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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동아일보 사람들- 신길구

Posted by 신이 On 12월 - 19 - 2018

 

신길구(申佶求, 1884~ 1972)는 서울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했다. 한성은행 서기보를 거쳐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 때 기자로 입사해 1920년 7월까지 재직했다. 이후 퇴사해 한약업사시험 제1호로 합격했다. 한의학계에서 ‘본초학의 대부’로 불리며 서울대 약대와 동양의대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신길구(申佶求) (서울, 1884~ 몰) ▲ 1920. 4 기자, 1920. 7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舊友回顧記] 득의(得意)로 왔던 시절(時節)

금년 4월 1일은 동아일보 창간 50주년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하물며 10년의 5배인 반백년(半百年)이랴! 창간시(創刊時)의 젊었던 필자가 고희를 넘었으니 체력도 쇠약하고 기억도 희미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자연의 길이겠다.
‘東友’ 편집실이 ‘재직시(在職時)의 일화(逸話)’를 쓰라는 청탁을 해왔기로 다음에 기억나는 것을 적어보기로 한다.

촉견서립 맹폐지성 어어양양 태양무색 옥석구분(蜀犬恕立 猛吠之聲 魚魚羊羊 太陽無色 玉石俱焚)

이것은 조선의 장서인 동차결(東車訣)에 있는 일절(一節)이다. 무망(無忘) 이경윤(李慶潤)의 편인데 東은 아국(我國)이 동방(東方)에 있고 차(車)는 지남차(指南車)의 차(車)를 따서 동차(東車)로 한 것인데 자기의 자손을 위한 비결(秘訣)로 한 것이다. 일제는 한국을 병탄하고 우리의 역사 ․ 지리 ․ 문화 ․ 생활의 습속(習俗) ․ 도참(圖讖) 등을 모조리 수집연구하던 중 정감록기타비결(鄭鑑錄其他秘訣)을 연구하고 이것을 프린트하여 당시 당국(當局)한 고관들에게 참고로 배부한 것이다. 이것이 삼부(三部)나 주주인 김병태군(金丙台君)에 입수된 것을 필자가 일부를 주간 장덕수(張德秀)에게 전하고 이것을 연구하여 볼 것을 말하였다. 때마침 고문으로 계시던 석농(石儂) 유근(柳瑾)선생이 재석하시여 우리와 같이 일람(一覽)하였다. 그런데 촉견서립(蜀犬恕立)의 촉견(蜀犬)은 독자(獨字)의 파자(破字)이오, 노립(怒立)의 립(立)은 그대로 되고 어어양양(魚魚羊羊)은 선자(鮮字)의 파자(破字)이니 곧 조선독립(朝鮮獨立)이오, 태양무색 옥석구분(太陽無色 玉石俱焚)은 시위운동자는 물론, 참관한 일반민중도 일경(日警)에 포착(捕捉)되어 악형(惡刑)을 당하여 그 처참한 정경은 태양도 무색하리라는 것을 예언한 것이다. 이것은 석농선생의 해석이다. 본서(本書)는 김용주(金用柱)가 편집하고 ‘정감록(鄭鑑錄)’이라하여 조선도서주식회사(朝鮮圖書株式會社)에서 발행하였다. 후일 해방후에 안 일이지만 삼산(杉山)이라는 일경(日警)이 조선신궁(朝鮮神宮)에서 이것을 연구해석한 고본(稿本)이 있다.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

어느날 ‘신여자(新女子)’라는 잡지가 신간으로 편집국에 기증되었다. 이 잡지는 일엽 김원주(一葉 金元周)가 주재(主宰)하던 것인데 그는 이화학당(이화전문학교전신) 출신으로 여성운동의 선점자(先占者)로 일시문학정년(一時文學靑年)의 인기를 독점하였다. 그가 쓴 ‘청상과부론(靑孀寡婦論)’이 필명(筆名)을 날리게 된 것이다. 지금 수중에 없어 그 내용을 소개할 수 없고 또 기억도 거의 상실되어 인용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회화유향(繪畫遺香)의 감(感)이었다. 이것이 논설반(論說班)에서 화제(話題)가 됐는데 석농선생이 “여자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결국 남자의 밑에 드는걸!” 하고 파안일소(破顔一笑)하였다. 이것은 석농선생이 해학(諧謔)을 잘하시는 분이라 남녀관계를 일러 말하신 것 같다. 그런데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송산 김명식군(논설반의 일원)이 웃으며 “선생님께서는 하나만 아시고 그 둘은 아직 모르십니다. 왜 여자쪽이 위로 가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하고 못을 박았다. 석농선생은 함구무언(緘口無言)하시고 장주간은 “송산의 말이 옳군!”하고 하몽 이상협 편집국장은 담배를 피우면서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50주년인 오늘날에는 석농선생과 김송산, 장설산, 이하몽 삼인(三人)은 유명을 달리하엿고 김일엽은 무상(無常)과 환멸(幻滅)을 느끼어 기독교를 개종하고 불문(佛門)에 귀의(歸依)하여 예산 수덕사에서 참선하고 있다는 말이 전할 뿐이다. 이제는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을 깨달았을 것이다. 50년 동안에 우리나라의 여성은 물론 세계의 여성의 사조(思潮)는 격세(隔世)의 감(感)으로 변하였다.
일본 ‘저팬 타임스’의 만화에는 여자 3명이 있는 바에 남자 4명이 상대하고 있는 상황을 그린 제목에는 여성해방(女性解放)-“바는 남자만 오는덴가?”하며 여자가 불만을 토하고 있다.
번(飜)하여 보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여자는 편발(編髮)이나 쪽진 머리가 업성지고 단발(短髮)이 아니면 장발을 펼쳐 어깨를 덮으며 긴치마는 미니스커트로 변하는 동시에 농촌의 여성도 미니로 하여 유행에 뒤떨어질세라 애쓴 결과는 자궁내막염(子宮內膜炎)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고 유한계급(有閑階級)의 부녀(婦女)들은 소위 사교무용에 심취하여 심지어 성적해방(性的解放)을 자행하여 가정을 파괴하는 예가 맣고 가정계획을 잘못 인식하고 낙태수술을 감행하여 불치의 병고로 신음하는 현상이다. 요컨대 이것은 우리의 전통을 모시하고 외래의 습속(習俗)을 검토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과오(過誤)에서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머니의 은공(恩功)은 어버지보다 크다

옛날의 편집국은 외근기자가 편집국에 출동하면 편집국장으로부터 탐방(探訪)할 곳돠 원고청탁할 인사(人士)의 지시를 받고 외출한다. 그러면 편집국이 한적(閑寂)하다가 오후 1~3시가 지나 외근기자가 돌아와서 원고작성, 문선회부(文選回付), 교정(校正) 등으로 매우 분망(奔忙)하게 되는 것이 항례(恒例)였다.
어느날 한가한 틈에 추송 작덕준군과 예기를 나누는데 말이 어머니가 자식을 임신하고 양육하는데 미치자 그는 “어머니의 정신의 생활과 육체의 생활이 태아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첫째 임신을 깨달을 때 어머니될 부인의 기쁨과 용기와 책임은 여간 큰 것이 아니다. 좌와행지(坐臥行止)와 일거일동(一擧一動)을 삼가-눈으로는 나쁜 것을 보지 않고 귀로는 음성(淫聲)을 듣지 않고 입으로는 성낸 말을 하지 않고 잘 때는 모로하지 않고 앉으면 가장자리에 앉지 말고 섰을 때는 한발을 들지 않고 음식(飮食)이 정당(正當)치 않은 것은 먹지 않고 몸을 조심하며- 10삭(朔)만에 진통을 참고 출산하여 포유양육(哺乳養育)하는 그 은혜(恩惠)는 진실로 태산(泰山)보다 높고 대양(大洋)보다 깊다. 그러나 아버지의 은덕(恩德)은 어머니에 비하면 매우 가볍다. 즉 ‘부(父)는 일일지공(一日之功)이요, 모(母)는 십일지은(十日之恩)’이라고 할 수 있다” 하면서 말을 맺었다. 추송(秋松)은 사람됨이 강직(剛直)하면서도 신경질(神經質)이 되어 다정다한(多情多恨) 사람이다. 이말을 듣고 난 교정부의 이승규군이 발연변색(勃然變色)하면서 “추송(秋松)! 그 말을 취소(取消)하시오-. 우리가 적어도 우리민족 2천만의 대변자(代辯者)인 처지에 있으면서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어떻게 되겠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지 않으오. 이말이 밖으로 새어나가 보오. 거번(去番) 권덕규(權悳奎)선생의 ‘가명인두상(假名人頭上)의 일봉(一棒)’이라는 논문과 ‘조선부노(朝鮮父老)에 고(告)함’이라는 사설이 전국 유림(儒林)의 성토(聲討)를 당하여 그 수습책(收拾策)으로 사장 박영효 씨가 퇴임하고 신문보급에 큰 지장(支障)을 일으킨 것은 아직도 기억에 새롭소. 추송의 이번 말은 악의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 하여도 도저히 용인할 수가 없소. 사시(社是)에도 어긋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민중의 열망과 기대에도 벗어나는 것이오. 그 말은 취소하고 앞으로 자중하여 말을 삼가시오”하였다. 추송은 자신을 굽히지 않고 결코 잘못이 없다고 항변하므로 일시공기가 험악하였다. 이국장은 비로소 양인(兩人)을 중재하여 그 흥분된 것을 진정시키려고 온화한 말로 진땀을 흘린 일이 있다.만일 추송이나 하몽이나 이승규군이 50주년기념 좌담회에 참석하였으면 서로 웃고 회구담(懷舊談)을 하였을 것이다. 아! 창천(蒼天)이여, 왜 그들을 일찍 사세(辭世)케 하였나뇨?

何夢의 “朝鮮獨立運動의 一大事劇”이라는 題目에 對하여

신문지의 지면의 신선(新鮮)과 체재(體裁)의 양부(良否)는 일종의 기술(技術)이다. 활자의 대소(大小)는 물론 기사의 배열과 그 내용을 표시하는 제목의 여하(如何)에 따라 독자에게 친근한 호감을 주는 것이다. 하몽 이상협 편집국장은 여기에 대하여 조예(造詣)가 깊어서 기자들이 취재한 기사에 부친 제목은 반드시 이국장의 고열(考閱)을 통하여 만일 마음에 맞지 않으면 곧 제목을 정정(訂正)하는 성벽(性癖)이 있었다. 독립선언(獨立宣言)한 33인의 공판이 개정(開廷)되면 날 사회부 기자인 유광렬군이 재판소에 출입을 전담하여 취재한 것을 문선(文選)에 돌리고 교정이 끝나 조판까지 하였으나 제목만은 회판(回版)에 걸친채로 공란(空欄)으로 하고 있으면서 이국장은 그 제목은 내가 생각하는 중인즉 잠시 기다리라고만 한다. 담배만 피고 그 흩어져가는 연기의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태도는 너무나 태연자약(泰然自若)함이 마치 저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외교의 난삽(難澁)을 느낄때 담배를 피워 그 연기의 산거(散去)하는 방향을 바라보면서 그 대책을 심사(深思)하는 모습과 흡사했다. 이윽고 판매부장 유태로군이 와서 신문을 인쇄하여 배달할 시간이 되었는데 아직껏 제목이 없이 공란이 되어 지형(紙型)을 뜨지 못하니 곧 제목을 붙여야 하지 않겠냐는 진언(進言)에 국장은 교정지의 제목공란에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의 일대사극(一大事劇)’이라고 썼다. 이를 본 편집국원은 모두가 놀랐다. 이 독립이란 문자로 압수가 되지 않을까 염려된 까닭이다. 그러나 이럿은 검열망에서 무사하게 벗어났다. 사원 일동은 이국장의 대담한데 다만 경탄(驚嘆)할 뿐이었다.

先生님은 ‘三種神器’를 否認하십니까

외우(畏友) 김동성군이 중국에 특파되어 중국정계의 인사와 외국의 저명한 학자에게 축사와 축필을 받아와 만족하여 말하기를 “외국인사들은 ‘귀지(貴紙)가 앞으로 반년(半年)을 가지 못하여 정간(停刊)이나 폐간(廢刊)되리라. 그 이유는 일본인은 편파적(偏頗的)이오 단기(短氣)가 되어 정당(正當)한 언론(言論)을 용인(容認)하지 않는 때문’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과연! 창간이 반년도 못되어 동아일보는 무기정간처분을 받았다. 문제의 발단은 9월25일부 제176호 사설 “제사문제(祭祠問題)를 再論하노라(二)”에서 일인(日人)이  그 황실의 상징으로 삼는 삼종신기(三種神器)를 제사(祭祀)지내는 것을 우상숭배(偶像崇拜)라고 논한데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으로 나타난 이유서이고 창간이후 거듭되는 반일(反日) 또는 민족혼(民族魂)의 고취(鼓吹)를 하는 신문제작이 마치 눈 위의 혹과 같이 생각돼 트집을 잡아 행한 것이다. 일인(日人)들은 명치천황(明治天皇)의 칙어(勅語)를 읽을 때 “짐(朕)이 생각하건대”를 황칙무지(皇勅無地)하여 떨면서 읽는 터이라 빈 종이에 쓴 교육칙어(敎育勅語)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이오 일본의 상징인 것을 말한 것이라 여기아 대하여 생각나는 것을 적어 보려 한다.
이 정간(停刊)과 대를 같이하여 어느 사립중학교에서 개성(開城)으로 수학여행을 갔었다. 인솔자는 일인교원(日人敎員)인데 학생들이 선죽교석상에 이르러 고려조의 정포은선생이 조영규의 철퇴(鐵槌)를 맞아 즉사(卽死)하고 그 석상(石上)에 유혈(流血)이 낭자하여 석중(石中)에 침투되어 춘풍추우오백수십성상(春風秋雨五百數十星霜)을 지난 오늘날까지 석상(石上)에 의연(依然)히 붉은 빛이 나타난다고 학생들 간에 이야기가 되었다. 그것은 충절(忠節) 때문이라고 학생들이 감탄한 것을 보고 일인교원이 “그런 이치에 닿지 않은 소리를 하지 마라. 오늘날 과학문명이 발달된 이 시대에 그런 허망한 소리를 하다니 참! 딱한 녀석들이다”고 가볍게 일축하였다. 그러자 한 학생이 “그러면 선생님은 일본의 삼종신기(三種神器)도 부인(否認)하십니까”고 급소를 찔렀다. 일인교원은 이렇다 저렇다 말 한마디 못하고 얼굴빛이 백지장처럼 핼쑥하고 아무 말도 못하였다. 부인한다면 곧 불경죄에 걸리는 판이다.
그러므로 시인(是認)하면서 아무 말도 못한 것이다. 학생들은 일인교원을 타일렀다. “전설(傳說)을 존중(尊重)하고 그 전설은 전설대로 간직하는 것이 옳지 않을가요! 이것을 부인(否認)하면 무엇이 됩니까?”고 하였다. 이 말은 옛날의 얘기지만 오늘날에야 ‘동우(東友)’지의 ‘회고기(回顧記)’를 쓰게 되어 일광(日光)을 보게 된 셈이다.

(신길구,  ‘舊友回顧記- ‘得意로 왔던 時節’, 동우(東友), 1970년 4월 30일)

 

 

(창간 50주년 기념특집) ‘그 때 그 사람 그 정열 창간 전후를 말한다’

신길구(申佶求)(76· 편집국 기자)

-그때는 대개 딴 신문(新聞)에서 기자(記者)로 일하고 있던 사람들이 연줄연줄로 많이 들어왔던 모양이야. 나는 그때 조흥은행(朝興銀行) 전신(前身)인 한성은행(漢城銀行)에서 당좌를 보고 있다가「동아(東亞)」가 창간된다는 말을 듣고 학교동창인 순성(瞬星)(진학문(秦學文))을 찾아가 상의를 했지. 또 하몽(何夢)이 학교선배이기도 해서 입사(入社)가 된 거예요.

-모두들 열띤 분위기속에서 정말 열심히들 일했지.

-경무국 도서과에「니시무라 신따로」(西村眞太郎)란 자가 우리말에 아주 능숙해 창간호(創刊號)부터 밤을 새워가며 광고(廣告)까지 깡그리 번역해 넘겼지. 그때『알뜰히 살뜰히-』를 번역하지 못해 전화를 걸어오고 야단을 피운 적이 있었어.

-그리고 창간호(創刊號)부터「부평초(浮萍草)」란 연재소설을 썼던 민(閔)태원이「우보(牛步)」라는 필명(筆名)을 썼더니「니시무라」가『「우보(牛步)」란 말이 불온하지 않느냐. 소걸음으로 천천히 가도 결국 목적지까지는 가고 말겠다는 뜻이 아니냐』고 캐묻는 따위의 어처구니 없는 말도 했었어. 그런데 창간(創刊) 이듬핸가 한달에 17(十七)번을 발매금지 당한 적이 있는데 그런 탄압속에서도 기자(記者)들은『넌 해라 그래도 난 쓴다』라는 식이었거든.

(동아일보 1970년 4월 1일자 11면)

 

 

[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 13] 召松 申佶求 선생

근대 본초학 정립한 ‘한국의 신농’
본초강목 탐독하다 한의학에 입문

신길구(1894~1972) 선생은 서울한의과대학과 동양의약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본초학을 정립한 선구자로 알려져 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세인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지고 있다.

한의학계의 학자로서 일제시대부터 이미 일인들의 존경과 인정을 받고 추대되어 모든 한의학연구소 또는 황한의생강습소의 강사로서 강의를 도맡아온 선생은 본래 한의학자는 아니었다. 원래 선생은 사립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수료한 뒤 判任 文官試驗에 합격했다.

3.1운동 후 무인독재자 테라우찌(寺內)가 물러가고 사이또미노루(齋藤實)가 총독이 되어 소위 문화정책을 펴면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자 선생은 동아일보 창간 기자가 됐다.

그러나 검열과 폐간이 빈번한 와중에서 선생은 졸지에 실직자가 되었다. 그때 삼남매가 3세, 4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자 비탄에 빠져 근 10년을 허송하게 되었다.

이때 의학에 관심을 두고 심심 소일로 李時珍의 본초강목을 탐독하고 번역을 하게 됐는데 이것이 곧 선생이 한의학에 입문한 시초다.

선친이 한학자인데다가 서당에서 한학을 이수한 경력은 본초강목을 완역하는 기틀이 됐다. 정통으로 한의학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선생은 본초강목 이외에도 의학입문, 동의보감을 문헌을 통해 배웠다.

선생의 특이한 이력 중에는 朝鮮 漢藥業組合 월보 주간을 맡은 경험이 있다는 사실이다. 한약업사가 되기 전의 일이다.

한약업조합은 한약재의 수출과 수입을 관장하던 기관으로 국내외의 다양한 한약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한문해독능력과 한약업조합에서의 경험으로 선생은 총독부가 시행한 한약업사시험에 응시하여 제1호로 합격했다. 1931년에는 한약국을 개업해 한의학의 임상에 들어가게 됐다.

해방 전에 이미 선생은 본초학의 달인이 되어 경기도 의생강습소 강사로서 본초학을 강의하는가 하면 동양의학강습소 강사를 역임하면서 한의학 제도가 없는 일제시대 한의학의 명맥을 잇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다.

해방 후에는 동양대학관 교수를 역임하고 1952년 한의사국가고시 위원, 1953년 서울한의대대학이 만들어졌을 때(당시 학장 박호풍)에는 교무처장으로서 초기 한의대 교육의 틀을 빚는데 이바지했다.

선생은 한의대 교수로서 서울대 약대 강사를 맡았다. 한의학계 인사로서 서울대에서 강의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도 할 수 있었던 것은 원전 해독능력과 산야를 누비고 다닌 채집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그의 강의에 힘입어 서울대 약대에 본초학이 이식될 수 있었다.

이 이후에도 선생은 한의과대학에 강의를 나갔다. 1961년에는 동양의대 교수로 있었으나 학내문제에 얽혀 그만두었다가 1965년 경희대와 동양의대가 합병하면서 다시 본초학 강의를 맡았다. 선생이 작고한 뒤에는 고 안병국 선생이 ‘신농본초 100종’이란 책으로 강의를 이어받았다.

선생에게서 본초학을 사사받았던 이상인(경희대 한의대 명예교수. 현 서울 수유리 이상인한의원) 전 교수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본초집요 상하권으로 교육을 받았지요. 1권은 목본과 초본이었고, 2권은 광물과 동물을 다룬 책입니다. 이들 책은 1년내로 끝마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어요. 강의는 매번 30~40분 늦게 끝났는데 말입니다. 하여간 본초의 세계가 무궁무진했어요.”

이런 선생이 본초학분야에서는 어떤 공헌을 했을까? 단순히 가르친 것 자체도 한의학계에 공헌이라면 공헌이지만 그것만으로 임무를 다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 뭘까? 이상인 전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선생의 본초학은 동의보감 식으로 기원, 성상, 기미, 귀경, 효능, 주치 등을 조목조목 기술했어요. 이를테면 당귀는 ‘산형과에 속한 … 뿌리’라고 가르쳤어요. 그러나 학명은 넣지 않았어요. 한약재를 식물분류학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선생의 기술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학명이 있었으면 더 정확했을 것입니다.”

같은 당귀라도 안젤리카 기가스와 안젤리카 시넨시스, 안젤리카 아큐블로라로 나눠지고 후자 2가지만 유효한 게 지금의 본초개념임에 비추어 다소 미흡한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그의 한계는 학문이 발전한 현재 시점에서 본 한계일뿐 당시의 시각으로 보면 선구적인 측면을 절대 간과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한의학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당시 우리나라 현실에서 본초학의 체계를 확립한 성과는 세월이 흘러도 무시하지 못한다는 게 현직 본초학 교수들의 판단이다. 강병수(동국대 한의대 본초학) 교수는 그를 ‘최근세 본초학의 대부’, ‘한국의 신농’이라고 부를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당시 발행된 모잡지에는 선생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생약연구의 메시아격인 인물로서는 동양의약대학 교수이신 신 선생을 (한의계의 ‘베테랑’ 컬럼난에) 모시지 않을 수 없다. 40여년간 오직 선조들이 이룩한 경험약을 과학적인 체계로 정리하신 공로는 치하하기기에는 너무나 크다. 지금 71세의 고령임에도 젊은이 못지 않게 연구에 몰두하실 뿐만 아니라 후배지도에도 세심한 주의를 아끼시지 않으신다.”

이런 스승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본초학과 본초학을 연구하는 후학이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국의 산야를 누비면서 연구·개발·정리하기 40여년. 선생의 학문적 업적과 정신적 가치는 여러 권의 책속에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본초학 총론(1954년), 본초학 각론(1958년), 한방의학 집요(1963년), 동의개론(1966년), 약초재배법(1969년), 중요한방처방집(1971년), 신씨 본초학 총론(1972년), 신씨 본초학 각론(유고. 1973년 출간) 등이 있다.

대부분 강의록을 정리한 책들이다. 본초학자들은 이들 책이 지금도 깊이가 있다는 평을 아끼지 않는다.

불후의 명저 신씨본초학 총론·각론 집필

선생은 1920년에서 29년 사이 청강 김영훈 선생 문하에서 한의학과 본초학을 사사하고 동시에 본초강목을 완역할 정도로 이론에는 밝았지만 실물을 보아야 하였기에 늘 기회를 만들어서 각 지방 산야를 누비며 약초채집을 다녔다. 이때 채집다닐 때마다 큰딸을 데리고 다녔다. 같이 다니면서 이 식물은 이름이 무엇이며 약명은 무엇이고(예, 우리말로 삽주, 일어 オケラ, 창출, 뿌리), 양건하는지 음건하는지, 삶아서 말리는지 쪄서 말리는지 술에 담구어 말려 쓰는지 등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10本이상 군락을 이루고 있었는지, 그곳이 양지인지 평지인지, 음지(습지)인지를 살피고 그 상황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아무리 군락을 이루고 많이 있어도 2~3개 이상은 채집 못하게 하고 희귀한 경우는 한 개이상은 뽑지 말고 후진을 위해 또는 내년 번식을 위해 꼭 남겨두는 것이 학자로서의 양심이며 책임이라고도 가르쳤다.

◆ 약재 상황 카메라에 담아

서울 근교의 산은 말할 것도 없고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함북 회령에서 전남 해남까지 8도를 두루 다녔다. 등산가가 아니어서 정상까지 올라가지는 않았어도 밑에서 중턱까지 일년생 초본에서 다년생 목본에 이르기까지 뿌리, 열매, 적은 가지 잎사귀 등 胴亂(채집통)에 형태가 구겨지지 않게 담아서 짊어지고 다녔다. 서울근교는 돈암동 종점에서 오르기 시작하면 서쪽으로 성벽을 끼고 돌아 삼각산 인왕산 안산을 거쳐 영천으로 내려왔다.

지금은 시가지나 주택가로 되었지만 진관사 문수암으로 나와 그곳 스님과 한담도 나누고 이웃주민과 약초재배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했다. 집에 돌아오면 중국서적이나 일본의 유명식물학자인 朝比奈 박사의 저서 또는 식물도감 등을 펴놓고 연구정리하기에 바빴다. 북쪽 고산식물과 남쪽의 아열대식물에 이르기까지 식물학자 장형두 박사와 동행한 일도 많았다.

◆ 채집 후 일일이 정리

선생은 이렇듯 채집여행 재배강습여행을 다니면서 방언채집도 했다. 제주도에 가서는 그곳 방언이 경상도나 전라도보다도 유난히 다르니까 방언채집을 해서 제주도방언집을 만들기도 했다. 이와같이 어문학에 관심을 보이는 한편 명승고적을 찾으면 그곳의 유래, 발견년대, 그리고 전래설화도 기록으로 남겼다. 속리산기행, 동룡굴(평북 구장군) 답사 등 그 자세함과 친절한 설명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채집다니며 방언을 채집하거나 사찰에서 스님들과 혹은 그곳 지방주민들과 나누는 대화가 모두 약초의 재배와 수확·조제·저장에 이르기까지 현장학습이었다.

약국을 찾는 환자가 있어도 환자의 상태, 평상시의 식생활, 생리현상 등 문진과 진맥으로 체질을 감안, 아무리 만성병이라도 다섯첩 이상은 안지어주고 복용하고난 후 다시 용태를 봐서 더 투약하는 등 영리보다는 학자적 양심으로 대했다.

선생은 대학에서 강의하는 중에도 한약협회 일을 하기도 했다. 한약협회 서울지부 부회장을 맡았던 이력은 서울대 약대 교수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본래 한약업사로서 출발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겠다는다는 의지의 표시로 읽힌다.

1972년 별세하기 전까지 선생은 저작활동에 몰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씨본초학각론의 출간사를 썼던 수문사 姜壽炳 사장에 의하면 “1965년 본사로부터 집필의뢰를 받고 손을 대기 시작한 지 7년만인 1972년 비로소 탈고를 해 출판이 시작되었으나 양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해설하에 정확한 처방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입각해서 다듬느라 총론편과 동시에 출간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당시 동서의학연구회장으로 있던 의학박사 이종규씨도 선생의 연구열을 극찬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노경에 그 정력이란 도저히 젊은 사람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이다. 항간에서 말하는 본초학의 귀신이다. 이미 고희의 연세를 넘기신 선생으로서… 과학적으로 조리있게 풀이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정작 선생은 본초학은 ‘1+1=×’라는 식의 과학이 아니라고 밝혔다. 오히려 본초학은 형이상학이며, 不立文字 敎外別傳을 신조로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문구에 표현된 바 眞相을 파악하는 한편 배후에 존재하는 實相을 사색해야 한다는 게 선생의 지론이었다.

◆ “본초학은 과학 아닌 형이상학”

선생은 1972년 7월 11일 향년 79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장녀 신현경 씨는 선생의 영면 순간을 이렇게 말한다.

“노년에는 후진양성교육에 거리의 원근을 가리지 않고 강연여행을 다녔어요. 돌아가시기 전에도 청주지방에 강연하러 갔다 귀경해서 기행문을 쓰다가 잠자리에 든 뒤 그대로 영면으로 이어졌습니다.”

선생은 한의학의 과학화를 위해서 장녀를 경성약전에 진학케 했다. 장녀 신현경 씨는 “현실에 타협하다보니 선친의 뜻을 받들지 못하고 고희를 넘겨 후회막급이고 그 불효가 하늘을 찌를 듯 송구하기 그지없다”고 회고했다.

선생의 1남3녀 중에는 의약분야로 진출한 자제와 손자들이 많다. 장녀 신현경 씨와 삼녀 신창휴(재미) 씨, 손녀 신재우 씨는 약사이며, 선생의 장손자인 신동우 씨와 둘째 사위는 양의사, 차손자인 신승우(32) 씨는 한의사로서 현재 경희대 강남한방병원 재활의학과 과장으로 근무, 한 대 걸러 한의학의 맥을 잇고 있다.

문하생에는 서울시한의사회 회장을 역임했던 故 임덕성 씨가 있다.

가족들은 지난해 7월 9일 30주기 추모예배를 갖고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렸다.

(김승진, ‘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 (13)- 召松 申佶求 선생’, 민족의학신문, 2003년 6월 20일·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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