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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동아일보 사람들- 이여성

Posted by 신이 On 12월 - 26 - 2018

 

 

이여성(李如星, 1901~월북)은 대구 출신으로 중앙고등보통학교, 일본 릿쿄대학(立敎大學) 정치경제학과에서 수학했다. 1919년 대구에서 혜성단(彗星團)을 조직해 항일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3년 복역했다. 1931년 조선일보 조사부장을 거쳐 1932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1933~1936년 조사부장을 맡았다. 신문사 조사부장 재직 시절 <숫자 조선연구> 전 5권을 펴내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숫자로 읽어냈다. 동아일보를 떠난 뒤엔 조선역사화 제작과 복식사 연구에 몰두했다. 1944년 결성된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참여했으며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을 맡았다. 1948년 월북해 김일성종합대학교 교수직을 지냈다.

 

이여성(李如星) (대구, 1901~ ) ▲ 1932.10 사원(정리부), 조사부장, 1936.12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일제강점기에 서촌에서의 ‘아름다운 동행’은 더 있다. 이번에는 형제였다. 이여성(본명 이명건, 1901~?)과 이쾌대(1913~1965년)가 그들이다. 이들 형제는 한국사, 특히 한국미술사에서 아주 드물고 의미 있는 존재였다. 이상이 구본웅에게 바친 표현을 빌려온다면 이들 역시 ‘자발적 발광체’였다. 시대와 철저히 함께 하되 홍수처럼 밀어닥치는 조류에 무작정 휘쓸리지 않고 자기중심을 유지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쓰라렸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월북했고, 결과적으로 남과 북의 역사에서 모두 잊힌 존재가 되고 말았다.
경북 칠곡에서 개화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두 사람은 민족의 역사와 미술, 그리고 스포츠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다. 열두 살의 나이차로 미루어 형이 동생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게 옳겠다.
형 이명건은 일찌감치 민족의 현실에 눈을 떴다. 1918년 서울에서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해 가을 친구 김두전, 김원봉과 함께 해외에서 민족해방운동을 벌이자는 결의 아래 중국 남경의 진링(金陵)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이들이 중국으로 떠나기 직전 김원봉의 고모부이자 나중에 의열단 의백(단장)이 되는 황상규는 세 친구에게 조국산천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각각 호를 지어주었다. 김두전은 ‘약수(若水,물과 같이)’, 김원봉은 ‘약산(若山, 산과 같이)’, 이명건은 ‘여성(如星, 별과 같이)’이었다. 이때로부터 세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줄곧 이렇게 썼는데, 이들이 따로 또 같이 걸은 길은 조금 뒤 이여성-쾌대 형제가 걷는 길의 원형이 되었다.(…)
‘이여성’의 길도 외형상의 모습은 달랐을지언정 근본적인 줄기는 아주 유사했다. 삼일운동직후 중국에서 귀국한 그는 대구지역의 학생비밀결사 혜성단을 조직해 악덕 관리들에게는 ‘암살 경고’를, 민족자본가들에게는 ‘독립운동자금 요구’를 하는 등 강력한 투쟁을 펼치다 적발돼 3년을 복역했고, 그 뒤 일본 유학 시절에는 김약수와 함께 북성회를 조직하는가하면 북성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한 뒤 안광천, 하필원 등과 함께 일월회(ML계)를 조직하는 등 사회주의운동의 첨단을 걸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상하이로 건너가 망명생활을 할 때 약소민족(필리핀, 아일랜드, 이집트, 인도, 베트남 등)의 독립운동 연구를 통해 민족통일전선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의 길을 걷는다.
그 직후 귀국해서 동아일보 조사부장으로 있을 때 매제 김세용과 함께 세광사라는 출판사를 설립하고 1931~1935년 ‘숫자조선연구’라는 역작을 다섯 권 세상에 내놓았다. 총독부 통계)자료 등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조선의 실사정’을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연구서는 우리나라 출판물 중 최초로 말미에 색인을 실은 책이었다.(…)
미술에 큰 재능을 보인 이쾌대는 졸업과 함께 도쿄의 제국미술학교(1934~1939년)로 유학을 떠나고 이여성 가족만 이 집에 머물 무렵 이여성은 동아일보에 함께 근무하던 이상범(1897~1972년, 누하동 178에 화실 운영하며 누하동 182에 거주)과 함께 2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런 화가로서의 모습은 그의 정치사회운동이 위축되자 여기(餘技)로서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1920년대 초 일본에서 조직운동을 한창 펼칠 때에도 미술전시회에 작품 10여점을 출품한 바 있었다. 인간 이여성을 지탱하는 두 축은 정치사회운동과 미술(또는 미술사)이었다. 이 점은 나중에도 실증된다.
마침 이여성과 이상범 두 사람은 모두 동아일보 조사부 소속으로서 이여성은 부장이었고, 이상범은 화백으로서 ‘청전 양식’이라고 불리는 한국적 산수화의 새로운 전형을 찾아가던 주목받는 화가였다. 이런 인연으로 두 사람은 그 다음해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제패 때 일장기 말소 사건에 함께 연루돼 강제해직됐다. 

(김창희·최종현, ‘다시 꿈꾸는 서촌-진보적 민족주의자의 길’, ‘오래된 서울’, 2013)

 

 

《숫자조선연구》에 대한 당대인의 관심은 책 광고로도 확인된다. 《동광》(1932년 11월)의 <애인에게 보내는 책자>라는 글에서 평론가 김경재는 《숫자조선연구》를 추천했다. 조선사람들 특히 조선 청년들이 일본, 미국, 러시아 등의 사정은 많이 알려고 하고 실제로 많이 알고 있기도 하지만 정작 조선 사정에는 어두우므로 일별해서 조선 정세를 간명하게 알려주는 이 책을 추천한다는 것이었다. 이 어렵고 난해하고 숫자투성이의 책을 ‘애인에게’ 권했을때 그 애인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하지만 평론가가 애인에게 권하는 책으로 선정할 만큼 이 책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초부터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고 이미 약소민족 국가의 민족문제나 독립운동, 노동 문제 등에 고나한 문제적인 논설이나 논문을 발표한 이력을 생각하면 이여성은 분명 선각자이거나 전위적인 형명가 같은 모습을 보여 준다. ‘창백한 인텔리 지식인’의 면모가 그에게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문사형 기자들과 차별되는 점이다.
‘민족’ 이나 ‘노동’ 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일본 유학 시절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이여성은 이미 중학 시절에 비밀결사 혜성단을 조직했고, 김약수, 김약산 등과 함께 ‘유관장(유비, 관우, 장비) 3인의 꿈을 꾸고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으며, 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거금 수만원을 집에서 끌어냈다. 평소에는 침착하고 학구적이었지만 이념적 행위에는 불같이 뛰어들어 야심을 불태우는 혁명가의 모습을 가졌다.

(‘통계로 조선 실상 파헤친 조사부장- 이여성’, ‘조선일보 사람들: 일제시대 편’, 2004)

 

 

愛人에게 보내는 冊子

讀者의 秋는 다시 돌아 왓습니다. 日氣淸朗하고 하늘 높은 날 가을을 찾아 山野로 散策할 때, 또는 조용히 가을 밤 燈火를 대할 때에 어떠한 冊子를 손에 잡을가. 여러분은 各其 愛好하시는 冊子를 가지섯겟지마는 이제 諸氏의 愛讀書를 滿天下에 公開함이 또한 讀書界에 뜻잇는 일이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 또는 親한 친구에게 勸하고 싶은 冊子」는 무엇인가 하는 設問을 들어 그 解答을 左에 紹介하는 所以입니다.

李如星金世鎔 共著 數字朝鮮硏究
評論家 金璟載

『數字朝鮮硏究』를 推천하고 십습니다. 理由는 朝鮮사람은 더욱이 우리들 朝鮮靑年은 日本, 米國, 露西亞 等의 사정은 알려고도 하고 多少 알기도 하되 朝鮮 情勢에는 어두운 까닭이외다. 그런데 前記 數字朝鮮硏究는 그가 簡明하고 一瞥하야 朝鮮의 諸 情勢가 解得됩니다.

(김경재, ‘愛人에게 보내는 冊子- 李如星金世鎔 共著 數字朝鮮硏究’, 동광, 1932년 11월호)

 

 

이여성(李如星)의 본관은 경주이고 호는 청정(靑汀), 본명은 이명건(李命鍵)이다. 1901년 12월 29일 아버지 이경옥(李敬玉)과 어머니 윤정열(尹貞烈)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이경옥은 경상북도 칠곡의 대지주였으며 막내 동생인 이쾌대는 화가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여성이 칠곡과 대구 중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대구와 칠곡의 자택 두 곳에서 성장했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1910년대 말은 한국독립운동사와 이여성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기였다. 그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던 1918년에 김원봉, 김약수와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독립기지 건설에 나섰고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나자 귀국하였다. 대구에서 혜성단(彗星團)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3년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출옥 후 일본 도쿄[東京]의 릿쿄대학[立敎大學] 정치경제학과에서 공부하면서 당시 새로운 세계관이었던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1923년에 도쿄에서 김약수(金若水)와 함께 사회주의 단체 북성회(北星會) 결성에 참여하였고, 1925년에는 사상 단체 일월회(日月會) 결성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성악가 박경희(朴慶姬)와 결혼하였다. 1926년부터 1929년까지는 상해에서 연구 활동을 계속하였다.

상해에서 귀국한 1929년부터 국내 언론에 본격적으로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여성은 1930년대 전반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의 활발한 언론활동을 통해 약소민족운동연구를 진행하였다. 또한 이 무렵 정치적 동지이자 매부인 김세용(金世用)과 함께 『수자조선연구(數字朝鮮硏究)』(전5권)를 집필하였다. 1944년 8월 여운형(呂運亨)을 필두로 조동우(趙東祐), 이만규(李萬珪)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인 건국동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여성은 해방 직후부터 각종 중앙조직과 정당의 중심인물로 주목받았다. 1945년 8월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이 되었으며, 11월에는 여운형(呂運亨)이 조직한 조선인민당(人民黨) 결성에 참가하였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民戰)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위원 및 부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었다. 8월에는 인민당(여운형), 조선공산당(박헌영(朴憲永)), 남조선신민당(백남운(白南雲))의 3당 합당을 위한 합당교섭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1월에는 여운형의 사회노동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상임위원 겸 사무국장이 되었다. 1947년에는 사회노동당 후신인 근로인민당 서울시당 준비위원회 선전부장 및 중앙상임위원을 지냈다.

1948년 초 월북하여 8월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그 해 김일성종합대학 교수가 되었다. 1957년에도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그 해 8월 조선역사가 민족위원회 중앙위원, 김일성대학 역사학강좌장이 되었다.

미술 및 학술 활동

이여성은 1934년 서화협회에서 주도한 제13회 서화협회전에 비회원으로 출품한 동양화 「어가소동(漁家小童)」이 입선함으로써 화가로서의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그는 이듬해인 1935년 이상범과 함께 2인전을 열었다.

이후 그는 신문지상에 자신의 그림을 종종 발표하였는데, 1936년 7월 4일부터 7월 9일까지 5일간 『조선일보』에 그림과 글을 연재한 「신미도행(身彌島行)」이 대표작이다. 이 연작은 그가 평안도 선천 앞바다 신미도를 다녀오는 과정에서 보고 느낀 바를 글과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그림은 신미도, 기울포, 장군굴, 운종산, 유열만을 소재로 그린 산수화 5폭이 소개되어 있다. 그는 곧 “화단의 혜성, 중년에 화도(畵道)로 전향한 동양화가의 귀재(鬼才)”로 평가받았고, 조선화단의 중견화가로 인정받았다.

이여성은 1936년 말 동아일보사에서 강제 사직 당한 후 동양화에 몰두하였다. 그의 화론(畵論)은 1939년 『조선일보』에 5차에 걸쳐 「동양화과(東洋畵科) 감상법 강좌」를 통해 파악된다. 그는 이 글에서 사생(寫生), 운필(運筆), 색채, 구도, 격(格) 등 5가지 주제로 동양화의 감상법을 논하고 사물의 생동감 포착, 선과 색채 강조, 구도와 격의 중요성 등을 지적하였다. 그의 동양화론의 특징은 색채를 강조하고 실경화를 지향한 데 있다.

그의 예술가론은 1935년 『신동아(新東亞)』에 게재된 짧은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우선, 그는 “조선의 예술가는 마른 체구와 푸른 안색과 풀죽은 거동과 졸리는 눈초리를 가지고 담배와 술과 여인과 불규칙과 무절제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고 이것과 힘써 싸울 굳은 결심을 갖자고 하였다. 그는 “정력주의적인 성실, 근면한 노력과 진지 고매한 태도”를 가진 예술가상을 지향했고 “현실 조선을 과학적으로 파악하는 예술가가 되자”고 제안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의 사회주의 예술가들이 지향해야 할 바가 민중을 위한 창작활동, 즉 프롤레타리아 예술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즉 이여성은 과학적으로 조선을 파악하고 민중을 위하여 활동하는 건강한 사회주의 예술가를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사회주의 예술론은 민중의 입장에 서서 민족의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여 예술로 표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민족·민중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한편 이여성의 문화론은 복식사 연구에서 잘 드러나듯이 일본 학자들의 조선 향토성론과 만선사관을 비판한 데서 나타난다. 즉 그는 1941년 「조선복색원류고(朝鮮服色原流考)」에서 백색(白色)의 한복 복색(服色)은 조선시대 통치의 결과라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그것이 향토성의 필연적 결과라는 주장을 반박하였던 것이다.

이여성은 1948년 초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정치가가 아닌 학자로서 생활하였다. 이여성이 북한에서 진행한 연구는 고고학, 한국미술사, 한국건축사 등이다. 그가 북한에서 이룩한 대표적인 학문적 성과는 『조선미술사개요』에 압축되어 있다. 이 책은 북한 최초로 사회주의적 시각에서 쓴 미술사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이여성이 숙청된 이후 김용준에게 철저히 비판을 받았고 북한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참고문헌
『한국근대미술』(윤범모, 한길아트, 2000)
『조선미술사개요』(리여성, 서울 : 한국문화사, 1999)
「이여성의 정치사상과 예술사론」(신용균,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일제 식민지기 이여성의 민족운동」(최재성, 『사림』39, 수선사학회, 2011)
「한국 근대 역사인물화」(박계리, 『미술사학』26, 미술사학연구회, 2006)
「조선복색원류고」(이여성, 『춘추』2-1, 1941.2)
「동양화과」(이여성, 『조선일보』, 1939.4.15~4.21)
「찬연한 고조선 문화를 채관을 통해 재영」(『조선일보』, 1938.1.8)
「예술가에게 보내는 말씀」(이여성, 『신동아』5-9, 1935.9)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여성(李如星), 김세용(金世鎔) 공저(共著) [숫자조선연구(數字朝鮮硏究)] (上) 
(동아일보 1931년 12월 19일 5면)
이여성(李如星), 김세용(金世鎔) 공저(共著) [숫자조선연구(數字朝鮮硏究)] (中) 
(동아일보 1931년 12월 23일 5면)
이여성(李如星), 김세용(金世鎔) 공저(共著) [숫자조선연구(數字朝鮮硏究)] (下) 
(동아일보 1931년 12월 24일 5면)

 

신간소개(新刋紹介)

▲숫자조선연구 제5집(數字朝鮮研究第五輯) (이여성(李如星)·김세용(金世鎔) 공저(共著) )

(동아일보 1935년 4월 23일 3면)

 

약소민족(弱少民族)의 기후(其後)【其一】(동아일보 1933년 1월 1일 9면)
약소민족(弱少民族)의 기후(其後)【其二】(동아일보 1933년 1월 2일 9면)
약소민족(弱少民族)의 기후(其後)【其三】(동아일보 1933년 1월 5일 11면)
약소민족(弱少民族)의 기후(其後)【其四】(동아일보 1933년 1월 6일 1면)
약소민족(弱少民族)의 기후(其後)【其五】(동아일보 1933년 1월 7일 1면)
약소민족(弱少民族)의 기후(其後)【其六】(동아일보 1933년 1월 8일 1면)

 

최근(最近)의 약소민족(弱少民族) (一) (동아일보 1934년 1월 1일 9면)
최근(最近)의 약소민족(弱少民族) (二) (동아일보 1934년 1월 2일 17면)
최근(最近)의 약소민족(弱少民族) (三) (동아일보 1934년 1월 3일 5면)
최근(最近)의 약소민족(弱少民族) (四) (동아일보 1934년 1월 4일 5면)
최근(最近)의 약소민족(弱少民族) (五) (동아일보 1934년 1월 5일 5면)
약소민족(弱少民族)의 최근(最近) (6) (동아일보 1934년 1월 6일 1면)
약소민족(弱少民族)의 최근(最近) (7) (동아일보 1934년 1월 7일 1면)
약소민족(弱少民族)의 최근(最近) (8) (동아일보 1934년 1월 8일 1면)
약소민족(弱少民族)의 최근(最近) (9) (동아일보 1934년 1월 9일 1면)
약소민족(弱少民族)의 최근(最近) (10) (동아일보 1934년 1월 10일 1면)

 

공업조선(工業朝鮮)의 해부(觧剖)【一】(동아일보 1935년 1월 1일 15면) 
공업조선(工業朝鮮)의 해부(觧剖)【二】(동아일보 1935년 1월 2일 15면) 
공업조선(工業朝鮮)의 해부(觧剖)【三】(동아일보 1935년 1월 3일 6면)
공업조선(工業朝鮮)의 해부(觧剖)【四】(동아일보 1935년 1월 4일 6면)
공업조선(工業朝鮮)의 해부(觧剖)【四】(동아일보 1935년 1월 5일 8면)
공업조선(工業朝鮮)의 해부(觧剖)【五】(동아일보 1935년 1월 9일 6면)
공업조선(工業朝鮮)의 해부(觧剖)【六】(동아일보 1935년 1월 10일 6면)
공업조선(工業朝鮮)의 해부(觧剖)【七】(동아일보 1935년 1월 11일 6면)
공업조선(工業朝鮮)의 해부(觧剖)【八】(동아일보 1935년 1월 15일 4면)
공업조선(工業朝鮮)의 해부(觧剖)【九】(동아일보 1935년 1월 16일 4면)
공업조선(工業朝鮮)의 해부(觧剖)【十】(동아일보 1935년 1월 18일 6면)
공업조선(工業朝鮮)의 해부(觧剖)【十一】(동아일보 1935년 1월 19일 6면)
공업조선(工業朝鮮)의 해부(觧剖)【十二】(동아일보 1935년 1월 20일 6면)
공업조선(工業朝鮮)의 해부(觧剖)【十三】(동아일보 1935년 1월 22일 6면)
공업조선(工業朝鮮)의 해부(觧剖)【十四】(동아일보 1935년 1월 23일 6면)

 

연맹(聯盟)의 제재(制裁)와 伊太利(이태리)의 갈 곳?【一】(동아일보 1935년 10월 12일 1면)
연맹(聯盟)의 제재(制裁)와 伊太利(이태리)의 갈 곳?【二】(동아일보 1935년 10월 13일 1면)
연맹(聯盟)의 제재(制裁)와 伊太利(이태리)의 갈 곳?【三】(동아일보 1935년 10월 15일 1면)
연맹(聯盟)의 제재(制裁)와 伊太利(이태리)의 갈 곳?【四】(동아일보 1935년 10월 16일 1면)

 

아름답고 실용적이 되는 조선여자의 의복… 이여성 씨(李如星氏) 담(談)   (동아일보 1939년 1월 4일자 3면)

 

향토무악(鄕土舞樂)인 농악(農樂) 강릉(江陵) “풍물”의 인상기(印象記) (1) (동아일보 1939년 7월 6일 4면)
향토무악(鄕土舞樂)인 농악(農樂) 강릉(江陵) “풍물”의 인상기(印象記) (2) (동아일보 1939년 7월 8일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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