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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동아일보 사람들- 이상돈

Posted by 신이 On 12월 - 24 - 2018

 

이상돈(李相敦, 1912~1997)은 충남 천안 출신으로 1939년 일본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고하 송진우 선생의 주선으로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가 됐다. 1940년 8월 동아일보 폐간 때까지 근무. 해방후 제헌국회의원을 거쳐 5,6대 국회의원(충남 천안)을 지냈다. 말년에 민주당 고문(1991~1997) 청거장학회 이사장(1995~1997)을 역임했다. 196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

이상돈 전 기자의 회고기 :

일본 경찰당국에서는 8월10일에 동아일보를 강제 폐간한다는 사실을 극비에 붙이고 사원들의 언동을 철저히 감시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방법으로든지 8월10일에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된다는 사실을 미리 지방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은 충동으로 8월8일자 동아일보 ‘應接室’난에다가 나의 필명 天馬公 이름으로 ‘부득이한 사정으로 오는 8월10일부터는 ‘應接室’문을 폐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독자여러분은 미리 양해하기 바란다’는 글을 넣었다. 윤전기 소리가 난지 얼마 안되어서 전화벨 소리가 요란스럽게 나고 사회부장 淋炳哲이 전화를 받자 경무국 도서과에서 ‘應接室’난에 天馬公이 쓴 8월10일 운운 전부를 삭제하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다. 그 귀절마저 삭제하게 되었다. 역사적 운명의 날 8월10일. 경찰서에 구금됐던 중역들도 전부 석방되고 그날 오랜 역사와 피눈물 나는 투쟁을 계속하던 東亞日報는 勢窮力盡하여 終刊號, 廢刊號를 내게 되었다. 4층 강당에서 피눈물 나는 東亞日報 解散式이 있었다. 물론 경찰서형사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東亞日報 중역중에서 白寬洙 前 社長만이 참석하고 다른 중역들은 한 사람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白前社長이 등단하여 말을 못하고 눈물을 흘리자 장내가 울음바다가 되었다. 芹村 先生은 울먹이는 소리로 “아무쪼록 여러분들 건강에 유의하고 死中求生의 심정으로 또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합시다”는 짤막한 인사로 식을 끝냈다. 사원들은 작별의 술잔도 나누지 못하고 사방으로 뿔뿔이 헤어졌다.
-출처: 東友 제111호(1979년 7월) ‘동아 그때 그 시절’

 

이상돈(李相敦) (천안, 1912~ ) ▲ 1939. 4 사원(사회부), 1940. 8 폐간.〔민의원의원〕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舊友回顧記] 東亞 그때 그 시절-④ 李相敦

내가 東亞日報 記者가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0年전, 즉 1939년 4월 초라고 생각된다. 40년전 日本治下의 東亞日報 記者生活을 회고해 보면 여러 가지 추억에 남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 한국 新聞硏究院發刊言論秘話篇에 나의 回顧談이 게재된바 있고 또 東亞日報 强制廢刊(1940년)에 얽힌 이모저모 역시 나의 拙著 『鬪爭 20年』에 揭載된 바 있다. 그래서 되도록 重複되지 않는 범위안에서 興味本位로 그리고 斷片的으로 몇가지만 적어 볼까 한다.

우선 내가 東亞日報 기자기 된 경로부터 적어보자. 1938년 겨울, 나는 日本早稻田大學卒業반에 있는 몸으로 겨울방학을 이용해서 歸國한 김에 서울 京城에 가서 仁村 古下 두 先生을 방문하였다. 古下 宋鎭禹 先生을 苑西東 자택으로 방문한 것은 미리 약속한 밤 8時였다. 그때 나는 古下先生 특유의 高談峻論과 政談을 듣고 일개 學生인 나로서의 意見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古下先生은 그 當時 내가 日本東京의 우리 留學生 運動의 中心人物이고 또 早稻田大學 留學生同窓會長을 몇번 歷任한 바 있어 學生운동의 內容에 깊은 關心을 가지시고 여러모로 問議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의 卒業後 去就問題도 물어보고 東亞日報社에 와서 記者生活을 해 볼 생각은 없느냐고 물어 보는 것이었다. 그날밤은 古下先生과 한방에서 자면서 밤늦게까지 時局啖과 政治啖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破格的으로 다음날 아침 食事까지 대접받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때 비록 總督府當局의 壓力 때문에 古下 先生이 東亞日報社顧問職이 있기는 하지만 역시 實權者이었다. 그날 古下先生과 나와의 사이에는 내가 卒業後에 東亞日報社에 入社하기로 無言의 約束이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날 밤 古下先生과 만난 事實을 秘密로 하고 누구에게도 發說하지 않았다. 當時 「와세다」大學同窓으로 나의 막역한 벗인 金相万君에게도 秘密로 하였다. 그것은 東京警視廳 內鮮課學生담당 主任인 「시부야」(?谷) 刑事가 나의 卒業後 거취에 대하여 끈질기게 內査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抗日民族紙 東亞日報記者로 內定됐다는 사실을 警視廳에서 알게 되면 그들은 달갑게 여지기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당시 學生운동의 中心人物은 거개가 아니라 卒業後 東京을 떠나기 전에 2週日 程度 日本警察에 拘禁한 다음 學生運動의 內容에 對하여 調査를 받고 조선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 慣例가 돼있었다. 그래서 나는 保身策으로 卒業後에 故鄕에 가서 營農이나 하겠다는 말을 流布시켜 위장전술을 썼다. 그리고 1939년 3月말 졸업시험을 끝내고 4月초에 있는 卒業式에도 참석치 않고 비밀리에 東京을 떠났다.

故鄕에 돌아와 며칠 뒤에 서울 苑西洞自宅으로 古下先生을 찾아갔다. 古下先生에게 卒業하고 歸國한 인사를 하고 東亞日報社에서 일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런데 古下先生은 뜻밖에도 지금 기자의 결원도 없고 또 동아일보에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힘들다고 말하며 나의 간청을 冷然히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두말하지 않고 하직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古下先生이 문간까지 나오면서 나의 고향 천안주소를 적어놓고 가라는 것이다. 나는 古下先生과 작별하고 별 볼일도 없고 해서 곧바로 下午 서울을 떠나 천안에서 8km거리에 있는 고향 농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자정쯤 돼서 ‘즉일 상경 송진우’라는 내용의 特使配達 전보가 (속달전보)날아왔다. 나는 불과 몇 시간 전에 古下先生을 만났는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궁금증을 풀길 없었다.

아뭏든 나는 다음날 아침 일찍 천안발 통근열차로 상경하여 곧바로 古下先生을 찾아갔다. 古下先生은 가까스로 편집국 사회부 기자 한자리를 마련해 놓았으니 履歷書를 써가지고 동아일보사로 芹村 白寬洙사장을 찾아가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나 나는 당일로 月俸 60원의 기자발령을 받고 庶務部長 丁來東씨 안내로 각부에 인사를 다녔다.

다음날부터 대망의 東亞日報 記者生活로 들어갔다. 말하자면 하늘의 별따기보다 힘든 東亞日報記者 자리를 비교적 수월하게 그리고 빠르게 따게 된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때 신문사 경영규모도 지금에 비해서 보잘 것 없는데다가 입사시험제도도 없는 때라 東亞記者가 되기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보다 힘든때였다.

몇시간 뒤에 採用發令키로 이미 內定하고서도 일단 거부하는 作風이야말로 古下先生의 인사방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으로 흥미가 있는 사실이다. 古下先生은 회사의 知名人士 또는 언론계 경험자라도 동아일보에 입사하면 校正部에 배치시켜 거의 자존심을 꺾어놓는 것이다.

월봉 60원이면 그당시 白米 6가마 값인데 물가가 안정된 때인지라 초봉치고는 적은편이 아니다. 게다가 外勤手當, 夜勤手當 15원을 더 주었다. 그때 30원만 가지면 일류 요리집(明月館. 食道園 등)에 가서 몇사람이 券番 妓生(黃城, 朝鮮 두 권번이 있었다) 불러놓고 뚱땅거리고 밤새워 놀 수 있었다.

한번 이런일도 있었다. 나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면서 교정부를 거치지 않고 바로 警察署 출입을 하게 되었는데 처음 출입한 곳이 本町署(지금 中部署와 龍山署)였다. 그 당시 京城인구가 48만으로 警察署라야 종로, 서대문, 동대문 五個署에 불과했다. 그런데 8월15일은 일본인들이 ‘中元’이라 해서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 풍습이 있었는데 하루는 半島호텔(지금 롯데호텔자리) 지배인이 나를 좀 만나자고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왔다. 자기 사무실로 좀 와달라는 것이었다. 半島호텔은 일본의 野口財閥의 總師인 野口遵 ‘노구치’가 신축한 호화호텔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半島호텔’이 서울에서 제일 높고 견고한 건물이었다. 여하간 나는 이 半島호텔 지배인이 만나자고 해서 약속한 시간에 그의 사무실로 갔다. 그랬더니 日本人 지배인이 나에게 봉투를 한 개 주면서 약소하지만 ‘御中元’ 선물로 받아 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처음 당하는 일이라 주저하고 받지 않으니까 이것은 해마다 8월15일에 本町경찰서 출입기자에게 조금씩 주는 촌지이니 아무 염려말고 받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방아가지고 신문사에 돌아와서 봉투를 펴보니 50원짜리 小切手(保手)가 들어 있지 않는가. 나는 때마침 신문사에 나오신 古下先生에게 그 사실을 보고, 상의하였다. 古下先生은 “상관없어 받아 둬. 다음에 그 호텔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나면 추호도 사정두지 말고 후려갈기면돼. 이군 동료들과의 술값 생겼네 그려”하며 웃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한달 월급이 60원인데 50원이라는 돈이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에 나는 평소부터 의기투합한 사회부 林炳哲, 梁在厦, 金正實, 郭福山, 金根榮 등을 무교동 ‘雅郞宙’ 요정에 초대하고 기생을 불러 술 따르게 하고 노래 부르며 밤새워 마시고 질탕 놀았다. 그러나 계산서는 40원 밖에 안 나왔다. 병아리 기자인 내가 半島호텔 돈으로 선배들에게 한턱내고 뽐내 본 것이다.

또 한가지 웃지 못할 이야기 한 토막. 내가 동아일보기자가 된지 몇 달 뒤에 梁孝孫군이 동아일보기자가 되었다.

梁君은 韓末 大韓每日新報 주필로 ‘보국언론’의 대원로인 雲岡 梁起鐸 선생의 영식이다.

평소부터 잘 아는 친구인데 무척 호인이고 미남인 梁군은 그 당시 조선에서 갑부이고 광산왕인 崔昌學씨 집(前 京橋莊, 현재 고려병원자리)가정교사로 있다가 崔씨의 따님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때 崔씨의 친일성향의 사회적 지위와 사업관계로 결혼식도 비공개로 구식으로 하였다. 그래서 사내에서 서로 눈치만 보고 수군대기만하고 누구 한사람 한턱하라는 말을 못하였다.

때마침 나는 그와 단둘이 만나는 자리에서 “자네는 조선 제일의 갑부의 따님과 결혼하고서 술한잔도 안낼 셈인가?”하고 한대 쏘았다. 그는 “미안하네. 자네가 발기인이 돼서 적당한 때와 장소를 정해 적당한 규모로 사원들과 술을 나누도록 수고해주기 바라네”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그방면에 경험이 있는 몇몇 선배사원들과 상의하여 지금 인사동 골목 입구 예총화랑 자리에 있던 ‘天香園’에서 편집국, 영업국 전원을 초청하여 대규모의 結婚祝賀宴會를 벌였다. 물론 이름난 기생도 수십명 불러왔다.

조선 제일의 갑부의 사위 梁孝孫군은 연회의 규모가 엄청나게 큰데 놀라면서도 일은 저질러놓은지라 태연자약하게 하루밤을 즐긴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고소를 금치 못한다.

그때의 그 미남호인 梁孝孫군도 6.25동란때 납북되었다. 그 후 그의 생사조차 모른다.

1940년 8월 10일 동아일보 강제폐간 당시의 몇가지 사실을 적어보자.

1940년 봄이라고 기억된다. 그 당시 總督府 출입을 하는 梁在厦 기자로부터 警務局에서 東亞. 朝鮮 두 民間紙를 폐간해 버리고 總督府機關紙 每日新報 하나만 남길 방침인 것 같다는 놀날만한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경무국장이 東亞. 朝鮮 兩사장을 불러 전시하 용지난 기타 국책에 순응하는 뜻에서 자진폐간하라는 권고를 하게 되자 朝鮮日報社長은 그때 순응하겠다는 언질을 주었는데 東亞의 白寬洙 사장만은 즉석에서 단호히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총독 南次郞은 악명 높은 무단군벌 통치를 자행하는 판이라 역사와 전통을 견지하고 있는 민족의 대변지 東亞日報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민간지 壓殺의 총독부 방침이 확고한 것을 간파한 古下先生은 1940년 4월 극비밀리에 日本 東京에 건너가서 당시 동아일보 동경지국장 金勝文씨 안내로 정계 요로의 知人, 특히 日本 귀족원위원과 중의원의원을 만나 조선총독부의 民間紙 말살 정책을 시정해 줄 것을 진정하고 건의했다. 이것이 日本國會貴族院 衆議院에서 문제가 되었다.

이쯤 사태가 확대되고 악화되자 조선총독 南次郞이 노발대발하였다.

古下先生은 동경에서 돌아오자마자 京城驛에서 대기하고 있던 종로경찰서 형사에게 연행구속 되었다. 그러나 동아일보 발행인인 白寬洙 사장은 자진폐간 권고를 완강하게 거부할 뿐만 아니라 東亞日報社員 일동은 단결해서 신문의 제작과 발행에 한층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일이 이쯤되고 보니 그들은 설득과 종용의 소극적 방법으로서는 도저히 東亞日報를 때려잡지 못할 것을 깨닫고 가장 지능적이고도 교활한 방법으로 東亞日報를 압살하려고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여기서 걸려든 것이 明月館 요리집에서 요리상에까는 파지(新聞破紙)사건이다.

明月館에서 저녁을 먹게 된 총독부 警務局 관리들이 우연히 요리상에 깐 갱지 파지를 보고 (그때는 그것도 귀한 때) 明月館 지배인을 불러 그 파지를 어디서 샀느냐고 묻자 그 지배인은 솔직하고 東亞日報에서 샀다고 말하였다. 그들 日人 관리는 꼬치꼬치 여러가지를 묻고 회심의 미소를 띠고 그 다음날 新聞用紙를 부당하게 유용하고 物價統制令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東亞日報社 경리부장 金東燮, 盧謚煥을 구속하고 며칠 후 朴正燁 상무와 東亞日報 東京支局長 金勝文을 계속 구속하였다. 그리고 국가총동원법을 적용해서 엄중처단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白寬洙 社長은 날마다 흰 모시(紵布) 고이적삼과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신문사에 나와서 신문발행을 진두지휘하였다. 언제 어디서 형사에게 연행 구속될지 모르는 만큼 모시 고이 적삼을 입고 편집국에 들러 사원들을 격려 고무하고 경찰서에 끌려갈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조금도 겁먹지 않고 위축되지 않고 泰山巨木같은 풍모로 사원들을 격려하였다. 그러다가 7월 초순께 鍾路署형사 두명(일본인 1명, 조선인 1명)이 와서 동행을 요구하자 白社長은 편집국에 들러 “사원 여러분! 동아일보 발행인은 현재도 앞으로도 나 白寬洙요.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우리 민족의 대변지 동아일보 自盡廢刊屆에 내 손으로 서명 날인하지 않을 것이오. 따라서 동아일보는 죽지 않을 것이오. 사원 여러분은 용기를 잃지말고 신문제작과 발행에 힘써 주기 바라오”라는 간단한 인사를 남기고 형사와 함께 신문사를 나갔다. 이것으로 동아일보사장 이하 중역 전부가 구속되었다. 그러나 신문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발행되었다. 사원들도 배전이 일을 하였다.

그런데 8월초에 뜻밖에도 동아일보의 발행인 명의가 구속수감중인 林正燁 상무로 변경 표시되지 않았는가. 사원 일동은 깜짝 놀라 내용을 알아보니 白寬洙사장이 끝까지 自盡廢刊屆에 署名捺印하기를 거부하자 경찰의 강압으로 鍾路警察署內에서 구속중인 동아일보 중역 이사회의를 소집케 하고 사장 겸 발행인을 林正燁씨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林씨는 8월10일에 自盡廢刊하겠다고 自筆署名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사원들은 크게 흥분하였다. 영업국의 사원 鄭均徹은 술을 마시고 사내에 들어와서 줏대없는 무력한 중역들을 성토하기 시작하였다. 鍾路警察署 형사들이 달려와서 그를 연행해 갔다. 그리고 경찰은 그날부터 사원들을 미행하고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경찰당국에서는 8월10일에 東亞日報를 强制廢刊한다는 사실을 극비에 붙이고 사원들의 언동을 철처히 감시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방법으로든지 8월10일에 동아일보가 强制廢刊된다는 사실을 미리 지방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은 충동으로 8월8일자 동아일보 ‘應接室’난에다가 나의 필명 天馬公 이름으로 ‘부득이한 사정으로 오는 8월10일부터는 ‘應接室’문을 폐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독자여러분은 미리 양해하기 바란다’는 글을 넣었다. 윤전기 소리가 난지 얼마 안되어서 전화벨 소리가 요란스럽게 나고 사회부장 淋炳哲이 전화를 받자 警務局 圖書課에서 ‘應接室’난에 天馬公이 쓴 8월10일 운운 전부를 삭제하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다. 그 귀절마저 삭제하게 되었다.

역사적 운명의 날 8월10일. 경찰서에 구금됐던 중역들도 전부 석방되고 그날 오랜 역사와 피눈물 나는 투쟁을 계속하던 東亞日報는 勢窮力盡하여 終刊號, 廢刊號를 내게 되었다.

4층 강당에서 피눈물 나는 東亞日報 解散式이 있었다. 물론 경찰서형사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東亞日報 중역중에서 白寬洙 前 社長만이 참석하고 다른 중역들은 한 사람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白前社長이 등단하여 말을 못하고 눈물을 흘리자 장내가 울음바다가 되었다. 芹村先生은 울먹이는 소리로 “아무쪼록 여러분들 건강에 유의하고 死中求生의 심정으로 또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합시다”는 짤막한 인사로 식을 끝냈다.

사원들은 작별의 술잔도 나누지 못하고 사방으로 뿔뿔이 헤어졌다.

그때 동아일보 사원과 종업원들에게는 일본말로 ‘나미다낑’(淚金=눈물나는돈=退職金)으로 2년치 월급이 지급되었다. 1년분은 東亞日報에서, 1년분은 每日新報에서 주는 것이었다.

東亞日報 强制廢刊 당시의 사원들도 지금은 거개가 고인이 되고 혹은 拉北되어 현재 생존자는 손꼽을 정도에 그친다.

후진들에게 부탁할 말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기업화된 언론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겠는가. 다만 지난날 日本 식민지 폭정 아래서도 ‘東亞’는 경영주, 간부사원, 종업원 모두가 사명감과 자부심을 갖고 民族의 表現機關으로서의 東亞의 역사를 빛내고 그 傳統을 살리고 言論의 正統性을 堅持해 왔다는 것을 강조할 뿐이다.

그리고 지금 東亞로서는 지난날의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계승하고 언론의 本領을 固守 발전시켜야 될 것이다. 汚濁한 시류와 제약속에서 자유언론의 기치를 높이들고 사주, 이사, 기자, 종업원 모두가 自由言論의 大道로 힘차게 전진해야 될 때라는 것을 거듭 말하여 둔다.

(이상돈, ‘舊友回顧記- 東亞 그때 그 시절’, 동우(東友), 1979년 8월 31일)

 

 

 

仁村. 古下추천으로 東亞日報社에 入社

내가 東亞日報社記者가 된 것은 1939年 봄、4月이었다. 그때 우리말 新聞은 民間紙「東亞 日報」、「朝鮮日報」와 日本總督府機關紙「每日新報」의 3社뿐이었다. 日本語 新聞으로는 亦是 總督府 機關紙「京城日報」가 있고 「朝鮮新聞」과 「朝鮮每日」이 있고 日本에서 發行하는 「朝日新聞」과 「大阪每日新聞」그리고「讀賣新聞」이 서울(京城)에 支局을 두고 日本語 讀者網을 確保하고 있는 形便이었다.

前述한 바와 같이 우리말 新聞은 民間紙로서 「東亞日報J 와「朝鮮日報」둘 뿐인데다가 新間社의 經營規模가 지금에 比해서 問題가 되지 않으리만큼 零細性을 脫皮하지 못하고 있어서 新聞記者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힘든때이었다。勿論 記者를 公開採用하는 入社試驗制度도 없고 오직 新聞經營主가 嚴格한 人選과 推薦을 해서 採用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의 學歷과 人格과 思想과 文書를 嚴密하게 分析한 然後에 記者로 採用하는 것이었다。

1938 年 가을께로 記憶한다. 그 當時 나는 日本 東京 早稻田大擧 政治經濟學部 三學年 卒業班에 在學中이었는데 早稻田大學 同窓이며 나와 각별히 親交가 있는 學友 金相万君(現東亞日報社長〕이 나를 맞아 『지금 東亞日報社 宋鎭禹先生이 東京帝國호텔에 留하고 계시는데 君을 한번 만나자고 하니 가서 만나보도록 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나는 그해 여름放學에 歸國하여 苑西洞宅에서 古下 宋先生을 맞나 一 時間 동안 時局談을 하고 桂洞 仁村 金性洙先生도 만나뵌 일이 있었을 뿐인데 “古下先生이 東京에 온김에 나룰 만나자고 하니 나는 기쁜마음으로 帝國호텔로 가서古下先生올 만나 뵈었다. 그때 古下先生이 卒業後에 무엇을 하겠느냐고 나에게 묻기에 아직 未定이라고 對答하니까 東亞日報에 入社하여 記者生活을 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卽席에서 本是 記者生活이 나의 所願이니 앞으로 新聞社에 入社토록 힘써 주시기 바란다고 對答하였다. 그해 겨울放學에 歸國해서 苑西洞 古下先生宅을 찾아 人事드리고 다음해 봄에 早稻田大學 政經學部經濟科를 마치고 돌아와서 바로 古下先生의 推薦으로 束亞日策社에 入社하여 社會部記者가 된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東亞日報記者가 된 것은 오로지 仁村先生과 古下先生이 나의 東京留學生時節의 學生運動의 實績과 나의 文筆能力을 認定하시고 推薦한 結果로 比較的 平易하게 記者가 된 것이다.

내가 東亞日報에 記者로 들어간 1939年 當時의 東亞日報 陣容은 社長 芹村 白寬洙先生、顧問 古下 宋鎭禹先生、編輯局次長 高在旭(編輯局長缺員)、政治部長 金章漢(作故)、社會部長林炳哲(作故)、調査部長 崔益翰(越北)、學藝部長 李無影(作故)、地方部長 任鳳淳(作故) 等이 있다. 그런데 그때만해도 植民地 總督政治下인데다가 日本의 中國大陸 侵略戰爭이 한창인 때인지라 新聞社의 政治部는 部長한사람과 記者三人(洪翼漢、吳南基, 金滿周)이 日本同盟通信記事를 우리말로 번역해서 글자 한자 고치지 않고 揭載하는데 不過하여 獨自的 政治記事는 한줄(一行)도 못쓰는 때였다. 따라서 新間의 中樞的 役割은 社會部였다。常時 社會部記者로 梁在厦(拉北)、金正實(作故)、李根泳· 趙中玉· 李康成(以上越北)、郭福山(作故)、金容善· 金容植(運動部) 等 敏腕記者가 있고 學藝部에 異河潤、婦女欄擔當 朴承浩(拉北)、其他 宋志英· 張鉉七(越北)· 梁孝善(拉北) 等이 있어 活躍中이었다.

쌀여넓가마값의 初棒 事件取材論說執筆도

東亞日報社에 入社하면 제아무리 名門大學을 마친 사람이라도 一 應 校正部(整理部에서 一 年間 造版된 初校原稿의 誤宇를 校正整理하는 過程을 거치고난 다음에야 各部暑에 配置하 는것이 慣例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校正部를 거치지 않고 바로 社會部記者로서 本町、西大門、龍山、東大門、鍾路警察署 出入을 시키는 것이었다.大學을 갓나온 병아리 記者이지만 新聞記事를 集約해서 잘 쓴다고 林炳哲 社會部長이 나를 認定해 주었을뿐만 아니라 新間社說도 간혹 썼다。그 當時는 論說委員이 따로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의 時事問題와 事 에 對해서 社說을 쓰는데 高在旭, 崔益翰. 梁在夏가 主로 社說을 썼다. 나는 主로 經濟問題(農業關係、小作爭議問題)를 써서 高在旭 編輯局次長에게 보였더니 社說도 揭載해 주어 틈 틈이經濟問題社說을 執筆하고 當時 日本의 戰時 體制下의 日本食糧問題를 解剖分析한 硏究論文도 發表揭載하여 新進記者로서 實力을 誇示한바 있다.

내가 早稻田大學을 마치고 東亞日報에 入社한때 初偉은 60圓이고 外勤手當과 夜勤手常(그때는 朝夕刊發行)으로 20圓을 받았다. 말하자면 月給 80圓을 받은 셈인데 그때 쌀(曰米) 한가마代金은 拾원 程度였으니까 記者棒給으로서는 적은 額數는 아니었다. 物價指數로 보아 지금 記者捧給보다는 많은 便이다. 그러나 그 當時 記者 特히 民間紙인 東亞日報와 朝鮮日報 記蓉들은 俸給보다도 言論人、記者로서의 矜持와 自尊心을 가지고 살았다. 勿論 日本 總.政治下의 新聞인 만큼 여러가지 統制와 制約이 없지 않았지만 그런 속에서도 智謀를 짜 내서 民族魂을 일깨우고 自主獨立精神을 新聞紙面에 暗示的으로라도 表現시켜보려고 온갖 硏究와 努力을 다하였다. 記奢로서의 自尊心과 自覺心을 가지고 言論의 彈力性을 堅持하고 그날그날의 取材와 編輯을 하는 것이었다. 一種의 志士的 氣慨로 記者生活을 하였다.

그런데 그 當時 日本 總督府의 新聞統制方式은 警務局 圖書課 所管으로 新聞이 印刷 되는대로 第ㅡ 먼저 몇부를 몇部를 納品하면 우리말에 能通한 日本人檢閱官이 新聞을 綿密히 읽어보고 削除할 것은 電話로 削除하라고 命令하고 甚한 것은 押收하여 發買와 配市를 禁止하는 것이다. 그리고 事件의 經重에 따라서 미리 [當分間 記事揭載禁止通告]를 하여 事件眞相의 揭載를 禁止시켰다가 時日이 지난後에 禁止解除를 한다. 그런 擬遇에는 各新聞社에서 自由로 製作報道하고 段數를 制限하거나 內容과 製作에 干涉하는 일은 없다. 獨立運動者가 國內에 潛入하여 檢擧되거나 共産黨事件이 旋露되면 그 關係者들을 全部 檢擧拘速할 때 까지는 記事揭載와 報道를 禁止하지만 그 事件이 ㅡ 段落되어 揭載禁止가 解除되면 記者들이 自由로이 取材하는 것은 勿論이고 新聞製作에 있어서도 編輯者의 自由意思로 大書特筆로 크게 報道하여도 無妨하였다. 따라서 新聞讀者들은 비록 時間은 經過한 後이지만 事件의 全貌와 眞相은 明確하게 알 수 있게 된다. 事件의 眞相을 흐리고 歪曲報道룰 强要當하거나 新聞製作에 干涉을 받는 일은 없었다.

事後檢閱 徹底하나 歪曲報道 强要않아 ,

그리고 重大한 筆禍事件이라든지 日本 皇室에 對한 不敬罪를 犯한 事件以外에는 新聞記者를 警察에 連行하거나 拘束하는 있은 別로 없었다. 共産黨 秘密結社에 加擔했다든지 또는 破廉恥罪에 걸렸다든지하는 外에는 記事 쓴 關係로 記者가 警察暑에 連行되거나 拘束되는 일은없었다. 말하자면 비록 植民地 總督統治下일지라도 言論人、新間記者에게는 어느 程度特權이 保障되어 있었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實例를 한가지만 들어보자. 내가 앞에서 말한대로 서울市內(當時 京城府) 全五個 警察署(本町、龍山、西大門、鍾路、東大門 五個 뿐이었음 )에 出入하는데 東大門著長 日本人이 滿洲에서 勤務하다가 새로 赴任했는데 거만하기 짝이 없는데다가 東大門署 出入記者圃과 不和가 甚해서 事事件件 말썽을 부리는 것이었다。그래서 東大門 幹部들이 進言을 하였는지 東大門 暑長이 出入記者團을 有名한 明月館料理집(鍾路敦義洞)으로 招待하여 한잔 나누면서 被此의 誤解를 풀자는 것으로 나도 그 末席에 參席하였다. 그런데 저녁이 늦도록 主人公인 束大門 署長은 나오지 않고 繁務係長과 高等係主任等幹部만이 나와서 記者團과 어울리게 되었다. 記者團에는 勿論 日本人記者들도 끼였다.

술잔이 오고 가고 술이 거나하게 오르자 記者團에서 是非를 걸기 始作하였다. 都大體 署長이 招待해 놓고 署長의 콧배기도 볼 수 없으니 이럴 수가 있느냐! 記者를 無視해도 類萬不同이지 이련 술은 먹 지않는다고 술상을 차던지고 警察幹部들올 때리고 윽박지르기 始作하였다. 일이 이쯤되고 보니 警察幹部들이 署長에게 緊急連絡해서 及其也에 箸長이 늦게서야 明月館에 와서 늦게 온 事情을 머리를 숙여가며 謝過를 두번 세 번하였다. 그러나 記者들은 署長을 向하여 “건방진 자식! 네가 무엇이기에 그렇게 거만、하냐 ! 네술은 먹지 않겠다!” 等의 暴言과 함께 술병과 재떨이를 마구 던져 場內가 修羅場이 되었다. 事至於此하매 管轄署인 鍾路警察署 파고다公園派出所에서 巡査가 달려오고 鍾路警察署에서 應援部隊가  달려와서 明月館에 參席했던 記者ㅡ行을 連行하였다. 그런데 本著 宿直主柱이 나와 보고 깜짝 놀라면서 술을 過한 모양이니 어서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말하면서 씩 웃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後 月餘後에 東大門著長은 釜山消防署長으로 左遷發令을 받게 되었다.

보람있던 警察取材 對民溢路解決주선

내가 바록 얼마되지 않는 期間일지라도 東亞日報 記者生活을 하는 동안에 記憶에 남는 몇가지 事實만을 적어보기로 하자!

나는 大學올 갓나와 東亞日報社에 入社한 만큼 그 때 未婚총각으로 下宿生活을 했다. 처음에는 三淸洞에 下宿하고 있다가 東亞日報 寫眞部記者 尹弼求氏 紹介로 洗劍亭 밖 高陽郡 恩平面 平倉里 金仁鶴氏宅에 下宿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는 孝子洞終點(지금 靑瓦臺 入口)까 지 電車가 通하고 그곳서부터 平倉里(現 平倉洞)까지는 徒步로 通勤하는데 지금같이 큰길이 있는것도 아니고 彰義門까지만도 우거진 松林속 巫堂집 옆 오솔길로 올라가고 彰義門 고개를 넘어서도, 좁고 울퉁불퉁한 險路를 걸어다니는데 孝子洞 終點에서 約 6km 距離였다. 勿論 밤에는 電氣불도 없는 어두운 길을 六km 걸어가게 되는 것은 苦役이였다. 夜勤하고 밤 11時께 新聞社를 나와 孝子洞 終點까지 와서는 그곳에 있는 保安旅館에서 자는 때가 많았다. 그련데 그때 西大門 金華山事件이라는 것이 터졌다.

그것은 日本이 한창 滿洲를 侵略하고 中國本土 北京까지 쳐들어갈 準戰持인데 누구의 所行인지 金華山꼭대기에다가 騰寫版으로 프린트한 反日 反戰、反帝國主義 삐라를 數千장울 놓아둔 때마침 바람이 세게 불어서 그 삐라가 金華山 및 市街地 一帶로 휘날려 警察에서 그 犯人을 잡으려고 血眼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내가 新聞社에서 平倉里 下宿집으로 돌아가니까 下宿主人 金仁鎬氏가 自己房으 로 나를 데리고 가서 그날 西大門警察署高等係刑事 두사람이 나의房을 샅샅이 수색하고 나의 動靜을 소상히 묻고 가면서 自已네가 왔다갔다는 말을 絶對로 나에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귀띔해 준다. 그러니 각별히 몸조심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소리를 듣고 나는 그들이 金華山삐라事件에 내가 關聯이 있는가를 內査하는 출 알고 苦笑하였다. 그리고 新聞社에서 나와 밤에 親舊들과 목노집에서 술을 나눌 때에 나의 옆좌석에 수상한 人物(刑事)들이 와 있는 것을 나는 눈치 채곤 했다. 그러나 그 事件은 끝내 迷宮으로 들어간 채 8.15解放을 맞았다. 萬一 내가 新聞記者가 아니었으면 삐라事件혐의자로 警察署에 불려가서 調査와 審問을 받았을 것이다。비록 疑心은 나지만 確證을 못잡은 만큼 나를 경찰서로 連行 調査하지 못하였다.

記事保留 要請 거부 五段으로 大書特筆해

 언제인지 時日은 確實치 않은데 新聞社에 出勤하니까 西大門警察署에서 記事거리가 있으니 寫眞記者와 함께 곧 와달라는 電話가 걸려왔다. 나는 白雲善氏(사진記者)를 데리고 西大門警察署로 달려갔다. 署長室로 案內해서 가보니까 웬 女子中學生(지금 高等女學校〕두 사람과 그 學校長(學校名과 校長姓名은 밝히지 않겠다)이 와있고 各新聞社記者와 사진記者도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日本人 署長이 自己옆에 同席한 高等係 主任보고 各新間社에서 다 參席했느냐고 묻고 난 다음에 그 校長보고 무엇인가 說明을 하라고 눈짓을 하니까 私立學校이고 宗敎系統學校인 그 校長(勿論 國民服에 脚祥을 치고 머리도 박박깎은 차림)이 말하기를 “오늘부터 우리學校에서는 三十餘年간 입어오든 在來의 朝鮮式 校服을 버리고 日本 皇國臣民이 되기 爲해서 日本式 校服으로 바꾸어 입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日本式校服을 입은 女學生 二名을 데라고 왔으니 寫眞을 찍어서 新聞에 크게 報道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두 女學生은 멋모르고 (?) 校長에게 끌려서 警察署까지 온데다가 많은 新聞記者와 사진記者가 自己 사진을 찍어 新聞에 내려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오들오들 떨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머리를 숙이고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一稱의 公憤을 禁치 못하였다. 그 校長이 日帝에 阿附하는 그 態度도 못마땅한데다가 남의 집 귀여운 딸을 그 父母의 承諾도 없이 日本式校服을 입혀, 사진을 찍어 新聞에 나게하고 日本化、皇民化敎背에 앞장서려는 그 精神姿勢가 可憎하기 比할데 없어, 당장 호통을 쳐주고 싶었지만 꾹 참고 白雲善사진記者에게 눈짓을 하고 그대로 署長室에서 나와 버렸다。勿論사진도 찍지 않고 取材도안했다. 그 날 夕刊新聞에 總督府 機關紙인 每日新報와 京城日報에 그두 女學生의 日本式校服을 입은 사진과 함께 記事가 났음은 勿論이고 同業民間紙 朝鮮日報에도 그 記事가 났다. 唯獨 東亞日報만은 그 記事를 보이코트해 버렸다. 그 다음날 그 學校長이 나를 만나자고 中間에 아는 다른 新聞社記者를 通해서 交涉해왔지만 나는 끝내 만나지 않고 말았다。

또 한가지. 1939年末께라고 記憶한다. 本町瞥察署에 取材하러 司法係刑事室로 들어가나까 當時 우리朝鮮사람이 經營하는 鍾路에 있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W.百貨店 販賣主任 某氏가 刑事의 取調를 받고 있었다. 그 當時 戰時經濟體制下에 物資가 不足하여 暴利統制 强化하기 爲하여 價格統制令을 實施하고 있어 모든 生必品은 勿論이고 甚至於 路上에서 女子들이 팔고 있는 菜蔬와 果物까지도 公正價格을 反해서 팔면 警察署經濟係에 끝려가서 罰金과 拘留를 當하는 때였다. 그런데 그 百貨店 販賣主任이 取調받고 있는 內容을 옆에서 들으니까 百貨店에서 綿布數百필을 公定販寶價格을 違反해 팔아서 相當額의 不當利得을 取했다는 것이었다。나는 日本人 經濟係主任에게서 대충 記事內容을 메모해 가지고 新聞社로 돌아왔다. 그런데 新聞社 編輯局에 들어서니까 編輯局次長 高在旭氏앞에 그 百貨店 常務C氏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C氏는 前에 東亞日報 編輯局長을 지낸 바 있는 터이라 高在旭氏에게 말해서 本町黎察署에서 取級하고 있는 그 百貨店 販賣主任事件을 新聞에 報道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婦女子들이 머리에 이고 다니며 파는 과일과 生鮮魚物같은 것도 價格을 違反하면 용서 없이 依法取締하는 판국에 大百貨店에서 綿布를 大量販寶하여 不當利得울 取했다면 그것을 一種의 社會惡으로서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 아닌가! 나는 C氏의 請託을 물리치고 記事化해서 社會面에 五段으로 크게 報道하였다. 그 記事는 東亞日報만이 報道하고 다른 新聞에는 一切 報道되지 않았다. 이 事實이 遠因이 된 것은 아니겠지만 後에 東亞日報와 朝鮮日報가 强制廢刊된 後에 職場올 잃은 言論人· 記者들이 實業界로 轉身、就職하는데 前記 百貨店에 東亞日報社員은 한사람도 就職을 못하였다. 同業 民間紙인 朝鮮日報社出身들은 그 百貨店에 여러 사람이 就職한 것으로 記憶하고 있다.

 日帝의 脚本대로 되어간 東亞.朝鮮日報의 폐간

내가 큰 希望과 젊은 情熱을 가지고 記者生活을 하던 東亞日報가 日帝의 斷末魔的 發惡으로 드디어 强制廢刊을 當하게 되었다. 그때의 狀況을 적어보기로 하자.

1940 年 봄. 總督府 出入을 하던 社會部 梁在厦 記者에게서 總督府 當局이 新聞社統合이라는 名目下에 總督府機關紙 每日新報 한社만 남기고 東亞日報와 朝鮮日報는 自進廢刊시킬 方針인 것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社長 白寬洙先生이 總督府警務局長을 만나 自進廢刊하기를 종용받았다는 말과 白社長이 斷乎히 拒絶했다는 말도 들었다, 總督府當局에서는 戰時下에 新聞用紙難과 其他 여러가지 問題로 보아서 우리말 新聞은 每日新報 한社만 남겨두고 東亞日報와 朝鮮日報는 廢刊시키기로 方針을 세워놓고 强制로 廢刊하면 民心울 刺戟시킬 憂慮가 있는만큼 어데까지나 新聞社 自體가 自進해서 廢刊하는 形式을 밟도록 종용하고 說得하기 始作한 것이다.朝鮮日報社長은 總督府의 方針에 順應하겠다고 約束을 하였으나 東亞日報 發行人 白寬洙氏만은 一言之下에 拒否하였을 뿐만 아니라 顧門 宋鎭禹氏가 極秘密裡에 日本東京에 건너가서 政界要路 (日本貴族院과 家議院)에 陳情하여 朝鮮總督의 言論抹殺政策을 是正하도록 運動을 벌여 日本 國會에서 問題가 되었다. 오랜歷史와 傅統밑에 많은 讀者를 確保하고 있는 民族紙 東亞日報를 强制廢刊하려는 總督府 政策은 玄明한 政策이 아니라는 것이 日本 貴族議院(上院에該當) 本會議에서 問題가 되었다. 事至 於此하매 朝鮮總督 陸軍大將 南次郞이 激怒했을 것은 틀림없는 事實이다. 南次郞이의 武斷統治는 其極에 이르렀다. 朝鮮人 志願兵制度와 學徒志願兵制度를 强要하고 所謂 創氏制度까지 强要하는 暴擧를 恣行하다가 及其也에 東亞、朝鮮 두 新聞을 强制로 廢刊 시키는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런 版局에 朝鮮日報는 그들 方針에 順應하는데 唯獨 東亞日報만이 不應할뿐더러 東京에 가서 政治問題를 惹起시키게 되었으니 일은 擴大 一 路로 치닫게 되있다.

1940 年 7月初인가 古下 宋鎭禹先生이 東京에서 돌아오자 京城驛에 待機하고 있던 鍾路馨察署刑事가 鍾路署로 連行、留置시켰다。그러나 新聞發行人 白寬洙 社長은 頑强히 버틸뿐 아니라 記者들도 結東하여 新聞製作에 一 路邁進하는 만큼 그들로서도 說得과 종용의 消極的方法으로 써는 到底히 所期의 目的을 達하기 힘들것으로 깨닫고 知能的 方法으로 東亞日報를 壓殺하려고 덤벼들었다. 이것이 [明月館 破紙事件]이다. 그들대로 사건을 擴大해간 그들은 最後에는 白寬洙社長도 拘束하였다. 七月中旬 白寬洙社長이 鍾路署刑事에게 連行될 때 編輯局에 들러 記者들에게 一場의 訓示를 하였다 “東亞日報 發行人은 나 白寬洙요 내가 廢刊屆에 署名 捺印하지 않는限 東亞日報는 죽지 않을것이니 記者여러분은 勇氣를 잃지 말고 新聞製作과 發行에 힘써 주기 바라오!” 이말을 남기고 白寬洙社長은 泰然한 모습으로 鍾路磐察署로 連行돼갔다. 이렇게 되고보니 東亞日報 重役은 全部 拘束되고 部長級과 記者만이 新聞製作을 맡게돼있다. 그러나 新聞은 平常時와 다름없이 發行되고 있다.

社長이 掠印拒否하자 發行人 바꾸어 廢刊케

그런데 들리는 말에 依하면 白寬洙社長은 留置場안에서도 끝내 東亞日報自進廢刊에 署名捺印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記者와 編輯陣에서도 勇氣를 내서 新聞을 發行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八月^에 東亞日報의 發行人 名義가 白寬洙氏에서 林正燁氏로 바뀌게 되었다. 東亞曰報社員一 同은 깜짝 놀라서 그 內容을 아라보니 다음과 같은 기막힌 事由가 있는 것이다. 總督府 警務국에서 白寬洙社長을 拘束 留置시켜놓고 여러모로 說得과 威脅을 해가며 東亞日報自進廢利屆에 署名掠印할 것을 强要하였지만 白社長이 끝내 不應하므로 鍾路警察署에 拘束收監中인 東亞日報社 重役들로 하여금 警察署內에서 重役會議를 열게하고 그 會議에서 發行人 名義를 林正燁常務로 更新議決함과 同時에 林正燁氏는 卽席에서 1940年 8月 10日에 東亞日報를 自進廢刊하겠다는 覺書에 署名捺印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오랜 歷史와 傅統을 간직하고 日帝에 抗拒하던 民族의 代辯紙 東亞日報는 朝鮮總督陸軍大將이며 惡名높은 日本軍闕南次郞의 暴政下에 完全히 壓殺當하고 이땅에는 新聞없는 暗黑時代가 5年間 계속되었다(南次郞은 終戰後 戰權裁判에서 絞首刑宣告를 받다).

8 月10日. 東亞日報講堂에서 피눈물나는 東亞日報解散式이 擧行되었다.

鍾路警察署에 收監中인 重役과 幹部 全員도 釋放되었다(經理課長 金東燮氏만은 除外코). 東亞日報解散式에는 白前社長만이 參席하고 餘他重役들은 한 사람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工務局從業員들은 輪轉機를 붙들고 소리내어 울고 編輯局社員들은 原稿紙와 銀班을 내던지고 울었다. 그때의 悲痛한 心境과 懷絶한 光景은 그야말로 以筆難記以口難說이다. 東亞日報社 4층 강당에서 鍾路署 刑事의 包圍下에 解算式이 簡略하게 擧行되었다. 白寬洙社長이 登場하여 人事말을 하지도 못하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기가 바빴고 오직 “東亞日報社員과 從業員여러분은 아무쪼록 몸 健康에 힘써 死中救生의 心境을 堅持해주기 바란다!”는 말만 남기고 下壇하고 바로 解敗해 버렸다. 作別의 술 한잔도 나누지 못한채 新聞社에서 나와 뿔뿔이 헤어졌다. 다만 그 때 社員들에게 日本말로 「淚金」(눈물나는 돈의 뜻 =退職金) 으로 2年分 月給을 手票로 받았다. 1年分치는 東亞日報社에서 支給하고 1 年分치는 名目上으로는 每日新聞社에서 增資를 해서 주는것이라고 하지만 總監府에서 마련해서 준것이었다.

나는 2年分치 月給 1천4백원을 타가지고 홧김에 서울에서 친구들과 술을 진탕 마시고 그래도 마옴이 풀리지 않아서 日本 東京까지 가서 마음껏 마시고 실컷 놀다가 돌아왔다. 그때 나는 未婚총각으로 있었기 때문에 生活에 威脅을 받지 않아서 每日新聞社에서 준 1年分月給을 흥청맞게 다 써버리고 동아일보사에서 준 一 年치 퇴직금으로 부채도 갚고 시골 農村에 계신 어머님 선물과 家具도 삿다.

 필자약력

 ▲一九一二年 忠南 天安市 新堂里에서 出生 ▲ 公州高普 三年在學中 光州學生第件에 關聯 退學處分 ▲ 日本 早稻田大學 政治經濟學部卒業 ▲ 東亞日報社 記者 ▲ 初代國會議員 ▲ 第五代國會議員 ▲ 第六代國會議員 ▲ 美國務省招請으로 三個月間 美國視察 「鬪爭二O年」著 

(이상돈, ‘나의 기자시절’, 신문과방송, 1976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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