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56. 동아일보 사람들- 양재하

Posted by 신이 On 12월 - 19 - 2018

 

양재하(梁在厦, 1906~납북)는 경북 문경 출신으로 1930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조선일보 사회부기자가 된다. 1933년에 동아일보에 입사해 취재 편집을 하다 논설위원이 된다. 동아일보 폐간 후 1941년 종합월간지 ‘춘추’를 창간, 39호까지 발행했으며 해방 후인 1950년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나 6.25전쟁 중 납북됐다.

 

양재하(梁在厦) (문경, 1907~1950 납북) ▲ 1933.10 사원(경제부, 사회부), 1940. 8 폐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健初 梁在厦

▲ 1906년 7월 6일 경북 문경군 산북면에서 출생
▲ 50년 7월 납북
▲ 30년 서울법전 졸업, 조선일보 입사(사회부 기자)
▲ 33년 동아일보 기가 겸 논설 집필
▲ 41년 조선춘추사 사장, 월간 <春秋> 창간
▲ 45년 <新朝鮮報> 창간
▲ 46년 한성일보 창간, 주필 · 편집국장 역임
▲ 47년 서울신문학원 강사
▲ 50년 제2대 국회의원 당선.

□ 민족문화 유지에 힘써

건초 양재하는 일제때는 조선, 동아일보 기자로 민족혼의 환기와 민족문화 유지에 힘쓰고 해방 후에는 한성일보를 창간하여 혼란기의 국민여론 기도와 자주민주국가 창건에 앞장선 한국언론계의 거목이었다. 필자가 건초를 모시고 일한 것은 한성일보 시절의 일이었다.
건초는 1906년 7월 6일 경북 문경군 산북면 약산리에서 부친 양세환과 모친 조구산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비교적 유족하고 일찍이 개화사상에 눈떴던 부친의 뜻에 다라 신학문을 배우고자 집에서 70리 떨어진 문경읍내의 친척집에서 유숙하며 소학교를 다녔다. 이 학교의 제1회 졸업생인 그는 1919년에 서울의 제2고보(현재의 경복고)에 진학했다. 4년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건초는 법관이 되기를 바라는 부친의 뜻에 따라 경성법학전문에 진학했다.
그가 법전 재학 당시에 민족운동은 고조되고 있었다. 27년에 김규식이 남경에서 조직된 피압박민족연합회 회장에 취임하고, 국내에서는 조선공산당 조직에 대비하여 신석우, 한재홍 등이 민족단일전선을 위하여 신간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28년에는 온 민족을 들끓게 했던 광주학생사건이 발생했다. 건초는 끓어오르는 민족애를 불태우며 민족지도자들의 지도아래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전 조선학생회 대표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유학생 친목회 간사로 일했다.

□ 부친의 뜻 어기고 조선일보 기자로……

30년에 법학전문을 졸업한 건초는 부친의 뜻대로 법관이 되면 독립운동가들을 기소, 재판하는 일을 해야하므로 그것을 뿌리치고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한다.  당시 사장은 신석우, 부사장 겸 주필에 안재홍, 편집국장은 한기악 등의 진용이었다. 그리고 사회부장 김기진(28세) 아래 박윤석(29세·총독부, 용산서, 철도국담당), 김형석(30세·도청, 경성부청, 체신국담당), 김기림(25세· 종로서, 동대문서, 사회단체담당), 이원용(32세· 운동부, 본정서담당) 그밖에 양재하(25세)가 재판소, 서대문서, 형무소 등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건초는 특종기사를 많이 쓴 민완기자였다고 한다. 해방후 산성일보 편집국장시절 신입기자들의 오리엔테이션이 있을때면 그는 자신이 재판소에 출입하던 시절 특히 사상범을 재판할 때마다 일본인 법관들이 취재를 막곤하자 휴지통을 뒤져 특종을 빼어내서 쓰고, 때로는 쓰레기통 뒤에 숨어서 취재하기도 했다는 등의 무용담을 자주 들려주곤 했다. 그러면서 언론자유가 보장된 시대에 관청의 PR기사 따위나 쓴다는 것은 기자로서의 수치라고 힐책하기도 했다.
그런데 법전재학시절부터 사귀던 이화여전 문과 출신의 소년잡지 <아이생활>사 박길래 기자와의 염문이 알려지자 완고한 그의 부친은 박기자와의 결혼반대는 물론, 신문기자 생활마저 집어치우라고 강요한다. 그는 하는수없이 도쿄제국대학 신문학강좌 청강생으로 등록하고 신문사에서는 도쿄특파원으로 나가있도록 했다. 일본으로 특파된 건초는 신문학 연구에 힘쓰고 각 신문사에서 실무를 익히는 한편 정계인사들과도 폭넓게 교류했다.
32년 4월 재만동포 의연금사건으로 안재홍 사장이 사임하고 조만식 사장에 이어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경쟁관계에 있는 이광수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부사장으로 영입하는 등 회사 간부진이 대폭 바뀌었다. 이 무렵 귀국한 건초는 역시 부친의 완강한 반대로 기어이 신문사를 떠나야 했다고 한다.

□ 사회부기자로 일하며 사설 집필

조선일보를 그만둔 그는 언론에 대한 집념과 사명의식을 차마 버리지 못해 33년 10월 동아일보에 다시 입사한다. 그 무렵 동아는 사장에 송진우, 편집국장대리에 설의식, 정치부장 전장환, 경제부장 고재욱, 사회부장 현진건, 지방부장 박찬희, 조사부장 이여성, 정리부장 박만오, 학예부장 서항석 등의 진용이었다. 동아는 다음해 김성수가 자본금을 증액하면서 조석간제를 단행, 조선과의 본격적인 경쟁시대에 들어간다.
동아에 입사한 건초는 취재도 하고 편집도 했다. 그리고 몇해후 논설반의 일원으로 고재욱(편집국장대리), 서항석, 전장환, 고영환, 전홍진, 장현칠 등과 함께 담당분야의 사설을 썼다.
35년 5월 24일 28세때 그는 부친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오랫동안 사귀어온 박길래와 안재홍의 주례로 결혼했다. 건초는 과감한 취재보도와 예리한 논설로 일본관헌들의 비위를 거슬러 신문지법, 보안법 위반 등으로 여러차례 문초당하고 곤용을 치렀다고 한다.

□ 東亞 강제폐간당시 통한의 폐간사 집필

동아는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36년 8월 27일부터 37년 6월 3일까지 9개월동안 장기정간을 당했다. 그 무렵 기자들은 제때에 월급도 받지못하고 주로 장기, 바둑을 두고 막걸리 등으로 소일하며 편집국을 지켰다한다. 더구나 한겨울 혹한기에도 장작 몇 개비를 지핀 난로가에서 모진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37년에 신문이 복간된 얼마후부터 일제는 대륙침략정책을 확대하면서 조선인 황민화운동을 벌인다. 조선어교육 폐지, 일본어 상용 강요, 창씨개명 요구 등 민족혼 말살에 혈안이 되었다. 일제는 언론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언문지 폐간을 서둘렀다. 39년 들어 총독부의 미하시(三橋) 경무국장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자진폐간을 종용한다. 이에 불응하자 일제는 사건을 조작, 백관수 사장과 임정엽 상무를 구속 문초하며 40년 7월 26일 종로경찰서 사찰과장실에서 중역회의를 열게하고 자진 폐간케 했다. 이때의 울분과 통한을 담은 역사적인 폐간사는 바로 건초가 집필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제의 한민족말살정책에 맞서 여러 가지의 압력엔느 굽히지 않았으며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한다.
동아일보가 폐간되자 건초는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맞서 조선춘추사(朝鮮春秋社)를 창설하고 42년 2월 14일 종합잡지 월간 <춘추(春秋)>를 창간했다. <춘추>라는 제호는 오세창이 쓰고, 국판표지의 조선여인 민속화는 청전 이상범이 그렸다. 창간호인 제2권 1호는 300페이지이고 평시는 200페이지, 구독료는 60전이었다. 편집내용은 대개 전쟁관련 세계정세분석, 경제, 사회문제논문과 학예, 창작 등이었고, 광고는 주로 의약품, 서적, 화장품 등이었다. 특이한 점은 <춘추>라는 제호의 <추춘(秋春)>을 비롯하여 가로쓰기는 모두 우측에서 시작, 좌측에서 끝냈다. 그러나 전쟁말기에 이르러 일제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춘추>지도 제 5권 5호(통권 39호)로 종간했다. 그뒤 건초는 베이징(北京)등지에서 동양정치, 외교사 등을 연구하며 민족해방의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  해방되자 漢城日報 창간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폐망하던 날 여운형, 안재홍 등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양재하, 최익한, 이여성, 김광수 등을 신문위원으로 위촉, 매일신보를 접수하여 해방일보(解放日報)를 발행하려 했다. 그러나 17일, 그때까지 남아있던 일본군의 방해로 좌절되고 말았다. 그후 좌익계의 행방일보, 조선인민보(1945.9.8) 등이 발간되자 건초는 부득이 종로 YMCA회관에서 발행인 김제영, 주간 양재하, 편집위원 조인옥, 남국희 등의 진용으로 신조선보(新朝鮮報)를 창간했다. 그리고 그는 전조선신문기자대회(10.10)를 주재하고 일제 잔재 청산과 국가건설을 위한 “필봉의 재무장”을 강조하며 전투적 언론진의 구축을 촉구했다.
그런데 해방의 기쁨도 채 가시기전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3국외상회의에서 5개년 조선신탁통치안이 결정되면서 46년 봄부터 좌우익진영의 대립은 극에 달한다. 이에 대응하고자 건초는 신조선보는 제101호로 종간하고 서울 태평로의 옛 경성일보(京城日報) 사옥에서 46년 2월 28일 동인지 한성일보를 창간했다. 한성일보는 사장에 안재홍(전 조선일보 사장), 편집겸 발행인 편집국장에 양재하, 인쇄인에 김종량, 주필에 이선근(전 조선일보 편집국장대리), 편집부장에 송지영, 정치부장에 남국희, 사회부장에 김제영, 문화부장에 조충옥 등 쟁쟁한 멤버로 출발했다.
한성일보는 창간사에서 “민족통일과 자주독립국가 완성”과 신민주주의를 표방했다. 건초는 “다시 윤전기 앞에 서서” 제하의 글에서

『경성일보 자리에서 한성일보를 만든다니까 어떤 친구가 “신문쟁이는 할 수 없군!” 한다. 일제가 자랑하던 완비된 시설이 있고 일찍이 가져보지 못한 언론자유가 있으며 또 민세(안재홍) 대선배의 지도가 있으니 현단계에서 지상명령……(중략) 이직도 해결하지 못한 민족통일전선의 완수, 완전한 자자독립의 전취 그리고 민주국가의 건설을 당면과제로 해서 다시 한번 더 윤전기의 소음을 건국행……(이하 未詳)』

라는 결의와 감회를 밝혔다. 그리고 1면에 단평란 “춘로추상(春露秋霜)”을 실어 독자들의 인기를 끌었고, 2면에는 익살스런 “사발통문”란을 두어 시정의 화제를 모았다.
46년에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막(3.2), 조선공산당위조지폐사건(5.15), 대구폭동사건(9.17), 민선입법의원선거(10.28), 남조선 과도입법의원개원(12.12) 등등 역사적인 사건들이 많았다. 한성일보는 정치, 사회 등 시사문제를 보도, 논평함에 있어 동아, 조선일보 등과 더불어 중앙언론의 대표적 신문으로 손꼽혔다. 그리고 각 시도에 특파원을 파견하는 등 기동성 있는 보도를 폈다.
날로 성가가 높아진 한성일보는 다시 튼튼한 재정적 뒷받침을 얻었다. 공진항, 박기효 등이 5백만원을 출자하여 경제보국회의 농민주보(農民週報)를 제작한다는 조건으로 경성일보 시설관리권을 얻어 서울공인사(公印社)를 설립한 것, 그리고 한성일보는 편집, 발행, 인쇄인에 김종량(안재홍 처남), 사장 안재홍, 부사장, 공진항, 전무이사 박기효, 주필 이선근, 편집국장 함대훈 등으로 개편되고 건초는 한때 고문으로 물러났다.
그런데 47년 1월 1일부로 함대훈이 국장직을 사임(47년 4월 19일 군정청 공보처장 취임)함에 따라 건초는 편집국장으로 복귀한다. 2월에 미군정이 남조선과도 정부를 수립하면서 안재홍은 민정장관(民政長官)으로 정부에 들어간다. 이 무렵 많은 신문들이 발간되면서 용지난이 극심했다. 건초는 “언론정화와 새조선의 창건” 제하의 논문에서 『서울의 30개사, 남조선 일대에 70여 일간신문, 통신의 발행으로 용지난이 심하다』고 지적하는 한편 기사를 통해서 『심각한 용지난, 서리만나 문화부문, 배급은 적고 시장에는 경인지가(驚人紙價), 출판은 정식(停息), 신문도 명재궁도(命在窮途)』라고 강력히 경고했다. 정부수립을 앞두고 각 정파에서 신문을 발행, 경쟁하면서 언론의 정도를 위협하게되자 그는 언론의 정화와 용지대책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던 것이다.

□ “정치간섭말라”는 고발기사로 문초당해

정론지가 판치덕 시기에 한성일보는 불편부당한 보도와 공정한 논조로 지식층의 인기를 모았다. 건초는 “공정한 경찰의 조치, 정치간섭 말고 복무충실하라”(7.18)는 고발기사로 당시 경무부장 조병옥의 비위를 건드려 소환 문초당한 일이 있다. 다음날 자매지인 세계일보는 “언론자유 안재호, 한성일보 양재하 편집국장을 문초”라는 기사로 강력히 비난했다. 당시 경찰의 횡포를 짐작할만 하다.
필자는 바로 그 무렵에 한성에 입사했는데 정치부장은 구철회였으며 먼저 입사한 채문식(전 국회의장)이 중앙청을 출입하고 있었다. 얼마후 안재홍은 민정장관직을 사임(1945.6.8)하고 사장으로 복귀했다. 그후 민세가 직접 기명논설을 쓰면서 한성일보의 성가는 더욱 높아졌다. 당시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한성은 동아, 조선, 경향 그리고 부산의 국제신보 등과 함께 한국의 여론을 지도하는 5대 유력지로 꼽혔다.
한편 건초는 48년 6월 24일 조선언론인협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서울시내의 각 신문편집 간부로 조직된 담수회(淡水會) 간사로 있으면서 조선통신 필화사건 등에 관한 당국의 언론대책을 촉구했다. 또 정부의 신문지법안이 발표되자 관이 주필과 경영자, 편집인 등을 임명하는 것 같은 허가제는 절대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성일보는 48년 11월 5일, 주필 양재하, 편집국장 남국희 체제로 개편되고 배대판으로 발행했다. 그런데 연말에 자매지 세계일보는 외군주둔기사 필화사건으로 사장, 김종량, 편집국장 김창엽이 구속되고 다음해(49년) 1월 3일 마침내 허가취소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성일보도 발행인 겸 재정지원자인 김종량이 물러남에 따라 2월 3일부터 부득이 휴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약 7개월동안 휴간한 한성일보는 9월 1일부터 자본금 2천만원으로 새출발한다. 이때 사장은 안재홍, 추필 겸 편집국장에는 성재 이관구였다. 전무이사 이갑수로 개편되면서 건초는 한성일보를 창설한지 4년만에 이 신문과 인연을 끊고 말았다. 그러나 한성은 장내원이 간도 용정의 광명중학출신 중심으로 운영하다가 6.25동란이후 복간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 2대 민의원 당선직후 납북

건초는 언론단체에 관여하는 한편 후배양성에도 힘썼으며 신문학원 본과신설(49.10.10)에 따라 김동성, 설의식, 고재욱, 홍종인, 곽복산(소장), 배성룡, 양주동, 백낙준 등과 함께 학원에 출강했다. 그리고 외교협회 간사, 정치연구회 간사장, 국정교과서 편찬위원, 한국마사회 부회장(학생때 기마선수)등을 역임했다.
한성일보를 떠는 그는 50년 5.30총선때 문경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고, 민세도 평택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두 언론인 출신 정객은 6.25 동란으로 의정활동도 못해본채 납북되었다. 언론계의 두 거목은 이렇게 역사의 전면에서 물러섰다. 그러나 조선일보이래 함께 활동해온 언론계의 두 거목이 남긴 한국언론사의 발자취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건초는 6.25당시 서울시내에 은신중 7월 하순경 양재섭(종제) 수행비서의 인도로 종로 서린동 모음식점 2층에서 한복으로 변장하고 피신하려던 순간 그집 종업원의 밀고로 성남호텔(당시 무교동소재)로 연행당한뒤 납북되었다고 한다.

※ 참고자료 : 한국언론연보, 철필4호, 신문백년인물사전, 조선일보50년사, 동아일보사사, 삼천리, 한국신문사, 한성일보, 춘추지.

(엄기형 전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심의실장, ‘健初 梁在厦’, 韓國言論人物史話-8.15前篇(下),  1992)

 

 

신흥도시행진곡(新興都市行進曲) (其一) 나진편(羅津篇)

7,8호(七八戶)의 한미(寒微)한 농어촌(農漁村)
군함내래왕(軍艦來往)에 꿈을 깨어
시가지 게획령 연기로 재출현
대나진건설(大羅津建設)의 후일담(後日譚)

(一)

◇나진(羅津)에서 양재하(梁在廈)

저 산업혁명(產業革命)은 대기업기구(企業機構)를 가저가고 이 기업의 시설(施設)잇는 곳에는 반듯이 신흥의 도시(都市)가 나타난다. 천연적 자원(資源)이 풍부하고 대자본의 행진(行進)이 급속한 북조선에는 작금에 와서 그 현상이 더욱 현저하고 세게를 풍미(風靡)하는 군수경기(軍需景氣)에 발마추워 더욱 약진을 게속하고 잇다. 여기에 이름지어 신흥도시행진곡(新興都市行進曲)이라하야 흥남(興南)과 나진(羅津)의 그 기구(機構)를 엿보기로 하는 것이다.

함경북도 경흥군 신안면(慶興郡新安面) 한구석에 잇는 조그만한 어촌 나진동(羅津洞)이 재작년 8(八)월 24(二十四)일에 ○○선(○○線)의 종단항으로 결정되자 일약 세게적으로 그 이름을 날리게 된 동시에 이 신흥항구의 경기는 비상하야 수만흔 투기자 실직자는 이곳으로 모이게 되고 세인의 이목은 여기로 집중되엇다.

그러면 그후의 대나진항의 건설공작은 어떠케 되엇으며 또한 오늘의 모든 정황은 어떠한가. 세상사람들의 기억에서 차차 사라저가고 그자선도 안정기에 들어가랴든 이 나진항이 근일에와서 도시게획령(都市計劃令)과 만철의 토지 수용 문제(土地收用問題)로 말미암아 다시 그 자태를 나타내게 되엇으니 이때에 우리는 다시한번 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것이 의의 잇을것이라 하야 실지에서 보고듣고 느낀바를 적기로 하는 것이다。

먼저 나진항의 출세한 유래를 살피면 7,8(七八)호에 지내지 못하는 농어촌(農漁村)으로 수백년동안 그 정조를 보전하야 오든 중 명치32(三十二)년에 영국동양함대(萬國東洋艦隊) 12(十二)척이 이곳을 찾어온 일이 잇엇고 일로전쟁(日露戰爭) 당시에는 일본 상촌함대(上村艦隊)가 로서아『빨틱』함대(艦隊)를 추격하랴고 2(二)일간이나 이 항구에 정박한 일이 잇으며 대정7(七)년 시베리아출병 당시에는 일본군함 47(四十七)척이 입항하야 3(三)개월간 정박한 일이 잇어 군사상으로 먼저 개척을 받아오고 군항의 후보지로 주목되든 끝에 재작년에는 극동의 풍운이 자못 험악하게되자 드디어 종단항으로 나서게 되엇다.

그리고 신흥의 만주와 로서아 조선등의 삼각적 초점(三角的焦點)에 잇는만치 국제적으로 중요한 지대임은 더말할것도 없거니와 그 자리의 천연적 지세가 또한 조선동해안에서 가장 우수한 조건을 가지고 잇다. 항구내의 수면(水面)거리는 동서 4(四)리(浬) 남북6(六)리로서 약2(二)천5(五)백만평 범위내에 선함(船艦)이 자유로 정박할수 잇어 포옹력(抱擁力)이 웅대한 우에만구(灣口)에는 대초도(大草島)와 소초도(小草島)라는 두 섬이 잇어 남풍에 얼어나는 물결을 막고 자연의 방파제(防波堤)가 되엇으며 중간의 두 수도(水道)로 선박은 출입하게 되엇다. 그중에도 서수도는 수심(水深)이 10(十)『메돌』혹은 20(二十)『메돌』에 달하고 항내에도 10(十)『메돌』이상의 깊이로 되어 축항만 완성하면 계선안벽(繫船岸壁)에는 7(七)、8(八)천돈급의 큰 선함도 자유로 게양할수 잇으며 해저는 세토(細土)、사토(砂土)、이토(泥土)의 혼합으로 간만(干滿)의 차(差)도 일(一)피트(呎(척))에 지나지못하고 겨울에는 동결(凍結(동결) 될 염려도 잇으나 일단 동결된 얼음도 바람에 날려가고 축항부두 근방에는 동결되는 일도 드믈다는 것이나 진항으로서의 이름 잇는것이다。

그뿐아니라 육지에는 중앙에 넓은 평지가 잇고 동편에는 연두봉(烟頭峯)、수처봉(秀處峯)이잇어 반도로 되엇고 서편에는 도개봉(道開峯)과 감토봉(甘吐峯)이 흘립하야 서북쪽의 경풍을막고 북쪽에는 또한 평지를 격하야 관동령(舘洞嶺)이 높이솟아 북풍을 방어하고 남쪽은 전기천부의 해만(海灣)으로 되엇다. 또한 동편과 서쪽에는 시내 두줄기가 바다로 흐르고 그중간의 평지에 대나진 도시는 건설되어 가는중인데 이곳은 원래 경원군(慶源郡)의 일부와 온성군(穩城郡)의 일부로써 경원군 해진사(慶源郡海津社)로 되엇다가 온성군 안화사(穩城郡安和社)와 합병하야 경흥군 신안면(新安面)으로 되고 현재는 신매동(新梅洞)、나진동(羅津洞)、간의동(間依洞)、명호동(明湖洞)、신수동(新水洞)、초도동(草島洞)、창평(倉坪)을 병합하야 나진항으로 통칭하게 되엇다.

(신흥도시행진곡(新興都市行進曲) (其一) 나진편(羅津篇)’, 동아일보 1934년 9월 11일자 2면)

 

신흥도시행진곡(新興都市行進曲) (其一) 나진편(羅津篇) (동아일보 1934년 9월 12일자 2면)

신흥도시행진곡(新興都市行進曲) (其一) 나진편(羅津篇) (동아일보 1934년 9월 13일자 2면)

신흥도시행진곡(新興都市行進曲) (其一) 나진편(羅津篇) (동아일보 1934년 9월 14일자 2면)

신흥도시행진곡(新興都市行進曲) (其二)  흥남편(興南篇) (동아일보 1934년 9월 17일자 2면)

신흥도시행진곡(新興都市行進曲) (其二)  흥남편(興南篇) (동아일보 1934년 9월 18일자 2면)

 

 

소작쟁의진원지답사기(小作爭議震源地踏査記)

사야(四野)엔 대맥황(大麥黃)이나
촌촌(村村)은 쟁의(爭議)로 우울(憂鬱)
농지령(農地令) 실시후(實施後) 쟁의(爭議)만 격증(激增)
작인(作人)의 호소(呼訴)와 지주(地主)의 항변(抗辯)은?

대구(大邱)에서… 양재하(梁在夏)

조선에서 획시기적 사회입법(社會立法)이라 할수잇는 농지령(農地令)이 작년 10(十)월 20(二十)일부터 실시될때에 앞으로의 조선 농촌에는 반드시 명랑한 봄이 찾아 올 것을 예기하엿섯다. 그러나 이 기대와는 전연 반대로 반년을 못 지난 오늘에 와서 뜻하지 아니한 소작쟁의(小作爭議)만이 격증하야가고 별서 춘경기(春耕期)를 지내서 이앙기(移秧期)를 맞이 하랴하는 농촌에는 도리혀 우울한 빛을 보게 되엇으니 금년 1(一)월 1(一)일부터 4(四)월말일까지에 전 조선을 통한 소작쟁의 조정신립(調停申立) 건수가 4(四)천건을 돌파하엿고 이 신립은 법창(法窓)에 소송형태(訴訟形態)로 나타난 것이나 기외의 쟁의를 통합한다면 실로 만건을 초과하야 전년 1(一)년간 통게의 수십(十)배에 달하고 잇는 것이다.

이 현상을 어떠한 사람은 말하기를 오래동안 지주(地主)에게 억압을 당하다가 농지령이 나타나므로 말미암아 비로소 호소(呼訴)하는 길을 얻은 까닭이니 소작인의 권익신장(權益伸張)을 위하야 반가운 현상이며 또한 당연한 결과라고도 말한다. 가령 한거름 나가서 그러타고 하드라도 이것은 그만치 농촌에 불안이 잇다는것을 말하는 것이며 사회적 중대 사실임은 틀림없다. 또는 농지령 자체에 허다한 결함이 잇어 법제상(法制上)의 불비를 말하고 혹은 악덕지주와 악 사음(舍音)이 횡행하야 무고한 농민을 못살게 하며 농지령의 운용(運用)을 그릇친다하고 혹은 소작인이 나태하고 무리한행동이 만타는 것을 전한다.

그러면 과연 지주가 다 나쁘고 소작인에 모두 잘못이 잇든가 우리는 여기에 대하야 법제상 이론(理論)을 캐고 정책적 비판(政策的批判)을 나리기전에 실제에 잇어서 농민의 소리를 들어보고 지주의 항변도 또한 참고하여야 하겟다.

물론 그의 근본적대책의 구명은 이 제도 밑에서 잠간 문제삼지 안트라도 이 소작문제는 조선농민의 절대 다수와 관게되는만치 그 영향이 자못 크니 하로속히 해결하여야 할것이오. 설사 장래 조선에는 농공(農工)、광업(鑛業)이 정립(鼎立)된다 하야도 어디까지. 업이 주종(主宗)이 되어 신흥공업(新興工業)의 자원(資源)이 되고 허풍선이 금광경기(金鑛景氣)도 부뜨러가야 할것이매 소작쟁의는 노동쟁의(勞働爭議)보다도 일층 중대성을 띠고 잇고 농정(農政)에도 백년대계(百年大計)의 명안을 세워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야 총독부 당국에서도 이미 작비(昨非)를 느끼고 농지령과 소작쟁의 조정령의 개선안을 지난 도지사회의와 사법관(司法官)회의에 제안하야 연구검토하고 방금 조사연구를 진행하고 잇다하거니와 기자는 우선 소작쟁의가 일어나는 진원지(震源地)를 찾아서 그 적나나(赤裸裸)한 동태를 여러분 앞에 내노흐랴는 길을 떠나게 되엇다.

추풍령(秋風嶺)『턴넬』을 넘엇다고 김천(金泉)에서 잠간 정거한 급행열차는 전조선에서 소작쟁의 건수가 가장 만흔 대구(大邱)로 향하야 다라난다. 차창으로 보이는 들(野)판에는 보리물결(麥浪)이 유곡선(流曲線)을 그려 피곤한 나그네의 눈을 위로하야 주고 별서 씨(種子)를 뿌려노흔 모자리판(苗板)도 간간히 보인다. 사월남풍대맥황(四月南風大麥黃)은 옛이나 이제나 다름없것마는 풍년을 노래하는 포곡(布糓)의 소리는 들이지안코 말성만흔 소작쟁의만이 늘어가다니-

(‘소작쟁의진원지답사기(小作爭議震源地踏査記) ①’, 동아일보 1935년 5월 15일자 2면)

 

소작쟁의진원지답사기(小作爭議震源地踏査記) ② (동아일보 1935년 5월 19일자 2면)

소작쟁의진원지답사기(小作爭議震源地踏査記) ③ (동아일보 1935년 5월 21일자 2면)

소작쟁의진원지답사기(小作爭議震源地踏査記) ④ (동아일보 1935년 5월 22일자 2면)

소작쟁의진원지답사기(小作爭議震源地踏査記) ⑤ (동아일보 1935년 5월 23일자 2면)

소작쟁의진원지답사기(小作爭議震源地踏査記) ⑥ (동아일보 1935년 5월 24일자 2면)

소작쟁의진원지답사기(小作爭議震源地踏査記) ⑦ (동아일보 1935년 5월 26일자 2면)

소작쟁의진원지답사기(小作爭議震源地踏査記) ⑧ (동아일보 1935년 5월 29일자 2면)

소작쟁의진원지답사기(小作爭議震源地踏査記) ⑨ (동아일보 1935년 5월 31일자 2면)

 

 

 

적지(赤地)의 호남순방(湖南巡訪)
송정리(松汀里)에서 본사특파원(本社特派員) 양재하(梁在厦)

오오(嗷嗷)하는 백만대중(百萬大衆)
대겸지옥(大歉地獄)에 직면(直面)
전남피해(全南被害)만 일천만원이상(一千萬圓以上)
한발위학여염여분(旱魃爲虐如焱如焚)

조선미총생산량(朝鮮米總生產量)의 3(三)분1(一)이상을 생산하는 곡창(糓倉)-조선이 자량하는 김제(金堤) 만경(萬頃) 옥구(沃溝) 전주(全州) 나주(羅州) 등 대평야를 독찾이하고 잇는 전나남북도는 방금 60(六十)년래의 처음이라는대 한발(旱魃)로 인하야 왼산하가 흉작기근(凶作饑饉)에서 떨고 잇다.

평균우량(雨量))은 예년의 48(四十八)%에 불과하야 전연 이앙(移秧)을 못한 땅이 2(二)만6천(六千)여 정보에 달하고 억지로 이앙한 것도 말러죽고 면화(棉花) 대두(大豆) 등 전작의 발육도 양호치못하야 4(四)활내지 8(八)활의 감수가 예상되며 지방에 따라서는 거의 전멸상태에 빠진 곳도 적지안타.

그러지안어하도 여러 가지 중압에 눌린 오늘 조선농촌은 풍년에도 반미기근(飯米饑饉)이 오기 쉬운데 이 미증유의 한재는 농촌의 자급경제(自給經濟)를 여지없이 파탄시키고 잇다.

◇|◇

조선에서 인력으로 어떠케 할수없는 자연의 재해라 하면 수재 풍재 상(霜) 박(雹) 충(蟲)재 등 여러가지를 들 수 잇으나 이 어느것이고 한재(旱災)에는 미치지 못한다. 연중행사격으로  닥처오는 수해가 비록 심하다 하드래도 그것은 일시적이오 또 부분적이지마는 한재는 만성적(漫性的)으로 아조 심각한 것이다.

『나일』하(沙)『델라』(三角洲)가 비옥한 것과 같이 조선의 수해는 그것이 지난 뒤에는 도리혀 풍작이 오는수도 잇지마는 초목군생을 죽이고 사람을 말려 죽이는 이 한재는 포악한 그대로 타고 남는 곳에는 아모것도 없다.

시경(詩經)에 잇는 한발위학여염여분(旱魃爲虐如焱如焚)이란 말 그대로이다. 그래서 한발이 잇는 뒤에는 반드시 대기근이 잇엇든 것은 지낸 날 조선역사가 말하는바이다.

◇|◇

그러나 세상에서는 표면에 번듯하는 수,화재에는 눈을 번 듯 뜨면서 이 한재에는 관심이 적다 이 만성적 재해의 인식부족이 이다지도 심하랴?

기자는 먼저 초토에서 우는 전라남북 각군의 이재민을 위문하고 그 신음하는 소식을 전달 코저 호남순방(湖南巡訪))의 길을 떠낫다.

각지의 피해상향은 총독부 농림국(農林局)에서 출장조사한 수자가 이미 보도되엇거니와 그중에도 전라남도가 더 참혹하고 전라남도 중에서도 서해안에 가까운 함평(咸平) 무안(務安)영광(靈光) 라주(羅州) 등지는 문자 그대로 적지화(赤地化) 하엿는데 수도(水稻) 피해가 우심한 군별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함평군(咸平郡) 8할7분감소예상(八割七分减少豫想) 무안군(務安郡) 7할감(七割减) 영광군(靈光郡) 5할감(五割减) 나주군(羅州郡) 5할감(五割减) 영암군(靈岩郡) 5할감(五割减) 담양군(潭陽郡) 5할감(五割减) 장성군(長城郡) 5할감(五割减) 곡성군(谷城郡) 4할감(四割减) 광주군(光州郡) 4할감(四割减) 해남군(海南郡) 3할감(三割减) 기타군 성약(其他郡省畧)

◇|◇

원래 전라남도는 산림과 하천의 분포가 조하서 천수답(天水畓)도 한재를 모르는 곳이 벼 1(一)년간의 쌀(米) 생산이 2(二)백50(五十)만석을 초과하야 머지안허서 4(四)백만석을 바라보며 면화도 벌서 6(六)천근(斤)을 생산하야 장래 1(一)억2(二)천근을 목표로 하고 잇으며 인구밀도(密度)도 전 조선 총평균의 2(二)배에 달하는데 금년 한재로 말미암아 전기 전라남북을 통하야 피해군부의 답(畓)만이 14(十四)만 정보에 요구제의 호수가 14(十四)만2(二)천여호라는 방대한 수자를 보이고 잇어 인구로 따지면 실로 백만 대중에 가까운 터이다. 이 쌀 외에도 여러가지 전작잡곡(難糓)의 피해가 적지안흐니 오늘날까지의 총피해액은 벌서 1(一)천만원을 돌파하고도 일(一)반농민들의 초조하는 정신적 타격은 자못 헤아릴수도 없는터이다. (15(十五)일 송정리(松汀里)에서)

(‘적지(赤地)의 호남순방(湖南巡訪) (一) 松汀里에서’, 동아일보 1935년 8월 17일 2면)

 

적지(赤地)의 호남순방(湖南巡訪) (二) 羅州에서 (동아일보 1935년 8월 18일자 2면)

적지(赤地)의 호남순방(湖南巡訪) (三) 務安에서 (동아일보 1935년 8월 18일자 2면)

적지(赤地)의 호남순방(湖南巡訪) (四) 子島에서(동아일보 1935년 8월 20일자 2면)

적지(赤地)의 호남순방(湖南巡訪) (五) 咸平에서 (동아일보 1935년 8월 21일자 2면)

적지(赤地)의 호남순방(湖南巡訪) (六) 靈光에서 (동아일보 1935년 8월 22일자 2면)

적지(赤地)의 호남순방(湖南巡訪) (七) 長城에서 (동아일보 1935년 8월 24일자 2면)

적지(赤地)의 호남순방(湖南巡訪) (八) 高敞에서 (동아일보 1935년 8월 26일자 2면)

적지(赤地)의 호남순방(湖南巡訪) (九) 扶安에서 (동아일보 1935년 8월 27일자 2면)

적지(赤地)의 호남순방(湖南巡訪) (十) 光州에서 (동아일보 1935년 8월 28일자 2면)

 

 

 

댓글 없음 »

No comments yet.

RSS feed for comments on this post. TrackBack URL

Leave a comment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