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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동아일보 사람들- 송덕수

Posted by 신이 On 12월 - 18 - 2018

 

송덕수(宋德洙, 1892~?)는 서울 출신으로 사립광흥의숙에서 속성측량과정을 수료했다. 1920년 동아일보 사진제판부에 입사했다. 1923~1929년엔 사진제판 자영업에 종사했으며 1931년 동아일보에 재입사했다. 1936년 사진부 주임으로 있을 때 동아일보 일장기말소사건과 관련해 일제 경찰에 연행돼 고초를 겪었다.

 

송덕수(宋德洙) (서울, 1892~ 몰 ) ▲ 1920. 7 기술원(사진), 1923. 3 퇴사. ▲ 1931.10 재입사, 기술원, 사원, 사진부주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일장기말소사건

1936년 8월 25일자 본보 제2면에는 일본의 주간지 ‘아사히스포츠’에 실렸던<追記=본사 최인진 전 사진부장은 ‘손기정 남승룡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다’(2006년 신구문화사) 94~104쪽에서 문제의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진 출처는 후쿠오카 규슈지사에서 발행한 1936년 8월 23일(일요일)자 제19,695호 ‘오사카 아사히신문’ 제5면 ‘오사카 아사히신문 남선판’과 ‘오사카 아사히신문 조선 서북판’이라고 밝히고 있음> 월계관을 쓰고 수상대에 오른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전재했다. 손 선수의 가슴에 그려진 일장기를 말소하여 실은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본보는 제4차 무기정간을 당했다.

당시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세계제패는 우리 민족을 흥분케 했고, 승리의 영광을 우리의 것으로 가지지 못하고 일본의 것으로 넘겨주어야 했기에 너무나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민족의 아픈 가슴을 달래기 위하여 민족 대변지를 자임해 온 본보가 이를 그냥 무심히 넘길 수 없었던 것은 누구의 지시나 명령도 아닌 자연발생적인 본보의 체질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이길용 체육부 기자가 조사부 소속 본보 전속화가 이상범 기자에게 일장기 처리를 의논하였는데, 그때 둘은 그저 빙그레 웃었을 뿐 별다른 말을 나누지는 않았다. 이심전심, 내민 자도 받은 자도 서로의 의사가 소통되었던 것이다. 일장기 말소는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1932년 김은배 선수가 로스앤젤레스 올림픽대회에서 마라톤 6위로 입상했을 때도 눈에 거슬리는 가슴의 일장기를 기술적으로 말소했던 일이 있었다. 그 당시 총독부 측의 트집 없이 넘어갔던 경험도 있어 그들은 이번 일장기 말소에도 합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것이 크게 문제가 되었다. 1936년 8월 29일자로 본보는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고, 관계 인사들의 구속에까지 이르렀다. 사진부의 백운선 서영호, 그 사진을 실은 사회부 편집자 장용서 임병철, 사진과장 신낙균, 조사부 전속화가 이상범, 체육부 이길용, 그리고 사회부장 현진건 등이 차례로 연행되었다. 그 후 이 동판을 ‘신동아’가 실었다 하여 잡지부장 최승만, 사진부의 송덕수가 추가 연행됐다. 당시 경찰부 유치장 방 6개가 모두 동아일보 기자들로 차 동아일보를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

이때 끝까지 구속이 풀리지 않은 사람은 사진 수정의 발안자인 이길용, 사진 수정에 직접 가필한 이상범, 사진부 제판기술자 백운선 서영호, 사진과장 신낙균, 그 사진을 게재한 장용서, 사회부장 현진건, 그리고 ‘신동아’에 게재한 잡지부장 최승만 등이었다.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송덕수(입사당시 사진제판)

1888~ 불명. 서울 봉래동 삼정목85 출신
1906년 3월 사립광흥학교 졸업.
1908년 8월 사립광흥의숙의 속성측량술 수료.
1909년 3월부터 1912년 3월까지 토지측량사무소 근무.
1912년 4월부터 1920년 4월까지 경성일보서 사진견습.
1920년 5월부터 동년 7월까지 대구조선민보 사진부 제판에 근무.
1920년 8월11일 본보 입사. 월봉 60원.
1923년 2월28일 본보 사임.
1923년 5월부터 1929년 12월말까지 사진제판 자영(自營).
1930년 1월1일부터 동년 12월까지 중외일보 근무.
1931년 5월1일부터 동년 10월 7일까지 조선일일신문 근무.
1931년 10월 8일 본보 기술원으로 재입사.
1932년 4월1일 사원.
1938년 1월 21일 사진부 주임.
1940년 8월10일 강제폐간과 함께 본보 사임.

(‘동아인명부(7)‘, 동우(東友), 1963년 12월 21일)

 

 

일장기발소사건(日章旗抹消事件) 20년전의 회고기 ③

그 다음날인 26일(二十六日)에는 대강 우리를 취조(取調)해보더니 웃줄(上層部)을 걷기 시작(始作)하여 사회부장(社會部長) 현진건(玄鎭健)、사진과장(寫眞課長) 신낙균씨(申樂均氏)를 붓잡아서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에 유치(留置)하였다.

이날 밤 늦게 잡지부장(雜誌部長) 최승만씨(崔承萬氏)(본사 간행잡지(本社刊行雜誌)『신동아(新東亞)』책임자(責任者)가 부뜰려 왔는데 씨(氏)는 나의 감방(監房)으로 들어오더니 저성(低聲)으로 사진과원(寫眞課員) 송덕수씨(宋德洙氏)도 잡히어 옆 감방(監房) 장용서씨(張龍瑞氏) 있는데로 들어갔다고 말하여준다. 곧 뒤이어 잡지(雜誌)『신가정(新家庭)』편집자(編輯者) 변영로씨(卞榮魯氏)도 불려왔었는데 이분들이 부뜰려온 이유(理由)는 첫째로 최(崔)·송(宋兩氏)는『신동아(新東亞)』에 낸 손선수(孫選手)의 사진(寫眞)에 일장기(日章旗)『마아크』가 좀 선명(鮮明)치 않다는 것이고

두째로 변씨(卞氏)는『신가정(新家庭)』에 손(孫)·남승룡(南昇龍) 두 선수(選手)의 각부사진(脚部寫眞)을 뚜렷하게 노출(露出)시켰다는 것이라 한다. 

(이상범, ‘日章旗抹消事件 二十年前의 回顧記③’, 동아일보 1956년 8월 19일자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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