 1960년 10월 25일 1면)

 

 

한일회담(韓日會談)의 오늘과 내일(來日)

일본(日本)은『두 개(個)의 한국(韓國)』을 대(對)하고 있다… 이웅희 특파원(李雄熙特派員) 현지(現地)『레포트』

장 내각(張內閣)은 정계(政界) 일부(一部)로부터 지나치게 조급하다는 비난(非難)을 받아가면서 일본(日本)의 소판 외상(小坂外相)을 방한(訪韓)케 하였고 한일회담(韓日會談)의 속개(續開)를 서둘렀었다. 그러나 동경(東京)에서 예비회담(豫備會談)이 개막(開幕)된지 만 1개월(滿一個月)이 경과(經過)한 지금 동 회담(同會談)은 완전(完全)히 교착상태(膠着狀態)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한일회담(韓日會談)이 거의 한걸음도 진전(進展)을 보지 못하고 있는 이유(理由)는 무엇이며 또한 앞으로의 전망(展望)은 어떠한 것인가? 이것은 한일회담(韓日會談) 취재(取材)를 위(爲)하여 본사(本社)가 동경(東京)에 특파(特派)하였던 이웅희 기자(李雄熙記者)의 이면상(裏面相)에 중점(重點)을 둔「레포트」이다.

(동아일보 1960년 11월 27일 2면)

 

 

본사 취재반(本社取材班)에 이웅희 위원(李雄熙委員)·신상현 부장(申相鉉 部長)
송건호(宋建鎬) 논설위원도 한적(韓赤) 자문위원으로 동도(同途)

남북적십자(南北赤十字) 제3(三)차 본회담을 위해 23일(二十三日) 오전 평양(平壤)으로 떠난 일행 54(五十四)명 가운데는 본사(本社) 송건호(宋建鎬) 논설위원과 이웅희(李雄熙) 논설위원 겸 심의위원 신상현(申相鉉) 방송뉴스 제2부장이 끼여 있다.
송(宋)의원은 한적(韓赤)대표단의 자문위원으로 활약하며 이(李) 위원과 신(申)부장은 본사(本社) 특파취재기자로서 현지(現地)취재를 하게 된다. 본사는 이(李) 신(申) 두 특파원이 현지에서 보내오는 남북적(南北赤)회담의 경과와 북한(北韓)의 이모저모를 신문과 방송을 통해 독자와 청취자에게 그때그때 상세히 알릴 계획이다.

(동아일보 1972년 10월 23일 1면)

 

 

“혁명의 현장 동아(東亞)가 있었다”

「고대 데모대 깡패단 습격으로 유혈소동」.
1960년 4월19일 아침 동아일보 1면과 사회면.  전날 고려대생 시위피습사건의 전모가 생생하고도 상세하게 보도됐다.  이 기사들은 3·15부정선거의분노가 채 식지도 않은 국민들과 학생들에게 다시 한번 큰 충격을 주었다.
동아일보는 4·18에서 4·26까지 4·19혁명의 전 과정을 시민들의 눈과 귀가 되어 어는 매체보다도 신속 정확하게 보도했다. 「全(전)수도의 거리 뒤흔든 학생들의 노도」「서울에 밤10시 기해 중무장 군대진주」(20일), 「4·19희생자에 눈물어린 동포애」(22일), 「출동한 군대와 데모대원 눈물의 공방」(26일).
동아일보는 긴박한 시국을 연일 2단통 제목으로 상세히 보도했다.  타 신문들도 동아일보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19일 오후 비상계엄의 선포와 함께 검열제가 실시되면서 동아일보는 수난을 당했다.  연일 시커멓게 지운 사진과 대사가 잘려나간 시사만화, 허옇게 삭제된 기사들을 지켜보며 시민들은「행간의 의미」를 읽어내야 했다. (…)

당시 동아일보 정치부기자였던 李雄熙(이웅희)의원(민자)은『18일부터 4월말까지 거의 밤을 꼬박 새웠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비상시국이라 전 국무위원들이 중앙청에서 합숙을 했거든요.  중앙청을 지키랴, 데모대와 군경찰의 대치상황을 챙기랴 눈코뜰새가 없었습니다』

(동아일보 1995년 4월 19일 5면)

 

 

 

 

 

 

댓글 없음 »

No comments yet.

RSS feed for comments on this post. TrackBack URL

Leave a comment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