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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동아일보 사람들- 이상철

Posted by 신이 On 12월 - 24 - 2018

 

이상철(李相喆, 1893~1979)은 충남 청양 출신으로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 벽초 홍명희의 천거를 받아 1924년 5월부터 8월까지 사회부 기자로 일했다. 이후 조선일보 정치부장, 매일신보 정치부장을 역임했다. 2, 5, 6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1960년 체신부장관, 내무부장관을 역임했고 1965년 6개 국회에서 국회부의장을 맡았다.

1924년 신입기자 시절 이상철의 회고 :

내가 동아일보에 있었던 기간이 4개월밖에 되지 않는데다가 사회도 비교적 평온해서 특기할만한 중대사건은 없었다. 나의 개인적인 취재활동도 별로 특기할만한 일이 없었다. 당시 신문은 4면 평판이었고 석간뿐이었으며 마감 시간은 하오 3시였으니까 상오 9시쯤 출입처로 나갔다가 하오 1시에 사(社)에 들어와서 기사를 쓰는 일이 매일 되풀이 되었을 뿐이다. 다만 지금 기자와 다른 것은 동아일보 기자라고 하면 언론인으로 대접받기 보다도 오히려 대일 항일지사(對日 抗日志士)로서 사회의 존경을 받아왔다는 점이다. 우리는 또 이것을 크게 자부하면서 긍지를 가지고 독립운동가의 정신으로 일을 하였었다. 그래서 출입처에 나가면 일본의 조일신문(朝日新聞)이나 매일신문(每日新聞) 특파원들이 출입처 간부보다도 오히려 우리를 ‘소스’로 상대하여 자료교환을 하였으며 우리도 그들에게서 기사자료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 민족운동의 정당성을 그들에게 설명하였으며, 그들은 일본의 입장을 우리에게 설명하였다.
-출처: 東友 제10호(1964년 3월) ‘舊友 회고실’

 

이상철(李相喆) (청양, 1893~ ) ▲ 1924. 5 기자, 1924. 8 퇴사. 〔국회부의장〕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구우(舊友)회고실] 내가 있던 시절  

내가 동아일보사의 기자로서 첫발을 디딘 것이 지금으로부터 40여년전 어느 봄날인 것으로 기억된다. 약4개월동안 역려과객(歷旅過客)으로 잠시 머물려 있었고, 오래 전일이라 입사하고 퇴사한 날짜를 확실히 말할 수는 없으나, 내가 동아일보에 들어간 것을 축하하여 고모님이 ‘곤사지’ 양복 한 벌을 맞추어준 일이 아직도 머리에 생생한 것을 참고해보면, 그 계절이 봄철인 것은 틀림없다. 내가 기자생활을 시작할 무렵은 마침 3.1독립만세사건이 일어난뒤 5.6년이 지난 때였다. 일제의 노예정책(奴隸政策)에 항쟁하여 민족의 울분을 터뜨린 만세운동이 전국을 휩쓸어간 뒤라, 겉으로는 폭풍이 지나간 직후처럼 고요한 상태에 있었다. 그안에는 별로 특기할만한 대사건의 발생은 없었다. 이 시기는 민족운동이 내밀히 조직화 되어간 시기였다. 3.1독립만세사건 이후 제등(齋藤)총독이 소위 문화정책(文化政策)을 실시한다고 해서 친일지로 조선일보의 발간을 허가했고, 민족지로서 동아일보의 발행을 허가했었다. 민족지로서 동아일보를 허가한 것은 불길처럼 타오르는 민족운동의 대세를 강압책으로는 꺾을수 없다는 판단아래, 일시적 무마책을 쓴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당시 총독부기관지로서 매일신보가 있었고 조선일보도 대정친목회가 경영하는 친일지였으며, 동아일보만이 민족진영을 지도하는 철저한 민족지였다. 조선일보가 민족지로서 새 출발을 하게 된 것은 조선일보가 경영난에 빠지게 되자, 동아일보에서 퇴진한 이상협, 민태원 등 신문인과 신석우 백관수 조설현 등 자본가가 합작하여 조선일보를 매수해서 이상재 씨를 사장으로 모신 뒤부터의 일이었다. 내가 동아일보에 입사하게 된 동기는 당시 뜻있는 젊은 청녀들이 그러했듯이 나도 배앗긴 조국을 되찾는 민족독립운동에 내 젊은 정열을 바치기 위해서였다. 나의 이러한 희망을 달성시킨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당시 동아일보의 사내파쟁(社內派爭)이 정비되는 과정에서 편집국장 벽초 홍명희 씨가 나를 기자로 천거한 일이었다. 그때 동아일보 사내파쟁이란 마치 정당파쟁과도 비슷한 점이 있었는데 사장 고하 송진우씨계와 고하를 배척하는 하몽 이상협, 우보 민태원, 석송 김형원 등 언론계 선배들 사리에 알력이 생겨서 결국 인촌 김성수 씨는 그 조절을 이루지 못하고 형식상 양파를 다 내보내고 새로 진용을 짰던 것이다. 그러나 고하는 실질적으로 후퇴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내가 입사할 때는 사장에 남강 이승훈 선생, 편집국장엔 홍명희 씨가 새로운 편집진용을 정비하고 있었다. 어쨌든 나의 사회진출의 제1보가 기자생활이었고, 이 기자생활의 제1보가 파쟁 즉 ‘힘’과 ‘힘’의 상쟁(相爭) 과정을 계기로 출발되었다는 것은 거의 반평생을 힘의 투쟁과정인 정치생활에 종사하고 있는 나의 운명과도 관련되어 있었던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나는 그때 사회부에 소속되어 경기도와 경성부를 담당하고 있었다. 사회부장으로는 종석 유광렬 씨가 앉아 있었다.
내가 동아일보에 있었던 기간이 4개월밖에 되지 않는데다가 사회도 비교적 평온해서 특기 할만한 중대사건은 없었다. 그러고 나의 개인적인 취재활동도 별로 특기할만한 일이 없었다. 당시 신문은 4면 평판이었고 석간뿐이었으며 마감 시간은 하오3시였으니까 상오 9시쯤 출입처로 나갔다가 하오 1시에 사(社)에 들어와서 기사를 쓰는 일이 매일 되풀이 되었을뿐이다. 다만 지금 기자와 다른 것은 동아일보 기자라고 하면 언론인으로 대접받기 보다도 오히려 대일 항일지사(對日抗日志士)로서 사회의 존경을 받아왔다는 점이다. 우리는 또 이것을 크게 자부하면서 긍지를 가지고 독립운동가의 정신으로 일을 하였었다. 그래서 출입처에 나가면 일본의 조일신문(朝日新聞)이나 매일신문(每日新聞) 특파원들이 이 출입처 간부보다도 오히려 우리를 ‘소스’로 상대하여 자료교환을 하였으며 우리고 그들에게서 기사자료를 손쉽게 얻을수 있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 민족운동의 정당성을 그들에게 설명하였으며, 그들은 일본의 입장을 우리에게 설명하였다.
한편 그 당시 신문사 사정은 지금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그때는 각 신문사가 기업체로서의 경쟁의식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편집국 구조도 편집부가 없었고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정리부(교정), 지방부의 5부가 있었고 사회부장이 편집을 담당하고 있었다. 각부에 5,6명씩 전편집국원이 20명 정도였으며, 정치부는 외신 번역이나 하고, 경제부는 명동시장에 가는 것이 일이었고, 사회부가 취재활동의 핵심이 되어 있었다. 나의 사회부 기자시절에 잊혀지지 않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사회부장 유광렬 씨가 편집을 하면서 언제나 종이를 입에 물고 뜯어먹는 버릇이 있어 우리는 이것을 보고, 우스워했던 것이다. 지금도 이것을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말하자면 지금에 비해서 그때에 편집국은 매우 한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나는 유광렬 씨와 우러봉 한기악 씨와 얼려서 약주를 나누기도 했다. 또 한가지 기억에 남은 것은 당시 동아일보 기자들은 연말 연초에 지사(知事)나 부윤이 주는 소위 세찬을 절대로 받지 않은 것이다. 지금 우리는 초스피드 시대에 살고 있으며 신문은 완전 기업화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신문이 여전히 사회의 목탁이라는 본질을 지니고 있는 한, 지난날 인력거시대에 겪은 우리들의 기자생활에 비친 정신자세도 적은 참고는 될성 싶다. (국회의원)

(이상철, ‘舊友회고실- 내가 있던 시절’, 동우(東友), 1964년 3월 23일)

 

 

전(前) 국회부의장(國會副議長) 이상철(李相喆)씨 별세(別世)

이상철(李相喆) 전 국회부의장이 27일 새벽5시 서울 은평구 응암동 81의130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86세.
李 옹은 해방전 언론인을 지낸 후 2대 의원(青陽)으로 정계에 진출했으며 4·19이후의 민주당(民主黨) 내각때 체신 내무장관을 역임했고 6대 국회에서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유족으 로는 미망인 김성희(金性姬) 여사(64)와 1남 1녀가 있다. 발인 29일 오전, 장지는 충남 대덕군 진잠면 병촌리 선영. 

(동아일보 1979년 11월 27일 7면)

 

 

石雲 李相喆

▲ 1898년 1월 10일(음력) 충남 공주군 사곡면 선학동에서 이보우의 2남으로 출생
▲ 1979년 11월 27일  서울 은평구 응암동 81-130 자택에서 별세
▲ 1909년 청양군 주사
▲ 22년 일본 明治大學 專門部 법과 졸업
▲ 24년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조선일보 정치부장
▲ 32년 매일신보 정치부장
▲ 38년 매일신보 취체역 영업국장
▲ 47년 자유신문 부사장
▲ 50년~65년가지 2,5,6대 민의원(청양)
▲ 60년 체신부장관, 내무부 장관
▲ 65년 국회부의장

□ 지방관리 10년 끝에 일본 유학

석운 이상철은 1898년 음력 1월 10일 충남에서 선비이자 부농인 이보우의 2남으로 태어났다. 이날 그의 모친은 아들 둘을 연달아 낳았는데 나중에 난 그는 2남이 되고, 먼저 태어난 형(李相珏)은 장남이 된 쌍둥이었다.
그는 다섯 살이 되자 형과 더불어 한학공부에 들어가고, 열두살이 되자 신학문 공부를 위해 부친이 창설한 청무학교에 들어가지만 이때부터 형과는 차별해서 교육되었다. 2남 이하에게는 신학문을 시키지만 장자에게만은 천박하고 그 장래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신학문을 시킬수 없다는 것이 부친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3세때네 두 살 위인 부인과 결혼을 하지만, 14세가 되자 한성에 가서 보다 나은 공부를 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어머니의 장롱에서 50원을 훔쳐 무작정 상경을 결행하게 된다. 권농동 고모댁에 숙소를 정한 그는 청진동에 있던 흥화학교(閔忠正公 설립)에 입학한다. 이 무렵 그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법학전수학교로 진학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비장한 결심을 보이기 위해 상투까지 깍아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비송금이 끊어지는데다가 부모의 설득이 워낙 끈질겨서 이듬해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는 청무학교를 졸업했다. 이사이 그의 부친은 그를 청양군청 주사로 취직시키기 위해 힘쓰고 있었는데, 청양군수로 하여금 공주에 있던 관찰부에 군 주사시험 응시자로 추천케 하여 시험을 보게 한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1909년 17세의 나이로 구한말의 청양군청 주사로 근무하게 되는데 다음해인 10년은 경술국치(庚戌國恥)의 해였고 주사명칭도 판임관으로 바뀌었을 뿐 그는 별다른 변화를 기도하지 않았다.
청양군에서 5년을 근무하자 일자리를 옮겨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 이웃 고을인 보령군 주사로 전근을 했고, 23세가 되자 아예 멀리 가보고 싶어 함남 풍산군, 정평군으로 옮겨갔으며, 3.1운동은 정평에서 맞이했다. 지방관리생활 10년이 되자 그는 기어이 고향을 떠난다. 당시 금융조합이 중심이 되어 일본관광단 모집이 추진되고 있는 사실을 알아낸 그는 관광단 10여명 속에 끼어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여행에 나서는데 관광보다는 일본유학의 가능성 탐색이 주목적이었다. 오사카, 교토를 거쳐 도쿄에 도착한 그는 간다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을 찾아 김낙수 간사와 청산학원 전문부에 다닌다는 윤창석 등을 만나 『돈 없이도 유학하고 잇는 동교청년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동경에 눌러앉기로 결심한다. 기독교청년회관 기숙사에 자리를 정한 그는 3년제인 명치대학(明治大學) 전문부법과에 입학하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20년의 일. 처음 기숙사에서는 나중에 조선일보 주필을 지낸 서춘과 한방을 썼고 김준연, 김도연, 백관수, 박석윤, 유억겸, 원효섭, 변희용, 박순천 등과 교유하며 「청양인·지방관리 이상철」에서 「조선인 이상철」로의 터전을 닦는다. 유학생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충남 서산 출신의 민태원과 충북 진천 사람인 박찬희를 정부회장으로 당선시키기도 한다. 나중에 민주당 정부통령 선거대책 위원장, 간사장을 역임한 조정 솜씨를 이때부터 발휘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동경 유학이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졸업은 임박했으나 목표이던 변호사시험 준비는 여의치 못하여 낙방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서른한살이던 22년 겨울, 그는 졸업장만 안고 귀향하면서 이듬해에는 기어이 변호사시험을 다시 치르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으나 23년 9월 1일의 관동대지진은 그 기도를 좌절시켰다. 동경에 남겨 놓았던 책이 모두 불타고, 동경의 분위기가 험악해서 다시 건너갈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때늦은 기자생활, 26년간 언론계 몸담아

이래서 부득불 무위도식하면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던 그에게 신문기자 되기를 권유하는 사람이 있었다. 동경유학을 진작 마치고 돌아와 호서은행 천안지점장으로 있으면서 동아일보 취체역도 겸하고 있던 성원경 씨가 그 사람이었다. 결국 그는 성원경의 주선으로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언론인으로 변신하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이미 서른두살이었다. 이 무렵 동아일보는 이른바 석도원사건을 계기로 사장 송진우와 상무겸 편집국장 이상협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어 이상협과 신구범 전무, 홍증식 영업국장, 김동성 조사부장, 김형원 지방부장, 민태원 정치부장, 김양수 논설반장 등이 대거 퇴사하고, 새 사장에 이승훈이 취임한 직후 였다. 당시 편집국 전 기자수는 15명 남짓했고, 사회부에는 6~7명의 기자가 있었는데, 활기있기는 경찰출입기자들이었고, 경기도청과 경성부청을 맡은 그는 재미없는 행정기사나 긁적이며 무료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초봉은 50원이었다 하며 그밖에 외근수당 20원이 붙어 70원을 받았는데 하숙비가 고급이라야 30원이었으니 생활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4개월만에 사표를 던지고 사표를 던지고 나온다.그러다가 우보 민태원의 주선으로 24년 10월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가 되는데 앞서도 기록한바 있지만 우보와는 동경 유학시절부터 막역하게 지냈던 사이인데다가 동아일보를 그만둔 민태원은 그때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영전되어 있었다. 정치부장은 우보가 겸하고 있었는데 정치부장의 하는 일은 조선총독부에 출입하면서 기사관계로 회사에 문제가 생기면 이를 해명하여 무마하거나 신문담당자인 경무국도서과 직원과 담판을 벌이는 것이었다.

(…)

조선일보를 쫓겨난뒤 4~5개월 놀고 있던 그는 역시 조선일보를 물러나와 중외일보 창간을 준비중이던 이상협의 호출을 받아 그 신문 판매부장이 된다. 그러나 중외일보는 팔리지가 않아 1년도 채 안된 27년 11월게 사직하고 이때부터 그의 생애중 가장 기나긴 5년여를 실직자로 헤메는 암흑기를 맞이한다.
나이 40세에 이른 32년 간신히 매일신보 정치부장 자리를 얻어 언론에 복귀하고, 9년 뒤는 21년 봄 취체역 영업국장을 미지막으로 「매신」을 떠났으며, 강원도 광산연맹 전무이사 자리를 얻어 고난의 시절을 연명하다가 춘천에서 8.15해방을 맞이한다. 이때 그의 나이 53세.
잠시 동안 미군정으로부터 적산(敵産)인 경성일보 · 매일신보 재산관리인 자리를 맡기도 하고 해공 신익희가 사장으로 있던 자유신문 부사장을 맡기도 했으나 해방은 그에게 있어 제3의 인생항로를 설계하는 계기가 됐으며, 지방관리 10년, 일본유학 3년, 언론인생활 26년에 이은 정계생활 18년이야말로 그의 행정경험, 언론인 경력이 총집결된 「지모가(智謀家」 「조정자」「대안창출자」로서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한 새로운 세계였다.

□ 청빈한 정치철학, 3선 거친 정계중진

그는 제헌국회이래 6년 국회까지 시종일관 향리인 충남 청양에서 계속 입후보하여 세 번 낙선하고 2대, 5eom 6대의 세차례 당선했다. 현역 국회의원으로 잇을 대나 원외 정치인으로 머물렀을 때나 그는 언제나 실천가능하고 수용가능한 타협안을 모색하는 현실정치가의 노선을 추구했으며 특히 이합집산을 거듭해온 야당가의 중요 결정의 배후조정자였다.
4.19가 터지고 민주당이 집권하자 체신부장관, 내무부장관, 여당의 간사장 등을 역임했지만 표면에 나서지 않는 기간에도 언제나 각종 당조직과 당대회의 기획조정자였고 조각명단의 전형위원이었다. 구파의 유진산을 상대하는 신파 대표로 그의 위치는 확고부동했으며 그러면서도 권모술수보다는 원리원칙을 중시하고 사태의 장래를 정확히 전망, 투시하는 형안의 소유자였다.
그는 돈을 몰랐다. 언제나 선거 빚에 쪼들리었으나 설사 돈을 만들 수 있는 이권이 그의 앞을 지나가도 그는 이를 무시했다. 5.16이 터져 그가 군수사기관에 구속되어 조사를 받을때도 담당수사관은 『정말 말쑥하십니다』 아무리 털어봐도 먼지가 없다라는 감탄사로 조사가 종결되었다고 술회했다. 6대 국회때 일어났던 소위 삼분(三分)폭리사건때도 당시의 필두재벌 L씨로부터 사태수습 협조요청과 함께 정치자금 제공의 암시를 받았으나 『돈이라면 나에게는 별 필요가 없다』고 완곡히 거절하는 용기를 발위했다. 현실정치를 하려면 악마의 도움이라도 우선 받고 봐야 할판인데 이것은 정계의 상식으로는 지극히 예외적인 태도였다. 그의 이러한 깨끗한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은 L씨는 나중에 이상철의 세 손자들을 모두 특채하여 이사까지 승진시킨 사실을 아는 이는 알고 있다.
그는 정치부 기자이던 필자를 좋아해서 은퇴후에도 수시로 불러 훈도하기를 좋아했다. 정치를 하려면 부득불 남의 돈도 받아야 하는데 그때마다 생선 먹듯이 해야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생선은 상하기가 쉬우므로 첫째 배탈이 나지 않도록, 상했는가 아닌가를 살펴야하고 다음으로 가시에 찔리면 고생을 하므로, 가시가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석운의 이 말을 나중에 어떤 실업인에게 전했더니 『한가지 더 조심할 것이 있다. 그것은 낙씨바늘이 숨겨져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하며 웃은 일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정치판의 돈이란 원래 깨끗한 돈이 없는 법인데 이토록 조심하고서야 어찌 남의 돈을 받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는 파벌정치, 숫자의 정치가 판을 치는 야당 정치인이면서도 표에, 인기에 아부하지 않는 고고한 정치인이었다. 후배의원들이, 원외당원들이 그에게 인사를 하려해도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이 접근하면 일부러 먼 산을 쳐다 보던 의연한 태도의 정치인이었다. 청탁을 병탄해야 하는 야당 정치인으로서는 취하기 어려운 독특한 행위양식이었다.
그는 18년을 정계에서 활동하다가 은퇴한후 10여년을 조용히 소일하다가 79년 11월 27일 향년 86세로 장서했다. 묘지는 장손 재덕(在德)이 경작하던 과수원 한역, 충남 대덕군 진잠면 병촌리.
생각하면 그는 50세 후반부터의 정계생활에도 불구하고 26년간의 언론계 생활을 합쳐 50여년을 언론인으로 일관했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언론인이란 언론사에 자리를 잡고 주로 시사에 관한 보도와 논평을 업으로 삼는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국회를 일컬어 입법부라고도 하지만 최대의 「언론의 광장」, 면책특권까지 부여된 「언론기관」이라는 견해가 있음을 필자는 유의한다. 그렇게 본다면 이상철은 사심없이 정론을 펼치고 이를 실천하다가 간 언론인이라고 하는데 무리가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석운에 관해서는 76년 1월20알자부터 45회에 걸쳐 한국일보에 연재된 「나의 이력서」라는 참고자료가 있음을 부가한다.

(박현열 전 KBS 사장, ‘石雲 李相喆’, 韓國言論人物史話-8.15前篇(上),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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