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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동아일보 사람들- 서춘

Posted by 신이 On 12월 - 18 - 2018

 

서춘(徐椿, 1894~1944)은 평북 정주 출신으로 오산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일본 동경제국대학교 철학부, 일본 교토대학교 경제학부를 나왔다. 일본 유학시절 1919년 2·8조선청년독립선언에 참여해 9개월간의 금고형을 살았다. 1927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1933년 8월까지 동아일보 경제부장 조사부장을 역임했다. 이후 조선일보로 옮겨 1937년 퇴사할 때까지 경제부장, 주필을 지냈고 1940년부터 매일신보 주필을 맡았다. 친일잡지 <태양>을 창간하기도 했다. 1996년 정부는 말년 친일행적을 이유로 1963년에 수여된 건국훈장 독립장 서훈을 취소했다.

 

서춘(徐椿) (수원, 1894~1943) ▲ 1927.5 경제부장, 조사부장, 경제부장, 1933. 8 퇴사.〔조선일보 경제부장, 주필, 매일신보 주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五峰 徐椿

▲ 1894년 11월 24일 평북 정주에서 출생
▲ 1944년 4월 5일 별세
▲ 1912년 오산중학교 졸업
▲ 東京고등사범학교, 東洋대학 철학과, 京都帝大 영문·경제학과 졸업
▲ 19년 2월 8일 일본에서 유학생 대표 11명과 2.8독립선언서 발표, 9개월간의 금고형 받음
▲ 26년 10월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 27년 5월~32년 4월 同社 경제부장, 조사부장
▲ 32년 4월~37년 11월 조선일보 경제부장, 주필
▲ 40년 9월 매일신보 주필

□ 인물의 고장 정주 태생, 경제통 언론인

오봉 서춘은 일제하에 그리 흔치않은 전문적인 직업언론이으로서 당시 적지않은 언론인들도 그랬듯이 그도 독립운동가의 한사람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는 1894년 11월 24일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가난한 가운데 오산중학교를 다녔고 12년에 동교를 졸업했다. 오산중학교는 1907년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사학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기관으로는 많은 인재와 애국지사를 배출한 명문학교이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그는 오산중학교에서 집안형세가 어려워 학교살림을 도우면서 다녔는데 남강의 눈에 들어 순전히 그의 힘으로 공부를 했고 졸업후에 일본유학도 갈수 있었다고 한다.
원래 정주는 역사적으로도 많은 인재를 낳은 고장이며 고구려의 옛 성터이고 한반도의 요충지로서 홍경래의 봉기로 최후까지 버티다가 중과부족으로 좌절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구 문명체제의 붕괴에 다라 새로운 문물이 빠르게 들어온 곳의 하나이다. 오봉의 동창생으로는 김억, 백인제 등을 들 수 있고 정주출신으로 문단에는 춘원, 안서 김억, 소월 김정식 등이 있고 언론계와 교육계엔 계초 방응모 그리고 남강 등의 인맥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오봉도 그러한 배경속에서 비록 가난한 역경속에서도 그의 비범한 재능과 노력으로 뻗어나갈 수가 있었다고 본다.
그의 가족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오산중학을 졸업하고 동경유학을 떠나는데 정주서부터 부산까지 며칠이 걸렸는지 걸어서 갔다고 한다.
그는 동경고등사범학교(현 동경교육대학교), 동양대학 철학과 그리고 경도 제국대학 영문·경제학과 등 3개의 대학과정을 마치고 당시엔 학사학위 하나 따는 것도 흔치않았던 시절에 3개의 학사학위를 따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무렵 일본 유학생들은 우리나라의 장래에 대해 대체로 두갈래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하나는 자중론(自重論) 또는 중립론(中立論)이고 둘째는 급진적 민족자결론(民族自決論)이었다. 전자의 경우는 대개 총독부 등지에서 보내는 관비유학생이나 또는 관립대학에 다니던 학생들이 많았고 후자의 경우는 사립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 주로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3.1운동의 한 촉진제가 되었던 2.8독립선언의 주동역이 거의 사립대학에 다니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짙은 학생들이었다고 생각된다.
19년 2월 8일의 2.8조선청년독립단선언에 앞서 그해 1월6일 조선기독교 청년회관<동경시내 니시고가와마치(西小川町) 소재>에서 열린 유학생 학우회 주최의 웅변대회에서는 오봉을 비롯해 이종근, 윤창석, 박정식, 전영택 등 연사가 번갈아 나오서 <세계사조에 따라 한민족은 자주독립을 해야 하는데, 젊은 학생이 앞장서서 싸워야 한다>하며 절규하자 청중들은 열광적으로 호응했다. 그래서 최팔용, 전영택, 서춘, 김도연, 백관수, 윤창석, 이종근, 송계백, 김상덕, 최근우 등 10명의 실행위원이 운동 추진 방법을 강구한 결과, 독립선언서를 일본정부, 각국 대사관, 귀중양원(貴衆 兩院)의원 등에게 송달키로 했고 또 최팔용, 나용균 등은 운동자금을 수집하고 선언서는 백관수가 담당해 이광수로 하여금 기초케 했다. 전영택의 신병으로 인한 은퇴로 9명이 된 실행위원에 이광수와 김철수가 추가되어 11명이 대표가 되어 2.8조선청년독립단 선언문과 절의문이 당시 각국 대·공사, 일본정부의 대신, 의회, 조선총독부, 각 언론기관과 저명한 학자들에게 우송됐고 그날 오후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 거의 전원인 4백여명이 모여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의 낭독이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속에서 이루어졌다. 이어 시위행진에 들어가려고 할 무렵 급파된 일경에 의해 장내는 스라장이 되고 시위는 좌절되고 말았다.

□ 전국 순회강연으로 농촌경제 일깨워

2.8선언은 한국의 젊은 역군들이 식민지배세력의 한복판인 동경에서 조국의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내외에 독립의 당위성을 천명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을뿐 아니라 곧이어 국내에서 전국적으로 일어난 3.1독립운동 발발에 있어서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데 보다 큰 역사적 의미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이 사건의 주동역할을 한 오봉 등은 소위출판법위반이라는 죄명으로 9개월의 금고형을 받았는데 오봉은 그후 비밀리에 낭강을 찾아가 2.8선언의 자초지종을 상세히 보고했으며 남강은 다시 여러 가지 움직임을 참고하여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방향에 대해 조만식, 안세환 등과 숙의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오봉은 일본유학시절부터 그가 언론계에서 종사하다가 타계할때까지 거의 평생동안 일경의 미행과 감시하에 있었다. 그런데 그 미행을 따돌리는 재주도 있었다. 가령 전치정류장에 서 있다가도 전차가 와도 짐짓 딴청을 피우고 있다가 미행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막 떠나는 전차의 뒷문으로 날쌔게 집어탄다든가 아니면 탔다가도 다른 문으로 빠져나와 골탕을 먹이기도 했다고 한다. 또 부득이해서 미행을 당할때는 갑자기 돌아서서 형사의 손을 잡으며 “술이나 한잔 합시다. 우리들 사이에 무엇이 장벽이란 말이요”하고 정색하며 술집으로 데리고가 술을 마시기도 했다고 한다.
오봉은 유학시절에 역시 일본에 음악공부를 하러왔던 한 여학생과 알게되어 결혼한 것으로 가족이 전하고 있는데 그 부인 이영희는 실은 숨은 애국운동가였던 것 같다. 오봉의 처가는 수원에서 당시 천석꾼의 부자로 화신연쇄점도 경영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명희는 진명여중에 다니다가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틀림없이 거기에 참가해 변을 당할 것 같아 이영희의 집에서는 서둘러서 동경으로 피신차 유학을 보낸 것 같다. 그래서 이영희의 이름도 기록에는 세가지로 나오는데 아마도 일경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때 그때 가명을 썼을 것으로 가족은 추정하고 있다.
오봉은 이영희와의 사이에 4남 3녀를 두었는데 차남인 서인창(徐仁昌)은 경기중학 재학중에 월반을 해서 서울약대를 졸업하고 도미, 필라델피아 약대를 나온다음 국립화학연구소 물리학과장, 덕성약대 강사, 약업신문 기획위원 등 약업계에서 활동했고 현재는 은퇴해서 사업을 하고 있다. 그 아래 인국(仁國)은 역사학을 전공했고, 현재 인천전문대학 부학장으로 재직중이다.
자제교육에 있어서 오봉은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차남 인창이 당시 가장 입학이 어려웠던 명문중학인 경기중학에 입학했는데도 오봉은 조금도 기뻐하는 기색을 안보이고 공부는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한눈 팔지 말고 계속 분발해서 하라는 말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창이 국민학교에 다닐때는 어쩌다 우등을 못하는 날이면 큰일이 나곤 했다고 한다. 모자나 책, 책가방 할것없이 모조리 아궁이에 넣어 불태워버리고 더 이상 공부할 필요도 없으니 학교에 다닐 필요가 없다고 질타할 정도로 엄했다고 한다. 오봉은 남들이 책벌레라고 할 정도로 시간만 있으면 늘 책을 읽었다고 하는데 술을 들고 취해 들어와서 책은 꼭 읽고 자는 습관이었다고 한다.
보통사람은 깨있다가도 밤에 책을 보면 잠이 오기 때문에 잠들기 위해서라도 책을 보기가 일쑤인데 오봉은 그 반대였다고 한다. 그는 잠이 들다가도 책을 펼쳐보면 오히려 잠이 번쩍 깬다고 하면서 책상머리에서 이따금 책을 읽다 꾸벅꾸벅 조는 자식들을 꾸짖었다는 것이다.
오봉은 일본유학을 마치고 한때 오산중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면서 때로는 전국 순회 강연도 했다고 한다.
그의 연설은 늘 정열적이고 어떻게 보면 선동적이라고도 하겠는데 아무튼 사람을 감동시키는 천부적인 언변과 재치가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언론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당시 언론계가 대체로 최고의 지성인들을 수용하고 있던 일제하의 현실에서 볼때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동아일보에 입사, 처음에 경제부 기자로 있다가 27년 5월에 경제부장과 조사부장 등을 역임했다.
경제부라고 하지만 당시엔 증권취인소(오늘의 증권거래소)에 나가 마두시장(米豆市場)의 주식변동이나 취재 보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고 한다. 그밖에 은행 같은 것도 취재대상에 들어있지만 기자가 주로 증권시세를 현장에서 전화로 부르면 부장은 그것을 받아쓰고는 했다. 따라서 오봉은 직접 취재보다는 데스크를 보고 또 경제관계 논문을 쓰는 것이 주임무였는데 특히 경제평론은 그 무렵의 제1인자라는 칭송을 받았고 바이라인 앞에는 경제학사라는 학위명칭이 동시에 쓰여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가 동아일보에 입사한지 얼마 안돼서 동사가 거사적으로 실시한 전조선수리조합 답사기(全朝鮮水利組合踏査記) 같은 것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27년 8월30일부터 12월25알까지 4개월여를 남부조선, 중부조선, 북부조선으로 나누어 10여명의 기자와 80여개소를 찾아다니면서 생생한 르포를 담은 이 기사는 오봉의 착상과 계획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에는 오봉외에 김동진, 김준연, 안정복, 유지영, 국기열, 최용환, 김과백, 한위건, 박찬희 등이 참가했는데 동아일보는 27년 7월 29일자 사고를 통해 그 조사의 취지를 밝혔다.

□ ‘자신의 경제’ 몰랐던 가난한 경제학자

20~30년대에 일본의 대한(對韓) 식민정책에서 특히 중점을 두었던 것들중에는 쌀증산계획과 철도정책이었다고 하겠는데 그들은 일본의 인구증가로 인한 식량문제를 우리의 농업증산으로 충족시키려고 했고 또 철도는 그 수송의 한 방편이었다. 그래서 쌀의 증산을 위해 이용한 것이 문제의 수리사업 확장이었는데 그로 인해 우리 농민에 대한 수탈정책은 더욱더 심해졌었다.
오봉은 28년 1월1일자 전조선수리조합총평(全朝鮮水利組合總評) 기사를 통해 수리조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은 하지만 그것은 일본인을 위해 지나치게 편파적이고 차별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의 강력한 시정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리고 수리조합사업이 우리나라 사람보다는 일본인에게 치중하고 있으며 이사 등 주요직은 모두 일본인이며 결국 우리나라 사람들의 토지는 일본인에게 팔려가는 실정을 구체적으로 지적 비판하기도 했다.
오봉이 직접 답사했던 경남 밀양, 하남수리조합의 경우는 이 지역의 토지소유는 일본인이 3할강(3割强), 조선인이 7할약(7割弱)으로 되어있었지만 일등답은 거의 일인 소유로 되어있고 조합의 조직도 타조합과 마찬가지로 조합장 이사 평의원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평의원의 자격이 조합비 1맥30원이상 납인하는 조합원에 한하여 동시에 선거권마저 일본인에게만 부여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오봉은 그무렵에 여러 가지 경제에 관한 평론을 많이 썼다. 특히 31년 11월에 동아일보가 자매지 월간종합지 신동아(新東亞)를 창간하게 되자 오봉은 그 창간호부터 거의 매달 평론을 썼다.
창간호에는 <농가 부채 5억원-조선농촌은 어디로 가나>를 썻는데 그는 조선과 일본의 농가부채를 농지면적을 농가호수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부채액수를 산출해 조선인 농사의 부채가 일본농가에 비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구체적인 실현성 있는 대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밖에 <조선경제 10년관(朝鮮經濟10年觀), 발전퇴보(發展退步)의 합주곡, 지역경제와 주민경제의 소장관계(住民經濟의 消長關係), 동아일보 29년 1월 1일자>등 모두가 다 우리경제의 궁핍상을 설명하고 일제의 식민통치정책의 과오에 대한 예리한 지적과 비판을 전개한 훌륭한 글들이었다. 그는 국내경제뿐만 아니라 국제경제 그리고 국제정치분야에서도 자못 해박한 지식과 심도있는 정세분석을 펼치는 글도 다루어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하는 시야가 넓은 직업적 언론인의 면목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를 잘 아는 한 언론인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어제 어디서든지 글을 쓸 수 있는 타고난 문필가였다는 것이다.
오봉은 32년 조선일보를 방응모가 인수하자 이듬해 이광수 등과 함께 조선일보로 옮겨가 역시 경제부장을 지냈고 나중에 주필 등을 역임했다.
거기서 그는 37년경까지 일했는데 그의 타협할줄 모르는 강직한 성격과 주장으로 몇 번인가 들락날락 했던 것 같다.
조선일보가 36년 6월에 사보를 처음으로 발간했을때 당시 주필이었던 오봉은 사보가 <단순한 기록에만 그치거나 또는 사실을 나열만 해놓을 때는 무가치 또는 도리어 해가 되며 과거의 기록을 귀감상아 전도를 개척해 나갈 부단한 노력에 일조가 되도록 발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듯이 그는 늘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논평하는 말하자면 충실한 기자이자 평론가로서의 자세를 갖춘 언론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는 오랫동안 경제부에서 일하면서도 가정생활은 늘 궁핍해 그의 친구들은 그를 가리켜 <자기 자신의 경제를 모르는 경제학자>라는 농담까지 했다고 한다.
동아와 조선이 40년에 급기야는 일제에 의해 폐간을 당하게 되자 그는 경제적으로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되었고 필경 가장으로서의 생활을 위해 한동안 쉬다가 매일신보 들어가 편집국장 주필을 잠시 역임했으나 암울한 나날속에 그야말로 울화병을 얻어 조국광복 전해인 44년 4월 5일 51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정연권 동아일보 이사, ‘五峰 徐椿’, 韓國言論人物史話-8.15前篇(上), 1992, .461~468쪽)

 

 

오를까 내릴까 今秋의 米價觀, 1斤 3錢 9厘乎

1. 『今秋米價』의 의의

『東光』은 나더러 『今秋米價예상기』를 써 보라고 한 지가 발서 약 3개월 지내엿다. 쓰고 싶은 마음이 없엇든 것은 아니나 이럭저럭 사정에 끌리어서 여지껏 못쓰고 잇다가 지금(7월9일)에야 겨우 붓을 잡앗다.

『米價의 예상』 이것은 검방진 계획이요 대담, 따라서 위험천만한 일이다. 일본 속담에 『一寸先は闇』라는 말도 잇거니와 사람이란 대개 내일 일은 모르는 법이다. 그러니까 모를 것을 안다는 것이 첫재 검방진 일이요 그 뿐 아니라 이러한 일에는 위험이 다분으로 부수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감히 붓을 든 이유가 어데 잇느냐 하면 그 대답은 이러하다.

금일 1石15圓 30錢하든 쌀이 금후 6개월을 지난 11월에 가서 幾圓 幾十錢할는지 그것을 확실히 알 수는 없으며 금일 每斤 4錢2厘하는 正租 1斤의 가격이 오는 新穀 出廻期에 가서 幾錢幾厘할는지 그것을 정확이 마칠 수는 없으나 그 때에 가서는 현재보다 더 오를까 또는 나릴까 또는 오르면 얼마나한 정도로 오르며 나리면 얼마나 한 정도로 나릴 뜻하냐? 한 정도의 추측은 대개 전연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환언하면 이만한 정도의 추측은 혹은 과거를 토대로 하며 혹은 현재의 정세를 고찰하야 추측할 수가 전연 없는 것도 아니라 따라서 이만한 자신을 가지고 붓을 든 것에 불과한 것이니까 이것은 실제에 잇어서 米價의 騰落에 막대한 이해관계를 가진 여러분한데는 단순히 한 참고거리밖에 안된다는 일언을 특히 주의해 둘 의무를 感하는 것이다.

다음 『今秋米價예상기』라 햇스니 그 『今秋』라는 것은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냐? 이 대답도 미리부터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잇다. 『今秋』란 來新穀出廻期를 가르치는 것이다. 曆月로 말하면 양력11월 이후의 米價를 가르치는 것이다. 누구나 대개 아는 바와 같이 米穀년도는 매년 11월에 시작하야 익년 10월에 마치는 것이다. 고로 10월은 舊穀將盡, 新穀將出의 달로서 신식의 일본 문자로는 此를 『端境期』라고 한다.

이만치 오는 동안에 독자한데는 이런 의심이 한 가지 생겻을 것이다. 무슨 의심인고 하니 『기왕 米價 예상기를 쓴다고 하면서 此6월부터 端境期인 10월에 至하는 4개월간의 米價에 대해서는 왜 이것을 생략하느냐?』하는 의심이다. 이것을 생략하는 이유는 이러하다.

(1)이 4개월간은 米價년도로 보면 최후의 『3분지1』년도로서 景氣의 好不好를 막론하고 米價는 다소 오르는 것이 상례이다. 설사 景氣의 악화 재료가 出하야 期米가 低落할지라도 그것이 폭락이라고 할 정도의 대폭 低落이 아니면 正米와 밋 小賣시세는 이에 따라서 低落하지 아니함을 상례로 한다.(물론 期米가 膽貴할 때에는 正米 及 小賣시세가 이에 따라서 민감하게 騰貴하지마는 금년 시세로는 대흉작을 예상시킬만한 天災가 잇기 전에는 期米의 騰貴를 招致할 하등의 재료가 없다. 물론 그 이유는 下述을 보면 알 것이다.)<24>

(2)또한 이 4개월간의 米價는 天候여하의 지배를 많이 받는데 天候여하는 測候所에서도 마치는 때보다 못 마치는 때가 많은 현상에 잇어서 더구나 이 방면을 모르는 나로서는 알 배가 못되는 것이다.

(3)連 2년을 두고 米價의 폭락으로서 형언할 수 없는 타격을 받은 조선 농민이 알고저 하는 것은 『장래의 米價가 좀 오르지 못하겟느냐?』하는 문제다. 이것이 우리가 문제로 하는 바의 초점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조선 농민이 문제로 하는 바 이 1句에 잇는 『장래』라는 말가온데는 이 4개월간은 전연 포함되지 아니하엿다. 何故오하면 이 4개월은 쌀 혹은 正租의 전부가 이미 대다수의 농민의 손을 떠나서 소수의 豪農 及 米商의 손에 드러잇는 때다. 따라서 이 기간은 농민의 다수도 역시 米 及 正租의 소비자 측에서는 고로 米價의 騰貴는 도리어 일반 소비자와 같이 일반 농민에게도 고통이 될 따름인 까닭이다.

이러한 이유 밑에서 중간 4개월간의 米價여하를 생략하고 新穀出廻期인 11월 이후의 米價를 목표로 예상을 시작하고저 하는 것이다.

2. 경제계의 대세로 본 今秋의 米價

경제계의 대세로 본 今秋의 米價에는 다만 비관의 一途가 잇을 따름이다. 무엇을 이유로 하야 그런 결론을 하느냐?

(1)세계적 불경기의 심각화

1. 米佛 2국에의 金의 偏在. 2. 銀價의 폭락. 3. 勞農露西亞의 농산물 投賣. 4. 독일의 과도한 배상의무의 부담. 5. 歐洲列國의 對米戰債. 6. 산업 합리화에 수반하는 대중의 실업. 7. 농공기술의 장족 진보와 조직 개선에 의한 생산과잉. 8. 列國의 關稅戰 9. 후진국의 공업화 등에 의한 세계적 불경기의 度는 아직도 그 심각의 度를 더해갈지언정 조금도 회복되어가는 兆徵이 보이지 아니한다. 따라서 서양 諸國의 주식물인 소맥 가격은 일로 앞날에도 더 떠러질 우려가 많다. 소맥이 떠러지는데 米만이 홀로 아니 떠러진다하면 米食國民의 일부가 麥食을 하게 되는 계단을 밟아가지고라도 米價 수준을 麥價 수준과 같은 『레벨』까지 떠러치고야 말 것이다.

(2)米의 항구적 생산과잉

일본 及 조선의 米의 생산과잉은 결코 작년의 예로 본 바와 같은 일시적 농작의 결과가 아니요 경지면적 증가에 의한 항구적 성질을 가지고 잇다는 것이 작금 兩 米穀년도와 같은 불경기 속에 잇어 米價를 더욱 심하게 떠러트리는 일대 원인이 되어가지고 잇다. 일본의 경제학자 高橋龜吉씨의 계산에 의하면 『풍작의 작년을 除하고 昭和2년으로부터 4년까지의 평균 1反步당의 수확량을 보면 1石9斗다. 此를 昭和5년의 일본 내의 米作付反別 323만9천여町에 乘하면 그 평년작 수확량은 6천154만5천石이 된다. 他方 조선, 臺灣으로부터의 純移入高는 약8백만石이다. 그러니까 이상 공급합계가 평년에도 6,954만석이다. 此를 5년도의 일본내 米消費量 6천893만石에 비하면 差引 62만石의 공급 과잉에 해당하다』 물론 高橋씨의 이 계산에는 년 5백만 石움˜ 소위 이상적 持越이 들지 아니하엿다. 그러나 그것은 매년 전년도에서 넘어오는 것으로 다시 익년으로 넘기고 말게 되는 것이니까 결국 상쇄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高橋씨는 兩地로부터의 移入高를 8백만 石으로 보니만치 실제보다 적게 잡앗다. 何故오하면 근년에 와서는 조선 米만으로도 약 8백만 石이 되고 臺灣米의 移入도 2백여만 石이 되는 까닭이다. 게다가 적어도 2,30만 石은 되는 外米의 輸入高도 高橋씨의 계산에는 들지 아니하엿다. 如斯히 조선 臺灣으로부터의 移入高룀¼ 實收보다 적게 잡고 또한 外米의 輸入高를 전혀 계산에 넣지 않고 일본의 평년작을 표준으로 하야 공급과 수요를 대조해 보아도 오히려 다소의 공급과잉을 볼 지경이라 하면 금일 일본 조선을 통하야의 米의 생산과잉이 결코 일시적 풍작의 결과가 아니요 실로 경지면적의 증가와 농업기술의 발달에 의한 항구적 샊�산과잉인 것을 알 수가 잇다. 따라서 금일의 米價의 폭락은 결코 일시적 풍작에서의 결과가 아니요 此 항구적 생산과잉에 기인한 것임을 알 수가 잇다. 따라서 (1)재작년 이래의 불경기가 없어도<25> 米價는 다소 低落해야 될 운명에 잇엇다는 것을 알 수가 잇고 (2)또한 작년의 米價低落이 米 자체의 원인에 잇어서도 결코 단순한 풍작의 결과만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잇다.

(3)減俸 그 他 行財政의 대정리

行財政의 정리로 실직자가 생긴다 하자. 이것이 米의 소비를 감소시킬 것은 대개 추측키에 곤란치 아니하다. 감봉으로 금주자가 생기며 애들한데 과자를 덜 사주게 된다고 하자. 술의 원료도 쌀이요 과자의 원료도 쌀이다. 이러케 생각해 보면 감봉을 위시하야 장차 행하려는 行財政의 정리가 米의 소비를 감소시키며 따라서 대흉년이 아닌 이상, 금후의 米價를 低落시킬 것은 대개 추측키에 곤란치 아니한 일이다.

(4)대중의 빈곤화에 대하야 米食계급은 점차 雜食계급으로 옮아간다

일본, 조선을 통하야 재작년 말부터의 심각한 불경기로 인하야 실업자가 격증해가며 빈곤이 점차 극심해간다. 따라서 종래의 米食계급은 점차 잡곡을 먹는 계급으로 옮아간다. 이것이 米의 需要減을 招致하야 米價를 점점 低落의 一路로 모라넣는 일대 원인이 될 것은 물론이다. 이 네 가지의 원인이 잇기 따문에 米價는 더욱 低落할 정세에 처햇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감봉과 및 行財政 정리의 영향은 목하의 정세로 보면 지금부터 3개월 후에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지금부터 3개월 후에면 그것은 거의 新穀出廻期에 가까운 것이다. 또한 대중의 빈곤화는 작년보다 금년에 더 현실로 나타나고 잇다. 조선 사람은 종래는 米食으로부터 粟食으로 옮아 오더니 금년부터는 粟食을 유지할 힘조차 없어서 粟보다 더 한 층 떠러지는 食物로 옮아가고 잇다. 금년 5월까지의 滿粟 輸入高가 작년에 비하야 반감한 원인은 결코 그 전부를 작년 풍작의 一事에 歸하고 말 수는 없는 것이다. 풍작으로 인하야 米食으로 옮아간 사람도 다소 잇겟지마는 그 대부분은 역시 粟食조차 유지 못하고 그 아레 계급으로 떠러진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如斯히 경제계의 대세로 본 米價의 전도에는 다만 비관의 一路가 잇을 따름이다. 따라서 작년 新穀期의 米 1石價가 13원이라 하면 금년 新穀期에는 그 이하로 더 나려갈는지도 모르는 형세며 따라서 正租 1근이 3전 이하로 나려갈는지 모르는 정세다. 그러나 이것은 경제계의 대세로 본 말이오 今秋의 米價에 대한 사실인즉 그러치 아니하다. 그 까닭은 전혀 米穀法의 개정 실시라는 一事에 잇다. 여긔서 개정 米穀法의 실시와 米價와의 관계를 서술하야 일반의 참고거리를 삼고저 한다.

3. 개정 米穀法과 米價와의 관계

지난 3월 제59의회를 통과한 법률 중에서 昭和 6년 이후의 米價 조절상 중대한 관계를 가진 것은 1. 米穀法의 개정이요 2. 米穀 수급조절 특별회계법의 개정이다. 전자의 개정으로 (1)外米 수입의 관리 통제가 종래에 비하야 철저하게 되며 (2)米穀法에 의거하야 출동할 기준 米價가 규정되엇고 후자 즉 米穀 수급조절 특별회계법의 개정으로 米穀 자금이 풍부해젓다. 즉 종래의 2억7천만 원으로부터 다시 8천만 원 증가되어 3억5천만 원으로 되엇다. 물론 米穀法의 정신은 米穀 수량에 과불급이 없이하며 米價에 過高過低가 없이 하야 수량, 가격 양자가 공히 중용을 얻게 하는데 잇지마는 米價 폭락으로 곤경을 당하는 재작년 이래의 현상에 잇어서는 米價의 低落 방지와 米穀의 공급 과잉 배제가 거의 유일한 목적이 되다싶이 되엇는데 이런 시대에 잇어서 개정 米穀法과 개정 米穀 수급조절 특별회계법이 실시되어 1. 외래의 수입제한을 철저히 하며 2. 米穀法에 의한 米의 매상을 단행할 최저가격을 규정하며 3. 米 매상을 풍부히 할 수 잇도록 米穀 자금을 8천만 원이나 증액한 것은 此法을 실시한 昭和 6년도 이후의 米價에 대해서는 퍽 유리한 정책인 것은 두 말 할 것 없이 명백한 사실이다.

이제 이것을 좀 더 자세히 말하면 兩法이 실시된 昭和 6년도부터는 (1)호혜조약관계에 잇는 소수의 外國米를 제한 외에는 일체로 그 수입에 허가를 要케된 관계로 外米 수입량의 제한을 일층 유효하게<26> 할 수가 잇고 (2)개정 米穀法에는 기준 米價에 의한 최저가격이 규정되어 잇어가지고 米價가 그 최저가격 이하로 나려갈 지경이면 정부의 米 매상이 단행될 것인 고로 米價는 그 최저가격 이하로 나려가지를 못한다. 물론 기준 米價는 해마다 다르다. 그런데 昭和 6년 7월1일부터 同 11월까지에 의거할 기준 米價는 22원 85전이다. 그러고 此 기준 米價에 의거한 최저가격(기준 가격보다 2할 下値)은 18원 28전이요 최고가격(기준가격보다 2할 上値)은 27원 42전이다. 즉 금년 7월1일부터 11월까지의 사이에는 米價가 18원 28전 이하로 떠러지게 되면 정부에서 매상을 단행하고 27원 42전 이상으로 올라가게 되면 정부에서 소유 米의 불하를 단행할 것인 고로 米價는 경기 여하에 불구하고 이 기간 중에는 최저가격 이하로 나려갈 수 없고 최고 가격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는 것이다. 즉 18원 28전과 27원 42전의 범위 내에 잇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東京의 深川正米의 가격을 기준한 것이다. 또는 일본산의 正米를 표준한 것이다. 또한 米穀法 제1조가 아직도 조선에 실시되지 못한 까닭으로 매상의 대상은 日本米에 한한다. 그러나 兩法의 개정이 일본산 米價에 이만한 영향을 미친다 하면 朝鮮米에도 이와 거이 비등한 정도의 간접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가령 조선 인천의 米價를 일례로 들어 말하면 원칙상 前記 최저가격에서 東京 正米 시세와 인천 正米 시세와의 價差를 減除한 가격이 인천에서의 최저가격이 될 것이다. 가령 東京과 인천과의 간의 正米 시세에 3원의 價差가 잇다고 하면 인천 正米의 昭和 6년도 최저가격은 18원 28전에서 3원을 감한 액 즉 15원 28전이 될 것이다. 고로 兩地간의 價差가 3원인 한에 잇어서는 금년의 인천 正米 시세는 15원 20전 이하로 떠러지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移出 통제 그 他의 약간 불리한 사정이 잇는 고로 꼭 이 원칙대로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치만 이 근방에 잇을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正租 1근의 가격이 얼마일 것을 타산해 보면 이러하다. 正米 1石에는 正租 330근을 要한다고 하고 또한 1石의 精米費를 2원 50전으로 잡고서 正租 1근의 가격을 타산해 보면 1근 3전 9리다. 고로 今秋에는 대개 조선 正租 가격은 3전 9리 근방 이하로 퍽 떠러지지는 않을 것으로 볼 것인데 이것은 개정 米穀法의 효과다.

4. 최근의 경제 사정

米穀은 일본 及 조선에 한한 특수 식량인 고로 비교적 세계 경기의 영향을 덜 받는다고 할 수 잇으나 역시 결국은 그 영향을 적지 않게 받는 것이다. 이것은 前擧한 米價 低落의 원인을 보아도 알 것이다. 이미 세계적 불경기가 米價 低落의 원인을 지엇다 하면 세계 경기의 호전이 米價 등귀의 원인을 지을 것은 물론이다. 去 20일 후버씨의 戰債 배상 연기안이 제창된 이후로 금일까지 약 20일간에 東京 大阪 인천을 통하야 期米는 약 1원 가량 正米도 약 1원 가량의 등귀를 보앗는데 此 등귀 원인 중에는 후버의 연기안이 가장 유력한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후버 案의 실시 영향에 의하야 일본의 경기까지 호전되면 일본의 各般 사업계도 따라서 활황을 정할 것인 고로 이에 따라서 米의 소비량도 자연히 증가할 것을 예기하고 오르는 것이다. 고로 금후의 米價를 연구하는 데 후버 案의 趣勢 여하를 항상 주목할 필요가 잇다고 한다.(1931년 7월 9일 擱筆)<27>

(서춘, ‘오를까 내릴까 今秋의 米價觀, 1斤 3錢 9厘乎’, 동광, 1931년 8월호)
 

 

 

댓글 한 개 »

  1. 친일파… 동아일보는 왜 친일파들을 감싸는 식의 텍스트를 지속 생산하는가.

    Comment by ㅇㅇ — 2020/04/28 @ 8:2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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