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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동아일보 사람들- 송지영

Posted by 신이 On 12월 - 18 - 2018

 

송지영(宋志泳, 志英, 1916~1989)은 평북 박천 출신으로 19세 때인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생활수기 공모에 당선됐다. 이후에도 종종 동아일보 독자란에 투고했는데 이를 눈여겨보던 설의식 편집국장이 견습기자로 선발했다. 1940년 동아일보가 폐간되자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시보 기자로 활동했다. 1943년부터 상하이 임시정부 관련 일을 하다 일제에 체포돼 재학중이던 난징(南京) 중앙대학을 3년만에 중퇴하고 나가사키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귀국, 언론계에 복귀해 1946년 한성일보 편집부장, 1948년 국제신문 주필, 1959년 조선일보 편집국장, 1979년 문예진흥원장,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민정당 전국구), 1984년 KBS 이사장을 지냈다.

 

송지영(宋志泳, 志英) (영주, 1917~ ) ▲ 1939. 8 사원(사회부), 1939.10 퇴사.〔국제신문 태평양신문주필, 조선일보편집국장〕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산촌생활기록(山村生活記錄) 화전민(火田民)들과 가치 (一)
송지영(宋志泳), 청전(靑田) 화(畵)

이 산촌생활기록(山村生活記錄)은 본보15주년기념(本報十五週年記念) 원고(原稿)『농어산촌생활기록(農漁山村生活記錄)』에 대(對)한 응모원고(應募原稿)』인바 그 내용(內容)이 본사(本社)의 고선권내(考選圈內)에 들지 못하야 당선(當選)은 되지 안헛으나 화전민(火田民)의 생활묘사(生活描寫)에 잇어서 취(取)할바 잇으므로 이에 연재(連載)하기로 한다.

주형. 맛난지도 꽤 오랜가보― 지나간 날 아무 세상일을 모르고 참새같이 웃고 떠들든 시절이 퍽이나 그립소.
우리가 서로환경이 다름으로서 형은 도회로 나는 농촌으로 이리하야 갈린지  네다섯해에 형도 안팍그로 만흔 체험과 단련으로서 느끼고 얻은바 적지 안흐려니와 나는 특별히 전에 보지 못하든 것 또는 생각지도 못하든 살림살이의 한갈피를 보고 듯고 또는 내가 직접 당함으로써 다시금 인생행로의구비치는 험악한 물결을 한두번 더 건넛다 믿소 그럼으로 세상이란 이러케도 험한가? 인생이란 참으로 웃읍고나―하는 생각을 더욱 절실히 느낍니다. 그것은 지금껏 사오년을 보고듣고 또는 내 자신의 생활까지가 현재의 도회사람으로서는 상상도 어려우리만큼 말하자면 왼 세상사람들이 떠들고 부러워하는 문명의 도회와는 아조 서로 통치못할듯이 꽉 막아버린 딴세상에서 지나왓기 때문에―.
주형. 나는 농촌으로 돌아오자 곧 이러한 딴세상 사람이 되엇습니다, 이것은 누가 가르처 그리한것도 아니요 내생활의 여유가부족하야 도회나 농촌에서 쫓겨온것도 아니요、단지 처음에는 한몸이 편키를 위하야 그들속에 끼운것이 차차 그들의 정경을 살피고 마음을 알며 점점 친하야 짐으로써 자연히 그들속에서 떠날 생각이 없으며, 이제는 나 까지 먹고 입고 지나는 모든 형편이 그들과 조금도 틀림이 없으므로 형 같은 사람들이 나를 본다면 두말없이 그네들과 같이 보아 줄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잇음으로 나는 이 세상과는 갈리인 그네들의 참다운 눈물과 참다운 우슴을 보앗으며 한숨이 무엇이고 기쁨이 무엇임을 잘알앗습니다.
그들은 어리석을망정 거짓이 없으며 완악할지언정 꾀를 부리지안습니다. 딴세상 사람인 그들의 먹을것을 찾는데는 석탄연기에 골치가 아프고 기계소리에 귀가 먹먹하여지는 회사와 공장이 아니요, 누으면 굽으러 질듯한 산비탈에 불을노코(이것을 부대라 한다)긴 호미자루로 돌구멍을 쑤시는데 잇으며 먹는 음식도 하얀 쌀밥과 고기국이 아니요 넉넉하여야만 감자와 강낭, 그러치 안흐면 풀뿌리나 나무의 껍질이며 입는 것은 하부다이나 비단이 아니요 겨울에 솜조차 못두는 광목이나 일목 등 그것도 값싼 것만을 골라 사는것들이다.
이것만으로도 세상사람과는 차이가 멀거든 하물며 이뿐이 아님에랴! 주형. 형은 일반 농촌에서 일어나는 달고 쓴 여러가지 경험은 잇으려니와 이러한 딴세상 사람들의 생활은 일즉이 보지도 못하엿스려니와 듯지도 못하엿으며 생각조차 못하엿스리다.
형뿐이 아니라 이세상에 만흔 사람들이 또한 형과 같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럼으로 나는 이제 내가 산촌생활을 하면서부터 지금까지의 눈으로 직접보고 귀로 들으며 또는 내가 직접 당한 여러가지 눈물과 우슴을 섞어 지나온 사실을 조곰도 거짓과 꾸밈이 없이 보고들은 그대로 내가당한 그대로 기록하야 형과 밋형과 같은 처지에 잇는 여러사람들에게 보고하야 문명인의 생활과 비교하야 그들에게 대하야 적으나마 생각하는바 잇기를 바라는바 이외다.
주형. 이러타고 주져넘거나 또는 건방지다고 나를 웃으시지는 안켓지요? 자― 이제로부터 쓰기로 합시다.
내가 처음 산으로 오기는 상○암이라는 소백산(小白山)을 뒤에 등지고 맑은 시내를 앞에 가로 노흔 그리 높지 안흐면서도 유수하기로 일홈이 잇으며 이고을 팔경에 하나인만큼 경치 조키로도 근처에 만히 알려진 곳이다.
본대는 큰절이 잇엇음으로 아직까지 마슬 일혿도 그냥 절 일홈을 따라 상○암이라고 부른다 한다. 내가 온뒤 몇일을 수리하야 잇게된 집이 바로 그전 법당이엿섯다고 한다. 지은 품으로 보와 그럴듯도 하엿다.
내가 처음 이곳을 찾어 올때는 바로 삼월초순 앞뒤 언덕에 진달래가 한창 피여 시내에 비취는 양이 퍽이나 아름다웟다. 시냇가돌길을 밟아오르며 먼산 기슭에 제비집같이 뜨엄뜨엄 달려잇는 집돌을 보며 처음보는 이만큼 조흔경색에 취하야 생각하기를 이 마슬 사람들은 아마 퍽 자미잇게 살리라 하엿다. (게속)

(동아일보 1935년 6월 22일자 4면)

 

 

謹吿(근고)

송지영(宋志泳) 임 기자(任記者)

소화11년 5월9일(昭和十一年五月九日) 동아일보사 풍기지국(東亞日報社豊基支局)

(동아일보 1936년 5월 14일자 5면)

 

사고(社吿)

송지영(宋志泳) 임 총무(任總務)

이용원(李容元) 임 기자(任記者)

김병삼(金秉三) 임 사진반(任寫眞班)

한덕이(韓德履) 김은석(金恩錫) 임 고문(任顧問)

소화12년 6월1일(昭和十二年六月一日) 동아일보 풍기지국(東亞日報社 豊基支局)

(동아일보 1937년 6월 7일자 4면)

 

 

 

雨人 宋志英

▲ 1916년 12월13일 평북 박천에서 출생(본적은 경북 영주군 풍기읍)
▲ 89년 4월 24일 별세
▲ 37년 동아일보 입사. 횡설수설 집필
▲ 38년 同社 만주특파원
▲ 40년 중국 上海時報 기자
▲ 43년 중국 남경중앙대학 3년 중퇴
▲ 46년 서울대학 강사, 한성일보 편집부장
▲ 47년 중앙대학 강사
▲ 48년 국제신문 주필 겸 편집국장
▲ 49년 태양신문 주필 겸 편집국장
▲ 59년 9월 18일~1961년 1월 27일 조선일보 편집국장
▲ 74년 조선일보 논설위원
▲ 79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
▲ 80년 10대 전국구의원(민정)
▲ 84년 KBS 이사장

송지영은 타고난 언론인이요, 문인이며 묵객(墨客)이었고 또한 말년의 한때는 정치인기도 했다. 그만큼 폭넓은 분야에서 재질을 종횡무진으로 발휘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술도 무척 좋아했다. 조선일보 편집국과 논설위원실에서 여러해동안 선배로 모시면서 함께 일한 갖가지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나의 뇌리를 스쳐간다.
그는 “우수의 일월(憂愁의 日月)”이란 회고록에서 『1961년 5월 16일에 불어닥친 변혁의 폭풍은 나로 하여금 풍랑에 휩쓸린 조각배 신세나 다름없이 하루 아침에 나의 모든 것을 잃게 하였다. 한 가정의 남편으로서, 아들 딸의 아버지로서, 어버이를 모신 자식으로서 또는 수십년에 걸쳐 스스로의 삶을 쌓아올린 사회인으로서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하였다』
한맺힌 사연을 옥중일기형식으로 서술한 글에서 『군사정권이 만들어놓은 소위 혁명재판에서 끝내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고, 나중에 무기형으로 떨어져, 그로부터 처절하기 이를데 없는 인생의 황무지, 쇠창살 속에서 밑도 끝도 없는 날과 밤을 보내야 했다』고 술회한 대목은 만감을 교차하게 만든다.
8년 2개월의 옥고를 치른 송지영의 연보를 대충 더듬어 보면 1916년 12월 13일 평북 박천에서 출생, 여섯 살때부터 마을 글방에서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 사서삼경을 익히는 한편 12세때 온가족과 함께 경북 풍기로 옮겨 정착한 뒤 소백산에 들어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읽으면서 신문학을 자습하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항일의병에 종사했기 때문에 학교에 가는 것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5세때 영주경찰서에 구속되어 항일사상을 추궁받은 것을 비롯, 43년 남경 중앙대학 재학중 일본경찰에 구속되었고, 44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선고를 받고 일본 나가사키형무소로 이감됏으며 50년 6.25동란때 서울에 남아있던 중 정치보위부에 구속됐다가 9.28수복으로 풀려났으며 61년 5.16과 함께 혁신계로 구속되어 사형선고까지 받는 등 파란만장의 영어생활을 연거푸 겪었다.

□ 記者생활과 文筆겸해

언론인과 작가로서 송지영이 남겨놓은 발자취는 괄목할 만 하다. 34년 월간잡지 일월시보(日月時報)에 논문과 시조를 발표, 35년 동아일보에 “화전민(火田民)들과 같이”란 생활기록을 14회 연재, 36년 “신동아·신가정(新東亞·新家庭)”에 수필·기행문 발표. 37년 동아일보 입사. 횡설수설(橫說竪說) 집필, 38년 만주특파원, 39년 동아일보 폐간으로 만선일보로 옮김. 40년 중국 상해시보 기자, 46년 한성일보 편집부장, 48년 국제신보 주필, 49년 태양신문 주필. 55년 희망사 주간, 56년 연합신문에 “청등야화(靑燈野話)” 연재(4년간). 국제신보에 “부운(浮雲)” “야초기(野草記)” 연재. 58년 조선일보 논설위원, 70년 중앙일보에 “대해도(大海濤)”란 역사소설 연재. 72년 조선일보에 “천풍(天風)” 연재, 79년 “그 산하(山河) 그 인걸(人傑)” 간행, 동년 문예진흥원장, 80년 민정당 창당에 참가, 10대 전국구 의원, 84년 KBS 이사장 등이다.
89년 4월 24일 74세를 일기로 화려하면서도 시름과 파란이 중첩되었던 한 평생을 마쳤다.
그때 서울대부속병원 영안실 입구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한 조화들이 고인의 덕을 기리며 넋을 달래고 있었다.
그는 어느날 일기에서 우리의 땅덩어리를 금수강산이라고 말로만 내세울 것이 아니라 정말 비단으로 수놓은 듯 빛나고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는 한국의 구속구석마다 사람사는 마을 주변에 온갖 화초를 심어 힘들여 가꾸지 않더라도 잘 자라는 꽃들이 봄·여름·가으내 활짝 피어있게 한다면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 금수강산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 하소연 한바 있다.
그토록 송지영은 꽃을 사랑했고 술자리에서도 이따금씩 흥겨우면 “낙양은 온통 꽃밭”이란 낙서를 후려갈기곤 했다. 그래서인지 이승을 떠날 때 그분이 온통 꽃속에 파묻혀 버린 것도 우연치 않은 것 같았다.

□ 風流를 즐긴 道人

도량이 넓고 풍류의 멋과 낭만을 즐기며, 특히 중국문학과 역사에 통달한 그의 주변엔 항상 문인 · 논객 · 교수 등의 주붕(酒朋)이 많았다.
명동과 관철동의 단골 술집은 이들로 말미암아 꽤 격조놓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조병화, 이봉구, 김수영, 심연섭, 이명주, 석영학 등의 얼굴이 떠오른다. 더욱이 송지영은 이병주와 서대문교도서의 같은 감방에 갇혀 있었다는 인연과 더불어 두사람이 모두 문단에서 다작가(多作家)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이 자주 들렀던 「낭만」, 「사슴」, 「칠성」 등 아늑한 달골 술집들이 시류(時流)에 밀려 이젠 자취마저 없어진 것은 아쉬운 일이다.

“이리로 저리로 흙바람에 몰려가는
인생의 벌판에서
자기라는 곧은 하나로 길을 잡아가는
수려한 지혜
작은 몸에 담긴 거대한 지식
당신 같은 깊은 도인을 본 일이 없습니다.“
송지영을 읊은 조병화의 시 한 구절이다.

송지영은 논설위우너실에서 심심하면 큰 붓으로 중국명시를 써서 친구와 후배들에게 나눠주었는데 나도 몇장의 휘호를 얻어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분이 조선일보 편집국장때 4.19혁명이 일어나 연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군중시위가 거리를 메웠을 무렵, 조선일보 1면 톱에 “학해는 해일(學海는 海溢)”이란 제목을 초특호(超特號) 활자로 장식하여 큰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젊은 학생들과 교수들이 합세한 성난 지성인들의 아우성은 전국의 학원가와 방방곡곡에 메아리져서 노도처럼 출렁여 바다를 메운다는 뜻으로 풀이되며, 간결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멋있는 제목이라고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격찬했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언론사상 기록될만한 명제목이었다. 그 뒤에도 걸작 제목이 많았다.
유식한 선비다운 솜씨요 센스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때 고정훈 논설위원은 신문사 창문에 확성기를 달아놓고 태평로 거리와 구 국회의사당 앞에 운집한 군중들을 향해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송·고(宋·高) 두 사람은 그뒤 민족일보로 자리를 옮겨 악운의 회오리바람을 맞게 된 것이다.
송국장의 지시에 따라 외신부장이었던 필자는 “국제중계(國際中繼)”란 고정칼럼을 맡아 주4회정도 집필했는데, 세계정세의 하이라이트를 간추려 그 배경과 변천과정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 등을 시사성에 맞춰 해설하는 작업이어서 조그만 보람과 자부심을 느꼈다. 그것이 한권의 스크랩이 됐다. 지금도 그런 칼럼은 존속됐으면 좋을 것 같다.
앞에서 언급한 주붕 외에도 빈번하게 저녁 술자리를 송지영과 함께 한 벗들은 이봉래, 양호민, 김성두, 남재희, 조덕송 위원 등인데 최석채, 이어령은 체질관계로 주당과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특히 조덕송은 필자와 함께 퇴근후 조선일보 옆 골목에서부터 시작, 명동 「은성」에 들러 그집 터줏대감격으로 늘 한자리에 앉아 흰머리에 붉은 얼굴로 막걸리를 조용히 들이키는 이봉구를 비롯한 여러 문인 · 논객들과 주중환담을 교환하곤 했다.
「은성」은 탤런트 최불암의 자당이 경영했었는데 몇해 전 교통사고로 작고를 했으며, 이봉구의 작품 “명동야화(明洞野話)”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송지영에 얽힌 일화는 너무도 많다. 그를 둘러싸고 인생을 논하며 희로애락을 골고루 씹는 가운데 풍류를 즐긴 동우들이 참으로 많았다.
하나, 둘씩 유명을 달리하는 무상함에 새삼 적료(寂廖)와 비애와 공허감 같은 것을 느끼면서 그의 발자취를 감회깊게 더듬어 본다.

(김상현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雨人 宋志英’, 韓國言論人物史話-8.15前篇(下), 1992)

 

 

 

현대 언론인 열전<02>  ‘격정시대’를 살다간 풍운의 언론인

우인(雨人) 송지영(宋志英) (1916 〜1989)

풍운을 견디다 간 선비” “언론·예술 섭렵. 시대의 재인” “풍류를 즐긴 도인” 우인(雨人) 송지영(宋志英) 이 세상을 떠난 후 나온 추모 기사의 제목들이다. 그의 삶을 잘 압축해 표현해주고 있다. 그는 일제하 동아일보 기자로 출발해 해방이후 여러 신문사를 거치며 활동한 언론인이었으며 동시에 수많은 역사소설을 써낸 작가이기도 했다. 또한 일제 말기에 기자로 출발해 해방이후 활발한 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해방 전후 시기의 가교적 역할을 한 언론인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송지영 만큼 근현대사의 온갖 풍파를 온몸으로 겪었던 언론인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그는 항일운동 전력과 친일 혐의. 진보언론 활동으로 인한 옥고와 군사독재권력에 대한 협력 등 파란 많은 인생을 살다갔다. 항일과 진보 언론 활동으로 10년 정도의 옥고를 치렀으면서도. 친일 혐의로 인해 논란의 대상이 됐고 말년의 정치 참여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삶은 근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지식인의 고난을 잘 보여준다.
송지영은 1916년 평북 박천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부친의 뜻에 따라 정규 학교를 다니지 않고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1928년에 정감록을 믿던 부친의 믿음에 따라 경북 풍기군으로 이사했다. 아사한 후에도 부친은 그를 신식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한학만 배우도록 했다. 이때 중국의 고전과 현대 문학까지 두루 탐독했는데, 이것이 훗날 그가 든든한 한문 실력을 인정받고 중국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갖게 되는 기반이 됐다. 한편 부친이 사다준 영어와 일어 책으로 독학을 하면서 새로운 학문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도 했다.

동아일보 생활수기 당선 인연으로 기자생활

초막에서 세상을 등진 듯이 공부하던 그는 점차 회의에 젖었다. 그는 19세 때인 1935년에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생활수기 모집에 ‘화전민들과 같아 라는 제목으로 응모해 당선됐다. 산 속의 초막 생활을 소설제로 쓴 체험기는 6월 22일부터 7월 13일까지 16희나 연재됐다. 그 뒤 동아일보 독자란에 자주 글을 써 보내 게재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동아일보사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왔다고 한다. 편집국장 설의식의 편지였는데 “글을 보고 기자의 소질이 있다고 생각되기에 본사에 올라와 견습기자 생활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 편지를 받고 송지영은 서울로 상경해 동아일보에서 2년간의 견습생활을 시작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무기정간을 받았다가 해제된 직후인 1937년에 21살의 나이로 견습기자 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1947년 4월에 나온 ‘신문평론, 창간호에 실린 “올챙이 기자시절”이라는 글에서 송지영은 “그때의 동아사 견습생 제도는 누구나 입사하는 사람에게 일을 익히도록 함보다도 장래의 신문인으로서 소질을 갖춘 사람을 지국 혹은 학원에서 선발하여 명실공히 신문쟁이를 육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당시 2년간의 견습생 제도가 일반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 당시 그의 연령이나 학력을 감안해 처음부터 정식기자로 채용하지 않고 일단 견습기자로 받아들였던 듯하다.
송지영은 견습기자가 된 지 2년 만인 1939년 8월에 정식 기자가 됐다. 그가 2년 후 정식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보다도 한문에 대한 해박한 실력을 갖고 있어서 문화부나 사회부 어떤 부서에서도 필요한 인재”로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스스로 회고했듯이 “활자 호수와 씨름하며 제목을 뽑고 판을 짜고 하는” 편집부에서 주로 활동했다. 어찌된 일인지 본사 기자가 된 지 2달 만인 1939년 10월에 그만두고 말았다.
송지영은 1939년 11월부터는 동아일보의 신경지역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동아일보 폐간 이후에는 만선일보 기자, 그 뒤에는 상해시보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렇게 생활하던 중에 대학을 다닐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중국 남경의 중앙대에 입학해 중국문학을 전공하게 됐다. 이즈음인 1942년 9월 경 그가 상해의 친일단체였던 ‘계림회’ 에 관여한 적이 있다는 주장들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얼마 뒤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43년부터 중경 임시정부의 특파원인 김병호와 연결해 남경 지역 지하공작 상황을 보고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44년에 일제에 의해 체포됐다. 1944년 6월 상해에 있는 일본 영사관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죄목으로 징역 2년 형을 받은 후일본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이 일로 그는 1982년에 건국포장을 받았고, 사후인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해방 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고

송지영은 해방이 된 지 두 달 뒤인 10월 9일에 맥아더 사령부의 정치범 석방 명령으로 출옥해 귀국할 수 있었다. 서울로 온 뒤 그는 정치상황을 관망하다가 한 동안 조소앙의 비서로 일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언론계로 돌아왔다.
원래 근무했던 동아일보가 아니라 새로 창간된 한성일보에 입사했다. 사장 안재홍과 주필 이선근이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편집부장을 맡았고. 얼마 뒤에는 중국어판(華文) 한성일보의 주필을 겸했다. 동아일보 인맥이 모태가 된 한민당에 관여하지 않고, 조소앙이나 안재홍 같은 중도파적인 인물들과 같이 활동을 했던 것이다.
그 후 송지영은 여러 신문사를 옮겨 다니며 주필이나 편집국장을 지냈다. 1948년 국제신문 창간에 참며해 주필을 지냈고, 1949년 이후 태양신문의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냈다. 태양신문에 재직할 때 6·25를 맞았는데, 우여곡절 끝에 고향인 경북 풍기로 도망가 지냈다. 그 후 부산으로 가서 잠시 국제신보 논설위원으로 근무했다. 1953년 환도 후 서울로 올라 와 태양신문을 복간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활동했다. 태양신문 폐간 후 1955년에는 희 망사 주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59년부터는 조선일보의 논설위원. 편집국장을 지냈는데, 조선일보 편집국장 재직 중 4·19를 맞이했다.
송지영은 1961년 1월 27일에 조선일보를 그만두었다. 정비석은 “송지영이 일본에 갔다가 세계 3대 광고 대리점의 하나인 ‘일본 전통’(電通)의 한국 대리점을 맡아가지고 돌아’와서 자신에게 같이 하자고 했다고 회고했다. 송지영이 사장을 맡고, 정비석은 부사장이 되어 사업을 시작했다. 일본 광고를 국내 신문에 게재하도록 해주고 수수료를 받는 사업이었다. 한국 전통 사장으로 근무하던 송지영은 5·16 후 다시 파란을 겪게 됐다. 그는 5·16 직후 민족일보 관계자들과 함께 구속돼. 8월에 조용수. 안신수 등과 함께 사형 언도를 받았다.

민족일보 사형수에서 민정당 국회의원까지

기소장에는 송지영이 일본에 있던 이영근과 접촉했으며 . 그의 지시에 따라 민족일보 창간에 관여한 것으로 돼 있다. 5·16 후 민족일보를 희생양으로 삼은 군사정권의 덫에 그도 걸려들고 만 것이다. 송지영은 1986년에 옥중 일기를 ‘우수의 일월 이라는 책으로 묶어냈는데. 이 책에서 자신은 “민족일보사에 단 한 번도 가본 일이 없”고 실제 아무 관계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1961년 12월 조용수는 사형이 집행됐으나, 안신수와 송지영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4번의 감형 끝에 결국 송지영은 1969년 7월 8일에 출소했다. 무려 8년 2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것이다.
출소 후 다시 문필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72년 2월부터는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유신체제 출범 직후인 1972년 11월의 한 좌담회에서 그는 “유신헌법이 90% 이상의 지지를 받은 것은 국민들이 이 헌법을 필요하다고 느낀 것 이고, 그 필요성의 핵심은 잘 살아보지는 것”이라며 적극지지 입장을 밝혔다. 이후 시론 등을 통해 유신 옹호 주장을 펼치던 그는 1979년 3월에 문예진홍원장에 임명 됐다. 물론 그가 많은 작품을 써낸 작가라는 점도 고려됐을 것이다. 문예진홍원장 시절 송지영은 조선일보 1980년 8월 13일자 시론에서 “정로(正路)는 어디에 있는가. 바로 잊그제 국보위 상위장 전두환 장군이 솔직하게 담백하게 자세하게 밝혀준 그 길이 곧 바른 길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 해 10월 입법회의 문공위원장이 됐고. 그를 포함해 4인으로 구성된 기초소위를 거쳐 ‘언론기본법’ 이 나왔다. 또한 그 해 12월에는 신군부가 창당한 민정당 발기위원회 부위원장이 됐으며, 다음 해 1월에는 민정당 중앙위의장으로 임명됐다. 결국 1981년 3월에는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돼 문공위에서 활동하게 됐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고도 문예진홍원장을 그만두지 않고 겸직했다. 1984년 5월에는 두 자리를 모두 사퇴하고 KBS 이사장을 맡았다.
1969년 출소 후 송지영은 갑자기 현실에 대한 지식인의 책임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은 현실에 대한 순응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1972년의 대담에서 그는 “관민이 일치단결하여 새로운 차원의 정신자세로 매진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지식인들도 새로운 사명감을 가져야 할 겁니다’라고 발언했다.
1981년에는 “오늘의 우리 형편으로 현실에서 도피할 수도 없고 방관자가 될 수도 없다. 한 시대의 주인이어야 할 지식인들은 더욱 그러하다”고 주장했다. 출소 이후 생각이 변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변화를 정당화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언론의 책임도 강조했다. 입법회의 문공위원장을 맡고 있던 1980년 말에 언론에 대해 “우리의 현실에서 자유를 방임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인망이 있고 다각적인 상식이 있어야만 함”

그는 1947년 7월 나온 ‘신문평론’ 2호에서 신문기자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세 가지를 들었다. “번개 같은 머리에 화살처럼 빠른 감각에 손발이 부지런해야 함. 생각을 가다듬기 무섭게 붓끝이 미끄러져야 함, 인망이 있고 다각적인 상식이 있어야 만 함.“ 1947년 10월의 3호에서는 ‘신문임상학’이라는 제목으로 뉴스 가치에 대한 글을 싣기도 했다. 기자의 조건으로 얘기한 세 가지 중에서 특히 ”인망이 있고 다각적인 상식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송지영에게 가장 잘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는 편집부 기자로 출발해 여러 신문의 주필이나 편집국장을 지냈지만, 전형적인 논객(論客)류의 기자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편집부 기자출신다운 감각이나 탁월한 한문 실력에 근거한 독특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4·19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서 ‘젊은 학생들과 교수들이 합세한 성난 지성인들의 이우성은 전국의 학원가와 방방곡곡에 메아리쳐서 노도처럼 출렁여 바다를 메운다는 뜻’ 의 ‘학해(學海)는 해일(海溢)‘ 이라는 제목을 1면 톱에 초특호 활자로 장식했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계륵’ 이라는 칼럼난을 만들어 특유의 문체로 중국의 고사·철학 풀이를 글에 담아 독자들의 인기를 끌었다고도 한다.
그의 언론인 시절에 대한 주변의 회고는 대부분 사람을 아우르는 능력에 관한 것들이다. 남재희는 송지영이 “후배를 아껴 술사는 것을 취미로 삼다시피” 했다고 했고, 고은은 “전근대적 의리 남아의 기질”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나아가 신동한은 “의리와 인정이 넘치는 기질이 언제나 주변을 따뜻하게 해주었다“고까지 했다. 실제로 여러 문인들이 자신들이 어려운 시절에 도와 준 송지영을 회고하고 있다. 또한 그가 문예진홍원장이나 KBS이 사장을 하던 시절 많은 문인·언론인들이 그의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가 1989년에 세상을 떴을 때 그에 대해 언론학자 최준은 “날카롭고 진보적인 사고를 지닌 기자”라며 “한 때는 진보적인 사상가(리버럴리스트)로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한국 민주화운동•언론자유를 위해 앞장섰던 선구자”라고 회고했다. 한편 원로 언론인 김을한은 “말년에 정치에 관여한 것은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그는 심지가 굳고 의협심이 강한 전형적인 언론인이었으며 숱한 역경에서도 자기의 신념을 꿋꿋하게 지켜 온 선비”라고 평했다. 후배 언론인 김상현은 “도량이 넓고 풍류의 멋과 낭만을 즐기며, 특히 중국 문학과 역사에 통달한 그의 주변엔 항상 문인·논객·교수 등의 주붕이 많았다”며 “화려하면서도 시름과 파란이 중첩되었던 한 평생”이었다고 평가했다.
항일 운동과 진보언론 활동 관련자로 10년의 옥고를 치른 그가 말년에 보여 준 행태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군사 정권을 정당화하는 언론활동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정치에도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의 옛 친구 김학철의 소설 제목대로 송지영과 김학철은 모두 ‘격정시대’룰 살았던 것이다. ’격정시대’를 살았던 그가 출옥 후 보여준 삶의 행태는 모진 세월의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등바등하지 않고, 구름에 달 가듯이 살았다”는 그가 말년에 보여준 삶의 모습은 곧 골곡 많은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일 것이다.

<소설가 김학철과의 아름다운 인연>
우인 송지영 일화

김학철(1916〜2001)은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독립운동가로 활동했고, 해방 후에는 소설가로 활동한 중국 옌벤의 조선족작가이다. 1988년 ‘격정시대’와 ’해란강아 말하라’라는 작품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최후의 분대장’ ·‘외다리의 거인’ ‘현역 독립운동가’로 불리기도 했다. 그런 그가 자신이 작가가 된 것은 전적으로 송지영의 덕택이었다고 밝힌바 있다. 본인은 작가가 될 꿈을 꾸어 본 적조차 없지만, 감옥에서 만난 송지영의 권유로 작가가 됐다는 것이다.
김학철의 본명은 홍성걸인데, 항일 투쟁을 위해 썼던 가명을 끝내 자기 필명으로 사용했다. 그는 1916년 함남 원산 출생으로, 서울의 보성고보를 졸업했다. 재학시절 윤봉길 의사의 거사에 충격을 받고 독립운동에 헌신할 결심을 했다. 그는 졸업 후인 1935년에 상해로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했고, 다음 해에는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했다. 1938년 김원봉이 창립한 조선의용대 분대장으로 여러 곳의 전투에 참가했다. 1941년 태항산 전투에서 총탄을 맞고 쓰러져 일본군의 포로가 됐고, 이때의 총상으로 인해 뒤에 다리 하나를 잃었다.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중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언도를 받고 끌려온 송지영을 만났다. 감옥에서 만난 동갑내기 송지영과는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 자주 다투며 친하게 지냈다. 해방이 되고 귀국하면서 송지영에게 다리 하나 없는 자신이 어떻게 먹고 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는 2001년 당시 서울대 법대 학장이었던 안경환 교수와 행한 대담에서 아래와 같이 송지영과의 인연을 얘기했다.
“사실 나는 청년 시절에 피가 끓어 찬찬히 무언가를 쓰는 것보다 행동을 즐기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소설의 길을 택한 것은 지극히 우연한 사건 때문이었어요. 태항산에서 다친 다리가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아 나가사키감옥에서 잘랐어요. 그런데 해방이 되었고. 감옥에 함께 있다가 귀국한 옥우(獄友) 송지영에게 부탁했어요. 한다리 없는 놈이 먹고살아야 할 텐데 어디 소설이라도 쓸 방법이 없느냐고. 지금 생각해보면 황당하고 무식한 소리였지만. 마음 착한 송지영이 이무영 선생을 소개하며 잘 지도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김학철은 해방되고 거의 두 달이 다 돼 가는 1945년 10월 9일에 맥아더 사령부의 정치범 석방 명령으로 송지영과 함께 귀국했다. 그는 송지영의 도움을 받으며 서울에서 사회주의 활동과 함께 소설 창작활동도 시작했다. 얼마 뒤에는 월북하여 노동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북한 정권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에서도 작가로 활동하며 문화대혁명을 비판했다가 옥고를 치르고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그는 1980년 이후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에 나서 많은 작품을 내놓았다. 그의 작품은 한국에서도 발행돼 널리 읽혔다. 그는 1994년에 제2회 KBS 해외동포상(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같은 해인 1994년에 발행된 ‘누구와 함께 지난 날의 꿈을 이야기하랴’ 라는 산문집에 실린 ‘송지영, 나의 벗’ 이라는 글을 통해 송지영에 대한 애틋한 정을 표현했다. ‘혁명적 로맨티스트’ 김학철이 ‘나의 벗’이라고 하며 송지영에 대해 쓴 글을 보면서, 파란 많은 근현대사 속에 진정한 우정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우인 송지영 약력>
1939 동아일보 기자
1946 한성일보 편집부장
1948 국제신문 주필
1949 태양신문 주필 겸 편집국장
1950 국제신보 논설위원
1953 태양신문 주필 겸 편집국장
1955 희망사 주간
1959 조선일보 논설위원. 편집국장
1961 한국전통 사장
1972 조선일보 논설위원
1979 문예진흥원장
1981 제11대 국회의원(민정당, 전국구)
1984 KBS 이사장

(박용규 상지대 교수,  ‘현대 언론인 열전(2)  격정시대를 살다간 풍운의 언론인’, 신문과방송, 2007년 3월호)

 

 

[특별기고] 비희극적 정치 -송지영씨의 경우

5·16정권의 사법정의는 군대의 기합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역사는 두 번 되풀이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 한 번은 삼류 희극으로.” 공안몰이가 살벌하게 계속되는 가운데 개헌론마저 솔솔 나오는 지금, 아무래도 삼류 희극이 진행되는 것 같기만 하다.

우리말로는 희비극적이라 하여 희극을 비극 앞에 두지만, 유럽 언어에서는 비희극적이라고 비극을 희극의 앞에 둔다. 비희극적이 합당한 것 같다. 비극이 먼저 있어야 희극이 정말 희극적이 될 수가 있겠기에 말이다.

우리 주변에 비희극적 일들을 자주 본다. 정치에 있어서도 그런 너무나도 선명한 경우가 가끔 일어난다. 많은 사람들이 있겠지만 내가 잘 알고 지내던 송지영씨의 경우도 그의 인생에 그 정치의 비극과 희극이 아주 선명하게 대비되어 교차하고 있었다. 짧게 설명하자면,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송씨는 5·16 쿠데타 세력에 의하여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러나 국제펜클럽 등의 진정으로 감형을 거듭하여 8년여의 감옥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그 후 또다시 쿠데타를 한 신군부에 의하여는 역으로 떠받들어져 국회의원까지 되었다. 비극에 뒤이어 정치적 희극이라 하겠다.

송지영씨의 집안 내력이 특이하다. 평안도의 정감록파 여러 집안들이 난시의 피난처를 찾는다고 경북 영주의 풍기 지방으로 집단이주하였다. 송씨의 집안도 있고, 국회의원을 지낸 박용만씨의 집안도 포함되었다. 송씨는 신학문을 멀리하고 한학에 몰두하여 신동 소리를 들었다. 아주 젊어서 <동아일보>의 기자·논객이 되었다가 동아 폐간 후 중국으로 가서 난징(남경)중앙대학을 다녔다. 그때 우리 임시정부 쪽과 내통했다고 일본 관헌에 구속되어 일본의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복역 중 해방을 맞았다. 소설가 김학철씨와 함께 귀국한다. 김씨는 중국의 태항산에서 항일전을 펴다가 부상을 입고 붙잡혀 형무소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귀국 후 여러 신문사 간부로 언론 생활을 하는 한편 소설을 썼다. 이범석 장군의 민족청년단(족청)과도 연결이 된다. 족청은 부산정치파동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친위대처럼 행동해 오명을 뒤집어썼지만, 당초에는 비교적 괜찮은 정치조직이었다. 그리고 그 세력은 부산정치파동 후 용도 폐기되어 숙청될 때까지 이승만 정권의 주도세력이었다.

송씨는 4·19 때 <조선일보>의 편집국장을 지내고 난 후 5·16이 났을 때 구속되어 사형 언도를 받는 것이다. 본인은 <민족일보>와 전혀 관계가 없고 일본 회사와의 제휴로 텔레비전 사업을 하려 했던 것뿐이라고 했는데, 일본에 있는 <통일일보> 발행인 이영근씨가 민족일보에 관련된 것에 연계되어 이씨와 친했던 송씨도 그 케이스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과 함께 사형 언도가 내려진 것이다. 조씨나 송씨는 오랜 뒤 민주화 이후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가 되고 뒤늦게 가족들이 보상도 받았다.

여기서 핵심 인물로 나오는 이영근씨의 이야기도 해야겠다. 이씨는 조봉암씨의 주요 참모였다가 진보당 탄압 때 일본에 망명하여 통일일보를 발행했다. 그는 민족일보의 조용수 사장을 얼마간 후원했다. 송지영씨와는 돈독한 친분관계일 뿐이었단다. 이영근씨는 별세했을 때 노태우 정권으로부터 그동안 한국 정부를 위한 공적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으니 지난날의 일들은 어처구니없었다 하겠다. 하기는 이씨가 따랐던 조봉암씨도 사형 50여년 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니 조봉암 이영근 조용수 송지영씨 등이 겹쳐진 정치적 비희극이었다.

송지영씨의 옥중기가 <우수의 일월>이라고 1천 페이지 가까운 책으로 나왔는데, 그날그날의 이야기를 쓴 것이고, 특별히 철학적 사색을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다 읽고 나면 깊은 여운이 남는다. 감옥생활 동안 그가 읽은 잡지와 책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 참고가 되기도 하고, 많은 혁신계 인사들의 옥중생활이 묘사되어 있다.

그는 출옥 후 다행히 조선일보에 복직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박정희 대통령 말기인 1979년 문예진흥원장으로 발탁이 된다. 그 연유를 알 수 없다. 다만 내 멋대로의 추측은 정감록파로 피난 온 가족들 중 한 분이 박 대통령의 측근 인사가 된 것이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신군부의 쿠데타가 나고 그는 더한층의 출세(?)를 하게 된다.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고, 이어서 한국방송공사 이사장이 되는 것이다. 전 정권의 사형수가 다음 정권의 국회의원이라! 대단히 비희극적이다.

아직 그런 신상의 변동에 관한 내막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내 나름대로의 추측은 이렇다. 박정희 정권은 친일 경력 때문에 독립운동계열 인사들을 별로 우대한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 사람들은 모두가 해방 후 세대들이다. 따라서 박 정권과 애써 차별화하기 위해 독립운동세력을 간판으로나마 표면에 내세웠을 것이다. 형식상의 감투이지만 민정당 창당주비위원장인 유석현씨는 유명한 독립투사이다. 그리고 항일의 상징 같은 면암 최익현 선생의 자손인 최창규 교수, 광복군 출신인 조일문 교수 등을 국회에 진출시켰다. 그런 맥락에서 송지영씨도 국회에 뽑혀 들어갔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해석한다.

그렇다고 송지영씨가 그렇게 역사의 피동인물만은 아니다. 언론인 소설가 한학자 서예가이기도 했던 그는 아호가 우인(雨人)인데 그것은 중국의 고전 <수호지>의 영수 급시우 송강에서 한자를 빌린 것 같다. 급시우 송강처럼 통이 크고 덕성이 있다. 한학과 중국에서의 생활은 그를 대륙적으로 만든 것 같다. 마치 장강의 흐름처럼 유유히 산다. 체구는 작지만 통이 매우 크고 매사에 호방하다.

옆에서 본 그는 거의 매일 저녁 술집 순례를 계속한다. 술은 약간만 하고, 봉사하는 여성들에게 팁은 아주 후하다. 8년여 감옥살이에서의 해방감을 실감하려는 것도 같았다. 부산 <국제신보>의 주필로 있다가 5·16 후 혁신계로 몰려 옥살이를 한 소설가 이병주씨는 처음에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송지영씨와 한방에 있었단다. 부잣집 아들인 그는 2년 반쯤 감옥살이를 하고 나와 지나칠 정도의 사치와 낭비를 하였는데 “출옥하면 최고의 사치를 하며 살겠다고 맹세했다”는 고백을 한 적이 있다.

그러면 송지영씨의 그 주머니는? 아무튼 돈 만드는 재주 또한 비상했다.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한학, 서예, 중국 경험 등에 족청의 넓은 인맥으로 우선 고서예 감정과 알선 등으로 적지 않은 용돈을 마련한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의뢰하러 찾아온다. 그리고 그는 가치가 있는 것일 때는 그의 폭넓은 지인 가운데 합당한 사람에게 전화를 건다. 그래서 용돈의 궁함이 없이 카페 등 술집 순례를 할 뿐만 아니라 가끔은 프랑스 파리로 날아가 친구인 고암 이응노 화백 등과 지내고 돌아온다. 이 화백도 이른바 동백림 간첩사건으로 잡혀와 송지영씨와 안양교도소에서 함께 지내기도 한 사이이다. 그렇게 파리 여행을 자주 하는 사이 송씨가 백건우씨와 윤정희씨의 사이를 맺어주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형식상 그렇게 내세웠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 호방한 그가 사형 언도까지 받고 8년여를 감옥에서 썩었으니…. 그때 또한 요즘 극히 우익적인 논객으로 알려진 류근일씨도 7년여를 함께 감옥생활을 했으니 5·16정권의 사법정의는 군대의 기합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비희극의 양산이다. “역사는 두 번 되풀이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 한 번은 삼류 희극으로.” 비유로는 그럴듯하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당면한 역사는 공안몰이가 살벌하게 계속되는 가운데 개헌론마저 솔솔 나오는 등 아무래도 삼류 희극이 진행되는 것 같기만 하다.

(남재희 언론인, ‘비희극적 정치 -송지영씨의 경우’, 한겨레, 2015년 12월 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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