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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 100년, 東友 100인 <16> 김명식

Posted by 신이 On 11월 - 29 - 2018

민족대변 東亞  100년, 자랑스런 東友  100인  (동우회보 제63호) 

 

 2.8독립선언 참가한 文士 창간때 논설반 입사 

 –  김명식  

  

 

 



1920년 창간 당시 사람들은 동아일보를 가리켜 ‘청년신문’이라고 일컬었다. 설립자 김성수가 30세의 젊은이였고, 편집국장 이상협은 28세의 나이에 사회부장과 정리부장을 겸했다. 논설반과 편집국 기자들도 대부분 30세 안팎의 청년들이었다.

 


초창기 기자들은 간부들의 추천으로 입사했지만, 일부 신출 기자들은 입사시험을 거쳐 채용되기도 했다. 신문사 경력이 있는 사람도 있고, 전혀 없는 사람도 있었다. 외국에서 유학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독학으로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인물본위로 선발하였기 때문에 한결같이 준재(俊才)들로 벌써부터 세상에 이름 석 자를 떨치고 있는 쟁쟁한 젊은이들이었다. 창간기자인 김동성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동아일보에 모인 사람들은 만세 직후여서 누구나 애국심에 불타올라 있었다. 직업의식을 가지고 들어온 것 보다는 ‘남이 감옥에서 고생하는데 나는 편안히 앉아서 문필보국을 한다. 이게 뭐가 괴로우냐’ 이런 심리였다. 그런 분들이 모인 곳이 동아일보였다. 말하자면 13도에서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유지들이 자연 모이게 됐다”(동아일보 사사 1권)


<김명식>
김명식(金明植·1891~1943)은 제주도 조천 출신으로 서울 한성고보를 마치고 1918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와세다 재학 시절 신익희, 백남훈, 장덕수 등과 함께 조선유학생회 회지 ‘학지광’(學之光)을 발행했고, 2·8독립선언에 참가했다. 동아일보 창간 때 논설반 기자로 입사했는데, 당시 논설반에는 이상협 편집국장, 장덕준 조사부장, 진학문 정경부장 등이 있었다.

 


김명식은 자타가 공인하던 문사(文士)였으나 세상에 시비도 많이 일으켰다. 그가 5월 4일부터 6회에 걸쳐 연재한 사설 ‘조선 부로(父老)에 고함’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공격한 대표적 논설이다. 가장권(家長權) 남용을 지적하고 가장의 책임과 의무를 촉구하는 한편, 젊은 세대에게는 새 문화를 받아들이라고 권하는 내용이었다.

 


이 글은 노인층 특히 유림에서 격노하여 전국적으로 신문 불매운동을 일으키는 등 야단이었다. 편집국장 이상협은 ‘한양과객’이란 필명으로, 그 글에 격한 표현이 있지만 청년들은 지금 현상이 너무 억울하니까 시집간 여자가 친정 부모에게 서러운 사정을 호소하듯 쓴 글이라고 이해를 당부하기도 했다.

 


김명식의 동아일보 시절은 길지 않았다. 창간 2년 뒤인 1922년 고하 송진우가 사장이 되자 회사를 떠나 33인 중의 한 명인 박희도가 사장으로 있던 ‘신생활’ 잡지의 주필로 옮겼다. 신생활 잡지는 곧 폐쇄되고, 사장 박희도와 주필 김명식은 투옥돼 함흥형무소에서 2년 옥고를 치렀다. 김창순 북한연구소장은 후일 ‘신생활’ 필화사건을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재판이라고 말했다.

 


김명식은 감옥 생활과 고문 후유증으로 1943년 4월 고향에서 생을 마감했다.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 글 김일동 (동우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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