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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동아일보 사람들- 송건호

Posted by 신이 On 12월 - 18 - 2018

 

송건호(宋建鎬, 1927~2001)는 충북 옥천 출신으로 1956년 서울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전인 1953년 대한통신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일보, 자유신문, 세계일보, 민국일보 등을 거쳐 1965년 경향신문 부주필, 편집국장을 역임하고 1966~1969년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지냈다. 1969년 3월에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입사, 1973년 수석논설위원, 1974년 편집국장을 맡았으며 1975년 동아사태 때 사표를 냈다. 1980년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월간지 ‘말’ 발행인, 한겨레신문 초대 사장(1988년)과 회장을 지냈다. ‘한국 언론의 사표’, ‘민족지성’ 등 다양한 별칭이 따라다닌다. <한국현대사론〉<민족 지성의 탐구〉<한국민족주의의 탐구〉<해방전후사의 인식〉등 민주화 운동 시절 대학생과 지식인들의 필독서가 된 책들을 다수 집필했다. 금관문화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

 

송건호(宋建鎬) (서울, 1927~ ) △1969.3 논설위원, 통일문제연구소소장겸, 편집국장, 1975.3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3권, 동아일보사, 1985)

 

 

○靑巖 宋建鎬(1927~2001)

1927년 9월 27일 충청북도 옥천 출생, 2001년 12월 21일 별세

◇학력 서울대학교 행정학과 졸업(56), 베를린신문연구원 수학 ◇주요경력 대한통신 외신부 기자(53) 조선일보 한국일보 자유신문외신부기자 한국일보 논설위원 (60) 경향신문 논설위원, 편집국장(64) 조선일보 논설위원(66) 동아일보 논설위원, 편집국장(74~75)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위원, 인권위원,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의장(84)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한겨레신문’발행인 겸 인쇄인, 회장고문 말’발행인
◇저서 ‘민족지성의 탐구’‘한국현대인물사론’‘민중과 민족’‘민주언론, 민족언론’ ‘한국언론 바로보기 100년’
◇수상 제1회 심산학술상, 한국언론학회 언론상, 호암언론상, 금관문화훈장, 정일형자유민주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한국언론의사표’,‘ 해직기자의대부’,‘ 민족지성’등별칭다양

한국언론학회는 창립50돌(2010년)을 맞아 미디어발전 공로상 수상자를 선정선우휘장명수씨 등 4명이 포함되어있다. 보도에 따르면“청암 송건호 전 한겨레사장은 언론자유와 언론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면서 훼절하지 않고 꿋꿋이 언론인의 양심을 지켜온 점 등이 높이 평가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별세한 사람 둘, 생존하는 사람 둘로 비율을 맞춘 것 같은데 작고한 천관우 씨가 빠진 게 아쉽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공정을 기하려 노력한 것 같다. 무엇보다 송건호 씨를 한국의 대표적 언론인으로 뽑는데 이의를 말할 사람은 별로 없을 줄 안다.나는 운이 있었다고나 할까, 그 송건호씨와 한국일보에서 동시에 근무했었고, 간격을 둔 후에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에서 함께 일한 경험을 가졌다. 송씨는 술담배를 전혀 하지 않아 에피소드가 별로 없다. 부득이 술자리에 합류하게 되면 주스나 우유로 대신한다. 특히 우유를 좋아해서 우유에 밥을 말아서 먹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졌다.
인간적인 면모 한 두 가지를 소개하면… 논설위원실에서 퇴근할 무렵 둘이 남게 되었는데 그는“아이고, 갈비를 한 번 실컷 먹어보았으면”한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돈만 남으면 책을 사기 때문이다. 한번은 책 사는데 따라 나섰더니 일본서적을 사고는(그는 영어도 잘하지만 일본말 서적을 많이 읽었다) 집에 같이 가잔다. 그리고 흑석동의 집 앞에서 그 책을 와이셔츠 밑으로 감춘다. 너무 책을 많이 사기에 부인의 잔소리가 있었던 것 같다. 방에 들어가니 벽면에 책이 가득 꽂혀있는데 몇십 년에 걸친 것들이라 흰색에서 누런색, 그리고 거무스름한 색까지 책 구입 연도를 말해주듯 구별이 된다.
그는 서울대 법대의 나의 선배인데 법학공부는 거의 외면하고 주로 일본어로 된 사회과학 서적만 탐독한 것 같다. 서재에서도 확인된다.나도 어지간히 비슷하다. 나와 법대이야기를 하다보면“출세지상주의자들이 많다”고 설레설레 한다.

박대통령은 송 씨를 특히 좋아했다

유신체제 전에 박정희 대통령이 각사 논설위원들과 가끔 만날 때 동아일보의 송 씨도 거기에 포함되었었는데 박 대통령은 송 씨를 특히 좋아했다고 측근은 전했다. 그래서 무언가 특별하게 도와주려고“송 선생, 내게 뭐 부탁하고 싶은 게 없습니까”하고 정답게 물었다.
그 무렵 큰 액수의 연구비를 얻은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대쪽선비 송씨는“요새 지방에 공장이 많이 건설되고 있다는데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산업시찰에 포함되는 것으로 끝났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면 송 씨는 권력의 신세를 지기가 싫었는데 그렇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의 예의는 지켜야하겠기에 산업시찰을 말한 것 같다.
모르는 사람들은 민주투사인 송 씨를 매우 활달하고 적극적인 이미지로 머릿속에 그릴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그는 조용하고 유순하고 어찌 보면 어리숙한 인상의 촌로 같기만 하다. 그의 모습을 알리기 위해 일화 한 토막 더.
그는 대한언론인회 회장을 지내기도 한 고 이정석 씨와 대단히 친하게 지냈다. 서로 농도하고 장난질도 잘했다. 그가 한국일보 외신부차장으로 있을 때다. 조선일보에 있던 이정석 씨가 장난기가 생겨 송 씨에게 전화를 걸어 시치미를 떼고 “여기 통신사인데 지금 아이젠하우어가 죽었다는 지급전이 들어왔으니 받으세요.” 했다.
그리고는 “워싱턴 발 ○○통신 지급전=미국의 아이젠하우어 대통령은 ○일○시 심장마비로 급서했다….” 송 씨는 “예, 예”하며 받느라고 정신이 없고 옆에는 급히 달려온 편집국장과 장기영 사장도 지켜 서서 초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기사를 불러가다가 이정석 씨, 스스로도 우서워 “쿡, 쿡”하고 말았다. 그랬더니 “정석이구나…너…너…너…” 장기영 씨는 이정석 씨를 혼낸다고 별렀다. 그런데 이 씨 왈 “한국일보에는 텔리타이프가 없나…”
송 씨와 친했던 소설가 이호철 씨는“있으나마나한 사람 같으면서도 정작 없으면 꼭 있어야 할 그 자리가 유난히 텅 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그를묘사하는글을썼다. “투사니 뭐니그런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그저 시종 담담하고 그 이상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이 자연스러움, 천진할 정도의 자연스러움이야말로 청암 송건호라는 사람의 가장 깊은 진면목인 것이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에서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옮기는 데는 당시 동아일보 논설위원이었던 손세일 씨가 중간역할을 했다. 나는 그 과정을 들었다. 그리고 논설위원에서 드디어‘대동아’라고 당당하게 자랑하던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이 된 것이다. 송건호 씨의 저서는 엄청 많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대량 해고사태에 항의하여 편집국장직을 사퇴한 후 오랫동안 생활수단으로, 그러니까 호구지책으로 15권이 넘는 참으로 많은 저술을 했다. 그 가운데‘한국현대사론’은 평가가 좋았다는 이야기다.
그때까지 학자들이 별로 다루지 않았던 일제하 암흑기를 그가 먼저 손을 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특히 관심을 갖는 책은‘민족지성의 탐구’로 나는 1975년‘신문연구’봄 호에 서평을 쓰기도 하였다. ‘자유이상의 차원’이란 제목이었다.

‘自由以上의 次元’을 추구한 求道者

“송건호 씨는 뼈대 있는 충청도 선비이다. 신문 말고는 곁눈질도 않고 꾸준히 외길을 살아가는 구도자(求道者)이다. 글에 일관성을 갖고 글과 생활을 일치시키려 애쓰다 보니, 고민이 많게 되고“살기 어려운 세상”이라고 탄식하게 된다. “제1부 가운데의 ‘한국지식인론’은 1967년 ‘정경연구’에 게재된 후 논쟁을 불러일으킨 대표적 논문으로 일본에서 번역’소개되기도 했다.‘ 자유민주주의의 도입의 타율성과 그것의 국제적 연대성의 강조는 이 땅에 두 가지 바람직하지 않은 풍조를 일게 했다. 하나는 냉전의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 성(반공)이강조되는 나머지 지적 풍토에 ‘폴러라이제이션’(Polarization, 양극화)경향이 생겼다는 것이고, 둘째는 국제적 연대성의 강조로 말미암아 사상의 사대적 자세가 싹텄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한 저자는 학문에 있어서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사대주의를 철저히 배격한다. 역사적 인식전체적 인식경험적― 실천적 인식이 되어야 한다. 전권을 통하여 강조되는 그의 민족주체적 입장이 여기서도 잘 드러나 있다.”
송 씨는 외신부 기자와 논설위원 경력이 거의 전부로 정치부에 근무한 일은 없다. 그런데 다음에 인용하는 글은 정치부 기자나 정치담당 논설위원들을 크게 깨우치는 글로 그의 정치에 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저널리스틱한 현실참여란, 문제의 본질적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흔히 야당적(단순한 정권교체를 위한)비판에 그치는 경우가 생긴다. 현실참여가 야당적 차원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동질적 차원의 저항으로 그치기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야 대립이란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이것이 이질적 대립이 못되고 동일한 차원에서의 싸움의 되풀이로 그치기 쉬운데 만약 지식인의 참여가 현상적 비판에 끝나 질적으로 동일한 차원에서 맴돌게 된다면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 전혀 발전이 없는 제자리걸음 밖에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인의 현실참여가 역사에 기여하는 참된 기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학문적 사회과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본질적 참여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 글을 음미해보면 여기서 송 씨의 그 후의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 민주화를 위한 투쟁, 냉전체제 극복을 위한 민족적 노력‘, 민주주의의 심화를 위한 모색 등등의 윤곽이 드러나는 듯하다.동아사태로 편집국장직을 사퇴하고 63민주항쟁 후 한겨레신문이 창간되기 전까지의 암울한 시기에 관해서는 다행하게도 그가‘고행(苦行)12년, 이런 일 저런 일’이란 비교적 긴 회고의 글을 남겼다.
고려대 명예교수로 민주투쟁을 한 이문영 씨는‘겁 많은 자의 용기’란 책을 냈다. 느낌이 온다. 그런 맥락이라면 청암의 회고의 글은‘온순한자의 용기’란 제목이 붙을 만하다. 온순하고 순박한 선비가 참으로 용감하고 끈질기게 권력에 저항하였다. 그의 투사로서의 생애는 이제 ‘사적인 생활사’의 범위를 벗어난‘공적인 역사’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호칭도 송 씨보다 청암, 청암 선생이라고 하는 것이 어울릴 것 같다.

‘말’지 창간, 민주화운동 앞장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 시 150여 명의 기자가 강제 해직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표를 던졌다. 이후 재야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1984년 해직 언론인들과 함께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만들고 이듬해 월간지‘말’지를 창간하여 제도권 언론이 외면하는 노동자와 농민도시빈민들의 실상과 민주화운동을 소개하는 한편, ‘한겨레신문’을 창간하고 사장과 회장으로 있으면서 편집권의 독립과 남북한 문제에 대한 냉전적인 보도의 틀을 벗어나게 하는 데 이바지하였다.“1986년에는 약 130여 명 중 거의 50여명(주동아방송 등을 제외한 동아일보 편집국만의 숫자)을 내 이름으로 해임한다는 것은 죽으면 죽었지할 수없는 일이었다. 나는 사장실에서 사장과 주필에 대해‘이와 같은 방법으로 문제를 수습하면 먼 20년 후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울면서 재고를 간청했으나…”라고 쓰고 있다.
그 후 6남매를 거느린 가장으로서 마침 집을 옮기느라고 저축도 써버린 형편에 무던히 고생을 했다. 마땅한 취직처도 없었지만 대학 강사를 나가려해도 권력이 방해를 하고, 그렇다고 권력이 유혹하는 자리를 받아들일 수도 없고, 생활수단이 망막하여 불안하고 고민도 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어쩌자고 이렇게 멍하니 있기만 하는가. 수입도 없고 하는 일도 없이 어떻게 살아가나 이런 일 저런 일을 생각하면 미칠 것만 같았다.” 글을 써 밥법이를 했다. 그러던 중 천관우 씨와의 교분으로 재야의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218 쿠데타가 일어난 후 청암은 정말 어처구니 없게도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얽혀들게 되어 심한 고문도 당하고 옥고를 치르게 된다. 그리고 그때 얻은 병이 결국 그의 생명을 단축시킨다. 그는 그때의 고문이 얼마나 가혹했던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그때의 체험을 통해 고백한다. 인간이란 육체적 고통을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만약 노련한 수사관이 연행해온 피의자한테서 모종의 자술을 받고자 한다면 100% 가능하다는 것을 체험했다.” 3ㅕㄴ 반 구형에 징역2년이 선고되었다.
언론자유투쟁은 동아일보가 가장 규모가 컸었지만 그 다음 조선일보가 치열했고 한국일보 등 기타 신문에도 있었다. 이 해직기자들은 점차 뭉쳤다. 그 투쟁집단의 상징이자 대표가 된 게 청암이다. 편집국장이란 지위도 있고 연령도 제일높아서 일 것이다. 그리고 여러 사의 해직기자들로 구성된 똑똑하고도 까다로운 그 투쟁집단에서 청암은 그 후덕하고 느긋한 성격으로 대표가 되는데 적격이었다.
‘수호지’를 보면 급시우(及時雨)에서 송강의 리더십이 잘 묘사되어 있다. 마침 같은 송 씨이기도 한 청암의 품성은 그 송강을 닮은 데가 있다고 불현듯 생각되는 것이다. 전날에 소설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송지영 씨가 마침 그런 유형의 인물이어서 내가 송강에 비유한 적이 있다.
공교롭게 그도 송강을 좋아했던지 급시우(及時雨)에서 한자를 빌려 그의 아호를 우림(雨林)이라 했던 것이다.

군사정권 보도지침 폭로 6월 항쟁 불씨 제공

해직기자 투쟁집단은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구성하고 청암을 의장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월간지‘말’을 발행하며 언론자유를 위해, 민주화를 위해 적지 않은 일을 했다. 특히 김주언 기자 등이 정부의 보도지침을 모아서‘말’에 폭로한 것은 특기할만하다. 청암이 쓴‘말’지의 창간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오늘 우리는 이 시대 참다운 언론운동을 향한 디딤돌로서《말》을 내놓는다.‘ 말다운 말의 회복’진실을 알고자 하는 다수의 민중들에게 이 명제는 절실한 염원이다.
오늘의 우리말은 우리말 본래의 건강성을 오염시키는 무리들에 의하여 있어야 할 자리를 올바로 찾지 못한 채 심각히 표류하고 있다. 거짓과 허위, 유언비어가 마치 이 시대를 대변하는 언어인양 또 하나의 폭력으로 군림하고 있음은 우리가 처해있는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청암의 줄기찬 노력의 화려한 결실은 한겨레신문의 창간이다. 6월 항쟁으로 민주화의 막이 오를 때 해직기자그룹을 중심으로 국민주 모금이란 획기적인 형식으로 서울 변두리 양평동에서 신문 첫 호가 나왔을 때의 감격은, 주변사람들도 느껴지는데, 당사자들은 어떠했을까 싶다.

언론철학 관철 시킨 한겨레신문 창간

청암은 그 창간 사장으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이 한겨레신문(나중에 한겨레로 제호를 바꾸었다.)은 이른바‘제도언론’의 틀을 깨고 우리나라 언론사에서 빛나는 새 장을 열었다 할 것이다. 가장 쉽게는 지금도 여러가지 조사에서 계속 신뢰도 제1위로 나온다는 것이다. 한겨레와 청암에 관해서는 책도 나왔고 회고담도 많이 있다. 굳이 이모저모를 내가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줄 안다.다만 꼭 말해두고 싶은 것은 청암의 언론철학이 초지일관 관철되었다는 측면이다. 그는 1970년대 중반 그의 저서‘민족지성의 탐구’에서 선구적인 언론철학을 천명하였었는데 그 내용은 이 글 앞부분에 인용한바있다. 그는 우리 언론계 정치기사나 정치논설이 여야대의 ‘다람쥐쳇바퀴’의 차원에서 벗어나 그것을 돌파하는 새 경지를 보여주지 못하고 답보하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했었다.
한겨레의 제작은 그의 언론철학에 부합되는 듯하다. 보수정당 대립이란‘다람쥐 쳇바퀴’를 벗어나 우리 정치발전의 미개척분야를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다. 그것이 때로는 진보적인 성향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반드시 진보운운에 국한할 것은 아니고 우리의 답답한 현상돌파를 위한 끊임없는 새로운 모색이라고 보아야할 줄 안다.
또한 냉전체제의 돌파를 위해 한겨레는 민족적 입장에서 꾸준히 노력하였고 그로 인해 수난도 당했다. 남북분단체제는 우리 힘만으로 극복될 일은 아니지만 우선 우리들의 자주적인 노력이 먼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자주적인 통일노력, 분단체제 극복노력, 냉전체제 돌파노력에 한겨레가 항상 선봉에 서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볼 때 한겨레의 제작방침은 청암의 언론철학과 일치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일찍이‘민족지성의 탐구’에서 천명한대로의 방침이라 할 것이다. 청암으로서는 그의 신조의 관철이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청암은 고문으로 인해 병을 얻어 말년에 병고에 시달리다가 작고하였다. 파킨슨병으로 5년 이상 투병했는데 나중에는 말마저 하지 못하고 겨우 들을 수만 있었다고 한다.
사후 그를 기리는 책도 나오고 재단도 만들어져 상도 주는 등 그의 추모 사업은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근래 한겨레 간부에게 들은 에피소드.
그 간부가 주일특파원으로 있을 때 청암이 일본의 공항에서 전화를 했단다. 마중 나가려고 하니“나 지금 귀국하는 길이여.”신문사 사장이 나 회장은 일본에 갔으면 특파원에게 각종 심부름을 시키는 게 각사의 경우이다. 그런데 꼬장꼬장한 대쪽선비 청암은 그러지를 않은 것이다. 조선일보 때의 청암이나 한겨레의 청암이나 그 품성은 그대로였다.
이렇게 청암에 관해 쓰고 나니 특히 한겨레와 관련하여 청암 한사람을 영웅화한 게 아닌가하고 주춤해진다. 한겨레는 거기에 모인 많은 성원들의 동지적 공동노작이다. 그들은 예를 들어, 타사에 비해 매우 낮은 박봉을 감수하면서도 그들의 대의를 위해 정성을 다하고 있다.
그런 공동체이기에 위의 에피소드에서 보는 것처럼 사장이 기자를 아랫사람이 아닌 동지로 대하고 싶었을 것이다.

(남 재 희 전 서울신문 주필·노동부장관, ‘靑巖 宋建鎬’, 한국언론인물사화 제7권, 2010)

 

 

[미니회고] 一民 김상만과 동아 논객들

故 송건호-이정석 선배의 급보 일화

동아일보 논객 중 한두 분만 더 들려 한다. 편집국장을 지낸 송건호씨는 원래 경향신문과 조선일보 논객으로 필명을 날리다 동아일보로 옮겨온 분이다. 인상도 지조 있는 선비형이지만 이분은 천 선생이나 조선일보 주필을 지낸 최석채 선생과 마찬가지로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정론을 편 강직한 논객으로, 글 읽고 글 쓰는 일밖에 다른 일은 잘 모르는 분이다.
그런데 이분이 동아일보 사원 해직사태 때 행인지 불행인지 편집국장을 맡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송 국장께선 250여 명이나 되는 기자들을 관리하고 행정을 보아야 하는 관리직보다 글 쓰고 대학 강의도 나갈 수 있는 논설위원실이 더 맞아 보였다. 결국 동아일보 기자 해직과 제작 거부 사태 책임을 지고 스스로 사표를 내고 동아일보를 떠났는데 후일 동아·조선 해직기자들이 주축이 돼 창간한 한겨레신문 사장이 되었다. 일부에선 이분에게 동아사태 당시 편집국장으로, 책임을 지고 사태해결을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고 비판적이기도 하다. 만일 송 국장이 논설위원실에 그대로 있었다면 신문사에 그대로 남아 더 많은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운명 같은 것을 느껴 본다.
여하간 신문사를 떠난 송 국장도 생활이 곤궁했다. 몇 군데 알량한 원고료 수입과 책 인세가 고작이었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송 국장은 한두 자녀를 강원도 외가에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문화방송 회장이 되신 최석채 선생은 송건호 선생의 딸을 비서실에 채용했다. 나는 80년대 워싱턴에서 근무하던 때 미국을 방문한 송건호 선생을 다시 만나게 됐다. 마침 워싱턴엔 KBS 이정석(전 대한언론인회 회장) 선배께서 지국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송건호 선생과 두 분은 아주 절친한 사이로 말을 놓는 사이였다. 두 분은 1950년대 송건호 선생이 한국일보로 옮겨가기 전 조선일보에서 함께 일한 인연이 있다. 두 분에 얽힌 얘기가 많지만 한때 화제가 됐던 일화 하나만 소개한다.
송건호 기자가 조선일보 외신부에 있다가 한국일보로 옮겨간 후 어느 날, 이정석 기자가 친구 생각이 나 한국일보 외신부로 전화를 걸어 송 기자를 찾았다. 송 기자가 나오자, 이 기자는 “나야” 하고 통화했다. 그런데 송 기자는 알아듣지 못하고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장난기가 동한 이 기자가 “아, 여기는 통신사인데 방금 아이크 대통령이 사망한 급보가 들어왔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기사 받으세요”라고 다그쳤다. 송 기자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예, 알겠습니다”라며 기사 받을 준비를 갖추더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 기자의 즉흥기사 송고가 시작된다. “○일 ○시, 아이크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집무 중 갑자기 쓰러졌다. 백악관은 즉시 아이크 대통령을 워싱턴의 월터 리드 병원으로 이송, 진료 중 이날 ○시 아이크 대통령이 서거했다고 발표했다.”
고 이정석 선배의 고백에 의하면 이 정도에서 그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송 기자가 아직도 눈치를 못 채고 “예, 예” 하며 기사를 받더라는 것이다. 이 기자의 즉흥기사는 계속됐다.
문제는 한국일보였다. 한국일보는 발칵 뒤집혔다. 보고를 받은 장기영 사장이 사장실에서 한달음에 편집국으로 올라오고, 한창 돌아가던 윤전기는 그 즉시 스톱됐다. 송 기자가 전화로 받는 아이크 급서 기사는 한 장 한 장 받는 것이 끝나기 무섭게 외신부장이 읽어보지도 못하고 직접 뛰어가 편집국 자리에 앉은 장 사장에게 전해졌으며, 기사는 ‘왕초’(장기영 사장의 사내 애칭)가 읽는 즉시 문선부로 보내졌다.
이렇게 송 기자를 ‘갖고 놀던’ 이 기자는 한참 만에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야, 나야, 나” 하고 이실직고했으며 그제야 눈치를 챈 송 기자는 “정석이야” 하고 펜대를 놓았다는 것이다. 이어 전말 보고를 받은 왕초는 “이놈이 한국일보를 망치게 하려는구나” 하고 대갈했다는 얘기다. 그 후 이 기자가 우연히 장 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제가 조선일보 이정석입니다” 하고 인사했더니 장 사장이 “응, 자네로구먼” 하고 씩 웃더라는 후일담이다. 과연 그 사주에 그 기자들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일화다. 변치 않은 우정을 나눈 송건호, 이정석 두 언론계 선배는 각각 2001년과 2008년 타계했다.

(…) 
 
(문명호, ‘미니회고- 一民 김상만과 동아 논객들’, 관훈저널, 2009년 12월 24일)

 

 

현대 언론인 열전 <10> ‘역사의 길’ 걸은 언론인의 사표

청암(靑巖) 송건호(宋建鎬)
(1927~2001)

송건호는 1999년 기자협회보가 전국의 신문∙방송∙통신사 편집∙보도국장과 언론학 교수를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에서 장지연과 함께‘20세기 한국의 최고언론인’으로 선정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2003년 미디어오늘이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존경하는 언론인 1위로 선정됐다. 그는‘역사의 길’이란“형극의 길이자 수난의 길”이며,“ 사회의 온갖 세속적 가치로부터 소외되는 길”이라고 밝힌 바 있다. 바로 이런‘역사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그는 ‘가장 존경받는 언론인’이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정론직필을 실천한 언론인이었고, 현대사 연구를 개척한 역사가이기도 했다. 1953년에 기자가 되어 1975년에 언론계를 떠날 때까지 여러 신문의 논설위원과 편집국장을 지냈고, 1988년에 다시 언론계로 돌아와 새로 창간된 한겨레신문의 사장과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또한 그는 기존 역사학계가 도외시하던 현대사 연구에 관심을 가져, 분단 현실과 통일 문제를 다룬 다양한 저서들을 남겨놓았다. 나아가 그는 한국 언론의 자유와 독립 쟁취를 위한 역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 후배들에게‘언론인의 사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를 통해‘역사의 길’을 걷기 위한 언론인의 자세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자들이 존경하는 언론인 1위

송건호는 1926년(호적상 1927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보통학교를 나오고 1940년 서울로 올라와 한성상업학교를 나왔다. 그는 이미 이때부터 고서점을 다니며 독서에 열중했고, 이런 습관은 평생 동안 계속됐다. 1946년에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학교가 격동에 휘말리면서 학업을 계속하지 못했다. 1948년에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지만 6∙25전쟁으로 다시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낙향했다.
전쟁 후인 1953년에 서울로 올라와 복학해 학교에 다니면서, 분단 조국에서는 관리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대한통신 외신부 기자가 됐다. 이후 그는 1954년에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 1958년 한국일보 외신부 차장, 1959년 자유신문 외신부장 등 외신부 기자로 계속 활동했다. 기자로 활동하면서도 학업을 계속해 1956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그가 계속 내근 업무를 하는 외신부에 근무했다는 것은 촌지를 받지 않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계속 공부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그가 외신부에 근무하면서도 당시 영어깨나 하는 언론인이라면 너도나도 가보려고 했던 미국에 가지 않았다는 점도 특이하다.
그는 1961년에 민국일보와 한국일보의 논설위원이 되면서 논객으로서의 면모를 확실히 보여주기 시작했다. 1963년에 경향신문으로 옮겨 논설위원이 됐다가, 1965년에는 편집국장이 됐다. 그가 편집국장을 맡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경향신문은 박정희 정권의 강압에 의해 강제매각 처분됐다. 그는“그때 중앙정보부장 김형욱한테 붙들려가서 대통령과 적당히 타협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도 들었다고 한다. 정권의 언론탄압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향신문을 떠난 그는 1966년에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됐고, 1969년에는 다시 동아일보로 옮겨 논설위원이 됐다. 이 기간 동안 그는“언론기업이 권력에 굴복하고, 권력과 결탁하는”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훗날 그는 1968년 벌어진‘신동아사건’이“한국의 언론기업이 권력에 완전히 굴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매우 상징적인 비극”이었고, 곧‘권∙언 복합체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동아일보에서 1973년에 수석논설위원이 됐고, 1974년에는 편집국장이 됐다. 그가 편집국장을 맡았던 1974년은 유신체제의 폭압이 극성을 부리며, 기관원들이 언론사에 상주하다시피 하던 시기였다. 1974년 10월 23일 정권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가 서울대 시위 기사를 게재하자, 중앙정보부는 편집국장 송건호 등을 연행해갔다.
곧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의 연행은 자유언론에 대한 기자들의 의지가 결집되는 계기가 됐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은‘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결의한다. 정권의 부당한 간섭에 단호히 맞서겠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정권은 교묘하게‘광고탄압’을 가했고, 경영진은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1975년 3월 134명의 기자가 해직되고 말았다.
송건호는 사태의 해결을 위해 노력했지만, 별결실이 없자“이런 판국에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있겠느냐”며 편집국장직을 사퇴했다. 언론자유를 외쳤다는 이유만으로 젊은 기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리는 현실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이 그에게는 양심상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언론계 떠나 생계 곤란할 때도, 관직 제의 거절

갑작스런 사직은 그에게 엄청난 생활상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는 뒤에 그 시절을 떠올리며“그때는 내일은 또 어떻게 먹고 사느냐가 제일 고민”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도 그는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현대사 연구에 뛰어들었고, 천관우의 권유로 민주화운동에도 관여하기 시작했다. 1975년은 언론인 송건호에게 삶의 전환기였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 해직 기자로 출판사인 한길사를 운영해 온 김언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75년은 언론인 송건호에게 삶의 역정 또는 사상체계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기가 된다. 동아일보 사태가 이 땅의 현대사에 그 어떤 계기가 되듯이, 그 시대상황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지식인 송건호는 1975년 역사전개와 더불어 당대의 현실을 온몸으로 호흡하는 역사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유신귄위주의 정치권력이 내리막을 향해 달리는 그 시대상황에서, 일찍부터 언론의 자유와 독립을 한사코 신뢰하던 민족주의자 송건호는 스스로의 문제의식을 심화시키면서 시대상황의 개혁에 앞장선 것이다.
언론계를 떠난 그는 원고료, 강연료 등으로 근근이 생활하면서도, 정권의 관직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정권의 압력으로 원고청탁이 끊어지고 시간강사마저 못하게 돼 생활이 극도로 곤궁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의 각종 유혹을 계속 뿌리쳤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자신보다 생활이 더 어려워 보이는 젊은 해직기자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현대사 연구와 재야 활동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그는 양심적인 언론인이라면 곧‘역사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는다.
1980년 그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큰 고초를 겪는다. 신군부의 정권 장악이 착착 진행되는 과정에서 지식인의 입장 표명이 있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1980년 5월 15일 지식인 134명은 정치민주화를 요구하는 시국 선언을 했다. 이 시국선언문을 썼던 송건호는 5∙17 이틀 뒤에 시국선언을 주도하며 계엄령을 위반했다고 체포됐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조작을위해서는 김대중과 언론계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어야 했고, 그 고리로서 동아투위를 설정했다. 송건호가 김대중에게 거액의 돈을 받아 동아투위에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조작하려던 정보기관은 그에게 무지막지한 고문을 가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2심에서 2년을 선고받았다가, 11월초에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다.

민언협 초대의장 맡아 언론민주화에 앞장

1984년 12월 동아투위, 조선투위, 80년 해직 언론인들이 힘을 합쳐‘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를 결성하자 송건호는 초대 의장을 맡았다. 해직언론인들이 언론민주화운동에 그를 앞세웠던 것이다. 민언협은 이듬해에‘말’을 창간했다. 1986년 9월 그는 민언협 의장으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함께‘보도지침’자료 공개 기자회견을 했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탄압의 실상을 만천하에 알렸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신홍범∙김태홍∙김주언 등이 구속되자‘말’지 발행 여부를 둘러싸고 민언협 내부에서 논쟁이 벌어졌는데, 송건호는 단호한 자세로 계속 발간을 주장했다.
1987년의 6월 항쟁 이후 동아투위∙조선투위∙80년 해직언론인들은 새로운 신문의 창간을 논의했다. 이들은 모금운동 형식을 통해 창간 계획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듬해인 1988년 5월 15일에 국민주 방식의 모금을 바탕으로‘한겨레신문’이 창간됐다. 송건호는 한겨레신문의 초대 사장을 맡았다. 언론계를 떠난 지 13년 만의 일이었다. 민주언론∙민족언론∙민중언론을 표방했던 한겨레신문의 창간은 언론사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지녔고, 이런 신문의 사장으로 송건호 이상의 인물을 찾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송건호는‘한겨레신문 소식’8호에 실린 글에서 새 신문이 보도지침과 같은 정부의 통제 관행을 따르지 않으며, 중요한 사실을 빠짐없이 국민에게 알리고, 왜곡보도를 배격하며 사실의 원인과 결과를 다 함께 밝히고, 사회의 부조리한 사실들을 널리 파헤치고 깊이 있게 추적해 국민들에게 알릴 것이라고 밝혔다. ‘한겨레신문’에 헌신하던 그는 사장, 회장, 고문을 거쳐 1994년에 은퇴했다.

“권력은 물론 자본으로부터도 독립해야 한다”

그는 언론인으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뒤늦게 여러 상을 받았다. 1986년 심산상(심산사상연구회), 1991년 언론상(서울언론인클럽), 1992년 한국언론상 본상(한국언론학회), 1994년 호암상 언론상(삼성복지재단), 1998년 한겨레대상(한겨레신문사), 2000년 정일형 자유민주상(재단법인 금연 정일형박사 기념사업회) 등을 받았다. 또한 1999년에 금관문화훈장을 받았고, 2001년 타계한 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고문후유증으로 인한 파킨슨증후군으로 8년간 투병생활을 하다 타계한 그의 삶은 한국 현대 언론사가 얼마나 질곡의 역사였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2002년 그의 언론인으로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송건호 언론상이 제정됐다. 또한 2002년 그의 일주기를 맞아 한길사가‘송건호전집(전20권)’을 펴냈다.
그는 언론인으로서의 경험을 통해“언론이 자유와 독립성을 잃게 된 것은 그 책임이 전적으로 권력당국의 억압과 규제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과, 또 언론기업이 권력당국과 유착하여 언론기업 스스로가 언론의 자유를 적대시하는 기현상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자유와 독립성을 잃은 언론은 곡필을 통해 “반민주∙부패세력을 대변”하게 된다고도 주장했다. 결국 그는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언론이 권력은 물론 자본으로부터도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언론을‘독립∙자유언론’이라고 불렀고, 스스로 그 실현을 위해 험난한‘역사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스스로 공부하며‘기자 전문화’강조

그는 이미 1960년대에 서구사회와 마찬가지로 한국사회에서도 지식층이 각종 직종으로 분화되어 “일종의 기술자화 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언론계에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언론인은 사상가가 되어야 한다. 신문기자라고 해서 한낱 기능인으로서, 어느 때는 이런 글을 어느 때는 저런 글을 쓰는 대서소 서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까지 주장했다. 그가 언론인이 기능인이 돼서는 안된다고했던데는 이유가 있다.“ 너무나 많은 기자들이 스스로를 한낱 기능직으로 비하하며 민중을 저버린 현실추종자로 유유낙낙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기능인이 되어버린 언론인들은 부패하고 비민주적 현실은 외면하고, 오로지‘현상유지’를 위한 기능적 역할만 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언론인의 전문성을 무시하고 지사적 저항만을 높게 평가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항상‘기자의 전문화’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사회과학적 지식’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물론 본인 스스로가 끊임없이 공부하는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지사를 자처하는 언론인들이“일제시대의 지사형에서 그 정신면이 없어진 대신 외형만 남은 생활을 했다”고 하며, 이런 생활을‘방탕’하다고까지 표현했다. 그는 스스로를“어디까지나 언론인이지 지사는 아닙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역사의식’을 토대로‘주창보도’해야

그는 전문성을 앞세우며 기능적 역할만을 하려고 하는 언론인뿐만 아니라 지사적 특성을 강조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는 언론인도 함께 비판했다. 그는 미국의 영향을 받아 전문직주의를 내세우던 언론인들뿐만 아니라 구한말∙일제하의 전통을 이어받아 지사주의를 강조하던 언론인들과도 달랐다. 송건호는 전자의 언론인들이 현실에서 눈을 돌릴 때 눈을 부릅뜨고 현실을 지켜보고자 했고, 후자의 언론인들이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술로 세월을 보낼 때 현실과 직접 부딪쳐 극복해 나가고자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역사의식’이었다. 그는“뚜렷한 역사의식은 지금 생성하는 오늘의 사실에 대해 해석∙평가의 기준이 될 뿐 아니라 지나간 사실들에 대한 해석∙평가∙의미를 찾는 데도 가치기준이 되고 미래에 대한 전망에서도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객관보도’는 자칫하면 진실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다고 하며, 역사의식을 토대로‘주창보도’해야만 언론이 바람직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동아일보 해직기자로서 송건호를‘내 인생에서 가장 큰 스승’이라고 평가하는 성유보는“오늘날 한국의 언론인들이 송건호 선생님이 사셨던‘언론인의 혼’을 반의반만 지키고자 한다고 해도 한국 언론은 진정한 의미의‘사회적 목탁’으로 자리 잡고도 남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송건호는 평생을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언론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항상“먼 훗날에도 욕을 먹지 않는 글을 쓰겠다는 마음을 다짐”하며 글을 썼다. 험난한‘역사의 길’을 걸었던 그를 사표로 삼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도 ‘독립∙자유언론’을실현해야하고,‘ 역사의식’을 갖춘 언론인이 돼야 할 것이다.

청암 송건호 약력

1953년 대한통신 외신부 기자,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
1958년 한국일보 외신부 차장, 자유신문 외신부 부장
1960년 세계일보 조사부 기자, 한국일보 외신부 차장
1961년 민국일보 논설위원, 한국일보 논설위원
1963년 경향신문 논설위원, 편집국장
1966년 조선일보 논설위원
1969년 동아일보 논설위원, 수석논설위원, 편집국장
1975년 동아일보 사직
1978년‘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
1980년 134인 지식인 시국선언문 작성,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옥고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의장
1988년 한겨레신문 사장, 회장
1999년 금관문화훈장
2001년 국민훈장무궁화장

 

‘어처구니없고’‘잡스러움’도 없던 송진사
청암 송건호 일화

송건호에 대한 글이 적지 않다. 대부분이 동아투위나 한겨레신문의 후배 언론인들이 쓴 것이다. 간혹 과거 함께 민주화운동을 했던 인사나 그의 연구에 영향을 받은 현대사 연구자들이 쓴 글들도 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그에 관한 글이나 또는 그를 언급한 글들 중에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언론인들이 쓴것은 거의 없다. 언론계에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 못한 언론인조차 이런저런 회고담에 자주 언급되는 것과는 너무 다르다.
드물게 남재희는 송건호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남재희는 송건호보다 5년 늦게 언론계에 들어왔다. 그는 1960~70년대에 송건호를 지켜볼 기회가 적지 않았던 듯하다. 그의 글 속에는 왜 송건호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언론인들의 글 속에 잘 언급되지 않았는가를 짐작하게 만드는 내용이 들어 있다. 유신 직전 신문사의 정치 담당 논설위원들이 청와대 저녁식사에 불려갔고, 여기에 동아일보 논설위원 송건호와 조선일보 논설위원 남재희도 참석했다고 한다. 나중에 대통령 공보비서관에게 들은 얘기라고 하며, 남재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송건호 씨가 소피를 보러 화장실에 갔을 때 박 대통령도 거의 동시에 화장실에 가게 되어 나란히 생리 현상을 해결하였다. 박 대통령은 송건호 씨를 좋게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다.
“송 선생, 내가 송 선생을 무언가 꼭 한 가지 도와주고 싶은데 원하는 게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각하, 요즘 지방에 공장들이 엄청 세워졌다 하는데 저는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한번 보고 싶습니다.”
너무나도 놀라운, 욕심 없고도 순진한 부탁이다. 그 덕(?)에 송건호 씨는 나중에 산업시찰단에 포함되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다.

남재희는 그 뒤에 “송건호 씨는 그러한 대쪽 같은 선비였다”거나 “언론계의 거목으로 존경받고 있다”는 말을 덧붙여놓고 있다. 불러주기도 전에 먼저 권력을 향해 달려가는 언론인도 적지 않던 당시에 송건호의 처세는“어처구니없다”는 소리를 들을 만했다. 더욱이 1975년에 후배들의 해직에 책임을 지고 스스로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물러난 그를 보며, 그의 또래 언론인들은 정말 어처구니없었을 것이다.

또한 남재희는 약간의 잡스러움이 없어 아쉬웠던 사람으로 한겨레의 상징 송건호 씨를 들 수 있다. 송진사로 통했던 송씨는 술을 못할 뿐만 아니라 주색잡기와 완전히 절연된 선비였다. 그러기에 현대의 지사가 된 것이다”라고도 적고 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송건호는 촌지를 받지 않고, 잡기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눈치 빠르고 호방한 척하던 당시의 언론인들이 훗날 쓴 글속에 송건호를 언급하기 꺼렸던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1975년 이후로도 쭉 ‘어처구니 없는’ 일을 했고, ‘잡스럽지’도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언론인의 사표’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용규 상지대 교수,  ‘현대 언론인 열전- 역사의 길 걸은 언론인의 사표’, 신문과방송, 2007년 11월호)

 

 

댓글 한 개 »

  1. ’75년경 춘천에서 송건호 국장님의 장모님과 같은 교회를 출석한 적이 있습니다. 장모님이 외손녀를 데리고 교회에 나왔는 데 나중에 송건호 국장님의 따님이었다는 것을, 할머니가 송국장의 장모인 것도 아주 훗날 알았습니다. 생활이 어려워서 자식까지 외가로 보내며 지조를 지켰던 송건호 사장님은 본받아야 할 이 시대의 참된 언론인이었습니다.

    Comment by 백두대간인 — 2022/05/17 @ 8:4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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