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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동아일보 사람들- 신동준

Posted by 신이 On 12월 - 19 - 2018

 

신동준(申東峻, 1932~ )은 경기 용인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중퇴하고 국민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54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1963~1966년 동아일보 정치부장, 기획부장을 지냈다. 제7대 국회의원(전국구, 공화당)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인구이동><국회의원들><삼류는 즐거워> 등 다수가 있다.

 

신동준(申東峻) (용인, 1932~ ) ▲ 1954. 7 수습(편집국), 기자(정치부), 1961. 6 퇴사. ▲ 1962. 8 재입사, 정경부차장, 정치부장, 기획부장, 1966. 1 퇴사〔민의원의원〕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선거최전선(選擧最前線) 탐방(探訪) 강원도편(江原道篇) (1)

官權萬能(관권만능)은 옛일
군부표(軍部票) 감시방법(監視方法) 막연(漠然)한 야당(野黨)

[춘천(春川)에서 본사 신동준특파원발(本社申東峻特派員發)] 강원도(江原道)의 선거(選擧)-하면「자유당(自由黨)」의 표(票)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기로 전국(全國)에서도 이름 높은 곳이다.

사실상(事實上) 지난 정부통령선거(正·副統領選擧) 전(前)만 하더라도 강원도(江原道)는「자유당(自由黨)의 도(道)」라 불리워도 손색(遜色)이 없을 만큼 자유당(自由黨) 외(外)의 타당(他黨)의 존재(存在)란 춘천(春川)·원주(原州) 두 곳에 민주당(民主黨) 핵심당부(核心黨部)가 있을 정도(程度)로 미미(微微) 하였다고 하며 넓고 넓은 도내(道內)는 그야말로 야당(野黨)의 그림자도 찾기 힘든- 자유당측(自由黨側)의 말을 빌리자면『평온(平穩)하기 이를데 없는 고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속칭(俗稱)「암하로불(岩下老佛)」이라고 까지 불리우는 순(順)하기 이를데 없는「강원(江原)사람」들은- 민주당측(民主黨側)의 말을 빌리자면『풀잎이 바람에 쏠리듯- 도민(道民)은 관(官)의 억센 바람에 나붓겼다』는 것이다.

이렇게 양(羊)같이「힘」앞에 순(順)한 백성(百姓)들이 산다는 강원도(江原道)도 이번「5.2(五·二)」선거(選擧)에서는 결(決)코「평온(平穩)」하지도 않을 것 같고「풀잎이 바람에 쏠리듯」관권(官權) 앞에 굴복하지도 않을 것 같다.

(…)

(동아일보 1958년 4월 28일자 2면)

 

팔도강산(八道江山) 발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제(第)1신(信)】
최북단(最北端)마을『명파(明派)』
휴전선(休戰線) 넘어다 보면서도 불안(不安) 모르는 농군(農軍)

10(一○)년이면 산천도 변한다고 한다.「해방」을 맞이하고 정부를 세우고 6.25(六·二五)를 겪고 그리고 휴전 후 벌써 4년(四年) – 전란의 먼지도 어지간히 가신 이제 – 우리 강토의 모습은 어떻게 변하였을까? – 기자는 문듯 우리의 팔도강산(八道江山)을 한바퀴 휘돌아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발 가는대로 – 여기 저기 찾아보고 – 붓 가는대로 -그 곳 풍물과「인간가족」들의 새로운 모습들을「스켓쥐」해보고파- 「몽당붓」한자루 헐은「로-라이·코-드」(캐메라) 하나 (스켓쥐·부ㅋ」한권「전국지도」한장 – 이렇게 넣어서「개나리봇짐」을 쌌다. 그리고 어디서 겪을지 모르는 풍우에 대비하여「삿갓」대신「우산」한자루를 걸치고 기자는 3(三)천리「유랑의 길」을 나섰다.【신동준기자(申東峻記者)】

어디로 갈까?-「지도」를 훑어보다가 기자는「회령(會寧)」이며「백두산(白頭山)」에 못가는 설음이 앞서 공연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다가「남한」에서나마 가장 북쪽에 있는 동리는 어디인가 한번 가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북쪽 끝에 있는「사람」도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북으로!「휴전선」이남의 최북단 부락을 찾아보고자 기자는「경춘선(京春線)」에 몸을 실었다.

× ×

○-「춘천(春川)」에서「뻐스」로 갈아타고「간성(杆城)」까지 오니 해가 지고 캄캄하여졌다.
밤중으로 이 곳 군·경과 연락하여「휴전선」근방까지 갈 수 있도록 수속을 밟았다.
○-「간성(杆城)」에서 약 40(四○)리 북상하면「현내(縣內)」- 고성(高城)군인데 이곳까지만 민간인 출입이 허용되어 있고 거기서부터는 군에서 관할하고 있는「민간인저지선」구역이다.
그런데 이「민간인저지선」에서 다시 20(二○)리가량 북상하면 그곳 군당국의「입주영농특별허가증명서」를 발급받고 집단으로 농사를 짓고 있는 부락이 있다. -「3.8(三·八)선」에서 약 150(一五○)리 지점이다.
○- 길가에 한길이 넘는 잡초와 피가 무성한 황무지를 지나「저지선」에서 군용도로를 쫓아「찦」차로 약 20(二○)분 달리니 고개를 등지고 아담한 부락이 고요하게 자리잡고 있다.
집들이 모두가 새로 지은 것과「오막사리」인 것이 먼저 눈에 띄었다.
○-「명파(明派)부락」-이 조그마한 부락이야 말로 현재「대한민국」의 최북단에 자리잡고 있는 유일한 동리인 것이다.
금년 3(三)월에는 단 열두명이 군의 특별허가를 맡아 군의 인솔로 매일 들락거리며 농사 준비를 시작하였다.
4(四)월이 되자 더욱 사람이 모여들고 군에서는 농토에 □고 졸라대는 주민의 진정을 들어「입주영농」을 허가했다.
○- 현재 76호(七六)호 – 421(四二一)명이 살고있는 이 부락은 모두가 금년 봄에 집을 짓고 들어온 사람들이다.

원주민과 이북 피난민이 반반가량|
금년에 경작한 논은 약 12(一二)만평 – 밭이 5(五)만평|

○- 함남(咸南)「삼호(三湖)」에서 1.4(一·四)후퇴 때 남하한 김능봉(金陵鳳)씨(55)는 금년에2(二)천평의 논을 갈았는데 이북에 있을때 보다도 5(五)백평이나 더 농사를 지은 셈이라고 무척 대견해하고 있다.
○- 언덕 넘어는 바로「휴전선」과「완충지대」-「학교」도「의사」도 없는 고독한 마을이지만「불안한 생각은 없느냐?」는 기자 말에 김(金) 노인은『농사짓기에 다른 잡념이 들 겨를도 없소이다』하고 새까맣게 껄은 얼굴에 표정없는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편집자주(編輯者註) -「발 가는대로」가보자-고 떠난 신(申)기자는 그래도 떠나기 전에 한번「전국지도」를 펼쳐놓고 대충 행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제1(一)차로 임시 정해본「코-스」가 대략 여기 그린「내지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물론「방향」만 가리키는 것으로 실제로는 그 인접지대로도 가는 것이지만 –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1(一)차적으로 정해본「행로」이고 경우에 따라 사정에 따라 또 그때의 기분에 따라서는『여정이 변경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신(申)기자의 떠날 때의「변명」이었습니다.
또「붓 가는대로」우리 팔도강산(八道江山)의 변해진 풍물·풍토 그리고「인간가족」들의 새로운 모습들을 그려보려는 의욕이지만 – 그렇다고 우리 강토의「새 풍물지(風物誌)」나「새 풍토기(風土記)」또는「새 풍속도(風俗圖)」라고 이름 붙일만한「굉장한 기행문(紀行文)」이 나오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도 역시 신(申)기자의 떠날 때의「변명」이었습니다.

(동아일보 1958년 10월 21일자 3면)

 

신동준기자특파(申東峻記者特派)… 한일회담(韓日會談) 취재(取材)에

동경(東京)에서 속개중(續開中)에 있는 제4차 한일회담(第四次韓日會談) 기사취재(記事取材)를 위(爲)하여 본보(本報)에서는 정경부(政經部) 신동준기자(申東峻記者)를 회담지(會談地)인 동경(東京)에 파견(派遣)키로 되어 신 기자(申記者)는 21일 하오 1시 20분(二十一日下午一時二十分) 김포공항(金浦空港)을 출발(出發) 향일(向日)하였다.

(동아일보 1959년 8월 21일 1면)

 

일본(日本) 본대로
한국(韓國)을 거의 이해(理解) 못하는 일인(日人)
동경(東京)에 대유행(大流行)인『우리 요리(料理)』는 젊은 층(層)이 즐겨

「일본」-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아주 먼나라 – 지리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현재의 관계로 보나 가깝고도 먼나라가 일본이다.
해방이 된지도 어언 14(一四)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동안「일본」과 우리나라 사이엔 높고도 두터운 담장이 가로막혀 서로 상대방을 모르는 채 오늘에 이르렀다.
60(六○)만이라는 엄청난 수효의 교포가 살고 있는 일본 -「한·일회담」으로 서로『잘 해 나가자!』는 기본 정책을 공개하고 있으면서 지금 두 나라의 거리는 너무나 멀다. 일본을 알자 – 좀더 알면 거기 좋은 길이 열릴는지도 모른다-
몇몇「외교관」이나「상인」들의 눈에만 비쳤던「일본」의 편모(片貌)를 기자는 한달이라는 짧은기간 이나마 엿보았다. 본대로 – 일본 모습 이것저것을 붓 가는대로 그려보기로 한다.

○- 일본사람은 지금 한국을 잊어버리고 있거나 모르고 있다.「한·일회담」이나 일본인 어부 문제 등은 신문지상에 크게 보도되긴 하지만「한국」만으론 완전히 그들의 관심밖이다.
그래서 한국인에 아직도 어떤「감정」을 가지고 대하지 않느냐-는 질문엔 기자는 고개를 가로 흔들 수 있겠다,
그들 특히 젊은이들은 너무나 바쁜 생활에 쫓기고 있고 나이먹은 층도 소위 종전(해방)이전의 모든 일을 악몽(惡夢)처럼 잊어버리려 하고 있고, 또 사실상 대부분 잊어버리고 있다.

○- 그러나 동경(東京)은 지금「한국요리」가 대유행이다.
시내 번화가의 몇 군데「한국요리점」은 일본인과 미국 군인이 쇄도하여 식사시간엔 진짜(?) 한국인은 발을 들여 놓을 틈이 없는 형편이다.
아마 한국에 있었던 사람이 옛날을 생각하고 가는거 아니냐-하면 이는 천만의 말씀이다.
한국요리를 먹으러 오는 일본인은 대개는 한국은 그림책에서도 못 본 새파란「젊은이」들이다.
지금 세계적인 선풍이 불고 있는「B·B스타일」로「바르도우」모양 머리를 풀어헤치고 짧은「스카트」를 입은 젊은「일본아가씨」들이 즉석「불고기」를 앉은 자리에서 두 접시 세 접시 간단히 치운다.

○- 생전 처음「일본」땅에 발을 들여놓은 기자는 일본인들이「쇠고기」나「돼지고기」를 먹기 시작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약50(五○)년전 – 일본인이「명치(明治)유신」이라 부르는 근대 개화문화가 도입된 후부터 라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러니 지금 나이먹은 사람들에 비해서 젊은이들이 키가 커지고 체격이 월등 좋아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게다.
우리 한국도 그렇긴 하지만 일본인 여성의 지금 40(四○)대와 20(二○)대 사이의「신장의 차이」는 너무나 커서 조금만 과장을 보태면 거의 곱(倍)은 되는 것 같이 보였다.

○- 그런 젊은 여성들이 화려한 복장을 하고 다니는 동경(東京)의 번화가「긴자」(銀座(은좌))는「일본 문화의「쎈터」이기도 하다. 【신동준기(申東峻記)】

(동아일보 1959년 10월 4일자 3면)

 

 

[데스크의 고락] 은화이좌(隱和而坐)
신동준 편집국정경부차장

고(苦)가 다 뭐냐!
아침엔 일선(一線) 척후(斥候)들의 안색(顔色)으로 그날 일진(日辰)을 집허두었다가 마감 시간에 정리부 시어머니들의 빗발같은 성화쯤엔 태연자약(泰然自若)이다. 아무리 기사(記事)가 없어 속에선 불이 붙어도 아예 초조(焦燥)한 내색이랑 띄워선 안된다. 시어머니 앞에선 약점(弱點) 안잡히는게 락(樂)중에 락(樂.
눈이 빠지게 급하고 바빠도 곡예사의 평형을 잃으면 ‘인생(人生)을 교도(矯導)받는 곳’으로 직행해야되지만 생활선에 걸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도 매양 눈만 딱감고 넘기면 고만이다.
위로는 기라성(綺羅星)같은 상사(上司)들의 눈치를 살피는 척만 하다가 산전수전 겪고난 특무상사(特務上士) 아저씨들 거동을 돕고, “하늘이 맷돌짝만하게 보인다”는 영계 견습형님들 시중을 모시며… 새로운 것 모험적(冒險的)인 것은 꿈도 꾸지 않고 유유낙낙(唯唯諾諾), 무사안일제일주의(無事安逸第一主義)의 사지(私旨)(?)社風에 젖으면 절로 몸이 떠간다.
아무리 뇌우벽력(雷雨霹靂)으로 정권이 뒤바껴도 강가의 강태공 못지않은 담담(淡淡)한 심경으로 기사(記事)낚시에 하염없이 세월을 흘려내다가 때로는 투망(投網)으로 이외의 어획(漁獲)도 올린다.
무심히 울리는 전화벨 소리로 혁명(革命) 예고(豫告)까지는 직감(直感) 못해도 호외(號外) 깜정도야 전류(電流)가 온다. 낚시꾼이 까딱거리는 찌로 ‘자치’ 입질인지 송사리 장난인지쯤 직감(直感)할 정도는 될까말까….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속의 할아버지처럼 때론 외양(外洋)에서 며칠을 물고늘어진 낚시에 어마어마한 기사(記事)가 물렸다가도 끝내 지상(紙上)으로 귀항(歸港)했을땐 생선벼만 앙상하게 끌고온 결과가 되기 일수지만, 나이 젊은 덕분에 그 노인처럼 기진맥진하진 않는다. 마지막 인생항로(人生航路)는 그렇게 되겠지만….
며칠을 두고 가뭄이 계속된다해도 천둥 벼락칠 정치천기도(政治天氣圖)가 무색할 해설(解說)깜을 마련해 두었다가 사내외(社內外) 난문(難問)에 대비하면 체면이 서고도 남는다.
여당(與黨)·야당(野黨)·거물(巨物)·미물(微物)·사꾸라·별별단체(團體)·별별기관(機關) 등의 그칠새 없는 항의(抗議)·관여(關與)·유혹(誘惑)쯤엔 불감증(不感症)의 꾀병으로… 또 쉴새없는 상사들 불만이나 사원들 불평엔 일체 자각신경마비(自覺神經痲痺)증세로 넘기면 지칠거 별로없다. 사막(沙漠)같은 권태(倦怠)쯤, 모종(某種) 일에 대한 혐오(嫌惡)쯤, 북바쳐오르는 신주같은 ‘출동부(出動簿)’ 성적향상(成績向上) 의욕(意慾)앞에 먼지처럼 날라간다.
고(苦)란에 없다. 락(樂)뿐이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고… 남보다 깨어있는 시간이 그만큼 길으니 그만큼 더 장수(長壽)하는 셈. 아침엔 입맛이 없고, 점심엔 시간이 없고 저녁엔 경황이 없어… 식량(食糧)이 대폭 절약된다. 만성위장염이나 신경쇠약정도야 옛날에 졸업, 목하(目下) ‘당뇨병(糖尿病) 선배’를 추격(追擊)중이나 백약(百藥)은 온통 면성(免性)이 되어 듣지도 않아 병원문 두둘길 생각도 않으니 남들모양 가욋돈 안든다. ‘데스크’처럼 즐거운 인생은 없다…?

(신동준 편집국 정경부 차장, ‘데스크의 고락- 隱和而坐’, 동우(東友), 1963년 10월 28일)

 

[나는 주문한다] 젊은 구미(口味)에 맞게

우리 ‘동아(東亞) 대중식당(大衆食堂)’의 재료구입 담당으로써 제앞도 잘못가누면서 담당 조리계에게 뭐 주문할게 있겠심꺼? 또, 주문한다꼬 고지고식대로 받아들일만큼 순박한 사람들도 아니고 보면 그저 사족(蛇足)같은….
대저 식당의 요리사들이 라카는데 그 승깔(근성(根性)?)이 대단해서 왼만큼 고생해서 재료를 구해다 넘겨도 “이걸로 무슨 요리가 된단 말이가?”카고 타박을 하는게 우리 재료업계의 상식으로 돼 있지만서도, 우리 식당 ‘정식부(政食部) 세사람 조리사단은 우리가 워낙 마감 시간 훨씬 전에 재료를 넘기는 공도 있겠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당신네 들이야 눈만 껌벅거리고 앉아있어도 할일은 손쉽게 다 안해내는교! 그렇지만서도예, 구입계 담당으로서 주방을 들락거리며 우리계원이 어찌다 원해(遠海)까지 나가서 잡아온 거리를 조리하는 냄새를 맡으면 때론 실망도 많았심데이. 기껏 싱싱한 횟감으로 고심끝에 낚아온걸 당신네들이 찜으로 푹푹 삶아 논걸보면 정이 막 떨어지는구마. 허긴, 이틀씩 지나서 물이간 물고기라도 가진 양념 다해서 우리가 맛보아도 감칠맛이 도는 얼큰한 매운탕을 끓여내는 솜씨엔 기쁨도 이만저만 아니지만서도예….
그런데, 나이든 우리 식당 단골손님인 영감님네들이야 그저 구수하고 푸진한 찌개면 군소리없지만서도예, 새파란 젊은 남녀들이야 양념이 조금만 과해도 제맛 풍미를 잃었다 카고 눈살을 찌푸리제, 접시나 남비 그릇까지 이러쿵 저러쿵 하제이, 이 젊은 이들의 까다로운 식성엔 여간 예민하쟎으면 금시 손님줄 안끊어지겠심꺼. “이 컷의 폭이 너무 넓어서 둔해 보이지안능교?” “이석줄 제목도 두줄로 날씬하게 만드는게 안좋겠소?” “전문에 인테루 좀 더 넣어서 시원하게 공간을 살리는게 어떻겠능교?”카고 주방에 다대고 마구 의견을 말하는 것도 변변치않은 재료라도 재료 이상의 맛나고 볼품있는 요리되길 바라는 심정때문 아인교.
흔히 ‘나와바리’라카는게 있어 공연히 딴 계(係)에서 주방에다 대고 이러니 저러니 하다간 대판 시비도 벌어지기 일쑤지만 우린 그런 낡은 통념보다예, 좀더 새로운 감각을 종합해서 해보자카는 거지예. 이제 까지 공식으론 ‘톱’ 재료가 안되는 것도 새로운 감각요리로는 참신(嶄新)한 ‘톱’이 되기도 하고예, 또 반대측도 안 있겠심꺼? 그야 주방 쪽에서도 ‘계획식사’며, ‘임시요리’에 우리에게 재료를 바꿔오라카면 열 번이라도 마다않고 안해 오능교. 이제까지 딴 식당에 손님 안뺏길라 ‘특식’만든다 법석도 떨고, 계절에 따라 별식 일품도 메뉴에 넣는다카고 수선도 떨고 했지만서도예, 우얗든 거두어들이는 재료가 신통치 않아 주방에겐 늘 미안하고마.

(신동준 편집국 정치부장, ‘나는 주문한다- 젊은 口味에 맞게’, 동우(東友), 1964년 3월 23일)

 

 

새해의 抱負

蛇足 (乙已年)

① 抱負 – 보이지 않는 큰 물결에 사회도 신문도 따라 흘러가게 마련이다. 그 물결에 억지로 거슬려도, 또는 무턱 휩쓸리기만 했던 것같이 느껴져… 새해는 좀더 물결을 골라 떠가고 싶지만… 그러나 잘못 침몰이라도 하는 날이며?
② 希望 – 여덟시간 노동제는 두로라도 열시간 쯤으로 단축하는건 이해도 헛꿈일까. 경영자가 제작자보다도 더 신문을 잘 이해하는 날은 아직도 멀었을까. 제작자가 독자보다도 더 신문을 소중히 여기는 때는 올건가. 지면도 독지도 여유를 갖는 ‘신문의 날’은 멀었을까.
③ 改善 – 아직도 독자완 무관의 제왕 자리를 고수하려는 지존의 언론계 종사자가 남아있다. 아직도 라디오에 자리를 안비키려는 심술이 지나치다. 아직도 신문사 내부엔 노력의 낭비와 부족이 격차를 이루고 있다. – 아직도 개선의 시급을 덜 절감하고 있다.

(신동준,  ‘새해의 抱負’, 신문과방송, 1965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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