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64. 동아일보 사람들- 윤교중

Posted by 신이 On 12월 - 21 - 2018

 

윤교중(尹敎重, 필명 윤백남, 1888~1954)은 충남 공주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대학교 고등예과를 거쳐 정경과에 진학했으나 조선황실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돼 도쿄고등상업학교로 전학해 졸업했다. 보성전문학교 강사, 극단 배우, 영화제작자로도 활약했다. 1928년 5월부터 동아일보에 수호지(水滸誌)를 번역해 신석수호전(新釋水滸傳)이라는 제목으로 596회에 걸쳐 연재했으며, 뒤이어 1930년 1월16일자부터는 1년6개월간 대중소설 ‘대도전’(大盜傳)을 연재했다. 1933~1936년 동아일보 편집고문을 맡았다. 1953년 서라벌예대 학장을 지냈다.

 

 

윤교중(尹敎重) (서울, 1888~1954) ▲ 1933. 9 편집국촉탁, 1936.11 퇴사.〔소설가, 연극·영화연출가, 호 백남(白南), 예술원회원, 서라벌예대학장〕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小說講座

大衆小說에 대한 私見
尹白南

筆者紹介

氏는 京城출생으로 금년에 49세이다. 일즉이 東京에 건너가 高等商業學校를 졸업하고 돌아온 이후, 초기 조선연극운동의 선구자로서 활동을 한 일이 잇스며 그 뒤에는 영화운동에서도 「尹白南푸로닥슌」 등을 두워 4,5개의 작품도 맨든 일이 잇다. 그 뒤 오로지 소설방면으로도 빗나는 자취를 我文壇에 던젓스니, 「破戒者」 등의 희곡이며 10여편의 소설을 집필하신 분이다. 본명은 「尹敎重」, 「白南」은 雅號이다.

三千里社巴人見의 所請은 大衆文學講座라는 네모가 번듯한 제목이었으나 원래 두뇌가 산만한 필자로는 ****와 같은 科學的 理論 내지 雜列式 講座같은 것은 짐으로도 무겁고 또 마음에 썩 하고 싶지 않어서 제목과 같은 윤곽이 흐릿하고 둥굴넙적한 내용으로 책임을 면코자 한다.

純文藝小說과 大衆小說 이 두 가지의 구별은 이제 다시 呶呶할 필요도 없이 한 개의 상식이거니와 세상에서 흔이 대중하면 통속으로 여기고 純文藝하면 고상한 것으로만 여기는 개념적 단정을 나는 깨트리고 싶다.
二者는 그 독자의 영역에 있어 또는 그 묘사의 방식과 관점에 있어 또는 사건의<186> 취급수법에 있어 다소의 相違가 있을 뿐으로 대중소설과 純문예소설의 分岐가 生하는 것이니 각각 완성된 작품이 그 가치에 있어 優劣이 있을 까닭은 없다.

假使小說을 A클래쓰 B클래쓰로 나누어
A CLASS= 純문예소설
B CLASS= 대중소설
이라는 구분을 하였다고 하고 A는 당연히 B보다 우월한 것이라고 할진대는 거기에 커다란 모순 하나이 생길 것을 각오하여야 한다.
假使 여기에 한 개의 純문예소설이 있는데 그 묘사와 수법이 졸렬하야 純문예소설로는 末流에 속할 것이라는 鑑定이 나리젔다고 보자. 그러면 A CLASS의 末席에 있을 者는 당연히 B CLASS의 上席에 居할 者라 하야 대중소설의 白眉라고 推賞할 수 있을 것인가.
또 그와 마찬가지로 대중소설의 秀逸작품이라 하야 이것을 문예소설 중으로 편입할 수 있을까?
이것은 상식으로 능히 판단할 종류의 것이 아니냐.
그러하므로 필자는 대중소설은 대중소설의 가는 길이 있고 純문예소설은 純문예소설의 것는 길이 있을 뿐이오. 그것을 비교하야 優劣을 생각하게 되는 愚昧를 一掃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純문예소설과 대중소설은 무엇을 가지고 구분하느냐.
이것은 퍽이나 뗄리카-트한 문제이다. 그러나 요약해서 말하고 보면 純문예소설은 성격을 主로 한 소설이오. 대중소설은 사건을 主로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해석이오, 정의는 아닌 것을 먼저 말해둔다. <187>
그러나 純문예소설에 사건이 없을 리 없고 대중소설에 성격이 묘사되여있지 않을 리 없으니까 이것은 「主로」란 데에서 뗄리카-트한 구분을 할 수 있기 때문에 純문예소설은 縱으로 성격을 파들어가고 대중소설은 橫으로 사건을 묘사하는 데에 성격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我流의 해석을 나려준다.
或者는 문장의 雜澁과 平易로써 구분을 하려하고 時代物과 現代物로서 구별하려는 등의 유치한 견해까지 있는 것을 보지마는 이것은 물론 過誤의 커다란 것이라는 것을 단언한다.
그러나 대중소설이 名詮自稱으로 대중을 상대하므로써 목표삼는 이상 다소의 誇張과 奇를 집어넣으려고 힘쓰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마는 그것이 대중소설의 眞骨頂이 아닌 것도 알어두어야 한다.
近者 日本內地의 有數한 純문예파 소설가들이 말머리를 나라니하야 新聞小說界에 출마한 것을 보라. 그리고 그네들이 이것이 대중소설이외다 하는 듯이 時代物·現代物할 것 없이 대중적 작품을 발표하는 것을 보라.
그네들은 자기가 쓰는 소설 머리에 대중이라는 두 字를 쓰지는 않었다. 그러나 그 중의 어느 것은 대중에도 대중, 純? 대중소설의 하나라는 것을 단언한다. 그러고 보니 결국은 작가의 태도여하 취급여하에 따라 純문예와 대중이 갈린다는 것을 거듭하야 증명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명백히 말해둘 것은 통속소설과의 구별이다.
대중소설의 眞髓를 파악하지 못한 人士들은 대중소설과 통속소설을 혼동하야 생각한다.<188>
이것은 큰 착각이다.
통속소설에는 그것에서만 볼 수 있는 全貌가 있다. 저급의 취미와 극히 상식적인 성격을 가저다가 또는 기이한 이야기 그것을 소설형으로 쓴 것에 지나지 안는다.
「秋月色」 「靑春의 설음」 등의 極彩色表紙 25錢 소설을 가저다가 문예소설이라고 부를 사람은 물론 없거니와 대중소설이라고 부를 사람도 없을 것이 아니냐.
한때에는 新聞小說을 통속소설이라고 부른 적도 있었지마는 지금에 와서 그런 通用을 하는 狂人은 없을 줄 믿는다.
그러면 대중소설이 흔이 무대와 사건을 시대에 取하는 까닭은 무엇인고 하는 문제, 이것은 다음 기회에 稿를 달리하야 씨보랴고 한다.(次號繼續)<189>

(윤백남, ‘小說講座-大衆小說에 대한 私見’, 삼천리, 1936년 2월호)

 

 

나의 아호(雅號)·나의 이명(異名)
윤백남(尹白南)

나의 아호(雅號)라고 할는지오 그것은 모론(母論)『백남(白南)』이올시다 그러나 내가 써놓고도『모론(母論)』이란 구절이 어폐(語弊)가 잇는 듯이 생각이 됩니다마는『백남(白南)』이란 호(號)가 지금은 민적(民籍)에 실린 이름『교중(敎重)』을 일축(一蹴)해 버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행세(行世)를 하게 되엇기 때문에 가끔『백남(白南)』은 윤교중(尹敎重)과 동일인(同一人)이라는 증명(證明)을 얻어야 되는 경우(境遇)가 많이 생깁니다.
그러기에 이번 질문(質問)을 받고, 나는 너의 본명(本名)이 무엇이냐 하고 물어보아 주섯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엇습니다.
한화(閑話)는 경원(敬遠)하고 본대답(本對答)으로 들어가지오. 나의 호(號)『백남(白南)』은『태백남인(太白南人)』의 가운데 글자(字)만을 집어다 쓰는 것인데 내가 일즉이 동경이육신문(東京二六新聞)과 기타(其他) 잡지(雜誌)에 집필(執筆)을 하고 잇을 때에『태백남인(太白南人)』이란 호(號)-다시 말하면 조선인(朝鮮人)이란 뜻을 실은 호(號)를 쓰든 것을 귀선후(歸鮮後)에는 본시조선인(本是朝鮮人)이라 새삼스리『태백남인(太白南人)』의 행세(行世)를 할필요(必要)는 없지마는 별안간 적당(適當)한 호(號)가 없길래 아래 위 두자(字)를 떼어버리고『백남(白南)』이라고 행세(行世)를 하기 시작(始作) 햇드니 부르기가 편(便)해서 그런지 쓰기가 간략(簡畧)해서 그런지『교중(敎重)』은 귀양 가고『백남(白南)』이 참 혹한 세도(世道)를 허게됩니다 그려. |完|

(동아일보 1934년 3월 30일 3면)

 

 

윤백남씨 별세(尹白南氏別世)

문필가 윤백남(尹白南)씨는 오랜 숙환 끌에 재작 29일 상오4시반경 시내 종로구 충신동 25의 34번지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향년 68세. – 고 윤(尹)씨는 과거 왜정시대부터 수차 본지에 연재소설을 집필한바도 있는 문필계의 중진으로서 그동안『서라벌예술학교(藝術學校)』학장으로 있으면서 집필생활을 계속하여 문필계에 크게 기여하여 왔는데 영결식은 금 1일상오11시 후암동에 있는『서라벌예술학교』교정에서 집행된다.

(동아일보 1954년 10월 1일 2면)

 

 

한국신문(韓國新聞) 백인(百人)의 얼굴

▲윤교중(尹敎重)

(백남(白南)·1888(一八八八)~1954(一九五四) 일본동경고상졸(日本東京高商卒). 보전 강사(普專講師)를 거쳐「매일(每日)」편집장(編輯長).  서울제2방송(第二放送)에 있다가 33~36年「동아(東亞)」편집고문(編輯顧問)으로 신문소설(新聞小說)을 집필(執筆). 한편 연극(演劇)·영화계(映畵界)에도 종사(從事). 해방후 예술원 회원(解放後藝術院會員)。

(동아일보 1964년 4월 11일 3면)

 

 

육당(六堂)과 백남(白南)

『가장 적은 돈과 힘으로 가장 요긴한 지식과 고상한 취미와 강건한 교훈을 얻으려하는 우리 소년제자(諸子)의 욕망을 만족케 하여-.』

『우리가 가진 정사(正史)의 대부분이 조정(朝廷)의 역사(歷史)라면 우리가 가지는 야사(野史)는 국민의 역사(歷史)다. -용지난(用紙難) 인쇄난(印刷難) 자재난(資財難)의 난자(難字)만이 거듭됨을 돌파하고 이 거대한 업(業)을 오인(吾人)의 평생(平生)의 소원이거니와-.』

앞의 글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십전총서(十錢叢書)」를 펴낼 때 쓴 취지문이며 뒤의 글은 백남(白南) 윤교중(尹教重)이「조선야사전집(朝鮮野史全集)」을 펴낼 때 쓴 간행사(刊行辭)이다. 우리 출판문화사(出版文化史)의 개산(開山)이자 큰 산봉(山峰)을 이루는 두 분의 이 글에서 나는 늘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두 분은 선구자의 의지로써 민족문화선양(民族文化宣揚)과 보편화한 지식의 반포를 자라나는 새 시대인 소년과 대중에 뿌리내리게 하여 출판입국(出版立國)의 큰 뜻을 펴려했던 것이다.
이미 육당(六堂)은 홍안(紅顔) 19세 소년시절에 일본에서 낡은 인쇄기를 구득(求得),「신문관(新文館)」이라는 출판사를 설립,「소년」「붉은져고리」「아이들보이」등의 잡지를 냈고 1910년에는「조선광문사(朝鮮光文社)」를 설립하여 육전소설(六錢小説)을 20여종이나 내기도 했다. 또 백남(白南)은 1913년「반도문예사(半島文藝社)」를 창업、그의 한문학(漢文學)에 대한 달견(達見)을 대중문화(大衆文化) 향상을 위해 긍지를 갖고 쏟았으며 첫 작품인「대도전(大盜傳)」의 집필로 들어간다.
이와같은 대(大)선배들이 걸어간 자랑스런 이상(理想)의 길인 출판(出版)의 한 귀퉁이에 외람스레 들어선 나는 오늘 무엇을 하는가. 성큼 다가온 가을, 여름내 여문석류도 이젠 그 열정(熱情)의 숨결을 토하려 하는데 나는 얼굴을 들지 못할 만큼 부끄럽다.
육당(六堂)과 백남(白南)이 지금까지 살아있어 출판(出版)을 하고 있었다면 지금의 우리처럼 이런 양심(良心) 심문을 받았을까 자성(自省)해본다.  (…) 고정일(高正一) 출협이사(出協理事)

(동아일보 1975년 10월 8일 5면)

 

 

 

연극(演劇)과 사회(社會) 병(並)하야 조선현대극단(朝鮮現代劇壇)을 논(論)함 (全10回)

(동아일보 1920년 5월 4일 4면 ~ 5월 16일 4면)

 

[小說] 신석수호지(新釋水滸誌)·신석수호전(新釋水滸傳) (全596回)

(동아일보 1928년 5월 1일 3면 ~ 1930년 1월 10일 3면)

 

[小說] 대도전(大盜傳) (前篇) (全63回) 

(동아일보 1930년 1월 16일 3면 ~ 3월 24일 3면)

[小說] 대도전(大盜傳) (後篇) (全182回) 

(동아일보 1931년 1월 1일 3면 ~ 7월 13일 3면)

 

[小說] 탐기루만화(耽奇樓漫話) (全85回) 

(동아일보 1930년 9월 11일 7면 ~ 12월 17일 3면)

 

[小說] 해조곡(海鳥曲)  (全171回) 

(동아일보 1931년 11월 18일 3면 ~ 1932년 6월 7일 3면)

 

[小說] 봉화(烽火) (全228回) 

(동아일보 1933년 8월 25일 6면 ~ 1934년 4월 18일 3면)

 

[小說] 흑두건(黑頭巾) (全226回) 

(동아일보 1934년 6월 10일 3면 ~ 1935년 2월 16일 5면)

 

[小說] 미수(眉愁) (全115回) 

(동아일보 1935년 4월 1일 7면 ~ 9월 20일 3면)

 

[小說] 백련유전기(白蓮流轉記) (全154回) 

(동아일보 1936년 2월 22일 4면 ~ 8월 28일 3면)

 

[小說] 태풍(颱風) (全130回) 

(동아일보 1950년 2월 17일 2면 ~ 6월 27일 2면)

 

[小說] 야화(野花) (全183回) 

(동아일보 1952년 8월 15일 2면 ~ 1953년 2월 15일 2면)

 

 

 

 

 

 

댓글 없음 »

No comments yet.

RSS feed for comments on this post. TrackBack URL

Leave a comment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