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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동아일보 사람들- 신태익

Posted by 신이 On 12월 - 19 - 2018

 

신태익(申泰翊, 1900~납북)은 서울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를 중퇴하고 1921년 조선일보 기자가 된다. 1924~1933년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이후 조선일보로 다시 옮겨 경제부장, 도쿄지국장을 역임했다. 1939년엔 동아일보 광고부장으로 재입사해 1940년 8월 강제폐간 때까지 일했다. 1949년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있었고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됐다.

 

▲ 1924. 9 기자, 1933. 9 퇴사. ▲ 1939. 4 재입사, 광고부장, 1940. 8 폐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주계일년(株界一年) (一)
본사기자 신태익(本社記者申泰翊)

일월기대배치(一月期待背馳)

예년세만(例年歲晩)으로 신춘(新春)까지는 제주(諸株)가 각각약동(各各躍動)하고 상세(商勢)는 매우 성황(盛况)을 정(呈)하였으나  금년(今年)은 구동말(舊冬末)부터 재계(財界)가 침체(沈滯)의 역(域)을 버서나 못하였스며 주계(株界)도 연말(年末) 휴회중(休會中)임으로 제주(諸株)가 일제(一齊)히 연화(軟化)하야 신보초입회(新甫初立會)에는 현저(顯著)히 둔상(鈍狀)을 정(呈) 이내연약(爾來軟弱)의 보조(步調)로 순일보세(旬日保勢)이엇다가 점락(漸落)하야 상세(商勢)의 한산(閑散)이 극심(極甚)이엇슴으로 취인고(取引高)도 점감(漸减)을 면(免)치 못하엿스나 사위(四圍)의 형세(形勢)는 이대로 침쇠(沈衰)함을 허(許)치안코 2월중순후(二月中旬後)의 활약(活躍)을 기대(期待)함이 만헛섯다.

경취저락(京取低落)

대납회(大納會)에 28원90전(二十八圓九十錢)으로 강조(强調)를 시(示)하엿든 것이 신보(新甫)가 28원10전(二十八圓十錢)인 것은 일반기대(一般期待)와 배치(背馳)되는 것이엇다. 당일(當日) 28원50전(二十八圓五十錢)을 금월(今月) 중고가(中高價)로 점락(漸落)하야 월중(月中)에는 27원대(二十七圓臺)까지 떠러 일장일치(一張一馳)로 67원대(六七圓臺)에서 왕래(徃來)하다가 필경(畢竟) 26원대(二十六圓臺)에 떠러저 27일(二十七日)에 26원40전(二十六圓四十錢)을 저가(低價)로 맨들고 6원70전(六圓七十錢)에 종(終)하다.

대신연조(大新軟調)

차역연조(此亦軟調)로 신보(新甫) 99원20전(九十九圓二十錢)을 고가(高價)로 점락(漸落)하야중순후(中旬後)는 67원대(六七圓臺)에서 5원50전(五圓五十錢)까지 점락(低落)하야 95원80전(九十五圓八十錢)에 종(終)하다.

이월정착한산(二月釘着閑散)

기대(期待)하든 일본어대장후(日本御大葬後)의 시세(時勢)는 그 휴일전(休日前)에 이미 전개(展開)된 경향(傾向)이 잇섯스나 휴일후(休日後)의 제주(諸株)는 모다 연화(軟化)하야 보세(保勢)로 정부(釘付)가 되고 현저(顯著)히 둔상(鈍狀)을 정(呈)한바 취인(取引)도 매우 한산(閑散)이엿다.

경취신뇌(京取伸惱)

26원70전(二十六圓七十錢)에 시(始)한後(후) 27원50전(二十七圓五十錢)으로 앙등(昻騰)하고 9일(九日)에 7원80전(七圓八十錢)을 고가(高價)로 그後(후) 점락(漸落)하야 하순(下旬)에 5원50전(五圓五十錢)의 저가(低價)까지 잇섯다가 5원80전(五圓八十錢)으로 반등(反騰)하고 속등(續騰)하야 6원40전(六圓四十錢)에 종(終)하다.

대신피란(大新波瀾)

95원20전(九十五圓二十錢)에 저가(低價)로 시(始)하고 약진(躍進)의 세(勢)를 시(示)하야 101원10전(百○一圓十錢))까지 앙등(昻騰)하는 활기(活氣)를 띄엿스나 9일(九日)에 98원30전(九十八圓三十錢)으로 연화(軟化)하야 9원대(九圓臺)에서 보세(保勢) 되엿스며 중순(中旬)에 100원대(百圓臺)를 출현(出現) 하엿스나 그 지속(持續)이 겨우 23일(二三日)로 곳다시 반락(反落)하야 98,9원대(九十八九圓臺)에서 왕래(徃來)하다가 8원7십전(八圓七十錢)에 종(終)하다.

주계일년(株界一年) (一) (동아일보 1927년 12월 29일자 4면)
주계일년(株界一年) (二) (동아일보 1927년 12월 30일자 4면)

 

 

◇ 경제시론발간(經濟時論發刊)

조선사람으로서 경제뎍 지식(經濟的智識)과 경제뎍 각성이 업서서는 아니되겟다는 의미에서 사계에 뜻이 잇는 제씨가 경제시론(經濟時論)이란 월간잡지를 발행키로 되엇다는바 집필동인은 다음과 가트며 사무소는 경운동 구십륙번디의삼 이라더라.

◇동인(同人) – 주윤(朱潤) 정수일(鄭秀日) 이건혁(李建爀) 신태익(申泰翊) 외 8인(外八人)

(동아일보 1928년 3월 23일 2면)

 

 

1930年의 歸結과 1931年의 新展望 – 世界問題, 極東問題, 朝鮮問題

1931년과 朝鮮米價問題
申泰翊

우리의 日常食糧이 되며 우리의 唯一한 收入의 源泉인 米價를 餘地업시 짓밟고 또 너무도 큰 傷處를 내여준 1930년는 갓다. 그러고 새 精神과 만흔 期待 아래서 1931년을 마지한다. 이에 當하야 將次에 展開될 米價問題를 매우 平易한 方式으로 考察하랴 한다.

昨年中 끈칠 줄을 모르고 慘落에서 慘落의 구렁으로 떠러지기만 하든 米價가 더 떠러지지 안코 얼만큼 그 걸음을 멈추고 잇는 형세로 변하얏다. 無前大豊에 대한 諷刺的恐怖人氣에 휩싸혀 어떠한 지경까지 갈는지 몰으든 米價가 무슨 까닭으로 이처럼 용이하게 下勢를 끈치게 되얏는가? 이것은 米價의 低落을 그대로 傍觀할 수 업는 危急을 깁히 늣긴 정부에서 여러 가지의 人爲的對策을 쓰게 된 때문으로 米價低落의 급한 勢를 꺽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과가튼 人爲策을 쓴다고 해서 압흐로는 米價가 안 떠러지게 될 것인가? 또는 정부의 米價對策이 과연 미가문제를 根本的으로 解決할 수 잇는 대책일가 하는 점에 잇서서 나는 만흔 疑念을 안가질 수가 업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1931년의 米價가 엇덜가 卽 압흐로 쌀갑이 올을 것이냐 떠러질 것이냐 하는 말을 하는 것보다도 米價의 低落을 막게 하는 정부의 대책이 과연 米價를 어느 정도까지 붓잡고 갈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야보는 것이 가장 緊要한 까닭으로 먼저 정부의 대책을 가지고 그 效果의 정도에 대하야 私見을 말하고 그 다음에 總括的으로 장차 米價가 어느 방면에 향하야 걸어갈가 하는 것으로써 결론을 삼으랴 한다.<18>

(1)쌀갑이 떨어저가는 것을 보고 더 떠러지기 전에 팔겟다는 생각으로 급히 팔야고 뎀비는 것은 人之常情일 것이다. 이러케 된 즉 大勢上으로 보아 二圓 가량밧게 안 떠러질 시세이라도 사는 사람은 적은데 파는 사람만이 만케 됨으로 二圓가량만 떠러지지 안코 三圓乃至四圓dl 떠러저서 더 싼 갑을 나타내게 되는 관계상 정부로서 米作者의 急賣를 막기 위하야 그 대책을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 米價低落의 勢를 어느 정도까지 沮止케 할 것은 疑心업는 일이다. 그 방법이란 것이 卽低利資金을 米作者에게 融通하야 주고 그代로 玄米와 正租를 창고에 보관케 한다는 것이다. 그런대 나는 이 대책이 米價에 주는 효과가 업다는 것은 아니지만 얼마만한 정도의 효과를 나타낼가 하는 占에 對하야 의문을 가지고 잇다. 昨年中 쌀갑이 떠러진 원인이 어듸잇서느냐 하면 누구나 모다 아는 바와 가티 米作의 大豊卽米收穫의 수량이 넘우나 만켓다는 예상 알에 떠러진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업는 것이다. 이와 가티 米數量의 壓迫으로 떠러진 쌀갑인데 玄米와 正租를 창고에 집어너엇다고 해서 米의 數量이 줄어들것이 아니다. 언제든지 창고로부터 나올 것이 틀님업다. 다만 大勢上 二圓가량 밧게 안 떠러질 時勢를 人心의 騷動으로 급히 파는 까닭에 二圓이상이 더 떠러지는 갑만 米의 보관으로써 막는데 不過할 듯하다. 다시 말하면 米貯藏의 장려는 일시적 米價低落의 방지책으로 생각한다.

(2)쌀갑이 폭등하야 消費者를 위협하는 경우에는 정부에서 政府持米를 팔어서 그 騰勢를 꺽고 또 너무 떠어저 米生産者를 위협하는 때에는 정부에서 민간의 쌀을 사듸려서 米價를 조절하는 바는 前前號에 말하얏거니와 작년중 米價의 慘落에 當하야 정부에서 민간의 米를 買上하는 것은 정부로서 당연히 취할 길이다. 또 이 買上이 米價의 低落을 막는 효과가 상당할 것은 前例로 보아서 알 수 가 잇다. 그러나 買上에 잇서서도 그 數量의 多寡如何에 따라서 그 효과가 만코적은 터이다. 그런대 현재의 日本米穀需給調節特別會計에는 3억2천만 원의 한도로 이중에서 2억5천만 원은 이미 사용하얏슴으로 결국 7천만 원밧게 쓸 돈이 업게 되얏다. 이런 사정 밋헤 잇는 정부로서 다량의 買上을 할 힘이 업는 窮境에 빠저 잇스나 부득이 2백만 석의 買上을 단행하얏다. 그러나 2백만 석의 買上으로는 無前大豊作인 此際에 잇서 買上으로 인한 큰 효과를 바라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3)外米輸入을 제한하는 것도 米價低落의 一手段이 될 수 잇다. 그러나 오늘까지의 결과로 보아서는 이럿타고 할만한 효과가 업는 모양이다. 또 日本米의 對外輸出를 하얏스나 豫定함과 가튼 成績을 보지 못하야 此亦微微한 수량에 불과한 터이다.<19>

이밧게도 枝葉的米價對策이 상당히 잇다. 이처럼 米價對策이 잇는 점으로 보아서 미가의 저락이 압흐로 방지케 될 것가티 생각하는 것도 턱업는 말이 아니라고 한다. 以上에 말한 정부의 米價上과 가튼 것은 買上하는 수량만큼 시장에서 상품화할 것을 못하게 하는 결과가 생긴다. 말하자면 현실에 유통되는 米의 수량이 만허서 위협을 늣겨 米價가 떠러지는 것이 買上을 하는 까닭으로 米의 수량이 줄어저서 米價가 밧는 위협이 얼마큼 緩和가 된다는 好影響을 바랄 수 잇다. 그러나 이것은 눈압헤 떠러진 불만 끈데 불과하고 일보밧게는 의연히 타올느는 불길이 잇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일인 줄로 생각한다. 卽 今日의 米價對策은 滔滔한 勢로 떨어지는 米價에 대한 一彌縫策으로 볼밧게 업다는 말이다. 무슨 까닭에 米價對策이 그처럼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업다고 하는가 하면 나는 아래와 가튼 말로써 對答을 하랴 한다.

오늘에 잇서 쌀만 만히 산출하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 아니다. 옛 시대와 가티 自足自給하야 내가 농사를 한 것 가지고 내가 一年糧食을 하는 것으로써 만족히 생각하는 때일진대 모르겟스나 농사를 하야 가지고 그 産物을 팔어야 되며 또 그 산물을 파는데도 될 수 잇는대로 만흔 소득이 잇도록 하랴고 애쓰는 오늘이다. 이런 때에 米價의 價格調節卽米價가 米의 生産費를 빼이고 농민의 생활이 가능한 정도에 달하고 못하는 점보다도 정부는 産米增殖에 熱中하야왓다. 물론 人口增加率 등 관계로 보아서 산미증식의 장려가 필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産米만 增殖하야 노흔 것이 돌이혀 米價를 壓迫하야 필경에는 産米增殖을 근본적으로 破壞케 되는 결과를 보게 되얏다. 이처럼 米價가 慘落하야 米의 生産費도 빼일 수 업는 정도에 달한 것을 보고서 비로소 米價調節의 대책을 案出한다는 것은 아모리 생각하야도 미덤이 적은 동시에 그 효과가 크지 못하리라는 맘을 갓게된다. 너무 간단한 말이지만 이상으로써 目下의 米價對策이 米價의 根本的問題를 해결 못할 것을 짐작할 수가 잇다. 어떠한 대책이 나온다 잡드래도 농산의 基礎的矛盾解決策이 잇지 안코는 참으로 米價를 調節키 어렵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러면 1931년의 米價는 어느 방면으로 걸음을 거러갈 것인가 이점에 대하야 나는 될 수잇는대로 豫言的言辭를 피하고 大局上으로 보아서 米價의 趨向을 살피는데 끈치랴 함을 먼저 말해둔다. 昨秋에 大豊作豫想 아래 慘落을 하든 時勢가 떠러지는 걸음을 멈친 것은 무엇보다도 정부로부터 긴급한 米價對策이 나오는 것을 보고 期米를 비롯하야 一般의 賣氣가 저지되얏든 것이다. 그레서 米價는 상당한 정도까지 反動的高價가 잇스리라는 예상이 왕성하얏든 까닭으로 時勢가 올느거든 그때에 팔겟다는 생각을 가지고 팔기를 실혀하얏다.<20> 그래서 全朝鮮의 鐵道發送量을 前年同期에 비교하야 米의 出廻量이 매우 적어젓다. 그러나 米價對策은 오즉 붕괴되는 低落의 勢만 막엇슴에 불과하고 大勢上의 위협까지 제거할 효능이 업는 때문에 米價는 一時 머리를 드는 듯한 反動的時勢가 不無하얏스나 다시 그 머리는 숙으러저 機會만 잇스면 아래로 향하랴는 경향이 만허 보힌다. 이와 가티 對策이 실제에 時勢를 능히 조절 못하고 一時的低落의 방지이어슴으로 다시 붕괴될 兆를 만히 가지고잇다하야도 심한 말이 아닐 줄로 생각한다. 더구나 出廻期에 放穀하기를 실혀하고 꼭 팔어야만될 事勢의 外에는 될 수 잇는대로 놉흔 갑이 나오거든 팔야고 한 사정을 가지고도 압흐로 出廻될 米가 만히 잇다. 그럼으로 놉흔 갑이 잇든지 업든지 결국에는 나오고야 말 쌀인즉 이것만으로도 將次米價가 얼마만한 위협을 바들는지 헤아릴 수가 잇다. 그럿타고 大豊作豫想의 恐怖人氣로 慘落이 거듭되는 때처럼 떠러질 것갓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大豊作에 놀내인 時勢는 終幕을 告하얏다고 볼 수 잇고 인제로부터 실제로 시장에는 出廻되는 수량이 米價를 지배할 것임으로 出廻數量如何가 가장 注目을 끄흐는 바로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1931년의 米價에 대하야 아래와 가튼 觀測을 가지고 잇다.

「甚大한 暴落이 잇스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의 政府對策이 잇슴에 不拘 米價의 大勢는 依然히 軟風을 실고 때때로 下向하랴는 편이 만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오늘의 形勢밋헤서 米價의 趨向을 占침에는 몇번이라도 강한 卦 卽 놉흔 갑을 냇겟다는 卦가 안나오고 한갈가티 약한 卦만 나올 뿐이다」

끗흐로 朝鮮米에 限하야 한 가지 우려할 일이 잇다. 昨秋를 거더듸릴 때에 서리가 오지안허서 베의 結實이 잘못된 데다가 日氣不順하야 降雨 등으로 베가 충분히 말느지를 못하얏다. 이와 가티 결실이 잘못되고 또 乾燥가 불충분한 베를 그대로 창고에 너허두면 더욱 베가 만히 傷하야질 念慮가 잇다. 따러서 1931년중에는 例年 비교하야 傷한 베가 만흔 수량에 달치 안흘가 한다. 만약에 과연 상한 베가 만케 될 경우에는 朝鮮米의 갑을 일층 떠러틀이는 결과가 잇슬 것을 憂慮不已하는 바이다.(끗)

(신태익, ‘1930年의 歸結과 1931年의 新展望 – 世界問題, 極東問題, 朝鮮問題’, 별건곤, 1931년 1월호)

 

 

경제용어(經濟用語)

▲머릿말 신문(新聞)의 경제면(經濟面)은 보아야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하는 말을 너무나 만히 들어온다.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함은 긴말 할 것 업시 조선(朝鮮)의 경제(經濟)가 조선(朝鮮)사람의 경제(經濟)가 아니라는 근본문제(根本問題)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나 오늘에 잇서 새삼스럽게 이것을 말할바가 아니다. 어떠든지 신문(新聞) 경제면(經濟面)에 실리는 용어(用語)야 말로 조선말이 아닌 것만은 사실(事實)이다. 이런 말로 맨들어노니 읽는 사람이  모르겟다고 함은 당연(當然)한 일이다. 그러고 일본문신문(日本文新聞)의 경제면(經濟面)을일본(日本)사람으로서도 읽는데 이 경제면(經濟面)의 기초상식(基礎常識)이 잇서야만 되는 때문에 신문경제면(新聞經濟面) 읽는 법(法)에 관(關)한 책(冊)이 상당(相當)히 만흔터이다. 일본(日本)사람도 이처럼 신문경제면(新聞經濟面)을 읽는데 고통(苦痛)을 늣기거든 하물며 조선문신문(朝鮮文新聞)의 경제면(經濟面)을 읽는 사람이 맘부처 안 읽는 것을 글타고 말 못 할일이다. 또 신문경제면(新聞經濟面)을 담당(擔當)한 기자(記者)들의 고통(苦痛)도 약간(若干)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에 잇서 어떠케 할 도리(道理)가 업다. 섯불리 조선말로 고치다가는 욕교반졸(欲巧反拙)의 결과(結果)가 되고 말 것이다. 아니 그런 예(例)가 만헛다. 그럼으로 오늘의 조선문신문(朝鮮文新聞)에서 써오는 용어(用語)를 조선말로 어떠케 고치자는 것보다도 먼저 신문경제면(新聞經濟面)의 용어(用語)가 어떠한 것이라는 설명(說明)을 하는 것이  경제면(經濟面)의 독자(讀者)에 긴요(緊要)할바로 생각한다. 그러고 이 설명(說明)에 잇서 나는 알에와 가튼 테두리를 벗어나지 안흐랴고 한다.

▲ 긴 이유(理由)의 설명(說明)을 피(避)하고 될 수 잇는대로 이러이러 한 것이라는 간이(簡易) 즉(即) 알기쉬웁게 설명(說明)할 것

▲ 동아일보(東亞日報) 경제면(經濟面)을 대상(對象)으로 하고 설명(說明)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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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제용어(經濟用語)의 설명(說明)을 함에 잇서서 무엇부터 시작(始作)을 할가하는 순서(順序)를 정(定)할 필요(必要)가 잇다. 동아일보 경제면(東亞日經濟面)을 대상(對象)으로 삼은터임으로 이 경제면(經濟面)의 첫머리부터 설명(說明)해 나아가는 것이 당연(當然)하다. 먼저 경제면(經濟面)의 8단 좌측(八段左側)으로부터 12단(十二段)의 종단좌측(終段左側)까지 일정불변(一定不變)의 숫자(數字)만 실닌 란(欄)이 잇다. 이 란(欄)을 가르켜서 일본(日本) 말로『상장란(相塲欄)』이라고 한다. 나는 조선말로는『시세란(時勢欄)』이라고 불으랴고 한다. 이 시세란(時勢欄)의 첫머리에 실닌 주식(株式)으로부터 경제용어(經濟用語) 설명(說明)의 출발점(出發點)을 삼고 순차(順次)로 하나씩하나씩 들고 나아가기로 한다.

(동아일보 1932년 8월 4일자 8면)

 

시장용어해설(市塲用語解說)

【一】

◇ 경제용어(經濟用語)의 제목(題目)을 가지고 신문경제면(新聞經濟面) 상황란(商况欄)에 대(對)하야 해설(解說)하여오든 것은 대체(大體)로 끗내엇다. 그러나 불충분(不充分)한 점(點)이 만헛슴으로 수정(修正) 또는 보충(補充)하야 후일(後日)에 출판(出版)키로 하며 끄트로『시장용어(市塲用語)』에 대(對)한 해설(解說)을 하기로 한다. 이 용어(用語)가 상당(相當)히 만흐나 가장 필요(必要)한 것만 골라서 한 말씩 간단(簡單)히설명(說明)하랴고 한다. 그런대 순차(順次)에 잇서는 이 용어(用語)가 경제용어해설(經濟用語解說)에서도 말한것과 가티 조선말이 아니라 일본(日本)말로 된것인 까닭에 할수업시 일본(日本)말로 읽는『ア、イ、ウ、エ、オ|』의 순서(順序)대로 나아갈 터이다.◇

▲상대매매(相對賣買) 사고파는 방법(方法)으로 개개(個個)의 약정(約定)으로써 매매계약(賣買契約)을 하는 것이며 딸하서 상대방(相對方)은 계약(契約)의 최초(最初)로부터 계약(契約)의 해제(解除) 또는 이행(履行)의 최후(最後)까지 관계(關係)가 계속(繼續)되는바 이것은 실물취인(實物取引)에서 주(主)로 하는 매매(賣買)의 방법(方法)이다.

▲청전(靑田) 6,7월(六七月)로부터 8월초경(八月初頃) 이양(移秧)이 끗난뒤 성육기(成育期)에 들어간 도전(稻田)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청전매매(靑田賣買) 추수(秋收)하기 전(前)에 성육기(成育期)에 잇는 도전(稻田)대로 미작(米作)을 매매(賣買)하는 선약(先約)이다.

▲선양(煽揚) 시세(時勢)를 자기(自己)가 예상(豫想)한대로 나타내게 하기 위(爲)하야 함부로 사거나 팔거나 하는 행동(行動)을 선(煽) 혹(或)은 선양(煽揚)이라고 한다. 그런대 이 말은 대개(大槪) 노픈갑으로 올리랴고 하는 경우(境遇)에 만히 쓴다.(이것은 매선(買煽) 그러나 시세(時勢)를 떨어트리랴고 하는 때에는『하선(下煽)』이라고 한다.

▲추락시세(秋落時勢) 도작천재기(稻作天災期)가 불량(不良)하야 올낫든 시세(時勢)가 수확기(收穫期)에 작황관계(作况關係)로 떨어저가는 미시세(米時勢).

▲추고시세(秋高時勢) 청전기(靑田期), 천재기(天災期)가 모다 순조(順調)로 지내간 도작(稻作)이 베여들일때에는 불량(不良)하다고 하야 반발(反撥)한 시세(時勢).

▲추시세(秋時勢) 9월(九月), 10월(十月), 11월(十一月)의 시세(時勢)로 특(特)히 기미(期米)에 만히 쓰며 이때에는 미가(米價)가 만히 변동(變動)되는 것이 상례(常例)이다.

▲악화(惡化) 매인기(買人氣)를 매인기(賣人氣)로 변(變)케 하고 시세(時勢)를 저락(低落)케 하는 것이다.

(…)

(동아일보 1933년 1월 21일자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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