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완희(柳完熙, 1905~1964)는 경기 용인 출신으로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경성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들어왔다. 1924년 10월부터 1925년 5월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했다. 1925년 시 ‘거지’를 발표하여 등단했고 시대일보 조선일보 기자로도 일했다. 해방 후에도 서울신문과 세계일보에서 근무했다.
유완희(柳完熙) (서울, 1905~1964) ▲ 1924.10 기자, 1925. 5 퇴사.〔서울신문 편집국장).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柳完熙
▲ 1905년 경기도 용인 출생
▲ 64년 鄕里에서 별세
▲ 24년 10월 동아일보 기자
▲ 25년 동아일보 퇴사 후 현대일보를 거쳐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있을 때 短評을 쓰다가 筆禍사건으로 4개월간 獄苦를 치름
▲ 그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있다가 언론계를 떠나 松山중학교 교장을 역임
▲ 55년 12월~56년 8월까지 서울신문 편집국장.
□ 예고없이 서울신문 편집국장에 발탁
유완희는 일생동안을 언론계와 교육계에 몸바쳐온 언론인자 교육자요. 항상 나라일을 걱정하는 우국지사였다. 훤칠한 키에 근엄하지만 인자한 인간미가 풍기는 자상한 선비였으며 정의감이 강한 편이었다.
성격도 온후하고 부하드을 사랑하는 마음가짐은 항상 따듯한 손길로 어루만져주는 자예로운 어머니 같다는 표현이 더 걸맞을지 모른다.
유원희는 1905년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하였고 64년 향리에서 신병으로 별세, 회갑을 채우지 못하였다. 그는 일제가 설립한 관립 전수학교에서 수학했다.
전수학교는 법률전문학교였으니 후일의 경성법전 지금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전신격이라 할수 있다. 전수학교를 나오고도 관계로 나가지 아니하고 24년 10월 민족지인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다. 원래 그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항정신이 강하였던 우국지사였으며 법률연구보다는 문학에 취미를 더 만힝 가졌으므로 일본기관의 관리보다는 신문기자를 택했던 것 같다.
동아일보에서는 ‘철필(鐵筆)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25년 5월에 그만두고 시대일보에 잠시 기자로 있다가 조선중앙일보로 옮겼으나 단평을 쓰다가 필화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4~5년 동안 근무했다. 문학을 좋아했기에 기자로 있으면서도 이따금 항일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그때는 이 나라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주장하는 편이 있어서 민족주의적인 문인들과 대립되기도 했다. 그는 프로문학 단체에 가담하였지만 그렇다고 공산주의자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그때의 조류에 휩쓸려 동조했었던 것 같다. 조선일보를 그만둔 후에는 고향인 용인에서 농촌계몽이 힘썼고 8.15해방과 6.25동란을 그곳에서 겪었다.
그러다가 55년 12월14일 서울신문 편집국장으로 취임했다. 서울신문에서는 삼동설한 몹시도 추웠던 그해 섣달중순에 사전 예고도 없이 편집국장 경질이 있었는데 모든 사원들은 인사발령 방이 붙은 것을 보고서야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임 조동훈 편집국장은 취임 1년 2개월만에 뚜렷한 이유도 없이 물러나게 된 것이다.
그때는 노동관계 법령도 없었고 물론 지금과 같은 노동조합도 없어서 편집국장 뿐만 아니라 기자들과 모든 회사원들의 인사문제는 경영자들의 의사에 따라 독단적으로 좌지우지 되곤 하였다. 특히 정부측의 간섭이 많았던 서울신문읙 경우는 유별나게 인사교체가 심했다. 어쨌든 회사의 인사명령이니 유완희는 곧바로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유완희의 기용에 관하여는 두갈래의 해석이 있었다. 하나는 정부관계기관에서 추천했다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사장인 정등운이 발탁했다는 이야기다. 사장 정등운은 원래 감리교 목사였는데 당시 공보처장 갈홍기와 같은 고향 사람이고 개인적인 친분이 있으며 더구나 종교적인 유대가 깊었었다.
□ 기사 빠뜨려도 노력하라고만 훈계
특히 정등운 사장은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 되기전에 독립촉성국민회 시절에 촉성회 경기도 지부장으로 있으면서 이박사를 도운적이 있다. 그때 경기도지부 산하의 용인군 유지였던 유완희를 알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서울신문 사장이 되자 유완희를 편집국장으로 발탁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장 믿음직스런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유완희가 편집국장 취임석상에서 가장 강조한 것은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나라가 없었던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아이꼬운 꼬락서니와 갖은 괄시를 받아가며 서럽게 기자 생활을 한 우국지사였으니 가슴속 깊이 새겨두었던 이야기를 당연하게 표현하였을 것 같다. 간혹 기사가 빠져도 크게 나무라지는 않고 열심히 노력하라는 훈계를 하는게 고작이었다.
머리는 짧게 깎은 스포츠형이었으며 단정한 옷맵시로 근엄하였고 국장석에 반듯이 앉아 있어 장난꾸러기 기자들도 함부로 응석을 하거나 놀아나지 못하였다. 한가한 오후 시간에는 옛날 기자생활 때의 이야기도 가끔 했다. 그때는 독립운동가의 동태파악과 연락망 감시 또는 독립운동 자금의 흐름 등을 캐기 위한 고등계 형사제도가 있었는데 특히 종로와 동대문경찰서의 움직임이 다른 곳보다 유별났던 것 같다.
그래서 주로 출입하는 곳이 종로와 동대문경찰서였으며 취재한 기사는 지금처럼 팩스나 전화로 송고하지 못하고 원고를 써서 종로서에 맡겨 놓고, 인력거를 타고 다란 곳으로 취재하러가면 신문사에 사환이나 인력거꾼이 원고를 찾아가곤 하였단다. 그래서 기자는 신문사에는 느지막하게 들러 게라나 대장만 확인하는 것이 고작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의 기자들은 독립운동가는 못되어도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지사로서 행세하였고 일반 국민들도 그렇게 평가했어던 것 같다. 신문사 운영이 어려우 제대로 급여를 받지 못해도 후원자들이 있어서 가정생활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으며, 일과후의 대포값도 걱정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하곤 하였다.
한번은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었다. 어느날 기사 마감을 끝내고 대장이 나오기까지 기루한 시간을 기다리던 사회부장 이혜복(현 대한언론인회 회장)이 가지들과 어울려 편닙국 옆방에서 장기를 두고 있었다. 대장이 나왔다는데고 사회부장이 국장석에 입회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차장이나 기자들도 보이지 않았다.(그때는 부·차장급도 대장을 옆에서 지켜보던 시절) 옆방에서 장기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유완희 국장이 직접 옆방까지 찾아갔다. 과연 너덧병이 어울려 장기를 두고 있는데 사회부장이 장을 받으면 차가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국장 왈 “차 떨어져 차 없으면 못 이겨…”라고 훈수까지 했다. 그렇게 인정 많고 자상하던 유완희 국장도 인사 바람이 유난히 많았던 서울신문사에서 취임한지 채 1년도 안된 8개월만인 56년 8월 20일 물러나게 되었다.
사임할 때도 기자들 앞에서 “학교에나 그냥 있을걸… 이제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도 없고… 어떻게 하자…” 하면서 앞일을 걱정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후 역시 향리에서 운명할 때까지 중고등학교 교장으로서 후진 양성을 위해서 노력했었다.
※ 참고자료 : 유광렬의 한국기자상(기자협회보 제62호)
(오응환 전 서울신문 경제부장, ‘柳完熙’, 韓國言論人物史話-8.15前篇(下), 1992)
非科學的의 科學, 隨感隨想, 요새 이때에 생각되는 일
요새 朝鮮에는 넘어도 非科學的의 人物들이 만타. 소위 우리 同志라는 사람들 가온대에도 그런 이가 잇다. – 적어도 나만은 그럿케 생각한다. – 왜 그러냐하면 그들은 다만 理論이 事實을 展開식힐 줄만 알고 事實이 理論을<81> 胚胎하는 줄은 몰으는 까닭이다.
둘에다 둘을 加하면 넷이 된다. 酸素에다 水素를 注合하면 물이 된다. 그러나, 둘과 둘를 따로 떼여 놋코 보면, 그것은 어데까지 둘식 둘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요, 결코 넷은 아니다. 그와 맛창가지로 酸素와 水素와도 이것을 따로 떼여 놋코 보면 결코 물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어대까지 酸素와 水素와의 별다른 물건으로써 存在하는 것이다.
우리의 갓는 그 엇더한 劃策이 客的情勢를 움즉인다는 것만 알 것이 아니라 도리혀 우리가 客的情勢가 우리에게 그 엇더한 劃策을 갓도록 하고 그 劃策이 다시 客的情勢에 대하야 複式으로 活動한다는 것도 잘 알어야 한다. 넷을 놋코 둘로 나누어 보아서 비로소 그것이 둘과 둘의 結合인 것을 알고 물을 놋코 分析하야보아서, 비로소 그것이 酸素와 水素와의 合成體인 것을 證明할 수 잇는 거나 맛창가지로… … .
치위는 몰아 온다! 눈보라는 닥처 온다! 하날에는 바람소리 – 따에는 어름장 – 그러나 우리에게는 먹을 것이 업다. 입을 것이 업다. 몸담을 곳이 업다. 果然 우리는 엇더케 또 이 모즌 겨울을 넘겨야 할 것이냐. 그러나 언제까지나 부르짓고만 잇슬 것인가. 울고만 잇슬 것인가. 생각고만 잇슬 것인가. 다 소용업다! 거리로 나오라! 나와서 웨치고 直接 現實과 싸워보라! 理論은 – 劃策은 事實以後읫것이니… … .
둘과 둘의 結合이 넷이 되고 酸素와 水素의 合成이 물 되는 것을 생각지 말고 넷을 놋코 둘노 나누어 보고 물을 놋코 原子律에 딸아 酸素와 水素와를 分離하야보라!<82>
(유완희, ‘非科學的의 科學, 隨感隨想, 요새 이때에 생각되는 일’, 별건곤 1927년 12월호)
나의 墓地銘
無始無終-살어서 보람이 없이 지났으매 죽어서 나믐이 있기를 어찌 바라리? 그러나 말없이 지나는데 누가 있어 탓하랴? 沈黙은 오늘이 가진 最高最大의 哲學! 사람의 일생이란 永遠과 永遠을 接續시키는 한 意識的 連鎖線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어늘 이 짧은 旅路에서 소리치면 얼마나 소리치고 날뛰면 얼마나 날뛰랴? 그러나 旅路에 맺는 꿈일사록 더욱 記憶에 새롭나니 沈黙은 沈黙일지어정 생활이나 마음에 있어 늘 刹那의 緊張-瞬間의 深刻을 잃어서는 않될 것이다. 그대들은 잠자는 獅子를 아는가?
묵은 記憶의 한토막
(유완희, ‘나의 墓地銘’, 삼천리, 1936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