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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동아일보 사람들- 서범석

Posted by 신이 On 11월 - 12 - 2018

 

서범석(徐範錫, 1901~1986)은 양정고보를 졸업하고 베이징대 정경과를 수료한 뒤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1930년 2월 동아일보 신의주주재 특파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펑톈(奉天)특파원으로 활약하고 사회부로 있다가 1933년 5월 퇴사했다.

 

서범석(徐範錫) (광주, 1901~ ) ▲ 1930. 2 기자(신의주지국근무), 펑톈(奉天)특파원, 기자(사회부), 1933. 5 퇴사.〔민의원의원〕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본사기자특파(本社記者特派)

본사(本社)에서는 일즉부터 중국(中國)의 수도(首都) 남경(南京)에 신언준(申彥俊) 특파원(特派員)을 상주(常駐)케하야 그 적확(的確), 풍부(豊富)한 재료(材料)와 민속(敏速)한 보도(報道)는 타사(他社)의 추수(追隨)를 불허(不許)하야 오즉 본사(本社)만의 특색(特色)이엇슴을 자타(自他)가 공인(共認)하는 바이어니와 만주사변(滿洲事變)을 발단(發端)으로 북중시국(北中時局)이 다단(多端)하게 되엇슴으로 봉천(奉天)에도 특파원(特派員)을 샹주(常駐)시킬 필요(必要)를 절감(切感)하야 신의주주재특파원(新義州駐在特派員) 서범석군(徐範錫君)을 금회(今回) 특파(特派)하기로 되엇습니다. 금후(今後)의 본지(本紙)는 중국통신(中國通信)에 더욱 이채(異彩)를 발(發)하게 될 것을 밋는바이어니와 재만동포(在滿同胞)에게는 만흔 편익(便益)을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11월 28일(十一月二十八日)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동아일보 1931년 11월 29일자 1면)

 

 

本社創刊45周年紀念·新聞週間시리즈- ‘東亞 45年’의 証言
(連載 第7回) <1931年> 만보산사건(萬寳山事件)

‘수리(水利)’ 싸움이 번져
한·중연쇄보복(韓·中連鎻報復)… 사설(社說)로 이성회복(理性回復)을 촉구(促求)
이역(異域)서 피흘린 유맹(流氓) 통천(痛天)의 사연

서범석(徐範錫)씨 회고(回顧) (국회의원(國會議員)·민정당(民政黨))

1931년, 나는 동아일보(東亞日報) 한만(韓滿)국경 특파원으로 있었다. 본거지를 안동(安東)에 잡고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을 낀 한만(韓滿)국경에서 생겨나는 일들을 취재하는 것이 임무였다.

‘동아(東亞)’에서 한만(韓滿)국경에 특파원을 둔 것은 그 당시 제 나라를 버리고 국경을 넘어 이민(移民)하는 동포들의 수가 적지 않았던 만큼 이들에게 닥치는 압력과 학정을 지켜봄으로써 그들을 보살펴주려는 큰 뜻이 있었던 것이다.

그해 7월2일, 장춘(長春) 서북쪽 70~80리 상거한 곳에 있는 만보산(萬寶山) 기슭에서 우리 동포와 중국인 사이에 큰 충돌이 일어났다. 사건의 말미는 황무지(荒蕪地)를 개간하는 우리 동포들이 개간된 농토 사이로 수로(水路)를 내자니 자연 중국인 땅을 거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아무리해도 타협이 잘되지 않아 승강을 하다가 우리 농촌에서 흔히 보는 것과 같은 물고싸움이 번져, 양쪽에 수많은 부상자를 낸 것이다.

“얼씨구나”하고 나선 것은 일본의 관헌들이었다. 그들은 한중(韓中)민족의 이간(離間)책으로 이 싸움을 그늘에서 더욱 선동, 사건을 자꾸만 확대시켜갔다. 남의 땅에서 황무지를 닦으려다 참변을 당한 동포들을 위한 의분과 또 그늘에 숨은 일본의 선동이 합쳐, 한인들의 중국인 습격사건, 살인사건이 국내에서도 덩달아 잇따라 일어났다.

본사에서는 즉각 현지(現地)에 가서 실정을 샅샅이 살펴 보도하라는 지시가 내렸다. 그 당시 동아일보(東亞日報)는 만보산(萬寶山) 사건을 크게 다루지 않았다. 까닭은 당시 사장이던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선생이 “이 사건은 아무래도 일제의 음모로 꾸며지고 또 터져 난 사건 같으니, 아무리 우리 동포가 많이 다쳤다 해도 한·중(韓·中)의 우의(友誼)를 생각해서 신중히 보도하도록 하자”는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또 동아일보(東亞日報)는 사설에서도 연이어 우리민중에게 냉정하라고 호소를하고 국내에서 습격당한 중국인에게 위무(慰撫)의 충정을 토로했다.

국내 각 중요도시에 번져가던 중국인 박해사건이 며칠 안가서 멈추게 되고 불행중 다행으로 한·중(韓·中) 양 민족간의 감정이 그 이상으로 더 악화되지 않은 것은 ‘동아(東亞)’ 사설의 선견지명에 크게 힘입은 것이라는 것이 당시의 중론(衆論)이었다.

나는 본사 지시를 받고 동업(同業) ×지(紙)의 본사특파원과 동행이 되어 장춘(長春)에 다다랐다. 동아일보(東亞日報) 장춘지국장(長春支局長)인 김이삼(金利三)이라는 사람은 또 동행한 딴 사 특파원이 소속되어 있는 ×지(紙)의 지국장(支局長)까지 겸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아일보(東亞日報)는 만보산(萬寶山)사건을 그다지 크지 않게 다루었고 그 ×지(紙)는 연일 대서특필해온 처지였다. 장춘(長春)에 있는 우리 민회(民會) 간부들의 태도는 두 특파원을 대하는데 너무나 판이했다. 나에게는 “소위 민족지(民族紙)라는 신문에서 그게 뭐냐?”고 호통을 치면서 괴롭혔고 ×지(紙)의 특파원은 거의 칙사대우를 했다. 이 민회(民會)의 간부라는 자들도 실상은 일제(日帝)의 장난에 놀아나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결국 그들의 방해로 현지(現地)까지 못간채 장춘(長春)에서 취재한 내용만을 보도했으나 정말 땀을 흘려야 했던 것은 취재가 아닌 다른 일로 해서였다. 중국정부는 우리나라 안에서의 화교(華僑)피습사건에 격분, 진상조사를 위한 특사를 보냈는데 본사에서는 또 나에게 지시가 오기를 그 특사를 만나 어떻게든지 “이번 일은 일제의 한·중(韓·中) 민족 이간을 위한 장난”이라는 걸 납득시키라는 것이었다. 만주(滿洲)에서부터 그와 함께 기차에 올랐으나 일경(日警)의 감시가 하도 심해서 도저히 기회를 잡을수가 없었다. 안동(安東)역에서였던가, 마침 일경(日警) 형사들이 교대하는 사이에 잠깐의 빈틈이 생겼다.

나는 쏜살같이 그 특사에게 달려가 종이쪽지 한 장을 꼭 쥐어주고 돌아왔다. 내가 말하려는 사연을 깨알같이 적어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이다.

그해 9월18일에 마침내 ‘만주사변’이라는 이름의 일본의 만주침략이 발발, 나는 안동(安東)에서 여러 동포들과 함께 피난 오는 동포들을 돌봐주는 일에 골몰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피난민 대열 속에서 전염병 성홍열(猩紅熱)이 유행, 우리집 식구들까지 감염되어 하루아침엔 아들놈을 땅에 묻고 돌아왔고 그 이튿날 저녁엔 딸을 이국땅에 묻어야만했다. 이 일을 겪고 나는 본사에 이 사연을 알리며 본사 복귀를 원했더니 허가되어 파란 많던 나의 한만(韓滿)국경특파원 생활에 종지부가 찍혔다.

(서범석, ‘萬寳山事件’, 동아일보 1965년 4월 8일자 6면)

 

 

 

▲ 1902년 10월19일 서울에서 출생
▲ 1986년 4월2일 별세
▲ 23년 양정고보를 거쳐 중국북경대학 정경과 수료
▲ 25년 조선일보 기자, 동년 시대일보 사회부 기자
▲ 26년 중외일보 기자
▲ 29년 5월~33년 5월 동아일보 신의주지국 기자
▲ 50년~72년 2, 4, 5, 6, 7, 8대 국회의원
▲ 73년 정계은퇴, 용인에서 영농생활
▲ 79년 국회의원 동우회 부회장

□ 무산된 미국유학의 꿈

의회와 신문은 민주주의의 쌍생아라고 한다. 하나는 국민을 대표해서 입법을 하고, 하나는 민의를 대변해서 여론을 반영한다. 신문기자의 의회진출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그 뿌리가 같은 때문일까? 우리나라 헌정사에서 언론인 출신의 국회의원은 헤아릴 수 없이 많거니와 그 가운데서도 정계의 거물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을 꼽을 때 육봉 서범석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서범석은 3.1독립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오랜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한 후에도 사회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사상운동 등에 몰두하여 가세는 점점 기울어갔다. 장남으로 태어난 서범석은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가정을 돌봐야 했으나 3.1독립운동에 참가하고는 곧 중국으로 망명, 북경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23년 북경대학 정경과를 수료하고 도미 유학하기 위해 북경대학총장 및 중국인 학우들의 주선으로 중국인유학생 여권을 얻어 냈다. 그리고 국내에서 천석꾼 말을 듣는 부호의 자제인 김태길, 김무길과 또 한명의 학우 등 네사람이 여비조달을 위해서 입국했는데 때마침 의열단원이 남만주철도를 폭파하려고 봉천 방면으로 갔다는 소문이 나돌던 때라 영문도 모르고 여관에서 종로서 형사대에 의하여 연행되었다. 서범석은 이곳에서 온갖 고문을 받은 끝에 이튿날 오후 소지한 여권을 압수당하고 만다. 이렇게 해서 여권을 빼앗기고 풀려나기는 했으나 미국유학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학우들은 다시 중국으로 갔으나 장남인 서범석은 가정을 돌봐야 할 책임감으로 국내에 주저앉기도 했다.
육봉 서범석은 취직을 서둘렀으나 가문을 더럽히지 않을 직장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더구나 그 당시의 서범석은 왜경에게 홍역을 치른 뒤라 자연히 사회주의 운동자들과 행동을 함께하게 되어 나중에는 경성청년회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서울청년회 열빈루 습격사건때는 일선행동원의 한사람이 되는가 하면 민중운동자 대회를 위해서 화요회 그룹인 신흥청년동맹과 제휴하여 대회 준비에 몰두했다.

□ 서울~경주간 첫 비행동승기의 해프닝

그런 와중에서 “조선일보 신흥우나 안재홍을 찾아가보라”는 부친의 말을 듣고 서범석은 어느 날 그들을 신문사로 찾아갔다. 두 사람은 10년 지기나 대하듯이 반갑고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며칠후 사회부에 배속시켜주었다. 이때부터 월급 15원을 받는 23세의 무관의 제왕은 부푼 꿈에 가슴 설레이는 기자생활의 첫 출발을 한다.

(…)

□ 6選 자랑하는 신념의 정치인

중외일보는 29년 11월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난 후에 곧 문을 닫게 되었다. 서범석은 얼마동안 낭인생활을 하다가 30년 늦은 여름 동아일보 국경(國境)특파원으로 안동현에서 신의주로 출근했으며 다시 만주 봉천(瀋陽)특파원으로 활동하다가 33년 5월에 퇴사했다. 서범석의 동아일보 국경특파원 및 봉천특파원 시절은 그의 기자생활 중에서 파란 많은 시대였다. 동북 중국거류 동포구축사건, 돈화(敦化)조선농민학살사건, 만보산(萬寶山)사건을 비롯 그밖의 여러사건에서 일제의 대륙침략에 동아일보가 맞서 싸우던 시기였던 바 송진우의 밀명을 받고 동분서주했던 서범석의 활약은 실로 비범했다. 그는 동아를 떠난 후 만몽일보의 창간을 위해서 장춘(長春)으로 갔으나 경영진에 배신당하고 기자생활을 그만두었다.
이제까지 주로 서범석 자신의 회고담을 참고하여 기술했다. 그러나 해방후 국회에 진출하면서부터 그의 인생극장은 폭넓은 정치무대에서 화려한 제2막을 연다.
그는 50년 무소속으로 옹진 갑구에서 출마, 당선하여 2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이윽고 58년 민주당 소속으로 서울 성북구를 통해 4대 민의원으로 등원한데 이어 60년에 5대 민의원에 당임했고 6대 국회에서는 민중당 소속으로 등원하여 동당 원내총무로 활약하다가 다시 신민당으로 옮겨 7대 국회의원 시절에는 신민당지도위원을 맡아 69년부터 73년까지 재임했다. 그는 71년 신민당후보로 성북 을구에서 다시 출마하여 8대 의원에 당선되었으며 73년 이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육봉 서범석이 정치무대에서 활약했던 기간은 50년부터 72년까지의 20여년이다. 우리 헌정사에서 이 기간은 어느 때보다도 정치적 파고가 높은 격변의 시기였으며 그 파고는 독재정권에 대한 야당의 항쟁이 거셀수록 더욱 높았던 시기였다. 서범석은 20대 왕년의 투지와 기백을 잃지 않았다. 그의 일관된 야당 생활이 입증하듯이 민권수호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 부동의 신념으로 투쟁했던 정치가다.
그는 은퇴 후 경기도 용인에서 영농생활을 하면서 유유자적한 세월을 보내는 한편 국회의원 동우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 참고자료 : 나(서범석)의 기자시절, 신문백년 인물사(편집인협회), 한국인물사(역사편찬회)

(김재희 전 전남일보 주필, ‘六峰 徐範錫’, 韓國言論人物史話-8.15前篇(下), 1992)

 

 

망국한(亡國恨)의 필봉, 사해(四海)를 누볐다… 초기 해외특파원 기사와 그 배경

그때를 말한다

송 사장(宋社長) 밀령(密令) 담배종이에 적어
장 총통(蔣總統)이 ‘동아(東亞)’에 감사패 보내
– 만보산(萬寶山)사건 전에 이미 교하(蛟河)에서 중국인들이 한국인을 학살한 사건이 있었으며 그때도 서(徐) 특파원이 취재했었다.

“31(三一)년 7(七)월 2(二)일 길림성(吉林省) 만보산(萬寶山) 지역에서 한국인 180(百八十)여 명이 중국인(中國人) 토지(土地)를 지나가는 수로공사(水路工事)를 하게 되자, 주로 한전이던 중국인(中國人)들은 밭에 피해가 온다고 들고 일어나 중국(中國) 관헌마저 동원하여 충돌하였지요. 사실 사건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었는데 장춘(長春) 신경(新京)에 있던 ‘동아(東亞)’와 ‘조선(朝鮮)’ 양지(兩紙) 겸임 특파원이던 김이삼(金利三)이 급전(急電)을 치고 중국인과 중국관헌에 의해 습격을 받았다고 전하자 ‘조선일보(朝鮮日報)’는 호외(號外)를 내는 등 대대적으로 이를 보도 했어요. 그러자 국내(國内)에서는 인천(仁川)을 비롯 진남포(鎭南浦) 등 곳곳에서 중국인을 박해하는 등 한중(韓中)간의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아일보(東亞日報)’에서는 당시 송진우(宋鎭禹) 사장(社長)이 김(金)씨의 전보를 받고 ”이것은 한중(韓中)간의 감정을 이간시키려는 일본(日本)의 침략적인 음모가 개재된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니 신중히 해야 한다“고 판단, 간단하게 보도하고 국경특파원(國境特派員)인 나를 서울 본사(本社)로 불러들여 진상조사를 하라고 지시했어요.”
그래서 그는 ‘조선일보(朝鮮日報)」특파원 신영우(申榮雨)씨와 함께 만보산(萬寶山)으로 향했다. 봉천(奉天)에 들린 그는 사태가 심각치 않다는 제1신(第一信)을 보내고 장춘(長春)에 도착했다.
“당시 일본인(日本人) 영향하에 있던 그곳의 조선인회(朝鮮人會)는 ‘조선일보(朝鮮日報)’의 신(申) 특파원은 측사처럼 환영하는 한편 나에게는 ”민족(民族)의 공기(公器)라면서 재만동포(在滿同胞)가 당한 일을 묵살하다시피 하니 그게 민족(民族)의 대변자(代辯紙)냐“고 심히 공박을 하더니 6,7명(六,七名)이 달려들어 스토브십으로 나를 때리기까지 했어요. 그래서 나는 ‘이들이 이렇게 나올 때는 이 사건의 배후에는 한중(韓中)간을 이간질시키려는 일본(日本)의 속셈이 있음이 틀림없구나’ 하는 생각이 더욱 굳어졌습니다.”
그래서 신중한 취재를 한 그는 그가 확인한바를 본사(本社)에 타전했다. 본사(本社)에서는 만보산(萬寶山)으로 들어갈 필요없이 ‘하르빈’으로 가 재만동포(在滿同胞)의 구수(驅遂) 상황을 취재하라고 타전했다.
‘동아일보(東亞日報)’는 서(徐)특파원의 기사와 함께 여러차례에 걸쳐 ‘이천만동포(二千萬同胞)에게 고합니다’라는 사설(社説)로 우리 국민을 진정시키기에 애썼다. 그 결과 중국인(中國人) 상인(商人)에게 눌리고 있던 종로(鍾路) 상인(商人)들이 주동이 되어 서울에서도 당장중국인(中國人)에 대한 대규모의 보복을 하려던 기세도 차츰 누그러들었다.
당시 상해(上海)에 있던 신언준(申彦俊) 특파원도 많은 기사를 보내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장개석(蔣介石)정부에서는 왕영보(汪榮寶) 주일공사(駐日公使)를 파견시켜 진상을 조사케 했어요. 그때 송 사장(宋社長)이 나를 불러 ”이번 사건은 일본인들의 정략적인 음모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왕 공사(汪公使)에게 알려야한다“면서 이 뜻을 꼭 전하라는 밀령(密令)(?)을 내렸어요. 그러나 일본인의 감시가 심해 왕 공사(汪公使)에게 그 뜻을 전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사를 마치고 귀임(歸任)중 신의주(新義州)를 통과하던 왕 공사(汪公使)의 열차(列車)에 탑승했다. 당시 외교관은 특별열차에 문이 달린 독방 객실(客室)을 사용했었다. 서(徐)씨는 담배를 싸는 얇은 종이에 한자(漢字)로 우리 뜻을 적어 손에 말아쥐고 노크없이 객실(客室)문을 열고 들어갔다. 깜짝 놀라는 왕 공사(汪公使)에게 “이것이 ‘동아일보(東亞日報)’가 주는 것이오”하고 손에 쥐어주고는 얼른 나와 버렸다. 그때 기차는 선천(宣川)역을 지나고 있었다.
“땀이 흐르는 것이 무슨 스릴러 영화의 주인공(主人公) 같이도 느껴졌습니다.”
이 같은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신중한 태도로 중국(中國)측에서는 일본(日本)의 진의를 알았으며 ‘동아일보(東亞日報)’에 특별한 호의를 갖게 되고, 뒤에 장개석(蔣介石)은 ‘동아일보(東亞日報)’에 감사패를 보내 왔다. 그리고 이일을 계기로 그때까지 별로 돕지 않던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를 특별히 후원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서범석, ‘그때를 말한다’, 동아일보 1970년 4월 1일자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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