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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동아일보 사람들- 오재경

Posted by 신이 On 12월 - 19 - 2018

 

오재경(吳在璟, 1919~2012)은 황해도 옹진 출신으로 일본 릿쿄대학교(立敎大學校)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36세 젊은 나이에 이승만 대통령의 공보실장(公報室長)으로 발탁됐다. 5.16 직후인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부(公報部)장관을 역임했다. 1977년부터 동아일보 이사로 봉직했고 1983년 동아일보 제16대 사장에 취임했다.

오 사장은 취임사에서 “동아의 영광은 고난의 역사로 빛난다. 영광이란 고난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바로 영광”이라며 동아일보가 가야 할 방향을 역설했다. – 출처: 동우 제155호 (1983년 2월)

 

사장 오재경(吳在璟) 83. 2~85. 2
이사 오재경(吳在璟) 77. 2~83. 2

(역대임원·간부일람, 동아일보사사 5권, 동아일보사, 1996)

 

 

 

 

본사주총(本社株總) 임원(任員) 개선
대표이사 사장(代表理事社長) 오재경(吳在璟) 씨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는 28일 제57기 정기 주주총회를 열고 김상만(金相万)씨를 명예회장(名譽會長)에 재추대했다.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는 또 이날 주총에 이어 열린 이사회에서 대표이사 회장(代表理事會長)에 김상기 사장(金相琪社長), 대표이사 사장(代表理事社長)에 오재경 이사(吳在璟理事)를 각각 선임하고 이사(理事) 및 감사(監事)를 다음과 같이 개선했다.

◇이사(理事) ▲부사장(副社長) 김성열(金聖悅) ▲주필(主筆) 전무이사(專務理事) 권오기(權五琦) ▲전무이사(專務理事) 김병관(金炳琯) ▲이사(理事) 신용순(申用淳)(편집국장(編輯局長)) ▲〃 박오학(朴五鶴)(기획실장(企劃室長)) ▲〃 송수항(宋壽恒)(판매국장(販賣局長)) ▲〃 구자경(具滋暻)(비상임(非常任)) ▲〃 현영원(玄永源)(〃) ▲〃 김상겸(金相謙)(〃) ▲〃 이상혁(李相赫)(〃)
◇감사(監事) ▲송영수(宋英洙)(비상임(非常任)) ▲송갑호(宋甲鎬)(〃)
◇고문(顧問) 김기택(金基澤)(상무대우(常務待遇))

오 사장 약력(吳社長略歷)
▲일본 릿쿄대 졸(日立教大卒) ▲명예문학박사(名譽文學博士)(계명대(啓明大) ▲공보실장(公報室長) ▲공보부장관(公報部長官) ▲국제관광공사 총재(國際觀光公社總裁) ▲기독교방송 운영이사장(基督教放送運營理事長) ▲언어교육 이사장(言語教育理事長) ▲국제(國際)로타리 차기 이사(次期理事) ▲ 동아일보 이사(東亞日報理事) (64세)

(동아일보 1983년 3월 1일자 1면)

 

〃민중(民衆)과 함께 살면서 자유(自由)·권리(權利) 확대 최선〃 본사(本社) 16대(代) 오재경(吳在璟) 사장 취임식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제16대 사장 취임식이 3일 오전 8시 별관회의실에서 김상만(金相万) 명예회장과 김상기(金相琪) 회장을 비롯, 임원 및 간부사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제16대 사장에 취임한 오재경(吳在璟) 사장은 취임사에서『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이를 근거로 보다 나은 내일을 창조해 나가는 자세로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을 남김없이 불태워 그 재가 만족의 밑거름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吳) 사장은『고난 뒤에 영광이 오는 것이 아니고 고난 그 자체가 영광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동아일보(東亞日報)는 민중 속에 살며 민중 누구나 참다운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자유와 권리를 나누어 주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吳) 사장은 또『종은 소리를 내야 종이며、노래는 노래 불러야 노래이며、사랑은 사랑을 해야 사랑인 것처럼 동아일보(東亞日報)는 이 시대의 민중들이 갈망하는 바를 충족시키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1983년 3월 3일자 11면)

 

 

[이달의 얼굴] 동아일보사 사장 오재경 씨

폭넓은 社會活動、「10大主禮」名士錄에
長官 在職時 r言論人 淨化退職」막아준 일화도

제16대 東亞日報社長에 취임한 竹圃 吳在環씨는 官界 言論界 宗敎界 등 社會 각 분야에서의 폭넓은 활동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언론계 일각에서는 그의 취임에 다소 의외라는 반응도 없지 않는 듯 하나 吳 社長은 自由黨 政權아래서 公報室長과 5.16 직후 公報部장관을 지냈을 뿐 아니라 70年代 초반 基督敎放送 社長으로 4년간 재직했으며 東亞日報社의 理事로 오랫동안 일해 왔기 때문에 결코 言論界에 생소한 인물은 아니다.
그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유능한 行政家이자 관리자이며 사회봉사활동가이다.
1919년 黃海道 옹진에서 吳澤寬 목사(제헌의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日本에서 중학과 立敎大學經濟學部를 졸업했다. 그가 대학 졸업 후 처음 취직한 직장은 8.15 해방 전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화신백화점이었다.
당시 옹진郡에서 유일한 大學 졸업생이었던 그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백화점 店員으로 취직 寶場에 서서 손님을 맞게 된 것이다.吳 社長은 『화신의 주인인 朴興植 씨를 대리해서 그 자리에 서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일했더니 3개월마다 승진의 기회가 주어지더라』고 당시를 회상했는데 백화점 주인이 되고자했던 그의 꿈은 8.15 해방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1945년 美軍政 아래서 관리생활을 시작한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 일처리와 탁월한 행정 능력이 돋보여 36세의 弱冠에 李承晚 대통령의 公報室長으로 발탁되었고 뒤이어 5.16 직후인 1961년에는 公報部 장관을 역임했다. 公報室長 당시 李起鳩 씨가 그에게 京鄕新聞을 폐간 시킬 수 없느냐고 묻자 그는 不法은 不法으로 해야지 法을 가지고 不法을 지탱할 수는 없다고 답변,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나온 얘기는 유명하며 5.16 직후 最高會議에서 淨化대상 언론인의 명단을 公報部 장관에게 내려 보냈을 때 「오늘의 不正腐敗는 어느 한 두 사람에게 그 책임을 묻기보다는 국민 모두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퇴직을 막아준 일도 있다.
아뭏든 그는 竹圃라는 雅號가 말해 주듯 대쪽처럼 곧고 事理가 분명한 선비형이다. 그는「隨想 22年」과 r竹圃文集」이라는 두 권의 수필집을 갖고 있다.
그는 1970년대 초반 基督敎放送 운영이사장(사장)으로 근무하던 4년동안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放送프로그램의 거의 전부를 청취, 일일이 시정사항을 지적하는 열성을 보였으면서도 무보수로 근무했다고 한다.
그러나 吳 사장의 인간을 말함에 있어 그의 言論관계 경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國際觀光會社 총재로서 우리나라의 관광발전에 크게 기여한바 있는 그는 목사의 아들로 현재도 교회 長老이며 6백만 信徒를 모았던 빌리 그래함 목사의 여의도광장 集會를 조직한 독실한 基督人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YMCA 理事、大韓體育會 부회장、失明豫防協會長、韓國地域社會學校後援會 이사장、韓國장미회 회장 등의 직책이 말해주듯 그가 손을 댄 社會活動의 범위는 너무나 넓다. 그리고 國際로타리운동에서도 그의 탁월한 능력이 발휘되어 로타리의 IOC 委員이라고 할 수 있는 次期 理事에 선출되는 영광도 누렸다.
그가 이렇게 광범한 사회활동을 벌일수 있게 된 데에는 하루 24시간을 25時로 만드는 精力的인 추진력과 他人에의 奉仕를 직업으로 생각하는 신앙심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20년동안 월급 받는 자리에 앉지 않았는데도 뒤에서 소리없이 집안 살림을 꾸려나간 부인 申載德 여사(피아니스트 전 梨大 音大 학장)의 內助의 공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깨끗한 私生活과 명연설 솜씨 때문에 가장 인기있는 「10大主禮」의 한사람이며「7대 베스트드레서」로 꼽히기도 하는 그의 슬하엔 아들(29) 하나를 두고 서울 惠化洞 자택에서 살고 있다.〈仁〉 ‘

(‘이달의 얼굴- 동아일보사 사장 오재경 씨’, 신문과방송, 1983년 3월호)

 

 

[명복을 빕니다] 오재경 前 동아일보 사장

 “소리내야 종” 독재 맞서 언론수호… 국내 최초 ‘동아문화센터’ 설립도

오재경 전 동아일보 사장이 27일 정오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3세.

고인은 1919년 황해 옹진군에서 오택관 전 제헌국회 의원의 외아들로 태어나 일본 릿쿄(立敎)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자유당 정부 시절인 1956년 37세의 나이에 공보실장에 임명됐다. 1961∼62년 공보부 장관, 1970∼74년 기독교방송 운영위원장, 1983∼85년 동아일보 사장, 1985년 한국로타리총재단회의 의장을 지내며 언론발전과 사회봉사활동에 힘썼다.

고인은 1977∼1985년 동아일보 이사와 사장으로 재직하며 군사정권의 탄압 아래서도 언론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소신을 여러 차례 피력했다. 1983년 3월 3일 사장 취임사에서 고인은 “고난 뒤에 영광이 오는 것이 아니고 고난 자체가 영광”이라며 “종은 소리를 내야 종이며, 노래는 노래 불러야 노래이며, 사랑은 사랑을 해야 사랑인 것처럼 동아일보는 이 시대의 민중이 갈망하는 바를 충족시키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자”라고 역설했다. 이 취임사는 3월 7일자 본보에 ‘독자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됐다. 5·16 군사정부 시절 첫 민간인 출신 공보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현역 언론인 40여 명을 해직시키라는 상부의 지시를 거부한 일화도 있다.

고인은 다양한 문화사업으로 문화적 토양을 마련하는 데도 기여했다. 1978년 동아일보 이사회에서 고인은 “평생교육의 장이 필요하다”며 문화센터 설립을 처음 건의했다. 국내 문화센터의 효시인 동아문화센터는 1981년 10월 2일 출범한 이래 대표적인 문화 배움터로 자리매김했다. 공보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1962년에는 프레스센터를 설립해 언론문화 발전의 기틀을 닦았다.

노년에는 사회봉사활동에 진력했다. 장애자재활협회 부회장, 한국로타리총재단회의 의장, 주한 미국 연합봉사기구 명예회장 등을 지내며 사회의 그늘진 곳을 밝히는 데 힘썼다. 2007년 미수(米壽)를 맞아 펴낸 ‘로타리, 나의 보람’ 출판 기념회에서 고인은 “봉사를 통해 내게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한 로타리의 어제와 오늘이 고마워서 이 글을 남겼다”고 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보희 씨(한국사회정보연구원장)와 외아들 종열 씨(국제로타리 3650지구 국제대회 참가촉진위원장), 며느리 조혜경 씨(명지전문대 음악과 교수)가 있다. 빈소는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8호실, 발인은 30일 오전 7시 반이다. 장지는 경기 의정부시 고산동 가족묘원.   

민병선 기자

(동아일보 2012년 6월 28일 A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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