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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동아일보 사람들- 신구범

Posted by 신이 On 12월 - 19 - 2018

 

신구범(愼九範, 1893~?)은 전북 고창 출신으로 1921년 9월 14일, 경성부 돈의동(敦義洞) 소재 명월관(明月館)에서 열린 동아일보 주식회사 창립총회에서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1~1924년 동아일보 전무이사로 근무.

 

신구범(愼九範) (고창, 1893~ ) ▲ 1921. 9 전무취체역, 1924. 4 사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주식회사의 성립

본보가 창간되기 전, 이미 발기인 총회까지 거쳤던 주식회사의 설립이 당시의 경제공황 등 어려운 여건으로 차일피일 지연되다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된 것은 1921년 9월 14일, 경성부 돈의동(敦義洞) 소재 명월관(明月館)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였다. 그러나 발기인총회에서 예정했던 규모에는 미달하여, 당초의 공칭자본금(公稱資本金) 100만원을 70만 원으로 줄이고, 총주식 수도 2만 주(주당 50원)에서 1만4000주로 줄였다. 제1회 불입금은 주당 12원50전으로 도합 17만5000원이었다.

주주 400여 명, 발기인은 55명이었고, 발기인 인수주가 9454주, 공모주가 4546주로 김성수가 바라던 1인1주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김성수계의 출자를 주축으로 하여 제1회 불입금이 확정되었다.

이때의 발기인 55명을 1920년 1월 처음 선출되었던 발기인 78명과 비교해 보면, 계속해서 발기인으로 참여한 인사가 33명, 당초 발기인 가운데서 빠진 사람이 45명이었다. 주식회사의 창립에 새로 발기인이 된 인사가 22명으로 많은 변모를 보인 것이다. 발기인은 다음과 같다.

박영효 김기중 고윤묵 이태건 김홍조 이충건 고하주 정해로

정재완 장두현 신석우 은성우 강대식 김기동 허걸 최준

문종구 박현경 조중환 박용희 이승준 장학규 손영돈 윤상은

이동석 강방식 윤현태 이관로 이종화 송진우 정수태 이운

장현중 장희봉 김찬영 양원모 성원경 현준호 이상협 김욱

장덕수 신구범 김종필 박정환 장현식 오완기 이병목 정은종

홍증식 박정식 박희식 지영진 박하창 신용식 김성수

수정된 새 정관에 따르면 100주 이상을 소유한 주주 중에서 임기 3년의 취체역을 3인 이상, 50주 이상을 소유한 주주 중에서 임기 2년의 감사역 2명 이상을 주주총회에서 선출하기로 했다. 또 취체역 회의에서 호선(互選)으로 사장, 부사장, 전무취체역, 상무취체역 각 1명을 선임하고 고문 약간명을 둘 수 있도록 했다.

창립총회는 투표로 취체역 10명, 감사역 5명을 선출하고, 신임 중역진은 9월 15일과 19일 양일의 회의에서 대표취체역 사장에 송진우, 부사장에 장덕수, 전무취체역에 신구범(愼九範), 상무취체역에 이상협을 결정하고, ‘재래(在來)의 동아일보사를 주식회사 동아일보사에 인계’하는 절차를 밟았다.

기구개편과 새 진용

중역회의는 사(社)의 기구를 개편, 종래의 주간을 폐지하고 새로이 주필을 두기로 하고, 편집·서무경리·영업의 3국과 공장을 두었다. 편집국의 통신부를 폐지하고 지방부를 신설하였다.

새 기구에 따라 주필은 장덕수 부사장이 편집국장을 이상협 상무취체역이 각각 겸임하고, 서무경리국장에는 양원모, 영업국장에는 홍증식, 영업국장대리에는 한중전(韓重銓), 공장장에는 최익진이 각각 임명되었다.

중역회의는 법정 발행인·편집인·인쇄인도 새로 결정, 종래의 발행인 겸 편집인 이상협을 한기악으로, 인쇄인 이용문을 최익진으로 변경해 10일 23일자로 총독부에 신청하고 11월 10일자로 허가되었다.

주식회사 동아일보사 설립 전후를 기준으로 하여 보면, 인적(人的) 변동도 적지 않았다. 창립 후 1년 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초대 사장 박영효가 퇴사하였고, 제2대 사장 김성수는 주식회사가 성립되면서 사장직에서 물러나 취체역의 한 명이 되었다. 편집감독 유근은 수개월 전 별세했고, 양기탁은 만주로 망명했으며, 논설기자 장덕준은 순직하고 진학문 박일병은 퇴사하는 등 큰 변동을 보였다. 장덕수는 주간에서 주필로 그 직함을 바꿨고, 영업국은 국장 이운을 비롯하여 임면순 유태로 남상일 등 각 부장이 모두 퇴사하였다. 1921년 11월 10일 당시의 진용은 다음과 같다.

▲ 발행인·편집인 한기악

▲ 인쇄인 최익진

▲ 대표취체역·사장 송진우(연봉 1800원)

취체역·부사장 장덕수(연봉 1440원)

(주필겸임수당 360원)

전무취체역 신구범(연봉 1440원)

상무취체역 이상협(연봉 1200원)

(편집국장겸임수당 240원)

취체역 이운, 김찬영, 성원경, 장두현, 김성수

감사역 현준호, 장희봉, 박용희, 이충건, 허헌

▲ 주필 장덕수(겸)

편집국장 이상협(겸)

논설반 김명식(1922년 2월 퇴사 후 전임궐원)

정경부장 이상협(겸)

사회부장 김형원

지방부장 김동혁

정리부장 최영목

조사부장 김동성

학예부장 궐(闕)

▲ 서무경리국장 양원모

서무부장사무취급 김철중

경리부장 김홍린

▲ 영업국장 홍증식

영엉국장대리 한중전

판매부장 한중전(겸)

광고부장 한중전(겸)

▲ 공장장 최익진

주식회사 설립 후 사(社)의 재정은 점차 호전돼 9월에는 사원 전원에게 위로금을 지급하였고, 그해 연말에는 월급 50%의 상여금도 지급하였다. 창간 이래 승급되지 못한 대부분의 사원에게 그 이듬해부터 승급도 실시하였다.

그러나 제2회 주금(株金) 불입이 여의치 않아 다시 설립자 김성수에게 의존하게 됐으나, 1922년경부터 일본 도쿄의 광고를 개척하면서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해 1924년경에는 정상적인 운영으로 들어갔다.

(…)

간부진 대 개편

1924년은 연초부터 박춘금의 난동, 식도원폭행사건, 이로 인한 사회적 물의와 언론집회압박탄핵운동의 전개, 조직화한 사회주의계열의 비난 등 동아일보로서는 어려운 시련이 거듭되었다. 또한 일제의 언론탄압도 날로 심해져 압수만도 1920년에서 1923년 사이 연평균 15회이던 것이 1924년 한 해만 56회로 엄청나게 늘어났다.

이렇듯 어려운 시기에 이상협 편집국장이 많은 동조 사원들을 이끌고 퇴진하는 일이 생겼다.

표면상 이유는 박춘금의 식도원 권총협박사건에서 비롯됐다. “송진우가 서약서를 썼다는 풍문이 들리자 이상협이 송진우에게 직접 물어본 일이 있었다. 그때 송진우는 서약서를 써 준 일이 없다고 하였는데, 며칠 후 송진우가 박춘금에게 써 준 사담(私談)이 사진판으로 게재되어 문제는 다시 시끄럽게 되었다.”(양원모 담)

당시 3시간여에 걸친 감금 협박으로 ‘사담’이라는 쪽지를 써 주었던 것을 매일신보가 4월 13일자 5면에 사진과 함께‘증서(證書)’라며 보도한 것이다.

식도원 사건이 있은 후, 이상협이 서약서를 써 주었느냐고 물었을 때, 송진우가 이를 부인한 것은 그가 써준 것이 서약서가 아니었고, 또 ‘사담’이라는 쪽지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던 것은 박춘금 무리의 행패를 모면하기 위하여 탈출 방편으로 써준 개인적인 문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상협이 송진우를 공격한 것은 그동안 두 사람 사이가 원활하지 못하였던 데 좀 더 큰 원인이 있었다고 한다. 이상협은 당시 신문계의 1인자로 스스로도 “조선에서 신문을 아는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다”고 자부하던 터였다. 그 성격도 날카로와 편집에서 영업에 이르기까지 송진우와는 가끔 의견이 상충했다. 창간동인 진학문도 이상협의 독주로 3개월 만에 사퇴했다. 이상협의 이런 독주는 그가 신문에 쏟는 열정이 컸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상협에게는 신문제작에 대해 잘 모르는 송진우 사장의 지시가 마땅찮을 때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신문제작과 경영은 다른 것이요, 큰 기구를 이끌어 가려면 신문제작 면에서만 생각할 수 없는 많은 애로가 또한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이 송진우와 충돌을 빚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렇듯 두 사람의 의견이 상충하여 이상협은 동아일보를 떠났다.

이상협이 결심을 굳히게 된 것은 당시 친일파의 손에 경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여 재정이 날로 어려워지고 있던 조선일보를 인수하기로 한 데도 그 원인이 있었던 같다.

본사는 4월 25일 장교동(長橋洞) 장두현(張斗鉉) 댁에서 임시중역회의를 열었고 사장 송진우, 전무 신구범, 상무 겸 편집국장 이상협, 취체역 김성수, 장두현 등이 사표를 제출했다. 취체역 장덕수는 미국에 체류 중이었고, 김찬영은 1923년 7월에, 정재완은 같은 해 10월에, 이운은 1924년 2월에 각각 개인 사정으로 임기만료 전 그 자리를 떠나 있었으므로 중역진으로는 취체역 성원경, 감사역 장희봉 이충건 허헌 만이 남았다.

중역회의는 취체역 보선을 위한 임시 주총을 5월 14일에 개최하기로 하고, 그때까지 약 20일간의 공백기간에 감사역 허헌이 사장 직무를 대행하기로 하였다.

이상협의 퇴진이 빚은 소용돌이는 두 차례에 걸쳐 많은 사원들이 그와 행동을 함께 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1차로 5월에 신구범 전무를 비롯하여 홍증식 영업국장, 김동성 조사부장, 김형원 지방부장, 민태원 정치부장, 김양수 논설반장이, 2차로는 9월에 최익진 공장장을 비롯하여 최영목 정리부장, 유광렬 사회부장, 이서구 박팔양 서승효 노수현 야마호 요소기요(山塙芳潔) 등이 이탈했다. 다수가 창간 동인으로 고락을 같이 하며 동아일보의 기초를 다지는 데 심혈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兩社 歷史回顧 (2)
東亞日報二十年史 大正九年(1920년)에서 昭和十五年(1940년)까지

東亞日報社는 金性洙, 張德秀, 張德俊, 梁起澤氏 등 여러분이 朝鮮에도 민간신문이 필요하고 따라서 이런 기관을 통하여 문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요하다고 생각하고 여러 가지로 의론한 결과 대정8년(1919년) 7월에 朴泳孝씨 이름으로 동아일보의 허가수속을 하였으니 이것이 말하자면 동아일보의 태동시기(胎動時期)이었다. 동시로 말하면 재등총독이 새로 부임하고 문화정치를 표방하든 때이라 발기인들의 운동이 혓되지 아니하여 그 다음해인 대정9년(1920년) 1월 6일에 당국에서 허가지령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해 4월 1일에 창간호를 내었는데, 그때, 동아일보의 陣容을 보면

社 長 朴泳孝

編輯監督 柳瑾

梁起鐸

主 幹 張德秀

編輯局長 李相協

營業局長 李雲

이러한 당당한 진용이었다. 창간호 첫머리에는 장덕수씨가 『주지(主旨)를 선명하노라』 하고

蒼天에 太陽이 빛나고 大地에 淸風이 불도다.

山靜 水流하며 草木昌茂하며 百花爛發하며 鳶飛魚躍하니 萬物 사이에 生命과 光榮이 充滿하도다.

空氣를 呼吸하도다. 아, 實로 장하도다…(以下略)

하고 기타 수천 마디로 社說를 써서 그때 조선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 그리고 창간호 하단에 『我報의 生命과 責任』이라는 문제로 柳瑾씨의 글이 있고 다시 일편에는 梁起鐸씨의『知乎아? 不知乎아』하는 론문이 실어서 東亞日報의 의기를 表했다 한다. 그러나 讀者가 대금을 잘 내지않고 심지어 지분국에서까지 대금이 잘 회수되지 아니하여 창입 당시부터 경영이 자못 골란하였든 모양이다. 이에 대하여<21> 동아의 경영주인 金性洙씨의 말을 들건대 그때엔 광고수입이란 극히 적고 신문대금으로 수지를 맞어야 하겠는데 원악 대금이 잘 회수되지 않기 때문에 그 곤란이란 여간이 아니였다고 한다. 김성수씨가 이 은행 저 은행으로 동냥하듯 다니며 수형을 써 놓고 매일 몇 백원 몃 천원씩 융통하여 그 신문을 경영하였다니 그 고심을 짐작하기에 넉넉하다. 더욱이 그 때는 윤전기를 놓지 못하고 겨우 夕刊 네페지 신문을 대동인쇄소(大東印刷所)에서 제판을 하였다가 밤을 세워가며 평판기계에 철거덕거리면서 박었다니 이만하여도 호랑이 담배 먹든 시절이라 아니할 수 없다.

호랑이 담배 먹든 초창기를 지나서 그해 7월에는 비록 구식이나마 륜전기를 놓고 차차 사무를 정돈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아일보에는 제1차의 수란기(受難期)가 오게 되었으니 그것은 그해 여름에 權悳奎씨가 『假明名人 頭上에 一棒』이라는 글을 써서 儒學者들의 분노를 샀기 때문에 일대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사건으로 사장 박영효씨는 인책사임하고 량기택씨도 책임 사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해 9월 25일에 「祭祀問題」의 론설이 당국의 기휘에 촉하여 필경은 제1차의 정간처분을 받었으니 동사의 혼란과 경악을 짐작하기에 넉넉하다. 간부들이 다못 아연하고 당황하여 문을 닫고

『신문경영이란 좀더 침착하고 정신을 채려야 하겠군.』

하고 한숨을 쉬었다는 말로 보아 그들의 심경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당국에서는 동아일보의 반성을 구하기 위하여 속히 해금하지를 않고 그해 가을 겨을도 지나고 그 다음해(大正10년; 1921년) 정월 유일에야 해정 지령이 나리게 되었다. 한번 견책과 매를 마즌 동아일보에서는 단단이 정신을 차리고 과격한 언론과 경솔한 언론을 주의하는 동시에 다시 씩씩한 새 출발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지면도 쇄신하고 진용도 정비하여 민간신문으로서의 명목을 빛내고저 하였다. 이 사이에 북간도(北間島)에 출장하였든 장덕준(張德俊)씨는 실종하고 편집감독 류근씨도 작고하여 동사의 진용에 異狀을 가저 오게 되었다. 그러나 언제나 꾸준한 노력을 퓀˜는 동사는 더욱 내용을 충실히 하고 사의 조직도 변경하여 일대 비약을 꾀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의 조직을 주식회사(株式會社)로 변경코저 가진 노력을 다 한 모양인데 특히 김성수씨는 <22> 전라도 방면으로 주를 모집하러 가고 장덕수씨는 서도지방으로 주를 모집하러 가는 등 맹렬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 사이에 있어서 김성수씨의 친구의 하나인 송진우(宋鎭禹)씨가 전라도 방면에서 역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더구나 송씨는 자기의 친구되는 신구범(愼九範)씨를 권유하여 그로 하여금 2천여주를 부담케 하였으니 그 때에 있어서는 실로 적지 아니 한 공적이었다.

이리하여 주의 모집을 완성한 그들은 그해 9월14일에 주식회사의 창립을 완전이 끝내였다. 그때 취체역으로 宋鎭禹 金性洙 張德秀 愼九範 李相協 張斗鉉 成元慶 등 제씨가 피선되고 다시 간부를 개선한 결과

社 長 宋鎭禹 副社長 張德秀

專 務 愼九範 常 務 李相協

이렇게 결정되였다. 이리하여 새로 창립된 주식회사는 재래 동아일보를 접수하여 가지고 새로운 활약을 하게 되었다. 

(‘朝鮮日報 東亞日報 自進廢刊 眞相과 今後’,  삼천리, 194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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