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영(尹致暎, 1898~1996)은 서울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대학교 법학과 졸업, 미국 프린스턴대 국제법과정 3년 수료, 미국 조지워싱턴대 국제법 학사 졸업, 미국 아메리칸대 국제법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1924년부터 1927년까지 동아일보 주미통신원으로 활동했다. 해방후 이승만(李承晩) 박사 비서실장을 역임했으며 1948년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초대 내무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거쳐, 2ㆍ3대 민의원을 지냈다.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해 당의장을 맡기도 했으며 서울특별시장 등 요직을 거쳤다. 1970년 12월 공화당 총재 상임고문이 되면서 사실상 정계를 은퇴했다. 1982년에 독립유공건국포장을 받았으나, 친일행적을 이유로 2010년 서훈이 취소됐다.
윤치영(尹致暎) (서울, 1898~ ) ▲ 1924. 6 기자(미국통신원), 퇴사연월 불명.〔내무부장관, 국회부의장, 서울시장.〕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민족(民族)의 항변(抗辯) 민주(民主)의 횃불
(…) 해외상주기자제(海外常駐記者制)도 시작되어 22년 10월에는 여운형(呂運亨)을 상해통신원(上海通信員)으로 하고 23년 4월에는 장덕수(張德秀)를 미국(美國)에, 5월에는 유광렬(柳光烈)을 상해(上海)에, 김형원(金烱元)을 동경(東京)에 주재(駐在)케 하였으며, 9월에는 동경(東京)에 대진재(大震災)가 일어나 그 혼란(混亂)속에 한계 주민(韓系住民) 수천(數千)이 학살(虐殺)을 당하는 일대참사(一大慘事)가 생기니 또한 이상협(李相協)이 몸소 그 진상(眞相)을 취재보도(取材報道) 하였다. 이 뒤로 동경(東京), 상해(上海), 북경(北京)에는 대개 상주(常駐) 통신(通信)·특파원(特派員)을 두었고, 미주(美洲)에는 24년부터 윤치영(尹致暎)을 통신원(通信員)으로 하였다.
(동아일보 1964년 4월 1일 4면)
5선(選)의원 윤치영(尹致暎) 씨
5선 의원과 공화당 의장을 지낸 윤치영(尹致暎) 씨가 9일 오후5시30분 서울 풍납동 중앙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9세.
윤(尹) 씨는 일제시대 일본 와세다대 미국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후에는 초대 내무부장관 서울시장도 역임했다.
유족은 딸 성선(娍善) 씨(71)와 아들 인선(仁善)씨 (49·서울백제병원기획실장). 발인은 13일 오전10시 서울 성북동 덕수교회. 장지는 경기도 광주군 선영.
(동아일보 1996년 2월 10일 1면)
지사(志士) ․ 초대 내무 ․ 당(黨)의장 현대정치사 증인
어제 타계(他界)한 동산(東山) 윤치영(尹致暎) 씨
9일 별세한 동산(東山) 윤치영(尹致暎) 씨는 일제 때는 독립운동가 였고, 해방후에는 정부여당의 요직을 두루 거친 한국현대정치사의 증인이었다.
거의 한세기 전인 1898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에 유학중이던 1919년 도쿄에서「2·8독립선언」에 참여했다. 30대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대와 아메리칸대대학원을 졸업했다.
그 후 해방까지 미국에서 한인동지회총본부 사무총장과 임정구미의원(臨政歐美議員) 등을 지내며 독립운동을 했다.
고인은 해방을 맞자 귀국, 이승만(李承晩) 박사의 비서실장을 지냈고 48년에는 제헌국회부의장과 초대 내무장관을 맡아 대한민국정부의 기틀을 잡는데 기여했다.
49년 대한국민당 당수를 지낸 뒤 5·16군사쿠데타로 공화당이 창당되자 이에 참여, 두차례나 당의장을 지내면서 67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돕기도 했다.
7대 공화당 전국구의원을 지낸 뒤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 안중근(安重根)의사숭모회 이사장과 의원동우회장、건국청년운동협의회장 등 사회활동과 함께 보수우익의 대변자로서 활동해 왔다.
개인적으로는 매주 골프를 치며『내 옷과 넥타이를 내가 고르는 것이 취미 중의 하나』라고 말할 만큼 삶을 즐겼다. 이렇게 유유자적한 생활을 90세를 훨씬 넘어서까지 계속했다. (최영묵)
(동아일보 1996년 2월 10일 37면)
후진에 위안과 용기 주시더니-
고(故) 윤치영(尹致暎) 선생님 영전에 김재순(金在淳)
동산(東山)! 윤치영(尹致暎) 선생님! 삼가 선생님 영전에 엎드려 곡하나이다.
선생님께서는 1898년 2월 10일 태어나셔서 1996년 2월 9일에 세상을 떠나셨으니 우리네 셈으로 99세, 흰백 자 백수(白壽)를 하신 셈입니다.
선생님의 부음을 듣던 날 밤, 저는 만상(萬想)에 사로잡혀 밤이 깊어가는 줄도 잊은 채 방구석에 엎드려 그저 묵묵히 음악을 듣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백수하신 선생님! 장수한 사람이란 오랜 세월을 산 사람이 아니라 많은 인생을 체험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께서는 정녕 장수하셨습니다.
선생님과 동시대를 살다간 많은 선배들의 유영(遺影)이 떠오릅니다.
선생님께서 사신 1백년의 파란만장한 생애- 통한과 고난과 환희로 얼룩진 조국의 역사가 생생히 회상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명예로운 행위는 조국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온 생애를 통하여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건국을 위해서, 보존을 위해서, 조국의 발전을 위해서 봉사하셨습니다.
인간이 소망할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선생님께서는 갖고 가신 셈입니다.
사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은 그 인물이 어떤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갔느냐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선생님의 주변 인물들, 그 중에서 비록 선생님과 뜻을 달리했던 사람들에게까지라도 선생님은 변치 않는 의리와 우정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남다른 긴 생애를 통하여 나라의 흥망성쇠, 인간의 훼예포폄(毁譽褒貶-비방과 칭찬)을 체험하셨습니다.
갠 날에는 비 오는 날을 생각하시고 비가 그치면 날이 갤 것이라는 것을 언제나 생각하시며 눈 앞에 전개되는 일에 일희일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배신과 실의에 찬 후진들에게 언제나위안과 용기를 주시곤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평생 기도하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기도는 슬픔의 외침이며 사랑의 찬가이며 구원의 소망이라 언젠가는 보답하는 날이 있으리라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동산(東山)! 윤치영(尹致暎) 선생님! 영예로운 인생을 마치시고 먼저 가신 사모님께서 기다리시는 곳 하늘나라에 안녕히 가십시오.
선생님께서 남겨놓은 사랑하는 아드님 인선(仁善)군 가족과 더불어 변치 않는 발걸음으로 선생님 뒤를 따라 가리오리다.
오랜 세월동안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삼가 명복을 비옵니다.
1996년 2월 13일 (전 국회의장)
(동아일보 1996년 2월 13일 4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