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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동아일보 사람들- 이상하

Posted by 신이 On 12월 - 24 - 2018

 

이상하(李相河, 1937~2005)는 전남 담양 출신으로 서울대 법대 졸업 후 1964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할 당시 사회부장을 맡았고 신군부 부인들 관련 구설을 지면에 반영했다는 이유로 경찰 특수수사대로 끌려가 구타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후배들에겐 ‘영원한 사회부장’으로 불렸다. 특히 1970년 3월 제3공화국 고위층의 도덕적 치부를 드러낸 ‘한강변 정인숙(鄭仁淑) 여인 살해 사건’ 취재 과정은 언론계의 전설로 남아 있다. 1984년 정치부장을 맡은 것도 당시 언론계에선 화제였다. 정치부 기자의 경력이 전혀 없는 사회부 출신이 정치부장을 맡은 것은 ‘파격(破格)’이었다. 19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정치면의 대변신을 시도했다. 대정부 비판이 터져 나온 유세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3,4개면에 펼쳐 신민당 돌풍의 숨은 주역은 동아일보 정치면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88년 13대 총선 때 집권 민정당의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정치권을 떠난 뒤 한국프레스센터 이사장과 무등일보 회장을 지냈다.

 

이상하(李相河) (담양, 1937~ ) △ 1964.2 견습(편집국), 기자(사회부), 사회부차장, 연구위원, 사회부장, 체육부장, 정치부장.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3권, 동아일보사, 1985)

 

 

 

李相河(1937~2005)

○ 1937년 1월 28일 전남 담양 출생, 2005년 4월28일 별세
◇학력 ;서울대 법대 졸업(63)
◇주요경력 ;동아일보 기자(64) 사회부 차장, 체육부장, 부국장대우 정치부장, 편집 부국장(88) ;13대 국회의원(88) ;민자당 대변인(90) ;한국프레스센터 이사장(93) ;무등일보 회장(99); 한국기자협회 회장(82)

투철한 기자정신 장인정신 돋보여

이상하란 인물은 이상하다. 신문기자에 이어 국회의원, 공공기관장,지방언론사 회장 등 쟁쟁한 자리를 거쳤지만‘평생 사회부기자’로 훨씬 더 알려졌다. 본인 또한 그걸 바랐다. 정치부 문턱은 밟지도 못하다 그 부장을 맡자 지면에 일대 새바람을 일으켜 민주화를 앞당기는데 기여했다. 위아래 신망이 두터워 편집국장은 물론 신문 최고위직에 오를것 같더니 느닷없이 회사를 떠나 신군부 세력이 만든 집권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는 1964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그리고 반쪽이나마 민주화가 이루어진 1988년 신문사를 떠났다. 그가 신문기자를 한 24년은 언론을 짓밟고 국민의 눈과 귀를 막던 세력이 한창 악을 쓸 때다. 자유언론 투쟁이 일고 대장은 물론 게라까지 검열했던 시기다. 광고파동에 이은 기자 해고 와중에 제작 거부냐 참여냐의 한편에 서는 아픔도 있었다. 그런 60~1980년대 한국사회를 그는 몸으로 부딪치며 마음으로 울며 지냈다.
그럼에도 이상하는‘사람을 몰고 다니는 유쾌한 사람’(그의 사후 2006년 동료 후배들이 출간한 추모문집 제목)이었다. 사회부‘두목’으로,‘ 백두’(白頭)를 휘날리며 동아일보 사회부의 전성기를 휘저었다. 기사에는 칼날 같고 사람들에겐 다정다감하며 울적한 마음은 술과 노래로 달랬다. 선이 굵고 호방하며‘사쓰마와리’류의 거친 면모를 과시했지만 기실
그는 여렸다. 죽을 때까지 문청(文靑)의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낭만파’로 살았다.

발로 뛰어 글로 푸는 솜씨 일품

1964년 동아일보 견습 6기로 입사한 그는 햇병아리 시절부터 괄목대상이었다. 발로 뛰어 글로 푸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견습 때 이미 선배들의 벽을 돌파해 ‘이상하식’사건기사의 진수를 선보였다. 핵심을 잡고 무섭게 물되 당사자도 수긍할 수밖에 없게 쓰는 그의 기사는 동아일보의 성가와 함께 빛이 났다. 65년 동대문경찰서 출입기자로 유기천 서울대총장과 벌인 신문 정론 논쟁은 동아일보 사건기자들 사이엔 전설로 굳어졌다. 우선 그가 쓴 65년 9월 11일자‘휴지통’을 보자.
“…유기천 서울대총장은 지난 7일 그가 담당한 법대의 형법2부 시험에서 묘한 문제를 출제하여 학생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는데… …시험문제인즉‘갑(甲)외 6명의 학생이 약 2백 명이 모인 곳에서 학장이 사퇴 않는 한 맹휴에 들어가겠다고 발언, 가결시킨 경우 갑의 형사적 책임을 논하라’는 것이었다나… …이 시험은 법대생들이 때마침 유 총장의 사퇴를 요구, 맹휴중이어서 몇몇 학생만 응시했다는데 학생들은 ‘법적 근거는 모르되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쓰면 모범답안이 될 거라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들…”
64년부터 이어진 한일회담 반대데모 와중에 나온 기사다. 묘한 시험문제를 낸 유 총장은 데모에 강경한 입장. 경찰이 농성학생을 연행할수 있게 학교 문을 열어주었다는 말까지 들으며 학생들로부터 퇴진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상하 기자는 그의 제자. 하지만 기사만큼은 어떤 연줄을 대도 봐줄 수 없다고 믿은 그는 연일 유 총장에 비판적 기사를 내보냈다. 어느 신문보다 따끔한 기사였다. 유 총장은 어느 날 은밀히 이 기자를 총장실로 불렀다.
“자네 법대 몇 회인가? 내 강의도 들었지?”“예”“그런데 자네, 스승을 헐뜯고 짓까불라는 내용이 내 강의에 들어 있었나?”“……”“왜곡과장보도가 우리나라 신문 병폐인데 자네는 햇병아리가 못된 것부터 배웠군 그래.”“그런 사실은 없습니다.”“이 사람아, 그‘휴지통’인가 뭔가에 못된 소리 끄적거린 게 누군가?”“선생님, 신문은 잡기장이 아닙니다. 끄적거리다뇨. 그리고 사실이 아닌 걸 쓴 적은 없습니다.”“뭐라고, 누굴 가르치려 들어. 이봐, 내가 동아일보 사장은 못할 줄 아나.
그땐 어쩔 거야?”“그땐 사표를 내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공인인 기자로서 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정인숙 피살사건’밤새워 취재

일선 경찰서 출입을 거쳐 시경 캡을 하는 동안 그는 기사가 흐르는 곳, 그 목을 꿰고 있었다. 진탕 술을 퍼마시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해도 그는 단숨에 먼저 온 기자들 취재범위를 넘어섰고 특종을 뽑아냈다. ‘유엔 호텔 화재 사건’의 피해자 주민 명부를 책 째 빼낸 일하며 ‘강변로 정인숙 피살사건’의 정 여인이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아이를 안고 있는 사진을 보도한 것도 그였다. (혹시 요즘 기자들은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사망자 사진을 구하고 명단을 뽑아내는 일은 당시 사건기자의 기본중 기본이었다. 정인숙은 요정정치 피해자로 그녀가 낳은 아이가 정일권 당시 총리, 혹은 박정희 대통령 소생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유엔 호텔 사건은 짓다 만 호텔건물에 빈민들이 모여 살다 대화재로 수십 명이 소사한 사건이다. )
특종이 단순한 노력만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사건기자를 해본 사람은 다 안다. 끊임없이 주변얘기를 듣고 바늘 같은 정보도 소중히 들어 소만한 기사로 풀어쓸 수 있게 신경을 써야 가능하다. 매일 밤 잠복근무를 나가는 형사부터 경찰서장 국장까지 두루 인맥을 쌓고 관리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의 매력은 바로 거기에 있다. 서울 법대 출신 엘리트 티를 내지 않고 그는 누구와도 쉽게 어울렸다. 마음이 활짝 열려있었고 사람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했다. 그의 진정한 신문기자로서의 무기는‘항상 다정한 마음’이었다. 기자의 숙명으로‘조지는’기사를 밥먹듯 쓰지만 끊임없이 사람을 관리해 연을 맺고 그걸 업무에도 연결시켜 특종으로 만들곤 한 것이 이상하란 얘기다. 가령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유고’라는 사실을 그는 동아일보에서 제일 먼저 알았는데 10년도 전 시경 캡을 할 때 알았던 궁정동 파출소장이 전화로 제보한 것이었다. 그에게 신문사로 걸려오는 전화 대부분은 그런 식으로 사건 사고에 관한 제보가 주종을 이루었다.
이상하 하면 동 시대 사람들은 흔히 술을 떠올린다. 그는 그야말로 두주불사였다. 적어도 신문사에 있을 때까지 자기 앞에 오는 술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퍼마시면서도 실수가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분위기를 썰렁하게 몰아간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와 함께 하는 술자리는 항상 웃음이 넘쳤고 우애가 가득했다. 사람들을 제 매력의 바다에 빠뜨리고 후배기자들에겐 신문기자의 나아갈 길을 일화와 행동으로 가르쳤다.

두주불사, 대중가요 가사의 달인

술자리가 어느 정도 됐다 싶으면 그는 노래를 불렀다. 아니, 노래를 유도했다. 그는 대중가요 가사의 달인이었다. 누가 어떤 노래를 부르건 꼭 한 소절 앞서 가사를 미리 불러줬다. 서양 팝송도‘sad movies’나‘riverof no return’같은 노래를 개사하기도 하고 원어 그대로 부르며 흥을 돋우었다. 그렇게 넉넉하고 즐기는 리더십을 은근히 내보이고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게 신문제작의 방향을 동료와 후배들에게 제시하곤 했다.
사회부장 시절 그는“사건을 보고도 흥분하지 않는 기자는 기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즐겨했다.“ 비단 범죄적인 사건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날 경우 신문기자는 먼저 흥분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사건은 일단 정상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탄히 진행되어가는 사회 궤도에 차질이 생긴 것이고 그러니 중요하게 다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또 독자와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도록 욕심을 부리며 집념을 가지고 사건에 임해야 한다.”
그런 자세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가 1980년대 초 이른바‘빨간 바지 복부인 사건’이다. 신군부가 득세할 무렵 시중에는 이순자 여사 등 모모한 신군부 부인들이 대대적인 강남 땅 투기에 나섰고 이 씨는 빨간바지를 입고 다닌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이상하 사회부장은 흥분했다.
사회정화니, 정의사회를 트레이드마크처럼 내세우는 이들이 기실 투기꾼이라니. 당장 사건기자 절반을 강남에‘풀어’복덕방을 이 잡듯 뒤지고 ‘빨간 바지’에 대한 숱한 증언을 들어 1면 머리기사로 올렸다.
그러나 이 기사로 그는 된통 곤욕을 치렀다. 경찰 특수수사대에 끌려가 며칠 동안 흠씬 두드려 맞았다. 당시 경찰 쪽에서“무조건 오보임을 시인하고 정정 보도를 내기만 하면 풀어주겠다”고 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사회부기자들이 직접 증언을 듣고 쓴 정확한 기사를 부장이 살자고 오보라고 부정할 수 없다”는 거였다. 끝내 반죽음이 돼 회사에 돌아온 그를 위로하기 위해 후배들이 보신탕을 사는 날 그는“사람이야 좀 맞았지만 신문은 오보파동에 말리지 않았다고… 그럼 된 거 아냐?”라며 허허롭게 웃었다.

기사에 욕심 많고 자부심 남달라

그런 투철한 기자정신과 장인정신은 그의 기자시절 내내 빛이 났다. 기사에는 누구보다 욕심을 부렸고 제 기사에 대한 자부심도 남달랐다. 발표기사 관급기사에 의존하는 것이 싫어 연중 연재물을 발굴해 지면을 확보했고(1980년대 초반 연거푸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읽을거리를 독려했다. 인간미 넘치는 살아있는 기사, 서민이 주인이 되는 기사를 요구
하고 그런 기사가 나온 날이면 사회부 전원을 대동하고 밤새 술잔을 기울였다.
물론 쓰라린 패배감을 맛본 일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80년 광주민주화운동 첫 보도다. 동아일보는 신군부가 내놓은 장문의 발표문을 이상하 사회부장 건의에 따라 첫 판에 보도하지 않았다. 대신 현장기자가 보내온 사실 위주의 짧은 기사를 내보냈다. 군의 강경 진압 등 세세한 사항까지 기록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광주시민을 폭도로 매도하는 기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진실만을 알리겠다는 그 시도는 실패했다. 워낙 정보에 목말라 있던 독자들은 타지와 비교해 동아가 ‘물먹은 것’으로 오해해 거세게 항의했다.
빨간 바지 사건으로 사회부장에서 물러난 그는 84년 정치부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정치부에서 일선 기자를 해보지 않은 첫 정치부장이 탄생한 것이다. 누가 봐도 정치 문외한인 그를 부장으로 깜짝 기용한 것은 물론 회사 측의 승부수였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제는 신문사 구석구석까지 미쳤고 신문은 똑같은 기사를 내며 독자적인 읽을거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홍조실의 보도지침대로 신문을 만들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정치부기자 황재홍은 이상하 정치부장의 취임 일성을 또렷이 기억했다.“ 전두환 군사정권 출범 이후 정치활동이 금지됐던 야당 인사들이 대거 규제에서 풀리고, 반독재 민주화투쟁으로 거리엔 최루탄가스가 자욱하고, 85년에는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는 이 마당에 회사는 왜 정치 문외한인 나를 정치부장에 앉혔는지 잘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정치를 전혀 모르는 나도 금방 알 수 있게 기사를 쉽게 써내라”고 첫 지시를 내렸다.동아일보 정치부가 민주화 철로에 침목을 까는 일은 알고 보면 단순했다. 정치기사의 양을 대폭 늘린 것이다. 특히 야당 정치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그대로 지면에 담아냈다. 정치 보스 얘기나 한 줄 인용해 쓰는 데만 익숙했던 신문의 관행을 깨고 동아일보에는 정치적인 말이 넘쳐흘렀다. 특히 민주화의 교두보로 기록된 212 총선 유세전에 나온 온갖 말들이 동아일보의 지면에서 생생하게 꿈틀거렸다.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진출

유신, 긴급조치 정권과 5공 정권의 언론통제로 눈귀가 막혔던 독자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사실 민주화란 별것인가. 나라가 되어가는 상황을 국민이 상세히 알고 정치인들의 온갖 주장을 다 듣고 판단할 수 있다면 민주화의 반은 이룬 것이 아니겠는가. 선거유세에 나오는 수많은 정부비판을 가감 없이 전해주는 것만으로도 독자들은 열광했다.212총선 신당돌풍 결과를 보도한 동아일보 가판이 전무후무한 40만부 판매기록을 세운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
1988년, 이상하는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돼 언론계를 떠났다. 그를 아는 후배 동료들은 모두 경악했다. 평생 외길, 기자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믿었고 동아일보의 주춧돌이 될 것을 의심치 않던 사람들이 더욱 그랬다. 후일 그가 집요하고 협박에 가까운 강요로 여당 국회의원에 ‘징발’된 사실을 알았지만 사람들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국회의원은 한 기, 4년으로 끝내고 언론재단 이사장과 무등일보 회장을 역임했다. 동아일보를 떠나서도 그의 마음은 항상 광화문 동아일보 주변을 맴돌았다. 2005년 4월 타계하기 얼마 전까지 그는 광화문에서 후배들을 만나 술을 마시고‘기자 정신’과‘동아 정신’을 설파하곤 했다.

(민병욱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李相河’, 한국언론인물사화 제7권, 2010)
 
 

 

[隨想] 時局과 賢問愚答

올해 正月 초하루 레이건 미국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은 각각 상대방 국민에게 平和를 위한 新年 메시지를 보냈다. 美蘇 두 頂上의 메시지는 워싱턴과 모스크바에서 T V와 라디오로 보도되었으며 이들 兩極의 지도자는 세계평화에 대한 염원을 간곡하게 피력하면서 1986년을 「평화의해」로 만들자고 호소했다.
世界 東西 양 진영을 실제로 이끄는 미·소 두 頂上의 이같은 平和 강조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의 곳곳에서 아직도 분쟁은 계속되고 테러와 폭력이 난무하고 전쟁상태가 계속 되는 곳이 많다.
세계평화를 강조하는 사람이 어찌 레이건、고르바초프 뿐이었던가. UN 총회에 참가하는 각 나라의 지도자들 모두가 세계평화、전쟁없는 지구촌을 부르짖어 왔다. 그래놓고 돌아가서는 자국이익을 앞세워 평화를 외면하기 일쑤였다.
그러고보면 이들이 외쳐 대는「平和」선언은 결국「전쟁」「분쟁」「분규」「폭력」「갈등」이 실재하고 있음에 대한 반증일 뿐인 것이다.
우리 憲政史에서 「民主」 란 말을 앞세우지 않은 정치집단이나 정치인은 없었던 것 같다. 明滅해 온 정치집단마다 민주주의의 실현을 표방해 왔다.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야당을 탄압하면서 장기집권을 꾀해 온 집권층도 언제 어디서나『이땅의 민주주의를 위해』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정치인들은 모두가 민주선봉이요 민주제단에 몸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각오였었다. 민주장정은 오늘도 이땅에서 계속되고 있다. 야당은 民主化만이 살 길이다면서 민주화를 위한 場外투쟁을 불사한다. .여당도  民主化야말로 우리만이 이룰 수 있다고 자부한다.  야당의 傳家實刀처럼 되어 있던「民主化」를 여당도 어림없다는 둣 같이 젊어지고 나섰다. .
그렇게 반갑고 회망적일 수가 없다. .
與野가 민주화에 동참했으니 그 이상 더 다행스러움이 있겠는가. 다만 한두 가지 걸리는 대목은 있다.
이 땅 에「民主化」를 이룩하겠다는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자기들 스스로는 民主人이 되지 못했고 自黨내의 민주화를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與黨은 그 독특한 생리상 전통적으로 下向式이다. 이따금 黨內 민주주의가 환기되지만 그것은 소리에 그치고 만다. 중요한 고비마다 一絲不亂이 강조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野黨도 할말은 없는 것이다. 按配라는 명분아래 파벌정치를 계속해 오고 있다.
또 하나 국민의 지지를 내세워 민주화 실현을 서로 先占 독점하려고만 드는 것이다. 서로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분명 이땅의 국민은 한겨레 아닌가.
民主 정당의 내부에 비민주적 요소가 많고 우리 아니면 안된다는 독재적 발상에 가둑차 있어서는 民主北의 길이 순탄치 못할 것 같아 걱정이다.
허긴 남의 걱정을 하고만 있을 수도 없다. 민주화의 길잡이라는 언론자유의 현상은 어떤가.

얼마전 대학생 몇명이 언론기본법에 대한 세미나 자료 준비를 위해서라며 찾아왔다. 賢問愚答은 이렇게 되었다. 

– 언론기본법에 의해 언론이 영향 받고 있다는데. . ..
『나는 언기법을 의식하면서 신문을 만들고있지 않다. 실제로 언기법이 신문제작에 발동된 사례는 없다.  그렇다고 언기법이 좋은 법이란 이야기는 아니다』
– 그렇다면 언론에 대한 영향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

「언론자유가 있다」고 대답하면 세계평화를 주장하는 국제정치인이나 民主化를 부르짖는 국내 정치인과 같이 앵무새가 될 것 같고 「언론이 活性化되지 못하고 있다」고 하려니 내 자신이 부끄럽고 말이 길어질 것 같아 『리포트나 열심히 쓰고 혹 시간이 있으면 저녁 때 술이나 한잔 사겠다』며 서둘러 그 학생들을 돌려 보내고 말았다

(이상하 동아일보 부국장 겸 정치부장, ‘隨想- 時局과 賢問愚答’, 신문과방송, 1986년 6월호)

 

 

[명복을 빕니다] 이상하 前 국회의원 별세

13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상하(李相河·사진) 전 동아일보 편집부국장이 28일 오후 별세했다. 향년 68세.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광주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이 전 부국장은 1964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굴곡 많은 현대사의 현장을 지켰다.

‘영원한 사회부장’으로 불릴 만큼 1960, 70년대 사건 사고의 현장엔 항상 그가 있었다. 특히 1970년 3월 제3공화국 고위층의 도덕적 치부를 드러낸 ‘한강변 정인숙(鄭仁淑) 여인 살해 사건’ 취재 과정은 언론계의 전설로 남아 있다.

시대의 아픔엔 ‘펜’으로 저항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가 시위 관련 보도를 통제하자 사회부장이던 그는 “직접 취재하지 못한 상태에서 보도자료만으로 기사를 쓸 수 없다”며 보도자료 내용을 싣지 않아 논란이 일었다.

1984년 그가 정치부장을 맡은 것도 당시 언론계에선 화제였다. 정치부 기자의 경력이 전혀 없는 사회부 출신이 정치부장을 맡은 것은 ‘파격(破格)’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19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정치면의 대변신을 시도했다. 대정부 비판이 터져 나온 유세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3, 4개 면에 펼쳐 신민당 돌풍의 숨은 주역은 동아일보 정치면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는 1988년 13대 총선 때 집권 민정당의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정치권을 떠난 뒤 한국프레스센터 이사장과 무등일보 회장을 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동분 씨와 2녀.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은 5월 2일 오전 7시.

(동아일보 2005년 4월 29일 A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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