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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동아일보 사람들- 윤고종

Posted by 신이 On 12월 - 21 - 2018

윤고종(尹鼓鍾, 1914~1979)은 1933년 함흥 영생중학교를 마치고 이듬해인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조선문단을 논함’이 당선되며 등단했다. 1935년 21세 나이에 동아일보 함흥지국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했다. 6.25전쟁 이후 조선일보 문화부장을 거쳐 동아일보에 재입사해 교정부 기자로도 일했다. 저서로는 ‘윤고종문집’ 등이 있다.

 

윤고종(尹鼓鍾) (함흥, 1914~ ) ▲1957. 7 기자(교정부), 1961. 6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尹鼓鍾

▲ 1914년 8월 16일 함남 함흥에서 출생
▲ 79년 별세
▲ 함흥영생중학교 졸업
▲ 35년 동아일보 함흥지국 기자
▲41년 동맹통신 기자
▲ 47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52년 同 조사부장
▲ 54년 1월~57년 1월 同 문화부장, 그후 동아일보 교정부 기자
▲61년 대한일보 사회부장

□ 문학수업을 겸행한 사회부 기자
윤고종은 흔히 알려진대로 평범한 문화부 기자 생활로 일관된 인생을 산 것은 아니다.
그는 말년에는 좀 어려운 생활 속에서 고생도 했지만 그의 품성그대로 늘 명랑하고 끈질긴 생활인의 모습도 보여 주었다.
1914년생인 그는 지금도 북녘땅인 함흥의 명문 사립 영생중학을 졸업, 35년 동아일보 함흥지국 기자로 언론계 생활을 시작했다.
약관 21세의 나이로 동아일보 기자로 출발한 그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문학수업의 길도 닦았다.
그 무렵의 함흥은 함경남도 도청소재지로서의 행정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공업도시로 한창 발돋움하던 흥남을 바로 옆에 끼고 있어 경제적인 지반 또한 튼튼한 곳이었다. 그리고 공자노동자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한 사상문제 등이 예민한 모습을 드러내는 고장이기도 했다.
함흥과 원산 등지에서 일어나는 이른바 프롤레타리아운동, 그중에서도 아나키즘의 영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윤고종은 조선일보에 있을 때 몇 번이고 아나키즘에 관해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말속에는 상당부분 정식화단 것도 있었지만 아나키즘이 내포하고 있는 기존질서의 파괴뒤에 있어야할 새질서를 위한 나름대로의 견해도 담겨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

윤고종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총독부에 의해 폐간된 후 41년 동맹통신 기자로 일하다 해방을 맞았다. 해방은 되었으나 공산당이 장악한 북한에서는 살 수 없게 된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 역시 38선을 넘었다.
그는 서울에서 처음에는 문학평론에 손을 대기 시작했으나 문학평론만으로는 살아가기가 어려운 세상이었다. 혼란과 무질서가 판을 치고 좌우갈등이 심했던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문학을 한다는 것은 꼭 굶어죽기 알맞은 짓이었다”던 그의 회상은 실감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는 47년에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하게 된다.

□ 끝까지 世態에 적응 못한 ‘尹博’

당시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는 각종 잡지에 문학평론을 Tm기도 했지만 윤고종 같은 온건하고 사상적으로 어느 쪽에든 편들지 않는 평론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앞에 길게 인용한 독도의 미 공군기 폭격사건은 윤고종이 입사한지 2년만에 현장에 급파되어 송고한 기사이다.
그는 기자활동을 하면서도 문필활동을 쉬지 않았다. 30세 후반기에 접어든 윤고종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약관 20세 초반에 청운의 뜻을 품고 언론에 투신할 때만해도 혈기 발랄한 젊은 기자였으나 어느새 40을 눈앞에 둔 그는 사회부기자로서는 어쩌면 노쇠한 기자취급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해방직후 새 시대의 젊은 기자들이 신문사 분위기를 일신하고 점점 그들 세대의 젊은 기자들이 신문제작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할 무렵이다.
30년대에 언론계에 진출한 늙은(?) 기자들은 겨우 중간 관리자인 부장자리에 오르거나 편집국장 또는 주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윤고종은 그래서 어떤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6.25전쟁이 나기까지 그는 그렇게 불안정하고 좌절당하는 제 모습이 싫었던지 문필생활에의 욕구가 북받쳤던 것인지 꽤 활ㄷ발한 평론활동을 폈다.
월남한 작가 · 평론가 등이 많이 모이는 잡지사에 곧잘 들르기도 하고 글도 발표했다.l 작가 김송이 주재하는 ‘백민’이라는 잡지가 있었다. 월남한 작가, 평론가, 시인들이 많이 집필하는 반문예지 같은 잡지였다. 6.25 전에는 그런대로 매달 거르지 않고 발간되는 잡지였는데 그 ‘백민’에 윤고종은 종종 문학평론을 기고하곤 했다.

52년 6.25전쟁의 북새통 속에서 그는 조선일보의 조사부장이 되었다. 신문사 안에서는 한직으로 꼽히는 자리이긴 했지만 40세가 다 돼서야 신문사의 중간관리자 자리를 맡게 된 것이다. 그 당시는 해방이라는 대전환기에다 6.25전쟁이라는 대변혁기여서 신문사 부장은 30대의 젊은 충이 많이 맡고 있었다. 특히 정치, 경체, 사회의 취재부서 부장에는 절은 부장이 압도적이었다.
54년에 문화부장이 된 그는 바쁜 자리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자기성품에 맞는 일이었다. 박식하다 해서 ‘윤박’으로 불리던 그는 후배들로부터도 ‘윤부장’ 대신 ‘윤박’이라는 애칭으로 불리었고 편집국장 성인기나 홍종인 주필로부터도 ‘윤박’으로 불리었다.
추운 겨울날 구공탄 난로가에 모여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를 나눌 때면 늘 ‘윤박’이 얘기의 중심이 되곤 했다. 술 얘기가 나오면 술의 유래서부터 술의 종류, 술에 얽힌 선인들의 일화 등 그의 얘기는 끝이 없었다. 정확한지 아닌지는 몰라도 연대나 지명, 사람의 이름 등이 그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올 때면 모두들 흥미진진하게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축구, 음식, 어느 것이 화제에 올라도 그의 ‘박식’은 늘 좌중을 주름잡았다. 옷을 때는 눈을 가늘게 뜨고 천진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57년에 조선일보를 퇴사할 때는 그도 퍽 늙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별로 빛을 받지 못했다. 동아일보에서 교정 일을 보면서 세월을 되씹기도 했고 잠깐이지만 대한일보에서는 까만 후배인 박성환 편집국장 밑에서 사회부장 일을 맡아 보기도 했다. 그 무렵 거리에서 만나면 오른 손을 번쩍 들며 반색을 하고는 “그래 요새는 무슨 책을 읽소, 아무것이나 많이 읽어 두는 게 큰 재산이 되지요” 하곤 했다.
언론계와 손을 끊은 후로는 사회의 뒤안길에서 많은 고생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어쩌면 그는 세태에 익숙하지 못한 채 사라져간 언론인이었다. 학벌을 따지지 않는다고는 해도 신문사 안에서 중학교 학력밖에 없는 그가 살아가기란 참으로 벅찬 일이었을 것이다.
어느 모로보나 윤고종은 ‘윤박’이라는 애칭이 꼭 들어맞는 언론인이었다. 다만 세태가 그의 박식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을 뿐이었다.

(장병칠 전 KBS 라디오국장, ‘尹鼓鍾’, 韓國言論人物史話-8.15後篇(下), 1992)

 

 

 

[사고] 신춘현상문예당선자발표(新春懸賞文藝當選者發表) (其一)

문예평론(文藝評論)【가작(佳作)】조선문단(朝鮮文壇)을 논(論)함 함흥부 황금정 이정목 팔팔(咸興府黃金町二丁目八八) 윤고종(尹鼓鍾)(본명 윤종(本名尹鍾))

(동아일보 1934년 1월 1일 2면)

 

[佳作] 신춘현상문예(新春懸賞文藝) 평론(評論)
조선문단(朝鮮文壇)을 논(論)함 (一)
윤고종(尹鼓鍾)

서언(緖言)
당면(當面)한 문제(問題)의 혼란(混亂)의 해명(解明)은 단지(單只) 당면(當面)한 사상(事象)의 개별적 토구(個別的討究)의 여하(如何)에 의존(依存)하엿다고 사료(思料)하는 것은 혼란(混亂)의 해명(解明)과 당면(當面)한 사상(事象)에 충실(忠實)한 소이(所以)가 아니다.
문제(問題)된 대상적 접충(對象的接衝)은 당면자(當面者) 자신(自身)이 혼란(混亂)과 같이 암중모색(暗中模索)을 동일(同一)히 함에 기여(寄與)가 잇을뿐이다. 모든 문제(問題)는 야기(惹起)한 그 순간적(瞬間的) 대상(對象)으로는 결(决)코 그 해결(解决)의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문제(問題)는-더욱히 혼란(混亂)이 극심(極甚)한 대상(對象)에 잇어서는 그 문제(問題)의 야기현상(惹起現象)에 선행(先行)한 상태(狀態)를 염두(念頭)에 두지 않고는 완전(完全)한 해결(解决)을 얻지 못할 것이다. 모든 선대(先代)의 현명(賢明)의 간단(簡單)한 내용(內容)은 역사적(歷史的) 유래(由來)의 구명(究明)에 잇어서 당면(當面)한 대상(對象)의 정당(正當)한 해결(解决)을 얻은데 잇다.
조선(朝鮮)의 문단(文壇)의 모든 문제(問題)의 구명책(究明策)이 금일(今日)까지 허다(許多)한 시일(時日)과 논의(論議)를 경유(經由)하야 아직 것 암중모색(暗中模索)의 현재(現在)를 계속(繼續)함은 무엇보담도 그 원인(原因)이 모든 우려자(憂慮者) 관심자(關心者가 대상화(對象化)한 사건(事件)에만 그 시선(視線)과 두뇌(頭腦)를 고정(固定)시킨데 잇는 것이다. 원리적(原理的)인 대책(對策)이 결(决)코 일시(一時)의 순간적(瞬間的) 현상자체(現象自體)의 구명(究明)에서는 추출(抽出)되지 않는 것이다. 조선문단(朝鮮文壇)이 과정(過程)하고 잇는 문제(問題)는 결(决)코 이와같은 문제(問題)의 일시적(一時的) 논의(論議)에서는 그 귀추(歸趨)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일(一)의 사상(事象)은 선행(先行)한 과정(過程)과 존재(存在)한 환경(環境)의 영향(影響)의 결과(結果)인 것이니 이와같은 선행(先行)한 과정(過程)과 당면(當面)한 환경(環境)을 등한(等閑)히 할 때 제기(提起)된 사상(事象)의 혼란(混亂)은 일층(一層) 그해명(解明)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조선문단(朝鮮文壇)의 당면(當面)의 제문제(諸問題)의 해결(解决)은 종(縱)과 횡(橫)의 토구(討究)에 잇어서만 가능(可能)한 일이다.

전망(展望)
조선문단(朝鮮文壇)의 당면(當面)한 제문제(諸問題) 중(中)의 최대 문제(最大問題)는 침체(沈滯)와 정돈(停頓)의 사실(事實)이다
사회주의적(社會主義的) 경향문학(傾向文學)과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우익문학(右翼文學)을 일환(一丸)으로 하야 조선(朝鮮)의 문단(文壇)은 위미(萎薇)와 정돈(停頓)|불황(不况)에 적당(適當)한 모든 술어(術語)로서 표시(表示)할 수 잇는 참경(慘境)에 처(處)하여 잇다. 대전 이후(大戰以後) 정치적 동요(政治的動搖)와 기성세력(旣成勢力)의 몰락(沒落)에 의(依)한 신흥세력(新興勢力)의 대두(擡頭)에서 희망(希望)의 서광(曙光)을 발견(發見)한 민족적 재생의식(民族的再生意識)의 발흥기(勃興期)에 잇어서의 문학운동(文學運動)과 그 성과(成果)를 회고(回顧)할 때 당면(當面)한 문단(文壇)의 현상(現狀)은 사멸(死滅)에 빈(瀕)한 단말마(斷末魔)의 그 회색(灰色)을 연상(聯想)하게 하는 외(外)에 아모것도 아니다. 문단(文壇)의 침체(沈滯)는 창작행동(創作行動)의 부진(不振)에만 그 의미(意味)가 국한(局限)하지 안는다. 조선(朝鮮)의 경험(經驗)하고 잇는 침체(沈滯)는 창작(創作)과 병행(併行)하는 비평(批評)의 권위실추(權威失墜)에 그 주요(主要)한 특징(特徵)과 의의(意義)가 존재(存在)한 것이다. 어떠한 문학권(文學圈)의 침체(沈滯)는 창작(創作)이나 평(評)의 일방적 침체(一方的沈滯)에 극한(極限)되는 것이 보편적 사실(普遍的事實)이다. 동양(東洋)의 이대(二大)의 인접(隣接)한 문학권(文學圈)의 부진기(不振期)를 상망(相望)할 때 우리는 이 사실(事實)을 발견(發見)하는 것이다. 거기에 비(比)할 때 이 땅의 문단(文壇)의 침체(沈滯)는 문학활동(文學活動)의 전적 멸망(全的滅亡)을 그 특색(特色)으로 하고 잇는 것이다. 어떠한 유파(流派)를 물론(勿論)하고 -신흥(新興) 프로레타리아-트의 약진적 문학활동(躍進的文學活動)도 예외(例外)로 하지 않고 이 땅에 성장(成長)하려고 하는
모든 문학적 맹아(文學的萌芽)가 사(死)에로의 몰락(沒落)을계속(繼續)하고 잇는 것이다. 이 사실(事實)은 오로지 작금(昨今)의 경제적 절박(經濟的切迫)한 정세(情勢)에서 배태(胚胎)한 것은 아니다.
대전이후(大戰以後)의 민족적 이상(民族的理想)과 광명(光明)의 현현(顯現)의 기대(期待)기 일(一)의 환상(幻想)의 사상누각화(砂上樓閣化)한 것을 인지(認識)하고 흥분(興奮)에서 냉정(冷靜)한 현실(現實)에 복귀(復歸)한 때부터 이 문학적 하강기(文學的下降期)가 시작(始作) 되엇든 것이다. 계급적 관념(階級的觀念)의 구상화(具像化)와 민족의식(民族意識)의 혼동(混同)이 현실(現實)과 사위(四圍)의 극변(極變)에 각자(各自)로 그 특색(特色)을 명확(明確)히 하야가지고 분립(分立)하려고 하는 때부터 문학적 약진(文學的躍進)이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정지(停止)하고 새로운 현상(現象)에 향(向)하야 이행(移行)하고 잇엇든 것이다.
계급의지(階級意識)의 조선(朝鮮)에로의 습래(襲來)와 유치(幼稚)한 봉건적(封建的) 민족의식(民族意識)의 대립항쟁(對立抗爭)에 의(依)하야 이 문학(文學)의 쇠약상태(衰弱狀態)가 일시(一時) 모든 사람의 시야(視野)에 발현(發現)되지 않엇든 것이다. 민족해방(民族解放)의 이념(理念)의 밑에 견고(堅固)한 의지적 결합체(意志的結合體)를 소지(所持)하든 민족주의(民族主義)의 이상(理想)이 일(一)의 공상(空想)에 귀(歸)하는 것을 알 때 모든 조선(朝鮮)의 사회(社會)의 관념(觀念)의 동향(動向)이 민족주의(民族主義)보다 논리적(論理的)하고 체계(體系)가 정비(整備)한 계급의식(階級意識)에 대부분(大部分)의 전환(轉換)을 필연적(必然的)으로 하엿든 것이다. 이 평화(平和)롭지 못한 과정중(過程中)에서 우리는
파류(派流)의 대립(對立) 외(外)의 아모것도 가지지 않엇다. 소지(所持)한 것이 잇다면은 프로레 문학(文學)의 새로운 문학형식(文學形式)과 내용(內容)의 출현(出現)이다. 막연(漠然)한 민족적(民族的) 불우(不遇)가 현실적(現實的) 생생(生生)한 호흡(呼吸)잇는 사실(事實)에로 전환(轉換)한데 이 이대사조(二大思潮)의 충격(衝擊)이 낳은 성과(成果)가 잇는 것이다. 조선(朝鮮)에 배태(胚胎)하고 조선(朝鮮)에 성장(成長)한 민족적(民族的) 관념형태(觀念型態)의 밑에 해외(海外)로서 이 조선(朝鮮)을 향(向)하야 노도(怒濤)같이 밀어든 문학사조(文學思潮)가 우익적(右翼的) 일익(一翼)을 형성(形成)함에 이 계급의식(階級意識)과 민족사상(民族思想)의 충돌(衝突)이 낳은 특색(特色)이 잇는 것이다. 대전 전(大戰前)과 대전 후(大戰後)에 층생첩출(層生疊出)한 서구(西歐)의 문학사조(文學思潮)의 난무장(亂舞塲)이 기성(旣成)의 권위(權威)와 존재성(存在性)을 말살부정(抹殺否定)하는 계급의식(階級意識)의 수입(輸入)에 잇어서 완전(完全)한 대단원(大團圓)을 이루고 만 것이다.
새로운 유파(流派)의 조삼모사적 영입(朝三暮四的迎入)이 기미이후(己未以後)의 조선문단(朝鮮文壇)의 중요(重要)한 과정(過程)이엇든 것이다..
이는 봉건적 사회형태(封建的社會型態)가 근대적 자본사회(近代的資本社會)에로 과도(過渡)하는 시대(時代)가 필연적(必然的)으로 과정(過程)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전철(前轍)이다.
접근(接近)한 일본(日本)의 명치문단(明治文壇)이 그러하엿고 조선(朝鮮)의
문학적(文學的) 각성(覺醒) 과거진시기(時期)를 동일(同一)히 한 중화민국(中華民國)의 문단(文壇)이 그러하엿든 것이다. 그러나 이 봉건적 유제(封建的遺制)가 근대적 자본주의(近代的資本主義)에로 전환과정(轉換過程)할 때 서구(西歐)의 일우(一隅)에는 유사이래(有史以來) 미층유(未層有)의 정치적 변혁(政治的變革)이 완성(完成)되여 인접(隣接)한 접괴지(接壞地)까지 변혁(變革)에 석권(席捲)되여 바리엇다. 이조(李朝)의 살인적 실정(殺人的失政)에서 봉건적 경제파산(封建的經濟破產)에 빈(瀕)한 조선사회(朝鮮社會)에 이 변혁(變革)의 비말(飛沫)이 넘어오지 않을 리(理) 없엇든 것이다.
더욱히 조선(朝鮮)의 경제적 참상(經濟的慘狀)은 자연발생적 계급관념(自然發生的階級觀念)의 온상지(溫床地)의 관(觀)이 없지않엇든 것이다

(동아일보 1934년 1월 14일 3면)

신춘현상문예평론(新春懸賞文藝評論) 조선문단(朝鮮文壇)을 논(論)함【一】(동아일보 1934년 1월 14일 3면)
신춘현상문예평론(新春懸賞文藝評論) 조선문단(朝鮮文壇)을 논(論)함【二】(동아일보 1934년 1월 16일 3면)
신춘현상문예평론(新春懸賞文藝評論) 조선문단(朝鮮文壇)을 논(論)함【三】(동아일보 1934년 1월 17일 3면)
신춘현상문예평론(新春懸賞文藝評論) 조선문단(朝鮮文壇)을 논(論)함【四】(동아일보 1934년 1월 18일 3면)
신춘현상문예평론(新春懸賞文藝評論) 조선문단(朝鮮文壇)을 논(論)함【五】(동아일보 1934년 1월 19일 3면)
신춘현상문예평론(新春懸賞文藝評論) 조선문단(朝鮮文壇)을 논(論)함【六】(동아일보 1934년 1월 20일 3면)

 

문학유산문제(文學遺產問題)와 해외문학파(海外文學派)의 임무(任務) (上) (동아일보 1934년 2월 7일 3면)
문학유산문제(文學遺產問題)와 해외문학파(海外文學派)의 임무(任務) (下) (동아일보 1934년 2월 8일 3면)

비평무용론(批評無用論)에 대(對)한 비평가(批評家)의 취(取)할 태도(態度) (동아일보 1934년 4월 6일 3면)

[文壇+時評] 문예부흥(文藝復興)과 조선(朝鮮) (一) (동아일보 1934년 4월 24일 3면)
[文壇+時評] 평가(評家)의 완전(完全)한 임무(任務) (二) (동아일보 1934년 4월 25일 3면)
[文壇+時評] 창작(創作)의 양적과다(量的過多) (三) (동아일보 1934년 4월 26일 3면)

문학(文學)에 잇어서의 객관(客觀) 신심리주의(新心理主義)에서 문제(問題)를 취(取)하야 (一)  (동아일보 1934년 7월 24일 3면)
문학(文學)에 잇어서의 객관(客觀) 신심리주의(新心理主義)에서 문제(問題)를 취(取)하야 (二)  (동아일보 1934년 7월 25일 3면)
문학(文學)에 잇어서의 객관(客觀) 신심리주의(新心理主義)에서 문제(問題)를 취(取)하야 (三)  (동아일보 1934년 7월 28일 3면)
문학(文學)에 잇어서의 객관(客觀) 신심리주의(新心理主義)에서 문제(問題)를 취(取)하야 (四)  (동아일보 1934년 7월 31일 3면)
문학(文學)에 잇어서의 객관(客觀) 신심리주의(新心理主義)에서 문제(問題)를 취(取)하야 (五)  (동아일보 1934년 8월 1일 3면)
문학(文學)에 잇어서의 객관(客觀) 신심리주의(新心理主義)에서 문제(問題)를 취(取)하야 (六)  (동아일보 1934년 8월 2일 3면)
문학(文學)에 잇어서의 객관(客觀) 신심리주의(新心理主義)에서 문제(問題)를 취(取)하야 (七)  (동아일보 1934년 8월 3일 3면)
문학(文學)에 잇어서의 객관(客觀) 신심리주의(新心理主義)에서 문제(問題)를 취(取)하야 (完)  (동아일보 1934년 8월 4일 3면)

조선문학(朝鮮文學)의 명일(明日)과 문학청년(文學靑年)의 사명(使命) (上) (동아일보 1935년 10월 4일 3면)
조선문학(朝鮮文學)의 명일(明日)과 문학청년(文學靑年)의 사명(使命) (下) (동아일보 1935년 10월 5일 3면)

[紀行] 환(歡)․희(喜)․사(寺)․점(點)․묘(描) (一) (동아일보 1937년 6월 24일 6면)
[紀行] 환(歡)․희(喜)․사(寺)․점(點)․묘(描) (二) (동아일보 1937년 6월 25일 7면)
[紀行] 환(歡)․희(喜)․사(寺)․점(點)․묘(描) (完) (동아일보 1937년 6월 26일 6면)

새로 검토(檢討)되어야 할 문학(文學)의 진실성(眞實性) (1) (동아일보 1937년 10월 9일 4면)
새로 검토(檢討)되어야 할 문학(文學)의 진실성(眞實性) (2) (동아일보 1937년 10월 10일 4면)
새로 검토(檢討)되어야 할 문학(文學)의 진실성(眞實性) (3) (동아일보 1937년 10월 12일 4면)
새로 검토(檢討)되어야 할 문학(文學)의 진실성(眞實性) (完) (동아일보 1937년 10월 14일 4면)

창작월평(創作月評)의 재검토(再檢討) 독자(讀者)와의 관계(關係)를 주안(主眼)으로 (上) (동아일보 1957년 3월 3일 4면)
창작월평(創作月評)의 재검토(再檢討) 독자(讀者)와의 관계(關係)를 주안(主眼)으로 (下) (동아일보 1957년 3월 5일 4면)

『일』의 확립(確立)이 선결(先決) 정실(情實)의 도가니에서 춤춰 (동아일보 1962년 5월 29일 4면)

 

 

문학평론가(文學評論家) 윤고종(尹鼓鍾) 씨

문학평론가 윤고종(尹鼓鍾) 씨가 8일 오후2시45분 서울 성북구 정릉3동 955의71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65세. 34년에 문단에 데뷔,「문학(文學)에 있어서의 진실(眞實)」「사실주의(寫實主義)의 현대적 의의」등 평론을 발표해 온 그는 해방 후 오랫동안 동아일보(東亞日報) 조선일보(朝鮮日報) 등 언론계에 몸담아 왔었다. 발인 10일 오전9시, 장지 모란공원 묘지.

(동아일보 1977년 10월 10일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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