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1864~1930)은 평북 정주 출신으로 빈한한 탓에 어린시절부터 유기상점(놋그릇가게) 사환으로 일했다. 유기 보부상으로 나서 평안도 황해도를 섭렵했다. 1887년에 유기공장을 세워 민족기업가의 면모를 갖췄다. 1901년 평양에서 알아주는 무역상으로 우뚝 섰다. 1907년 평양에서 안창호(安昌浩)의 강연에 감동하여 강명의숙(講明義塾)이라는 소학교를 세우고, 재단을 만들어 오산학교(五山學校)를 건립하는 한편, 항일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며 민족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1910년 기독교에 입교하여 오산학교 교리를 기독교 정신으로 바꿨다. 1911년 일제가 날조한 데라우치총독 암살 음모사건(신민회 105인 사건) 주모자로 지목돼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1915~1917년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해 목사가 됐다. 3.1운동 땐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계 대표로 참여했다. 이로 인해 또다시 3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고향으로 내려와 오산학교의 재건을 도모하면서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건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24년 5월 동아일보 제4대 사장으로 취임했으나 9월에 일부 간부들과 중견기자들이 일시에 퇴사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취임 5개월 만에 고문으로 물러앉고 인촌 김성수 선생이 제5대 사장으로 전면에 나서게 됐다. 이승훈은 평안북도 정주로 내려가 그가 설립한 오산학교 경영과 농촌진흥에 심혈을 기울이며 여생을 보냈는데 1930년 4월 사망 당시 고문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사장 이승훈(李昇薰) 1924. 5~1924.10
고문 이승훈(李昇薰) 1924.10~1930. 4 재임중 사망
(역대임원·간부일람,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民族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이승훈(李昇薰)
4대 사장으로 창간 초기 위기상황에 등판
본보에 네차례 글 연재 3 ·1운동 종교계 규합 기여
창간 이후 짧은 기간에 도약을 거듭하며 성가를 높여오던 동아일보는 4주년을 앞둔 1924년 내우외환의 시련을 맞게 된다. 박춘금 일당에 의한 송진우 사장 식도원 폭행사건 및 그로 인한 안팎의 물의, 그리고 사회주의 계열에 의한 동아일보 배척운동과 일제의 언론탄압 가중(연평균 15회 압수가 24년 한해 56회로 증가) 등이 잇따르면서 커다란 위기상황에 몰렸다. 평소 송진우 사장과 알력이 심했던 이상협 편집국장이 식도원 사건을 트집잡아 많은 동조사원을 이끌고 퇴진하는 자중지란이 벌어지면서 한꺼번에 먹구름이 몰려든 것이다.
5월14일 임시주주총회는 남강(南岡) 이승훈(1864∼1930)을 제4대 사장으로, 오산학교 교장인 홍명희를 주필 겸 편집국장에 영입하기로 결의했다. 어느 때보다도 확고한 리더십이 요구되는 시기에 오산학교 설립자와 교장을 난관극복의 선봉장으로 삼은 것이다. 이승훈은 취임후 중역회의에서부터 사원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승훈 사장의 노력으로 큰 고비를 넘기는 듯했으나 9월에 다시 최익진 공장장과 유광렬 사회부장, 최영목 정리부장 외에 5명의 중견기자들이 일시에 퇴사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취임 5개월 만에 고문으로 물러앉고 인촌이 제5대 사장으로 전면에 나서게 된다.
고문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이승훈은 평안북도 정주로 내려가 그가 설립한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오산학교를 떼어놓고 이승훈을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족운동에 뜻을 품고 교육사업에 헌신하기로 한 이승훈은 오산학교 경영에 유기공장 사업으로 모은 자신의 재산을 쏟아부은 것은 물론 온갖 심혈을 기울였다.
1907년 그의 나이 43세 때 평양 모란봉 아래 공설운동장에서 도산 안창호의 ‘교육진흥론’ 강연을 듣고 큰 감명을 받은 이승훈은 강명의숙과 오산학교 설립, 신민회 가입,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참여 등으로 이어지는 민족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으면서 때로는 전면에서 때로는 뒤에서 오산학교를 키워왔다.
남강은 4대 사장 취임에 앞서 1922년 7월 네차례에 걸쳐 동아일보에 글을 연재하기도 했다. 3·1운동 당시 기독교계 대표로 천도교 지도자들을 규합하는 데 크게 기여한 그는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가출옥하게 된다. 출옥하자마자 수인들에 대한 처우개선을 주장하는 글을 동아일보에 기고한 것으로, 일제탄압에 굴하지 않는 투사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황의봉 편집위원장, ‘民族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이승훈’, 동우회보, 2018년 9월 20일)
南岡 李昇薰
▲1864년 2월 18일 平北 定州출생
▲30년 5월 9일 狹心症으로 별세
▲1907년 講明義塾과 五山학교 설립
▲11년 新民會5인사건에 연루되어 獄苦
▲17년 平壤神學校 졸업
▲19년 3ㆍ1운동참가(33인)로 복역
▲22년 출옥 후 囚人들에 대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글을 東亞日報에 연재
▲24년 5월 東亞日報 제4대 社長겸 전무취체역
▲25년 五山학원 재단이사장
▲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추서.
□ 놋그릇행상에서 관서갑부(關西甲富)로…
남강 이승훈(南岡 李昇薰ㆍ別名 寅煥)은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극빈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로를 잃고 유기(鍮器)공장 사환과 유기행상으로 관서(關西)굴지의 부호로 성장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민족운동에 뜻을 품고 교육사업에 헌신, 오산(五山)학교를 설립했으며 1924년에는 안팎으로 어려운 처지에 빠진 동아일보의 제4대 사장을 맞아 민족지의 명맥을 잇게 했다.
남강은 1864년 2월 18일 평북 정주읍내 오막살이 초가에서 여주(驪州)이씨 석주(碩柱)와 홍주(洪柱)김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아명은 승일(昇日)이었다.
두 살때 모친을 잃고 할머니 송씨 슬하에서 자란 그는 여섯 살때 형(昇模)을 따라 정주읍 동쪽 납청정(納淸亭)이란 곳으로 옮겨 그곳 사숙(私塾)에서 천자문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우는데 워낙 총명하여 훈료(訓料)나 별음전(別音錢)까지 면제 받았다.
그러나 그가 10세 되던 해 조모와 부친마저 잃고 천애고아가 된 남강은 이듬해부터 학업을 중단하고 납청정에서 유기공장으로 치부한 임일권(林逸權)집 사환으로 들어가 각고의 노력 끝에 신임을 얻게 되자 공장의 외무원 겸 수금원이 된다. 그의 나이 15세 때였다.
바로 그때 한마을에 사는 이도제(李道濟)라는 사람이 남강의 장래가 촉망된다며 자진해서 딸(敬康)과 혼인케하니 그때부터 독립, 임씨공장에서 외상으로 놋그릇을 넘겨받아 평남북일대와 황해도지방을 맨발로 전전하며 행상에 나섰다.
맨발행상도 10년째가 되자 장사수완도 늘었고 사업을 보는 안목도 생겨난다. 그리하여 24세 되던 해 납청정으로 되돌아온 남강은 남의 돈(吳熙淳)까지 끌어들여 정주와 평양에 상점을 내고 유기공장을 만들어 본격적인 기업활동에 뛰어든다.
공장을 차린 그는 직공들과의 대화를 장려하며 노사협조체제를 제도화해서 생산의욕을 높이는 한편 노동조건도 크게 개선, 경영의 합리화를 다져나갔다. 뿐만 아니라 기업경영의 묘는 새로운 정보교류에 있다고 보고 평양과 서울까지도 자주 내왕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894년 동학혁명이후 청일침략전쟁으로 인한 참화로 공장시설이 파괴되고 상점피해도 매우 컸다. 커다란 시련이었으나 그 정도로 좌절할 남강이 아니었다. 다시 오희순으로부터 빚을 얻어 공장을 재건한 그는 이번에는 서울ㆍ인천으로 나와 수입석유와 양약, 지물 및 일용잡화 등에 이르는 많은 품목의 매점방매를 중심으로 일종의 도산매업에 매달렸는데 그것이 들어맞아 7~8년후에는 순이익 50만 냥이 넘는 거부로 성장했다.
그 무렵의 국내사업계에서는 이승일(李昇日)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고 하며 웬만한 물가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따라 등락이 좌우될 정도였다고도 했다.
권불10년이라 했던가… 얼마 후 남강의 사업도 실패의 고비를 맞게 된다. 그러자 그는 미련없이 훌훌 털고 낙향… 정주로 돌아가서 글방에 앉아 모처럼의 한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 글방에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가 매일 배달되고 있었다.
□ 島山에 심취, 후세교육에 모든 것 바쳐…
그 당시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한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우리나라의 내정까지 간섭하기 시작,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황제를 내몰아 양위케하는 등 매우 어수선했다. 이에 분개한 남강은 어느날 분연히 여장을 차리고 평양으로 나간다.
1907년 그의 나이 43세 때였다. 때마침 평양시내 모란봉 아래 공설운동장에서는 도산(島山 安昌浩)의 강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교육진흥론`이란 제하의 안도산 연설은 수만 군중을 사로잡았으며 남강 역시 큰 감명을 받았다. 강연이 끝난 뒤 단하에서 도산을 만난 그는 나라 일에 이바지하기를 다짐하면서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남강에서 국가관과 민족관을 확고하게 심어준 사람은 바로 도산이었던 것이다.
그길로 비밀조직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한 그는 신민회의 3대 목표(교육ㆍ기업ㆍ서적간행)와 도산이 계획한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건설상황을 듣고 서둘러 고향으로 내려와 일찍이 오산면 용동(五山面 龍洞)에 세웠던 글방(陞薦薺)을 증축 수리하여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설립했다.
그리고 스스로 금주단연(禁酒斷煙)의 수범을 보이며 유지들(李鍾聲, 李致淳, 趙衡均, 白陽汝)을 규합, 3백석 규모의 향교토지를 기그으로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세우는 한편 평양에 자기(磁器)공장을 만들어 대성학교 학생과 오산학교생들을 선발, 많은 숙련공을
길러냈다.
1911년 2월 신흥(新興) 학교문제에 관련이 됐다해서 구속되어 제주도로 유배당했던 남강은 그해 가을 일제가 날조한 이른바 데라우치(寺內)암살사건(신민회105인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4년동안 옥고를 치른다. 그는 옥중에서 성서 읽기를 일과로 삼다가 크게 감화를 받아 15년에 가출옥하자 세례를 받고 평양신학교를 졸업, 목사가 되었다.
1919년 3ㆍ1독립운동 때는 33인의 한사람으로 특히 천도교지도자들을 규합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만세사건직후 일경은 남강에 대한 보복으로 오산학교 교직원 전원을 검거하는 한편 신축교사와 교회당을 불태우는 반행을 저질렀다.
그후 남강은 48명의 동지들과 함께 3년형의 선고를 받고 복역중 22년 7월 가출옥하는데 출옥하자마자 수인들에 대한 처우개선을 주장하는 글을 동아일보 전후 4차례나 연재(22년 7월 25일~28일)하기로 했다. 그리고 정주에 내려가 오산학교(교장 洪命憙)의 재건을 돌보면서 조선 교육회일과 물산장려운동 및 국내초유의 민립대학(民立大學)창설캠페인 등에 앞장서 활약했다.
그러다가 24년 5월 동아일보 제4대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때 나이 이순이었다.
□`동아` 4대사장으로 민족지의 위기 넘겨…
그가 사장을 맡을 무렵의 동아일보는 말 그대로 내우외환의 연속이었다. 때마침 창간 4주년(4월1일)을 앞두고 동아일보는 광화문 네거리(광화문통 140번지)에 1백44평의 새사옥부지를 사들이고 고속 윤전기 증설을 서두르는 한편 지방판의 발행과 지방순회취재계획을 발표하는 등 도약을 위한 의욕에 차 있었으나 이른바 박춘금(朴春琴)일당에 의한 송진우(宋鎭禹)사장 식도원(食道園)폭행 및 그로인한 안팎의 물의, 그리고 사회주의 계열에 의한 동아일보 배척운동외에도 언론탄압의 가중(연평균15회·압수·가 24년 한해에56회로 증가)까지 겹침으로써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던 것이다.
여기에 평소 송진우 사장과 알력이 심했던 이상협(李相協)편집국장이 또한 식도원사건을 트집잡아 많은 동조사원을 이끌고 퇴진하는 자중지란까지 벌어짐으로써 신생민족지는 실로 내일을 가늠하기조차 어렵게 되고 말았다.
이에 4월27일 송진우 사장은 물러나고 5월14일의 임시주주총회는 남강 이승훈을 제4대 사장에. 그리고 오산학교교장인 벽초 홍명희를 주필 겸 편집국장에 영입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이틀후 신임 이사장은 첫 번째 중역회의를 주재하게 되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무엇보다도 이상협을 따라 회사를 나가려는 사원들 문제가 가장 가슴아팠던지 유임취체역 허 헌(許 憲)을 사직원을 낸 사원들의 유임을 권고하기 위한 권유위원에 임명, 동요사원들의 퇴사를 만류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새사장이 취임하던 5월 제1차로 신구범(愼九範)전무와 홍증식(洪증植)영업국장외에 김동성(金東成)조사부장 등 4명의 부장급이 이탈한데 이어 그해9월에는 최익진(崔益進)공장장과 유광렬(柳光烈)사회부장, 최영목(崔榮穆)정리부장외에 5명의 중견기자들이 일시에 퇴사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이승훈을 사장으로 하는 대 개편으로 큰 고비를 넘긴 동아일보는 송진우 사장의 퇴진과 함께 고문으로 한발 물러나 있었던 인촌(仁村 金性洙)을 전면에 내세우기로 하고 10월 21일 제3회 정기주주총회를 열어 김성수를 대표취체역으로 선출, 제5대 사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3대 사장 송진우와 취임반년째인 4대사장 이승훈을 고문으로, 주필 겸 편집국장인 홍명희는 그대로 유임토록 했다.
고문으로 물러앉은 남강은 또 다시 정주로 내려가서 오산학교경영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날로 어려워져가는 이웃농민들의 생계를 돕고자 자면회(自勉會)를 조직한다. 그리고 사비를 들여 수십대의 제승기를 구입, 농한기 고공품생산을 장려하면서 자신의 소유답까지 내놓고 공동경작케하는 등 농촌진흥에 발벗고 나섰다. 바로 그 무렵 오산학교출신의 신우철(申禹澈)은 스승의 회갑기념으로 각계인사들의 글을 모아 <육십일지 남강(六十一之 南岡)>이라는 단행본을 만들었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전부 압수당한 일도 있었다.
□유체(遺體)까지 교육에 바치려 했던 거인
이듬해 오산학교의 경영주체인 재단법인이 구성되자 남강은 재단이사장이 됐으며 26년에는 오산사립보통학교로 승격이 된다. 그리고 4년이 지난 1930년 5월에는 노경의 스승을 추앙하는 졸업생과 유지들이 뜻을 모아 오산학교교정에 자그마한 동상을 세우고 그 제막행사를 가졌다.
그런데 그 제막 며칠 후인 5월 8일 밤 자정께 남강에게는 협심증이 악화 친우인 박기준(朴基준)을 찾게 된다. 그리고 황급히 달려간 박기준에게 남강은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9일 새벽4시 파란만장했던 일생을 끝마친다. 향년 67세였다.
남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망국의 암울했던 그 무렵 많은 겨레들에게 충격과 아픔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유언·과 그 유언을 에워싼 일제의 과잉 통제는 더 이상의 슬픔과 분노마저 끓게 했다.
고인이 박기준에게 남긴 유언의 내용인 즉 <나를 묻지 말고 내 몸을 해부해서 표본으로 만들어 학교에 놓아 달라>는 것. 그리하여 그의 유체는 곧바로 서울로 옮겨지고 경성제국대학병원에서 해부를 기다리게 된다. 바로 그때 유체를 맡아 표본작업에 들어가려던 담당의사(今村)에게 일경은 작업중지 명령을 내린다. 이유인즉 보안법(保安法)에 위배된다는 것….
이같은 사실은 곧 조선일보에 크게 보도되고 6월6일 사설을 통해 일본경찰의 `터무니 없는 간섭`을 규탄, 고인의 뜻대로 오산학원에 돌려주는 것이 옳다고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으나 끝내 좌절, 거국적인 사회장을 거쳐 고향인 오산의 성현동(城峴洞)에 묻히고 말았다.
(金湖 전 중앙일보 편집부국장, ‘南岡 李昇薰’, 韓國言論人物史話-8.15前篇(上), 1992)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제7회> 풍전등화
“천도교-기독교 힘 합칩시다”… 초유의 종교연대 운동 성사
(…)
○ “독립운동을 중지합시다”
손병희가 이완용까지 교섭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당시 상황이 매우 절박했기 때문이다. 그간 국내에서는 중앙학교가 있는 북촌을 중심으로 거족적인 독립선언운동이 치밀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최남선이 집필하는 독립선언서는 완성 단계에 있었다. 민족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독립선언서에 서명 및 날인하는 일만 남았다. 독립선언서의 화룡점정(畵龍點睛) 같은 일이었다.
민족 역량을 총집중하는 궐기인 만큼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시기의 명망가들을 참여시키는 게 중요했다. 자의든 타의든 일제의 비호를 받고 있기는 하나 인망과 덕망이 높은 이들이 독립선언서 대표자로 서명하면 천군만마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중앙학교의 송진우와 현상윤, 선언서 작성을 담당한 최남선, 천도교의 대외 창구이자 보성학교 교장 최린 등 4명이 그 실무를 맡았다. 이들은 박영효 한규설 윤치호 윤용구 김윤식 등을 대상 인물로 꼽았다
그런데 처음부터 계획이 어긋났다. 손병희와도 막역한 사이인 박영효를 비롯해 지목된 지도자들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독립선언서의 서명에 난색을 표했다. 사회적 존경을 받는 원로들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실무자들이 망연자실해하자 손병희가 이완용까지 직접 만나게 됐던 것이다.
1919년 2월 4, 5일경. 중앙학교 숙직실에 4명이 다시 모였다. 분위기는 침통했다. 최린이 비장하게 말했다.
“그 사람들은 이미 노후(老朽)한 인물들이오. 독립운동은 민족의 제전이오. 신성한 제수(祭需)에는 늙은 소보다도 어린 양이 더 좋을 것이외다. 차라리 깨끗한 우리가 민족운동의 제물이 되면 어떻소.”(‘의암 손병희선생 전기’)
최린은 민족대표를 원로들에게서 구할 것이 아니라 손병희를 독립운동의 영도자로 받들고 30, 40대의 젊은 실무진이 모두 민족대표로 참가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최남선이 “가업(家業) 관계로 직접 참가할 수는 없다”고 딱 부러지게 거절했다. 최남선은 민족의 독립이라는 주의(主義)에는 찬동하나 민족대표로 정면에 나서는 정치운동의 희생양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최남선에 대한 지방법원예심신문조서·1919년 5월 19일, 이하 3·1운동 후 일제의 검경 및 재판부 신문조서는 동국대 고재석 교수의 ‘3·1獨立運動(市川正明編)’ 일본어 번역본을 인용함.)
최린이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최 선생(최남선)이 운동에 적극 참가 안 해 주신다면 나도 참가할 수 없는 일이오. 또 최 선생이나 송 선생(송진우)의 말씀과 같이 민족운동은 천도교만으로는 진행시킬 수도 없으니 차라리 이 운동을 중지합시다.”(‘의암 손병희선생 전기’)
거족적인 독립운동의 촛불이 힘없이 꺼져갔다. 최린은 “지금까지 논의해 온 일은 이 자리에서 전부 취소하고 피차간에 아무 책임도 없기로 하자”며 중앙학교 숙직실을 박차고 일어났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최남선은 일본 유학파인 정노식을 통해 2·8독립선언서 초안을 국내에 들고 왔던 도쿄 유학생 송계백에게 전보(2월 6일자)를 치게 했다. 도쿄의 2월 8일 거사를 일단 중지하고, 시기를 보아 국내와 호응해 운동을 동시에 전개하자고 통보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경성우편국에서 타전한 전보는 차출인의 이름이 불명(不明)으로 처리돼 송계백에게 전달되지 못했다.(정노식에 대한 경찰신문조서·1919년 4월 19일) 2월 8일 도쿄에서의 독립운동도 하마터면 무위로 돌아갈 뻔했다.
○ 세 종교 합작
모든 게 백지로 돌아간 지 며칠이 지났다. 도쿄에서 “기미(期未)를 이팔(二八)에 판다”는 암호 전보가 날아왔다. 국내 사정을 전혀 모른 채 도쿄 유학생들이 기미년 2월 8일에 독립선언서를 선포한 것이다.
더 이상 독립운동의 호기를 모른 체할 수도, 지체할 수도 없었다. 중앙학교 교사 현상윤이 다시 삼각정의 최남선 집을 찾았다. 현상윤은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천도교와 기독교를 연결시키는 것이 어떻겠소?”(현상윤, ‘3·1운동 발발의 개략’)
최남선도 마냥 넋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독립선언서 초안은 이미 완성돼 있었다. 최남선은 현상윤의 제안에 “좋소. 그리합시다”라고 말했다. 기독교와의 연결은 최남선이 주선키로 했다.
2월 11일 북촌 김사용의 집(인촌 별택)에 검정 두루마기를 걸친 촌로 한 사람이 바쁜 걸음으로 찾아왔다.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1864∼1930)이었다. 최남선이 독립운동에 함께할 유력 인물로 지목한 기독교 측 인사였다. 실제로 이승훈은 관서(關西) 지역 기독교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김성수 송진우 현상윤이 자리를 함께했다. 최남선은 일제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나타나지 않았다. 중앙학교 팀은 그동안의 계획과 천도교의 동향을 설명한 뒤 기독교 측의 참가를 요청했다. 이승훈은 천도교와의 합동 거사를 즉석에서 수락했다.(‘인촌 김성수전’)
이승훈은 이미 상하이와 도쿄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던 터였다. 2개월 전인 1918년 12월, 이승훈은 상하이의 동제사 요원 선우혁을 만나 해외 독립운동 계획을 상세히 들었고 국내에서의 지원을 요청받았다. 이승훈은 집안의 논까지 팔아 선우혁에게 운동자금을 주며 하늘에 눈물의 기도를 올렸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 불쌍한 백성에게 독립을 허하시렵니까, 허하지 않으시렵니까. 이번 기회에 어떻게 하시렵니까.”(김기석, ‘위대한 한국인, 남강 이승훈’)
자나 깨나 민족의 독립을 꿈꾸던 이승훈의 시원시원한 말에 인촌 역시 자금 제공으로 응원했다. 이승훈과 동향이며 오산학교 출신인 김도태는 “이승훈 씨의 관서 방면 공작비로 김성수 씨가 2000원인지, 3000원인지를 내놓았다”고 증언했다.(‘동아일보’ 1949년 3월 1일자) 당시 쌀 한 가마 값이 3원가량이었으므로 3000원은 쌀 1000가마 값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이승훈은 그날 저녁 바로 관서 지방으로 떠났다. 이승훈의 행보는 질풍노도와도 같았다. 평안남북도를 오가며 기독교 장로파의 길선주 양전백 이명룡 유여대 김병조 및 감리파의 신흥식 등과 만나 민족대표자 서명을 약속받았다. 이승훈은 이들의 인장(印章)을 가지고 신흥식과 동반해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다.(현상윤, ‘3·1운동 발발의 개략’)
그러나 이승훈의 발 빠른 행보와 달리 기독교와 천도교의 연계는 계속 지연됐다. 천도교 측과의 만남을 주선하겠다던 최남선 등의 태도가 모호했다. 이승훈은 천도교 측에서 거사 직전에 꽁무니를 뺀다고 의심했다.
사정은 있었다. 최린과 최남선 등 실무진이 계속 국내 원로들을 설득하느라 시간을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알 리 없던 이승훈은 기독교 단독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했다.
기독교 측의 단독 거사가 논의되고 있는 가운데 최남선이 소격동에 머물고 있던 이승훈을 찾아왔다. 2월 21일 마침내 최남선의 주선으로 이승훈과 최린이 만났다. 최린의 북촌 재동 집에서 이승훈이 단도직입적으로 따졌다.
“천도교 태도가 흔들리는 것이 아니오? 기독교만으로 독립운동을 단독으로 결행할 것이오.”(김기석, ‘위대한 한국인, 남강 이승훈’)
“독립운동은 민족 전체에 관한 문제인 만큼 종교의 이동(異同)을 불문하고 합동하여 추진합시다.”(현상윤, ‘3·1운동 발발의 개략’)
최린은 원래 계획대로 천도교와 기독교 합동으로 일을 추진하자고 이승훈을 달래듯 말했다. 이에 이승훈이 운동자금으로 5000원 정도가 필요하니 천도교 측에서 조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손병희의 재가를 받은 최린이 쾌히 승낙했다.
사흘 후인 24일 이승훈은 함태영(1873∼1964)과 함께 기독교 공식 대표 자격으로 천도교 중앙총부(현 덕성여중 자리)의 손병희를 방문한 후 독립운동의 일원화를 확정했다.
그제야 일이 일사천리로 전개됐다. 최린은 만해 한용운의 계동 집을 찾아갔다. 최린과 한용운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교류하던 친구 사이였다. 한용운은 일찌감치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신도 수가 많은 천도교를 중심으로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 승려였다.(한용운 경찰신문조서 제1회·1919년 3월 1일, ‘한용운전집’) 한용운은 즉시 불교계의 민족대표로 참여하는 것을 수락했고 한용운의 권유로 승려 백용성도 동참했다.
우여곡절 끝에 천도교계와 기독교계, 불교계 지도자들로 이루어진 민족대표의 골격이 완성됐다. ‘민족 독립’이라는 이름 아래 세계 역사상 초유의 이종교(異宗敎) 연대 운동이 한반도에서 성사된 것이다.
▼33인 순서는… 이승훈 “순서는 무슨, 이거 죽는 순서야” 교통정리▼
민족대표 명단, 천도교 손병희-기독교 장로파 길선주-기독교 감리파 이필주-불교 백용성… 나머지는 가나다順
3·1운동의 민족대표로 나서기로 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회합했던 서울 정동교회. 동아일보DB
3·1운동 이틀 전인 1919년 2월 27일 오후 1시 경성의 정동교회. 3·1운동의 기독교 측 대표자들 사이에 소란이 일었다.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 날인하는 과정에서 그 순서를 놓고 논란이 벌어진 것. 보다 못한 이승훈이 큰 소리로 말했다.
“순서가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죽는 순서. 누굴 먼저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김기석 ,‘위대한 한국인, 남강 이승훈’) 이승훈의 말 한마디에 참석자들은 곧 조용해졌다.
이에 따라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 33인의 순서가 정해졌다.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를 선두로 하고 기독교 장로파 목사인 길선주, 기독교 감리파 목사인 이필주, 불교 승려인 백용성의 순서로 이어졌다. 나머지는 가나다순으로 명기했다.
사실 3·1운동에서 기독교와 천도교의 연합을 이끌어낸 데는 이승훈과 함태영의 역할이 컸다. 당시 기독교 일각에선 타 종교와의 연대에 고민이 적잖았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신석구 목사는 “교역자로서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것과, 교리상 서로 용납하기 어려운 천도교와 합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가”를 놓고 심적 고충이 많았다고 회고했다(‘은재 신석구 목사 자서전’).
원로급 지도자인 윤치호 등 일부 기독교도들 역시 천도교와의 제휴를 ‘죄악’이라고 규탄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를 극복하고 기독교계 대표들은 ‘민족’과 ‘독립’의 대의 아래 3·1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3·1운동이 세계 초유의 이종교 간 연합을 이끌어낸 역사적 사례라고 평가받는 이유다.
이승훈
1864년 평북 정주 출생. 안창호가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 간부로 활동했다. 1907년 민족교육운동을 목적으로 오산학교를 설립해 교장으로 활동했고, 1911년에는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3·1운동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 대표로 참여했고, 1924년 동아일보 제4대 사장을 지냈다.
(…) 안영배 기자
(동아일보 2018년 5월 19일 A10면)
南岡李昇薰先生逸話
-金道泰
1. 첫말슴
南岡先生은 우리나라의 敎育者요, 志士요, 愛國者였다. 그의 前半生은 社會의 惡制度및에서 그야말로 惡戰苦鬪한 結果, 우리나라의 巨商 卽 큰 實業家였으며 큰 富豪였든 것이다.다시말하면 前日의 活動은 自己한사람, 自己네의 家族만을 爲하는 個人主義的 活動이였고 晩年의 活動은 나라를 爲하야 民族을 爲하야 世界人類를 爲하야 自己의 幸福과 利益을 버리고 犧牲的情神으로 餘生을 마치신 우리 後進의 標本이요, 燈臺며 指導者시다. 그러나 先生은 實踐的 推進力을 가진 이로서 學者는 아니였다. 그러므로 先生이 生存하셨을때의 말씀하신바를 들은이는 있지만은 先生이 글로적어노으신 것은 별로 본이가 없기 때문에 仔細한 略曆을 알수가 없다. 그나마도 先生께서 逝去하신지도 벌써 여러해지냈고 또는 그때 들은사람도 類가 적어가기 때문에 내가 지금 희미하나마 記憶 되는대로 先生에 대한 逸話를 若干 적어보려한다.
2. 先生의 幼年時代
지금으로부터 팔십사년전 千八五四年 甲子年 二月二日에 先生께서는 平安北道 정주邑에서 誕生하셨다.
때는 高宗이 어린몸으로 임금이 되시고 그의 아버지되는 大院君이 攝政이 되야 南人들을 登庸하야 여럿해동안 繼續해오는 老論인 金氏의 勢力을 驅逐하고 庶政을 一新하는 同時에 壬辰倭亂이후 역대 여러 임금들이 經營하려는 景福宮을 다시 建築하려는 여러 가지 準備로 매우 바쁘게 서두르든 때이며 정주邑에서 홍경래가 李朝에서 西北사람을 差別待遇하는 것이 不快하다하야 그를 개혁하량으로 義旗를 들었다가 失敗한지가 불과 五十四년밖에 안이든것이였다. 先生은 정주읍에서도 가장 가난한 옴악살이 초갓집에서 태어나 젖먹을때부터 悲慘한 생활이 계속되게 되였으니 그것은 선생이 나신지 얼마 안이되야 父母가 돌아가시고 오직 그의 伯氏가 있을뿐이었다. 伯氏 역시 어린몸으로 어린동생을 다리고 외갓집으로 친척집으로 轉해 다니기를 여러햇동안 계속하지않을수 없었다.
선생의 성은 李 이름은 승일, 그의 伯氏는 昇模였다. 선생의 나이 열 살이 넘을때에는 自己伯氏와도 같이 있을 형편이 못되야 自己가 獨立的生活의 길을 찾지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선생은 얼굴이 남보다 뛰어나게 업부게 생겨 美男子요, 나이는 어리지만은 매우 怜悧하였다. 그러므로 누구나 선생을 보는사람이면 귀여워 할마음이 자연히 소사나게 되였든 것이다. 당시 정주읍에 鍮器공장을 세워 成功한 이가 박씨인데 그는 金錢으로 博川郡守가 되였든 까닭으로 임박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어떤사람의 소개로 先生께서는 그 宅 使喚아희로 들어갔다.
몇해있는동안에 주인에게나 그집사랑에 놀러오는 손님에게까지 귀여움을 받어 밤에는 글공부도 받게 되였다.그러나 이 宅에서 늙을수는 없었다. 어떻게하든지 獨立的生活基礎를 세워야하겠다는 것이 어린머리속에 터를 잡기 시작하였다.
몇해동안 한푼두푼씩 모아두었든 몇 兩 돈을 가지고 장사를 하여보리라는 漠然한 생각으로 임박천宅을 하직하고 엇던 鍮器工場으로 가서 숟가락을 사가지고 숟가락장사를 떠낫다. 처음에는 손에 쥐고 다니며 팔다가 그것이 좀 늘어 등에지고 다니고 自己등에 지고다니다가 이제 당나귀를 한 마리 사서 나귀등에 실니고 다니게까지되였다.
그때는 숟가락만이아니라 다른 鍮器 즉 식기라든지 밥쭈걱같은 것을 싯고 황해도 지방에까지 돌아다니면서 販路를 擴張하였다.
3, 先生의 靑年時代
선생의 나이 이십고개를 넘게되자 鍮器行商만으로는 滿足할수 없고 인제 유기를 製造하는 공장을 한아 경영해보았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공장을 경영하는데는 상당한 자본이 필요하였다. 그때 평안도에는 鐵山에 吳氏一門이 대로 淸國貿易에 종사해왔는데 商業에 대한 經綸도 컷거니와 資産도 당시 국내 제1위에 니르렀다.
이조처음부터 우리나라 社會制度는 양반,중인,상한의 세 階級으로 나뉘였고 常漢중에도 여러 가지 구별이 있었다.
양반은 최고급에 속하야 국정을 좌우하고 상공업은 천시하야 산업을 힘쓰지않었고, 중인은 개성사람으로서 高麗王氏朝를 닞지않는다하야 中人을 삼았는데 그들은 政界에 참여할 권리가 없으므로 상공업을 경영하게 되여 서울을 중심삼아 전국 각시장의 經營的機關을 독점할뿐더러 중국이나 일본에대한 외국무역까지도 營爲하게 되였으며 상한은 그나마도 재본이 없어 경영치못하고 잡역에 종사하는 외에 소규모의 공업이나 才人 혹은 廣大로 나서기도 하였다.
그리하야 개성사람과 같이 상업을 많이 경영하였는데 지방이 淸國과 갓가움으로 淸國과 국제무역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아모리 갓갑다하더라도 淸國과 서로 往來하기에는 일년에 한번 冬至가 가는때를 타서 그일행에 섞여 물건을 가지고가서 팔아가지고 돌아올때에 역시 중국물건을 가지고 오게 되는것이니 한번 갓다가오기만하면 적지않은 이익을 보게되였다. 이 吳씨네도 국제무역을 행하야 우리나라의 巨富라는 이름을 듣게되였든것이니 그네는 국외무역에만 힘쓰고 국내에서는 다만 信用할만한곳에 자본을 빌려줄뿐이었다. 그때 정주에서 박창엽,박무일 두사람은 나이 삼십이 넘도록 放浪하다가 어떤사람의 소개로 吳씨네의 자본을 빌려 상업을 경영하야 약간의 성공을 보게되였든 것이다.우연히 두사람은 이승일이라는 청년을 만나자 그 청년이 매우 똑똑하고 영리하나 자본이 없어 사업을 경영할수 없는 것을 알고 그청년을 吳씨에게 소개하는 동시에 두사람이 보증을 하였다. 오씨의 자본을 빌려다가 納淸享에다가 남에게 지지않을 큰 유기공장을 시작하였다. 好事多魔라는 격으로 일을 시작한지 얼마아니되어 東學亂이 남쪽에서 일어나 그 소문이 들려오자 인심이 흉하야 안정할수없게되고 사업도 안심하고 경영할수 없게되었다. 그러자 일청전쟁이 일어나 靑軍이 평양에서 쫓겨 마대인이 敗戰軍을 끌고 納淸享을 통과하게 됨에 그 행로에는 살인, 강간 등의 가진 폭행을 敢行하고 본즉 그대로 職場을 직힐 수 없어 공장이고, 집이고 모다 집어던지고 陽德, 덕천 등의 山谷間으로 避亂을 가게되였다. 先生은 그틈에 끼여 가족을 기다리고 덕천땅으로 피해가서 일년동안이나 그곳서 감자농사를 지여 간신이 굶찌나않고 지낫다. 그러자 전쟁이 끝나 다시 納淸享에 도라와본즉 공장은 큰 修羅場이 되야 물건한아 남은것없고 집자리만 남어있을뿐이었다. 이 納淸享의 다른공장에서도 오씨네의 돈을 빌려다가 경영하는 것이 반수이상에 달하여 결국 納淸享의 유기공장은 오씨네의 자본으로 움즉여갓든 것이다. 그 여러공장주인, 직공할것없이 모다 도망가고 나머지는 터뿐이었다. 그 여러공장주인들은 오씨네네 대할 면목이 없다하야 행방을 감추고 누구하나 누구하나 공장에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중에 선생께서는 아모리 이러한 不可抗力의 亂을 당하였드라하더라도 얼마가 損害나고 얼마가 남어있다는 것을 분명히 조사하야 明細書를 꾸며가지고 오씨집에가서 이것을 보이면서 여러 가지로 謝過하였다. 오씨도 이번 亂離는 不可抗力이니까 自己자본이 대개 손해날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은 그렇다고 해서 事變후에 한사람도 사업에대한 報告를 하는이가 없어 恒常 마음에 불만을 가지고 또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해보았지만은 한사람도 보고하는이가 없어 섭섭하게 생각하든터에 선생이 사업의 明細書를 가지고 가서 이번 事變 때문에 손해본 원인과 사과의 말슴을 陳述하였다. 선생의 생각에는 아마 큰 걱정의 責望이 있을것이라고 豫測하였든 것이다. 그러나 의외에도 오씨는 여간 기뻐하는 눈치가 아니였다. 하인을 시켜 음식을 준비시키며 얼굴에는 화색이 滿面하야 엇쩔줄을 모르는듯한 태도가 뵈였다. 선생은 매우 의아하여 어리둥절하였다.이때 오씨의 말이 내가 여러사람에게 자본을 빌려주어 사업을 경영케하였으나 이번 事變후에 한사람도 오는사람이 없었는데 자네가 이렇게 해가지고 왔으니 좀 기특한일인가 장사하는 사람이 보통때에도 손해보는일이 많은데 더욱이 이번 亂離때에야 不可抗力이지 어떻게한단말인가 내가 그것을 모르는 沒常的한사람도 아닌데 차저와서 前後事情이라도 자세히 말해준다면 또다시 자본을 빌녀서 사업을 繼續하면 그만한 恢復될 것 아닌가 그런데 한번 오지도 않고 숨어 다닌다니 그럴 인사들이 어듸있겠는가 사람이란 손해를 보던 이익을 보던 서로 신용이 제일이야 자네는 이렇게 분명하게 사업을 보고하였으니 제일 신용있는사람일세. 이러한 사람이 성공하는 법이야 자네 이제 무슨 장사를 경영하든지 자본만은 얼마든지 대여줄터이니 장사를 크게 한번 경영해보게 내가 지금까지 여러사람에게 자본을 빌려주었던 것은 돈을 좀더 모아보겠다는 욕심보다 자네같은 신용있는 청년, 사업에 성공할 手腕있는 청년을 얻으려고 한것일세 하면서 특별히 귀여워하였다.
(김도태, ‘南岡李昇薰先生逸話’, 大潮, 1947년 8월호)
남강 이승훈의 생애와 교육운동
엄영식 (경희대 명예교수)
[본 강연 요약은 1987년 3월 28일 교육회관 강당에서 개최된 남강 이승혼 학술 토론회에서 강연한 것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남강 이승훈의 생애를 둘로 구분하여 생각한다고 하면, ‘사적(私的) 생활’과 ‘공적(公的) 생활’로 나눌 수있다. 그의 사적 생활은 1864년 태어난 때부터 1906년까지를 말하며, 공적 생활은 1907년부터 그 이후를 말한다.
남강은 매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어렵게 성장했다. 김기석은 그를 가리켜 ” 망망한바다 위에 떠 있는 가랑잎”이라고 표현하였다.
먼저 남강의 사적 생활을 전 ·후반기로 나눠보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보는데, 그 전반기는 유기공장의 사환에서부터 시작하여 유기행상. 유기좌상을 거쳐 유기공장을 경영하기까지를 뜻한다. 또한 이 시기는 유기공장을 합리적으로 경영하여 크게 성공한 시기로써, 그의 유기공장 경영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본 딴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자본주의 경영방식이었다. 그 후반기는 엽전 수송선의 침몰과, 피혁무역, 미역무역 등, 여러 가지 무역업에서 실패를 거듭한 좌절의 시기였다. 그러므로 남강의 사업은 성공의 시기와 좌절을 시기로 구분되며, 전반기의 그는 실업가. 또는 거상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남강은 그 자신이 배운 것이 없고 무식하다 하였으나. 그는 사업적인 두뇌가 밝았으며, 시대를 판단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나라의 힘이 강해야 된다는 것과, 일본의 경제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자본가들이 합동하여 대항하여야 한다고 하는 관서자문론(關西資門論)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남강은 사업에 실패한 후 그의 나이 38세 되던 해에 용동(龍洞)으로 돌아왔다. 그 때까지의 남강은 아직도 전통적인 봉건사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용동에다 남은 돈으로 약간의 토지를 매입하고, 양반 행세를 할려고 했던 데서 잘 알 수 있는것 이다.
또 그가 용동에 이상촌(理想村f)을 건설하고자 했던 것도 그의 사적인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여주 이씨 가문을 빛내보자는 데에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남강의 사적 생활을 통틀어 볼 때. 그는 정직한 인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함석헌도 남강을 가리켜, “그는 직(直)의 인간이다. 강(强)의 인간이다. “라고 표현하였다.
다음으로 남강의 공적 생활에 대해서 얘기하면, 그의 공적 생활은 한마디로 민족독립운동으로 일관되고 있다. 그의 공적 생활이 시작된 시기는 조선사람으로 양심을 갖고 조선사람으로서 살기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그의 공적 생활은 오산(五山)학교를 세움으로써 시작이 되는데, 그의 나이 44세(1907) 때였다. 그 후 남강의 공적 생활은 23년 동안 계속되는데, 옥중생활을 제외하면 실제로 사회에서 활동한 것은 14년에 불과하다.
남강이 공적 생활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도산 안창호의 강연을 들음으로써 비롯되었다고 할수 있다. 도산의 강연을 들은 남강은, “오늘부터 나는 다시 났다. 아니, 다시 난 것이 아니고 새로 났다. “고 하였던 것이다.
남강의 공적 생활은 오산학교를 육성하는 일과, 신민회(新民會) 평북총관, (그 패 남강은 ’10만원 모금운동’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 또한, 마산동 자기회사사장, 태극서관 관장, 3·1운동 주역, 민립대학 설립운동(1923). 동아일보사 사장(1924)등으로 이어지는데, 그 가운데서도 3·1운동시의 활약과 오산학교의 경영,이 두 가지는 우리나라 민족운동과 교육사에 있어서 큰 발자취를 남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남강의 교육, 사회활동, 신앙심, 모든 것이 ‘독립운동’,이 하나로 귀착된다. 그러므로 남강의 교육은 나라의 독립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고. 불 같은 신앙심도 하나의 독립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남강의 교육운동을 얘기하기에 앞서 독립운동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한다.
그의 독립운동의 특징은, 첫째 남강은 시종 국내에서 일제와 싸웠다는 것이다. 당시의 독립운동이라 하면 해외로 망명해서 했던 것이 하나의 상례(常例)였다. 그러나 남강은 해외로 망명하지 않고 국내에서 일제의 잔혹한 채찍 밑에서 정면으로 맞서서 싸웠다. 도산 안창호가 망명하고, 양기탁, 김구 등 신민회의 동지들이 거의 망명해서 떠났고,또 초창기 오산학교의 동지들이 모두 망명을 했으나 남강은 끝까지 국내에서 한 발자욱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오산의 9회 졸업생인 김홍일은 남강이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고 하였다.
“외국에 나가는 길만이 능사가 아니다. 전에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해외로 많이 망명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과연 그분들이 이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얼마나 되는가. 물론 내가 하는 말은 국내에서 활동을 하다가 왜놈들에게 붙잡힐 처지이기 때문에 부득불 망명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내 말은 망명 안해도 될 사람이 망명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요는 이땅에 살고 있는 국민들의 의식이 깨이고 각성을 해야만 독립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 아니겠는가. “
남강은 국내에서 싸우는 데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남강이 3·1운동 이후 출옥하여 인촌 김성수와 만난 자리에서 한 얘기에서도 그것은 더욱 명백해진다. 즉 남강은 “나라를 일으키는 길은 교육과 산업 두 가지 밖에 없는데,밖에 나가서는 일이 없다. 그런 대로 안에서 해야 한다. “고 했다. 둘째로, 남강의 독립운동은 죽음을 초월했다는 것이다. 1918년 12월 상해에서 현순이 찾아와 상해에서 독립선언을 하기로 하여 연락하기 위해 왔다는 말을 듣고 남강은 “앉아서 죽을 줄만 알았는데 이제 죽을 자리가 생겼구나.”하며, 3·1운동의 주역으로서 독립운동을 했던 것이다. 그는 확실히 죽음으로써일제에 대항했다고할 수 있다. 세째로, 남강은 독립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다. 3·1운동의 주모자 48명의 공판기록 가운데 보면, 19명의 기독교 관계자에게 당시 일본인 재판장이 “그대는 일한합방을 반대하고 조선독립을 희망하고 있었다지?”하고 심문한 내용이 있다. 그 물음에 대하여 18명은 “그렇다. “고 대답을 하였으나 남강은”그게 아니다. “라고 하였다. 남강은, “조선 독립에 관해서는 나는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나는 별로 일본을 반대할 뜻이 없다. 일본이 한국을 합방한 것은 하나님 뜻에서 나온 것이로되 별로 나는 이것을 반대할 의사는 없다. 그런데 합방이 된 것은 우리 조선사람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독립시켜 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남강은 그의 동상 제막식 답사에서 “내가 민족이나 사회를 위해서 조금이나마 한 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백성된 도리에서도 특별히 일한 것은 못된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우리 동포를 위해서 한 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게 그렇게 시킨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남강의 신앙심은 독립과 직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민족운동으로 볼 때 3·1운동 이후로는 거의가 일제에게 약해져 있었다. 물론 남강도 출옥 후 약해졌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남강은 결코 변절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이 독립운동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남강의 신앙심 및 독립운동의 정신이 곧 오산학교의 창건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곧 남강의 교육운동이기도 한 것이다. 1907년 7월 남강이 도산을 만나고 돌아와 강명의숙을 세운 것이 8월이고, 그해 12월 24일 오산학교를 세웠다.
남강은 처음 입학한 학생 7명을 놓고 입학식에서, “나는 민족운동에 쓸 인재, 국민교육에 쓸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 학교를 세웠다. “고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남강의 교육정신을 잘 나타내 주는 말이라 하겠다. 즉 오산학교는 관리의 양성이라든가, 입신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을 교육하는 데 쓸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 그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남강의 의지는 망명하려는 김홍일에게 만류하면서 한 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네 생각에 소학교 선생이 하잘 것 없는 것 같이 생각될지 모르나 그렇지 않다. 사실 다른일보다 더 어렵고 보람 있는 일이다. 나는 오산졸업생들을 전국의 소학교 교사로 보낼 작정이다. 우리가 한 마음으로 단합해서 일어나야 한다. 내가 예수를 믿는 것도 일어나기 위해서이다. 혼자만 잘 되어서는 안 된다. 소학교 교사가 작은 것이 아니다. “
남강은 국내에서 선생이 되는 것이 해외에 나가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그는 우매한 백성들을 일깨워 민족의 얼을 넣어 준다면 독립을 위해 그보다 더 큰 힘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 던 것이 다. 남강은 교회에 나가는 것도 목사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했으며, 그는 교인들을 계몽시켜 그들을 ‘독립의 일꾼’으로 묶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에 있어서는 교회의 조직밖에 우리 민족의 단결된 힘이 없었으리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남강의 말은 매우 타당했다고 본다.
오산학교는 처음부터 애국자 양성의, 정성의 정신으로 뿌리를 박은 학교이다. 오산학교는 남강, 고당 조만식, 유영모, 함석헌 등 민족에 대한 정성의 뿌리로써 이룩한, 심은, 또한 키워진 학교인 것이다. 당시의 민족 독립은 조선의 성(誠)이었으며, 그것을 가지고 끝까지 실행하는 얼이 오산에는 면면히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만큼 오산학교는 남강의 학교가 아니요 조선의 학교인 것이다.
1920년 3·1운동 때 불 타 폐허가 된 오산학교를 졸업생 및 학부형들이 2만원을 모아서 다시 세웠다. 1922년에 역시 불 탄 건물을 세우기 위해 모금했을 때는 204명이 참가해서 1만 5천원을 모았었다. 이 때 동아일보는 1922년 9월 17일자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오산학교는 우리 우국지사의 심복에 전하고 조선민족의 운명의 상징되는 것과 같다. 조선청년의 낙원의 전도를 열어 주는 데 실로 조선전체의 광명과 생명을 위해서 공헌한 바 크다. “
또한 1923년 재단법인을 설립할 때에는 30만원을 목표로 모금했는데. 116명이 참가했다. 1955년에 고등보통학교로 승격할 때는 총독부에서 기숙사를 지어야 된다는 조건을 내세워서 관서(關西)의 유지, 사회인들이 대모금운동을 전개했는데, 이 때는 1,369명이 참가를 했다. 이 후에도 오산을 위해 많은 이들이 돈을 내고 참가하여 오산을 다신 일으켜 세웠던 것이다.
남강은 내 땅을 갖고 나만 편히 살 수 없다 하여 땅을 팔아서라도 독립운동을 하고자 했는데, 형님이 반대하여 그 형님과 다투었다고 하였다. 남강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여러 번 땅을 판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 때 남강은 땅을 많이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땅이 바닥이 나니까 그런 이유로 형님도 반대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결론적으로,오산학교는 남강이 세우고 키운 학교지만 우리 민족의 학교요, 조선의 학교인 것이다.
(엄영식 경희대 명예교수, ‘남강 이승훈의 생애와 교육운동’, 한국기독교사연구회소식, 1987년)
[新年의 新意見]
이 뿐이외다
李昇薰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잇겟습니다. 그러나 나는 평생 소원으로 알에 적은 두가지 조건 뿐이 형제의 마음속에 깁히 기억되기를 懇求합니다.
1. 마음과 몸을 다하야 일하야써 각 사회 人衆의 信仰을 밧는 지경에 니르는 質實한 眞人이 생겨나기를
2. 가면이 아니요 진실로 일하는 사람이 잇거든 그에 대하야는 血氣方强의 청년들까지라도 그를 상당히 敬愛하며 숭앙하야 사회중심의 추세를 짓게 하기를
나의 생각에는 오늘 우리의 조선에 이 두가지의 새로운 사실이 作出되지 아니하면 새로운 질서의 미테서 새로운 건설을 행해 엇는 그날은 심히 멀은 明日로 延退되리라 합니다. 나의 이 말은 한 말로 말슴하면 일체의 허식을 파기하고 오즉 사실을 主하자 함이외다. 종래의 우리는 새것을 짓기에 진실하지 못하고 잇는 것을 다루기에 詐僞하다가 今日의 경우를 招致하엿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조흐니 진실하여야 하겟습니다. 진실하면 이름에 압서서 공적이 들어나고 공적에 딸하 신앙이 생깁니다. 이름에 압서는 공적이 잇고 공적에 딸흐는 신앙이 잇서 그와가튼 實勢로써 사람사람이 연결되고 사회와 사회가 조성되면 그 人族 그 사회의 저력은 누구라도 如何히 할 수가 업겟습니다. 나는 이것이 업고는 모든 것이 업다고 합니다. 이 뿐이외다.
(이승훈, ‘新年의 新意見- 이 뿐이외다’, 개벽, 1923년 1월호)
이승훈 [1864∼1930]
훈격 : 대한민국장 / 서훈년도 : 1962년
공적개요
○ 1907 오산학교 건립, 신민회 가입
○ 1911 105인사건으로 옥고
○ 1919 민족대표33인중 기독교측 대표
열 살이 되던 해 학업을 중단하고 상인의 길 들어서
이승훈(李昇薰, 1864. 3. 25~1930. 5. 9) 선생은 1864년 3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읍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석주(碩柱)이며, 어머니는 홍주(洪州) 김씨이고, 이들 사이의 둘째 아들이 바로 선생이다. 본관은 여주(驪州), 아명은 승일(昇日), 본명은 인환(寅煥), 호는 남강이다. 가난한 서민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2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6살에 고향 정주읍내를 떠나 인근 납청정(納淸亭)으로 이사하였다. 여기에서 10살 때 아버지를 여의기 전까지 3, 4년간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것이 어린 시절 배운 학문의 전부였다. 열 살이 되던 1874년 학업을 중단한 선생은 당시 유기(鍮器)상인으로 유명한 임일권이 운영하던 상점의 사환으로 들어갔다. 4년 뒤에는 이 상점의 외교원 겸 수금원이 되었으며, 근면성과 성실함이 인근까지 널리 알려져 1878년 이도제의 딸 경강(敬康)과 결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선생은 점원생활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상인의 길에 들어섰다. 선생은 보부상으로 평안도와 황해도 각 지역 장시를 전전하면서 자본을 모아 납청정에 유기상점을 차리고 평양에 지점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철산의 갑부 오희순의 돈을 얻어 1887년 납청정에 유기공장을 세워 민족기업가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1차 산업 위주의 사회에서 2차 산업의 토대를 만들어 간 것이다. 선생은 공장 경영방식도 근대적으로 개선하였다. 노동환경을 일신하였고 노동조건 개선에도 힘썼으며, 노동자의 신분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대우하였다. 때문에 작업 의욕이 왕성하여 생산성이 높고 품질도 우수하여 사업은 날로 번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도 한 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1894년 청일전쟁이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을 전쟁터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납청정에 자리 잡은 선생의 상점과 공장은 이때 잿더미가 되었다.
신민회에 가입하고 민족교육운동 일환으로 오산학교를 설립하다
덕천으로 가족과 함께 피난 갔다 돌아온 선생은 또 한번 오희순의 자본을 얻어 상점과 공장을 재건하였다. 나아가 평양에 상사를 개설하고 진남포와 납청정에 지점을 두고 본격적으로 무역과 운송업을 펼쳤다. 서울과 인천 등지로 왕래하면서 사업을 확장하는데 성공한 선생은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되었다. 그리하여 한 때는 선생에 의해 물가가 좌우될 정도의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이같이 상업 자본을 축적하여 본격적인 산업 자본가로의 성장을 눈앞에 둔 선생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였다. 1902년 우연인지 아니면 민족 자본을 말살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인지 아직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1만냥의 엽전을 싣고 부산으로 가던 선생의 운송선이 일본 영사관 소속의 배와 충돌하여 침몰한 것이다. 이에 선생은 일본 영사를 상대로 2만냥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소송은 당시의 국제 정세에 얽혀 1년이 지난 뒤에야 원가만 받는 것으로 해결되고 말았다. 선생은 1년간의 소송으로 장사의 적기를 놓쳤고, 또 소송에 매달리는 바람에 사업도 제대로 못하여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선생은 이러한 일을 겪으면서 외세와 민족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상업 자본가로서 이익을 추구할 때는 인식하지 못했던 민족 현실을 일제와의 소송과정에서 뼈저리게 절감한 것으로 생각된다. 생활상의 문제에서 반일 민족의식이 생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연계선상에서 선생은 43세가 되던 1907년 7월 인생의 큰 전기를 맞게 되었다. 평양에 나갔다가 나라가 없이는 집도 몸도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에 나 혼자만 영광을 누릴 수는 없소라고 하는 도산 안창호의 강연을 듣고 그를 찾아가 만난 것이 그 계기였다.
이후 선생은 개인의 영달보다는 민족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게 가졌고, 인생 행로는 오직 민족을 위한 것으로 바뀌었다. 당장 금주, 금연과 단발을 결행하고, 안창호가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하여 평안북도 총감이 되었다. 이 가운데 선생은 식산 흥업의 책임자로 평양 마산동에 자기(磁器)회사를 설립하였고, 서적의 출판과 공급을 목적으로 태극서관이라고 하는 서점을 경영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선생은 민족교육운동에도 앞장섰다. 도산을 만난 뒤 평양에서 용동으로 돌아온 선생은 서당을 고쳐 신식교육 기관인 강명의숙(講明義塾)이라는 초등교육 기관을 설립한 것이다. 이어 같은 해 12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이 된 오산학교를 개교하여 교장이 되었다.
안악사건으로 제주도 유배, 105인 사건으로 옥고 치러
한말 선생을 비롯한 민족운동자들의 구국계몽운동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한국은 일제의 완전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9월 선생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전에도 선생은 기독교 설교를 들은 일이 있었지만, 그에 입교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고 나니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아프고 서러웠다. 답답한 심정으로 평양으로 나갔다가 한석진 목사의 설교가 있다고 하여 들으러 갔다. 선생은 그 날부터 기독교를 믿기로 작정했고, 돌아와서 오산학교 교육도 기독교 정신으로 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기독교 신앙은 이후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면서 더욱 깊어졌다.
일제에게 나라를 강점 당한 직후부터 선생은 5년여 동안 철저히 탄압을 받았다. 1910년 말 안중근의 4촌 동생 안명근이 독립 군자금을 모금한 일로 안악사건이 발생하자, 이듬해 2월 선생은 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일제 강점기 무단통치에 의한 민족운동자 탄압의 출발점이었다. 1911년 9월 일제는 테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간부와 600여 명의 민족운동자들을 대거 체포한 신민회사건을 일으켰다. 그 가운데 105명을 기소함으로써 이 사건은 흔히 105인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선생을 지목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15년 2월에야 가출옥하였다. 감옥생활은 선생의 민족의식을 더욱 강고하게 만들었다. 출옥 후 오산학교로 돌아온 선생은 학교 일에 정성을 다하였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1915년 52세의 만학도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 동안 수학하게 되었다.
평양신학교는 1901년 마펫트 목사가 창설하여 1907년 첫 졸업생을 낸 기독교 장로교계통의 신학교였다. 이 학교는 기독교계 3.1운동 추진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 선생을 비롯하여 민족대표로 활약한 길선주, 유여대, 양전백, 김병조 목사, 그리고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하였던 송병조, 김인전 등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을 배출한 서북지역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선생은 여기서 수학하면서 민족독립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독립운동 동지들과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만나 사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3.1운동 추진의 자양분이 되었던 것이다.
국제 정세의 격변 속에 국내외에서도 거족적 독립운동 움직임 일어
한편 1918년에 들어와 국제 정세는 격변하고 있었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러시아에서는 이미 노농정부가 수립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미 대통령 윌슨은 전후 처리 지침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당시 사람들은 약육강식의 시대가 가고, 인도와 정의의 시대가 도래하는 세계 개조의 흐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나아가 이 같은 정세의 변화를 이용하여 한국 독립을 성취하고자 국내외 민족운동자들은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여 갔다.
이러한 흐름아래, 상해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18일부터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민족대표를 파견하여 일제 식민지 통치의 실상을 폭로 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준비하였다. 즉 외교활동을 통해 민족독립 달성을 구상하였던 것이다. 파리강화회로의 파견뿐 아니라 선우혁, 김순애, 김철, 서병호, 백남규 등을 국내에 밀파하여 독립운동 봉기를 종용하고, 여운형을 만주와 노령 연해주, 조소앙, 장덕수를 일본 동경으로 파견하여 국외 한인동포들의 독립운동 봉기를 이끌어내도록 하였다.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독립운동 논의가 진행되었다. 천도교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16년부터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킬 것을 손병희 교주에게 요청하는 신도가 있었고, 1917년에도 그러한 요구가 재차 표출된 적이 있었다. 특히 1917년 겨울에는 김시학의 발의로 우선 천도교, 기독교, 유림 등 3종단이 연합하고, 사회계와 구(舊)관료계의 저명 인사들을 포섭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알려지고, 파리강화회의 개최 소식이 전해지자 손병희를 중심으로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천도교 지도자들은 다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들은 송진우, 현상윤 등 중앙학교측의 인사들과 합세하여 독립운동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는데, 바로 이때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을 추진하던 재일 유학생들의 밀사로 송계백이 도착한 것이었다. 송계백이 가져온 2.8독립 선언서 초안을 보고, 또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듣고 크게 감동한 현상윤은 이를 중앙학교 교장인 송진우와 친구인 최남선에게 보였다. 그리고 다시 송계백과 함께 최린을 찾아가 보여 주고, 그를 통해 손병희에게도 전달한 것이다.
손병희는 이를 보고, 젊은 학생들이 저렇게 운동을 한다고 하니 우리 선배들로서도 좌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지금까지의 독립운동 추진 계획을 가속화하고, 나아가 다른 종교계와 접촉하여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독립운동의 구체적 방법과 진행을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에게 일임하면서, 권동진과 오세창은 천도교 내부의 일을 담당하게 하고, 최린은 외부와의 관계를 맡도록 하였다.
종교계 인사들과 학생층의 연합으로 3.1운동 계획 추진
한편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운동 추진은 선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2월 6일 선생은 상해 신한청년당의 밀사 선우혁으로부터 국제정세의 변화와 그에 따른 국내 독립운동의 추진을 권유 받았다. 이에 독립운동 추진 논의를 위해 상경한 선생은 최남선, 송진우, 최린 등을 만났고, 이들로부터 천도교를 중심으로 추진되던 3.1운동 계획을 듣게 되었다.
이때 선생은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 세력의 독립운동 계획은 쉽게 접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독교계를 대표한 선생과 천도교계를 대표한 최린은 일원화, 대중화, 비폭력화의 3대 원칙 아래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3.1운동을 추진하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선생은 곧 바로 서북지방으로 내려가 기독교 지도자들을 순방하며 3.1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갔다. 우선 평양에서는 장로교계의 원로 지도자 길선주 목사와 감리교 지도자 신홍식 목사의 참여를 확약 받았다. 그런 다음 평북노회가 열리던 선천으로 내려가 양전백 목사의 집에서 교회 지도자 들을 만났다. 여기서 선생은 천도교와의 합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3.1운동 참여와 민족대표 선정을 요청하였다. 이에 교회 지도자들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로 결정하고, 그 자리에서 이명룡, 유여대, 양전백, 김병조 등 4인을 민족대표로 선정하였다. 이들이 이렇게 쉽게 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동안 이 지역에서 목회 활동과 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상호 신뢰를 쌓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선생을 비롯하여 최린, 한용운을 매개로 기독교, 천도교, 불교계와의 접촉이 이루어져 종교계의 연합전선이 구축되었고, 여기에 ymca를 매개로 학생층이 참여함으로써 민족대연합전선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3.1운동 계획은 일원화되어 일사불란하게 추진되었다. 그리고 2월 28일 가회동 손병희 집에서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의 민족대표들이 회합하여 독립선언 계획을 최종 검토한 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갖도록 결정하였다.
독립선언식 이후 피체, 민족대표 중 가장 늦게 출옥한 선생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앞에 놓고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한용운이 대표로 오늘 우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 협심하여 조선 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고 하는 요지의 식사(式辭)를 하였고, 마지막으로 참석자 모두는 독립만세를 3창함으로써 거족적인 3.1운동의 불을 지폈던 것이다.
이 직후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들은 출동한 일경에게 피체되어 경무총감부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들의 인신(人身)을 구속할 수 있었을지언정 불타는 독립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특히 선생은 경무총감부에서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의 국권회복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일본인 검사의 질문에 아래와 같이 당당하게 답변하였다.
그렇다. 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어디까지든지 하려고 하고, 또 먼저도 말하였지만 금번 독립운동은 우리 동지들만으로 한 것이지 외국 사람이나 외국에 재주(在住)하는 조선 사람이라든지 또는 학생 등과는 하등 관계가 없으며, 일본 정부에 대하여 청원한 일에 있어서도 외국 사람의 조력을 요할 필요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이 말 가운데는 선생의 불요불굴의 독립정신은 물론 자주적 독립운동 노선까지도 모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선생은 민족대표 가운데 가장 늦은 1922년 7월 22일에야 출옥할 수 있었다.
오산학교와 [동아일보] 경영에 힘쓰다
이후 선생은 정주로 돌아와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쏟았다. 그러면서 물산 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나아가 [동아일보]가 1924년 1월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의 게재와 4월 박춘금 사건으로 내우외환의 위기에 빠졌을 때, 그 사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5월부터 10월까지 [동아일보]를 맡아 민족지의 경영 정상화에도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30년 5월 8일 선생은 전처럼 오산학교를 다 돌아보고 학생들 앞에서 훈화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면회(自勉會)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했다. 자면회는 용동 사람들로 조직된 자치기관으로 선생은 거기에 자신의 땅을 내놓아 공동 경작하게 하며 생활 개선과 향상에 힘쓰고 있었다. 선생은 이들을 다 돌려보내고 갑자기 병이 나 이튿날인 5월 9일 오전 4시, 6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영면 직전 선생은 평소에 늘 하던 대로, 내 뼈는 학교에 표본으로 만들어 보관하여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교육에 진력하는 사람들에게도 보여 주기를 원한다고 하는 유언을 남겼다. 이로 보아 선생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겨레의 스승이었다. 살아서는 독립운동가로 조국 광복과 민족 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고, 죽은 뒤에는 자신의 유골까지도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고 한 것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2001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승훈’,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