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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동아일보 사람들- 양효손

Posted by 신이 On 12월 - 19 - 2018

 

양효손(梁孝孫, 1911~납북)은 평남 강서 출신으로 중앙고등보통학교와 일본 중앙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독립운동가 양기탁(동아일보 편집고문)은 1922년 만주로 탈출하면서 장남 효손을 동아일보 대주주 인촌 김성수 선생에게 맡겼다. 양효손은 일본 유학시절 1933년 12월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인 부친 양기탁으로부터 밀령을 받고 일본유학생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려다 발각돼 조사를 받았다(동아일보 1934년 6월 17일자). 1938년 대학을 졸업한 뒤 다음해 10월부터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로 활약했으나 1940년 8월 동아일보 폐간으로 사직했고 해방 후엔 한민당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6․ 25전쟁 때 납북됐다.

 

양효손(梁孝孫) (강서, 1911~ ) ▲ 1939.10 사원(경제부), 1940. 8 폐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41 41권 일본 · 미국보도기사 > 일본보도기사 > 160. 재경 조선학생의 불온계획 폭로, 자산가의 자식도 참가, 수괴 3명 검거

160. 재경 조선학생의 불온계획 폭로, 자산가의 자식도 참가, 수괴 3명 검거

[旣報] 경시청 內鮮課가 해외의 불평 조선인과 연락, 불온한 계획이 있는 분자를 검거한 사건은 16일 대체로 조사를 종료하여 그 진상이 다음과 같이 판명되었다. 사건의 주모자로서 검거 중인 조선인은 本鄕區 眞砂町 25 眞成館 하숙, 明大 專門部 법과 중도퇴학 韓永協(26세), 동 中央大學 법과 2년 梁孝孫(28세), 明大 전문부 법과 출신 崔年壽(23세)의 3명이다. 이 중 梁은 上海에 살고 있는 上海임시정부의 위원장 梁起鐸의 장남으로 아버지의 밀명을 받고 작년 연말 무렵부터 上海의 불령단에게 보낼 투사를 물색한 결과 같은 하숙인 한에게 눈을 돌려 동인의 승낙을 받고 지난 3월 12일 東京 출발 서쪽으로 갔다.

이보다 앞서 일당은 上海 잠입 도중 관헌의 경계선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경찰서장의 증명서를 소지하는 것이 득책이라고 여겨 서장의 인감 위조를 생각해내고 조선 함경남도 홍원서장의 인감을 本鄕區 眞砂町 10 芦澤印鋪 芦澤芳雄 집에 의뢰하였다. 이 점포에서는 이를 괴이하게 여겨 本富士署에 진정함으로써 단서를 잡아 內鮮課에서는 上海로 향하던 도중인 한영협을 名古屋에서 붙잡았고 이어서 최년수을 검거했다.

최는 조선에서 金□成金으로서 유명한 崔昌學 씨의 장남으로 검거 당시에는 경성의 본가에 귀택 중인 것을 붙잡아서 경시청에서 급행한 吉田 警部補 등에게 연행되어 귀경하였다. 최년□은 한 및 양 두 사람이 계획을 털어놓자 이에 찬성하였고 일당은 최의 본가가 600만 圓의 대 자산가인 것을 노리고 향후에 최에게서 군자금을 끌어낼 계획이었다. 또 최는 영국행 준비가 되어 있어서 便船도 예정되어 있었다.

 모두 송국

조선 불온사건에 대해 경시청 內鮮課에서는 內務省 保安課와 협의한 결과 검거자 중 사건의 중심에 있는 주모자 3명을 送局하기로 결정하고 17일 榎本 內鮮課長은 東京지방검사국에 가서 思想係 戶澤 부장과 협의를 하였다.

· 『朝日新聞』(東京版), 1934년 6월 17일.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41 41권 일본 · 미국보도기사 > 일본보도기사 > 161. 上海임시정부와 결합 투사 양성의 조선인단, 암약한 3명을 검거

161. 上海임시정부와 결합 투사 양성의 조선인단, 암약한 3명을 검거

경시청 內鮮課에서는 올봄부터 재경 불령선인으로서 上海임시정부의 원조를 목적으로 암약하고 있는 자가 있다고 탐문하고 활동한 결과, 本所區 眞砂町 25 眞盛館 댁 中央大學 법과 2년생 梁孝孫(28세), 明大 전문부 법과 중도퇴학 韓永協(26세), 明大 졸업 崔年壽(25세)의 3명을 검거 조사하고 있다. 梁은 전부터 알고 있던 上海임시정부 간부 梁起鐸의 의뢰를 받고 작년 말부터 투사가 동이 난 임시정부에 투사를 보낼 목적으로 책모, 앞에 기재한 韓을 책임자로 삼아 3월 12일 上海에 파견하기로 결정, 이 여비를 친구인 조선 京城金成金으로 오륙백만의 자산가라고 일컫는 崔昌學의 장남인 앞의 최를 공명자로서 우선 30원을 내게 하였다. 그런 다음 착착 준비 중인 것을 출발 직전인 지난 3월 11일 먼저 韓을, 12일 梁을, 이어서 경성에 귀향 중인 崔를 내선과장이 그곳에 출장, 조사한 것이다.

· 『讀賣新聞』(夕刊), 1934년 6월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

 

 

 

[學敎通信] 계동(桂洞) 막바지 중앙고보(中央高普)

양효손(梁孝孫)

계동(桂洞) 막빠지에 한울을 뚜을뜻이 놉피 서잇는 중앙(中央)은 경성시가(京城市街)를 나려다보며 웅장(雄壯)히 서잇슴니다. 그리고 아츰마다 박창하 선생(朴昌夏先生)님의 인도(引導)로 여러 가지의 운동(運動)을 하고 울창(欝蒼)한 뒤산(山)으로 불어오는 조흔 공기(空氣)는 우리를 웨싸고 잇슴니다. 저의 학교(學校)는 금요일(金曜日)마다 8백건아(八百健兒)의 우렁찬 소래로 교가(校歌)를 부름니다. 이러한 뒤 각각(各各) 자기반(自己班)에 드러가 공부(工夫)하기 시작(始作)함니다.

생도(生徒)들은 견인부발(堅忍不拔)의 주의(主義)와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정신(精神)으로 자기(自己)의 할바 의무(義務)를 다하며 어대까지던지 서로 조력(助力)하야 굿은 단체적생활(團體的生活)을 하며 따라서 자기(自己)의 수양(修養)을 꾀하는 동시(同時)에 저의는 학교(學校)의 교풍(校風)을 우리로서의 스스로 진흥(振興)을 도모(圖謀)함니다. 이리하야 우리는 가일층(加一層) 애교심(愛校心)을 가지고 축일(逐日) 새 학과(學課)를 대(對)함니다.

또 저의 학교(學校)는 운동(運動)도 잘함니다. 그 중(中)에도 야구(野球)는 금년(今年) 전선중학야구대회(全鮮中學野球大會)에는 석패(惜敗)이엿스나 내년도(來年度)에는 필승(必勝)을 기약(期約)하고 선수(選手)는 열심(熱心)에 노력(努力)을 가(加)하야『코취』서상국선생(徐相國先生)님의 열성(熱誠) 깁흔 지도(指導)아래서 맹렬(猛烈)히 연습(演習)을 하고 잇슴니다. 선수중(選手中)에도 김수영군(金壽永君) 갓흔 전조선(全朝鮮)의 야구계(野球界)를 용동(聳動)식킬만한 탁월(卓越)한 선수(選手)가 잇슴니다.

저의 학교(學校)는 매월(每月) 일차식(一次式) 교내현상웅변대회(校內懸賞雄辯大會)를 개최(開催)하고 백남규 선생(白南奎先生)님의 심판(審判)이 잇슴니다. 그가운대는 자미(滋味)가 진진(津津)하는 물어급여흥(物語及餘興)도 잇슴니다. 일전동대회(日前同大會)에는 신임금군(申任今君)이 일등(一等)의 월계관(月桂冠)을 바덧슴니다. 이리하야 장차(將次) 우리 학교(學校)는『데모스데네스』와『소진(蘇秦)』과 갓흔 일대웅변가(一大雄辯家)를 양성(養成)하야 은연중(隱然中) 아름다운 중앙(中央)에 색채(色彩)를 띄우고 잇슴니다.

(동아일보 1927년 9월 10일자 3면)

 

 

상해(上海)의 밀령(密令)띤 대학생이명피체(大學生二名被逮)

경시청내선과(警視廳內鮮課)에서 취조(取調)

【동경전화전통】지난 3(三)월 11(十一)일 본부사서(本富士署)에서 본행구 진사정 적야인판점(本鄕區眞砂町荻野印判店)에 함남 홍원경찰서장(洪原警察署長)의 위조인판을 주문한자가 잇는것을 알고 동서의 형사가 미리부터 지키고 잇을 지음 거동이 수상한자가 그 인판을 차즈러 왓으므로 어렵지 않게 체포하야 경시청 내선과(內鮮課)로 부터 출장하야 취조한 결과 명대전문부(明大專門部)학생 한 장협(韓長協)(26)이와 중대법과(中大法科) 양효손(梁孝孫)(28)으로 판명된바 의외에도 작년 12(十二)월 전후 3(三)회 동안이나 상해 ○○부의 간부 양기탁(梁起鐸)으로 부터 상해에는 투사가 부족하므로 일본내지에서 투사를 보내달라는 밀서가 온것을 발견하야 경시청 내선과에서는 더 한층 긴장해 가지고 취조를 더욱 엄중히 하엿다.

그 결과 전기 양효손은 적당한 인물을 물색한 결과 명치대학 중도 퇴학생 한장협(韓長協)을 택하야 상해로 파견할 작정인데 신원증명서가 필요한 관계로 여러가지로 궁리한 결과 함남 홍원경찰서장의 인장을 전기 인판점에 주문한 것인데 또 다시 여비가 문제되어 친구인 명치 대학생 최창학(崔昌學)씨 장남 최연수(崔年壽)로 부터 30(三十)원을 받은 사실이 판명되엇으므로 다시 최연수와의 관계를 목하엄중취조중이다.

(동아일보 1934년 6월 17일자 2면)

 

 

 

만주몽강북지(滿洲蒙疆北支)의 산업(產業) (上)
비약적(飛躍的)인 발전상역연(發展相歷然)
양효손(梁孝孫)

(一)、만주국(滿洲國)의 산업(産業)

만주(滿洲)는 동양(東洋)의 빨칸이라고도하고 또 동야(東亞)의 화약고(火藥庫)라고도 평론가(評論家)는 말하엿다. 그만큼 만주(滿洲)는 중요(重要)한 곳이엇는데 대동원년(大同元年)(昭和7年) 3月1日에 왕도구현(王道具現)의 일국가(一國家)를 창조(創造)하야 민족협화기회균등(民族協和機會均等) 문호개방(門戶開放)의 신정치형태(新政治形態)를 수립(樹立)하야 세계역사상(世界歷史上) 신기원(新紀元)을 지엇다.

그리하야 만주건국이래(滿洲建國以來) 8년간(八年間)에 다방면(多方面)으로 비약적발전(飛躍的發展)을 하여왓는데 산업방면(產業方面)으로는 어떠한 역할(役割)을 하엿는가?

무통제(無統制)한 자본주의경제(資本主義經濟)의 폐해(弊害)에 감(鑑)하야 자본주의경제(資本主義經濟)를 수정(修正) 국가통제정책(國家統制政策)을 이용(利用)하엿다. 그리고 국민전체(國民全體)의 이익(利益)과 국방강화상산업정책(國防强化上產業政策)을 세웟다. 그리하야 강덕4년(康德四年)으로부터 동8년(同八年)까지의 산업5개년계획(產業五個年計劃)을 세워 종합적(綜合的)인 생산력확충(生產力擴充)에 매진(邁進)하고 잇다. 이것도 지나사변이래(支那事變以來) 수차(數次)의 수정(修正)을 부득기(不得己)하게되어잇는데 수정만주산업5개년계획(修正滿洲產業五個年計劃)에 의(依)하면 총자금8억원중(總資金四十八億圓中)에서 38억원(三十八億圓)은 중공업부내(重工業部內)에 집중(集中)되고 잇는데 최근(最近) 제3차(第三次) 수정(修正)으로 60억원계획설(六十億圓計劃說)이 전(傳)하고 잇다. 구체적내용(具體的內容)은 대부분(大部分)이 광공업부문(鑛工業部門)에 속(屬)한다고 한다.

봉건적경제조직(封建的經濟組織)으로부터 자본주의적단계(資本主義的段階)에 드러간지 얼마안되는 만주국(滿洲國)이 이러한 막대(莫大)한 자금(資金)이 과연(果然) 원활(圓滑)이 조달(調達)될는지는 내지(內地)의 자본축적(資本蓄積)의 빈곤(貧困)이 해결(解决)되어야만 그 자금(資金)이 적극화(積極化) 될것으로 추상(推想)된다.

(…)

(‘滿洲蒙疆北支(만주몽강북지)의 產業(산업) (上)’, 동아일보 1940년 1월 7일자 6면) 

 

滿洲蒙疆北支(만주몽강북지)의 產業(산업) (中) (동아일보 1940년 1월 9일자 6면) 

滿洲蒙疆北支(만주몽강북지)의 產業(산업) (下) (동아일보 1940년 1월 12일자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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