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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동아일보 사람들- 백광남

Posted by 신이 On 11월 - 12 - 2018

 

백광남(白光男, 1935~1966)은 1960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1966년 10월 주월특파원으로 부임해 활동하다 11월 28일 월남(越南)의 베트콩 출몰지구인 디안 부근에서 취재를 마치고 사이공으로 귀환하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졌다. 동아일보 사상 두번째 순직기자로 당시 나이 31세였다. 월남 전에 종군한 한국기자 중 최초의 희생자이자 유일한 순직기자였다. 파월 된지 한달반도 채 안되는 짧은 기간에 눈부시게 활약하다 순직한 백광남은 그 후 화랑무공훈장을 추서받고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백광남(白光男) (신의주, 1935~1966) ▲ 60. 4 수습(편집국), 62. 4 퇴사. ▲ 63. 6 재입사, 기자(조사부, 방송뉴스부, 외신부), 주월특파원, 66.11 순직, 외신부장대우 추서.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월남전에서 백광남특파원 순직하다

본보는 국군의 월남전쟁 참여에 신중론을 폈으나, 일단 4만여명의 병력이 투입된 후로는 그들에 대한 거국적 지원을 주창하였다. 국군파월 전부터 사이곤에 거주하는 이지관을 통신원으로 위촉하여 현지에서 활약시켰는데, 본사에서 처음으로 종군한 것은 사회부의 김치석(金致淅)과 방송뉴스부의 박미정(朴美禎) 두 기자였다. 김?박 두 특파원은 65년 10월 3일 파월부대 선진인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와 더불어 미해군 수송선단편으로 출발하였으며 약1개월간 청룡부대의 초기작전을 취재하고 11월 14일 무사히 귀국하였다.

본보는 이어 65년 12월 17일에 이석열(李錫烈)이 월남주재 특파원으로 부임하여 사이곤에 상주하면서 주월남 한국군사령부를 비롯하여 맹호?청룡부대의 월남현장을 취재케 하였다. 이석열은 66년 10월 13일 그의 특출한 월남보도로 한국신문협회가 베푸는 한국신문상을 받았다.

66년 5월 12일 동아방송은 파월장병에게 레코드 보내기운동을 벌여 8월 1일까지 디스크 372매를 청취자로부터 기탁 받아 국방부 월남정훈섭외국장 김병률(金炳律)준장에 전달하였는데, 이 레코드는 주월사 예하 3개 군방송망을 통해 현지장병 및 교포들에 방송되었다.

66년 10월 1일에는 월남에서 늘어나는 본보독자의 수요를 따르기 위해 사이곤에 지국을 개설하여 현지교포 홍경한(洪京漢)을 지국장으로 위촉하였고, 66년 10월 6일부터 ‘월남판’을 만들어 본지의 지방란을 월남소식으로 충당하였다.

10월 14일에는 이석열특파원의 후임으로 외신부의 백광남(白光男)이 떠났고 10월 15일에는 사진부의 홍성혁(洪性革)이 뒤를 따랐다.

한편 10월에는 그 동안 벌여온 주월국군에 사과보내기 운동으로 갹출된 사과 1,700상자를 추석 선물로 미수송선단 웨나이호 편으로 보냈고, 12월에는 1,200상자를 새해 선물로 보냈는데, 이에 대해 청룡부대장 이봉출(李鳳出)준장은 ‘고국의 향기 가득한 사과를 받아 든 장병들은 고국의 사과밭을 연상하고 향수를 달래면서 맛있게 먹었으며 사기백배하여 맡은 바 임무에 더욱 힘쓸 것을 다짐했습니다’라는 감사편지를 본사에 보내 왔다.

1966년 11월 28일 오후 4시10분, 마침 본사 간부회의가 열리고 있었는데 백광남특파원 순직이라는 비보를 받았다. 청천의 벽력이었다. ‘떠난 지가 엊그제인데, 이게 무슨 소린가’ 본사의 누구도 중앙정보부의 통고를 믿고 싶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의 죽음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로 나타났다.

그는 11월 27일 디안 소재의 국군비둘기부대를 방문 취재하고 28일 오후 2시20분 모터 사이클로 단신 사이곤으로 귀환도중 적군 출몰이 심한 작전지구에서 월남 민간인 삼륜차와 충돌하여 순직한 것이었다. 이것이 월남전선에서 한국인 기자로는 최초이고 유일한 순직이었다.

1920년 북간도에서 홍범도부대와 김좌진부대에 전멸을 당한 일본군이 그 보복으로 북간도 일대의 우리 동포를 무차별 학살한다는 소식을 듣고, 본보 장덕준이 현지로 자원취재 갔다가 실종 순직하였었는데, 월남전선에서 백광남의 순직은 본보로서 두 번째 겪는 비극이었다.

12월 3일 오후 3시 백광남의 유해가 김포공항에 돌아왔고, 12월 5일 동아일보사장(葬)이 본사 앞에서 거행되었고, 이어 오후 3시40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본사에서는 그에게 외신부장대우를 추서하였고, 그 후 10년간 해마다 인상된 봉급을 지불하였다.

백광남은 한국외국어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하였고, 1960년 4월 본사 제2기 수습기자로 입사하였던 것이다. 아직 31세의 젊은 나이로 9대 독자였다. 유족으로는 젊은 부인과 두 딸을 남겼다.

백광남기자 장례위원장 고재욱사장은 요지 다음과 같은 애끓는 조사(弔辭)를 장례식에서 읽었다.

군(君)은 일찍이 한국전쟁에서 우리 민족의 가장 영용(英勇)한 아들 딸들과 자유우방의 청년들이 헤아릴 수 없이 피를 흘렸고 많은 외국의 종군언론인 또한 목숨을 잃었건만 우리 한국 보도진에서는 단 한 사람도 이 조국방위전선에서 피를 뿌린 이 없음을 상기하고, 이는 일신의 안위를 앞세우는 한국 언론인들의 불충실이라 개탄한 바 있었습니다. 월남부임에 앞서 군은 이 사실을 다시금 명감(銘感)하면서 전장서 취재하다가 이역(異域) 고혼(孤魂)이 된다 할지라도 언론인의 전당인 신문회관에 유영(遺影) 한 장 걸리면 그것을 영예로 알고 만족하겠노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나갔습니다.

드디어 현지에 도착한 군은 단시일내에 언어를 익히고 정확한 정세를 파악하는데 출중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전투의 생생한 실황을 보도하는데 발분망식(發奮忘食)하였으며, 이름 없는 한국인의 사절로 한월친선에 헌신하였으며, 모든 산과 들, 도처에 사신(死身)이 방황하고 있는 전장을 달리면서도 주저하는 일 없는 용맹성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러나 뉘라서 인간사를 예측하오리까. 마침내 운명의 1966년 11월 28일 오후 2시, 월남 ‘디안’지구에서 우리 한국군 용전의 모습을 취재하고 경각을 다투어 고국의 형제자매들에게 알리려는 일념에서 수도 ‘사이곤’을 향하여 단신 적의 소굴을 돌파하다가 31세의 젊은 나이로 순직하였습니다. 군이 쓰던 펜과 취재한 기사며 사진들은 붉은 피로 물들어 이 천추의 유한(遺恨)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일가 친지들이며, 공동의 과업, 공동의 목표를 함께 추구하던 동지들의 가슴 속을 내왕하는 비통한 마음을 어찌 필화로 이루다 표현할 수 있사오리까. 군이 남기고 간 한마디 한마디가 이렇게도 빠른 시일 안에 현실로 나타날 것을 어찌 상상인들 하였사오리까.

군은 9대 독자로 젊은 부인과 어린 두 딸을 남긴채 월남전선에 청춘을 바치고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군의 유지는 어김없이 계승될 것이며 역사의 증인은 군의 뛰어난 족적을 낱낱이 기록하여 후세만대에 전할 것이며 생에 대한 군의 성실한 자세는 영원히 이땅의 뜻 있는 가슴에 한 개 전형(典型)으로 살아 있을 것입니다.

 

 

본사(本社) 견습생(見習生) 합격자 발표(合格者發表)

김원기(金元基)(77)
이진희(李振羲)(140)
이원우(李元祐)(366)
백광남(白光男)(393)
정형수(鄭亨壽)(418)
신동호(申東鎬)(420)
이상 6명(以上六名)

우의 합격자(合格者)는 3월25일(三月二十五日)까지 호적등본(戶籍謄本)과 최종출신학교 졸업증명서(最終出身學校卒業證明書)를 본사 서무부(本社庶務部)에 持參(지참)할 것.

(동아일보 1960년 3월 16일자 1면)

 

 

백광남 특파원(白光男特派員) 향월(向越)
사이곤 상주(常駐)

본사 외신부(本社外信部) 백광남 기자(白光男 記者)는 약(約) 1년간(年間) 월남(越南)에 상주특파원(常駐特派員)으로 월남(越南) 정세(情勢)와 전황(戰況)을 보도(報道)하기 위해 14日 오후 2時 45分 NWA기(機)편으로 임지(任地)인 사이곤으로 향발(向發)했다.

(동아일보 1966년 10월 14일자 1면)

 

 

백광남(白光男) 본사 주월특파원(本社駐越特派員) 순직(殉職)

디안서 작전지구(作戰地區) 뚫고 귀환(歸還)중 윤화(輪禍)
사고(事故) 있은지 20分 후 접전(接戰)으로 국군 전사(國軍戰死)

【사이곤-29日 홍경한 지국장(洪京漢支局長)】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월남상주특파원(越南常駐特派員)인 백광남 기자(白光男記者)(31)가 28일 오후2시경 한국군(韓國軍)의 작전상황(作戰狀況) 취재를 마치고 디안에서 작전지구(作戰地區)를 뚫고 사이곤에 귀환 도중 불의(不意)의 교통사고(交通事故)로 절명, 순직(殉職)했다. 백특파원(白特派員)은 이날 디안에 자리잡고 있는 비둘기부대(部隊)를 방문, 비둘기부대에 관한 취재를 마친 뒤 송고(送稿)를 위해 오토바이를 몰고 사이곤으로 급히 돌아오던 중 월남(越南) 민간인(民間人) 차량과 충돌, 실신(失神)한 것을 잠복근무 중이던 한국군인(韓國軍人)이 발견, 비둘기부대 의무실에 이송(移送), 응급가료 했으나 곧 숨을 거두었다.

사고(事故)지점인 디안 교외(郊外)지역은 베트콩의 출몰지구인데 백기자(白記者)는 이날 위험을 무릅쓰고 단신(單身) 오토바이로 송고(送稿)차 사이곤으로 나오다 이 참변을 당한 것이다. 사고지점 근처에서는 백기자(白記者)의 사고(事故)가 있은지 20分뒤 한국군(韓國軍)과 베트콩이 접전(接戰), 국군(國軍) 1명이 전사(戰死)했다. 고(故) 백기자(白記者)(1935년생)는 신의주(新義州) 태생으로 한국외국어대학(韓國外國語大學) 노어과(露語科)를 졸업(卒業)한 후 60년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에 입사(入社), 외신부(外信部)에서 근무해왔으며 지난 10월14일 주월특파원(駐越特派員)으로 현지(現地)에 부임(赴任), 취재활동을 해왔었다.

백기자(白記者)는 한국인(韓國人) 종군기자(從軍記者)로서 월남(越南) 현지(現地)에서 순직(殉職)한 최초의 희생자가 됐다. 유족(遺族)으론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266의17 자택(自宅)에 미망인(未亡人) 구영순 여사(具永順女史)와 장녀 소영(昭英)(5)양, 차녀 화정(和正)(2)양.

(동아일보 1966년 11월 29일자 1면) 
 

 

백광남(白光男) 본사 주월특파원(本社駐越特派員) 순직(殉職)

디안서 작전지구(作戰地區) 뚫고 귀환(歸還)중 윤화(輪禍)
사고(事故) 있은지 20分 후 접전(接戰)으로 국군 전사(國軍戰死)

【사이곤-29日 홍경한 지국장(洪京漢支局長)】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월남상주특파원(越南常駐特派員)인 백광남 기자(白光男記者)(31)가 28일 오후2시경 한국군(韓國軍)의 작전상황(作戰狀況) 취재를 마치고 디안에서 작전지구(作戰地區)를 뚫고 사이곤에 귀환 도중 불의(不意)의 교통사고(交通事故)로 절명, 순직(殉職)했다. 백특파원(白特派員)은 이날 디안에 자리잡고 있는 비둘기부대(部隊)를 방문, 비둘기부대에 관한 취재를 마친 뒤 송고(送稿)를 위해 오토바이를 몰고 사이곤으로 급히 돌아오던 중 월남(越南) 민간인(民間人) 차량과 충돌, 실신(失神)한 것을 잠복근무 중이던 한국군인(韓國軍人)이 발견, 비둘기부대 의무실에 이송(移送), 응급가료 했으나 곧 숨을 거두었다.

사고(事故)지점인 디안 교외(郊外)지역은 베트콩의 출몰지구인데 백기자(白記者)는 이날 위험을 무릅쓰고 단신(單身) 오토바이로 송고(送稿)차 사이곤으로 나오다 이 참변을 당한 것이다. 사고지점 근처에서는 백기자(白記者)의 사고(事故)가 있은지 20分뒤 한국군(韓國軍)과 베트콩이 접전(接戰), 국군(國軍) 1명이 전사(戰死)했다. 고(故) 백기자(白記者)(1935년생)는 신의주(新義州) 태생으로 한국외국어대학(韓國外國語大學) 노어과(露語科)를 졸업(卒業)한 후 60년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에 입사(入社), 외신부(外信部)에서 근무해왔으며 지난 10월14일 주월특파원(駐越特派員)으로 현지(現地)에 부임(赴任), 취재활동을 해왔었다.

백기자(白記者)는 한국인(韓國人) 종군기자(從軍記者)로서 월남(越南) 현지(現地)에서 순직(殉職)한 최초의 희생자가 됐다. 유족(遺族)으론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266의17 자택(自宅)에 미망인(未亡人) 구영순 여사(具永順女史)와 장녀 소영(昭英)(5)양, 차녀 화정(和正)(2)양.

(동아일보 1966년 11월 29일자 1면) 
 

 

영생(永生)할 역사(歷史)의 파수병(把守兵) 백광남기자(白光男記者)는 죽어서 말한다

장한 죽음은 숱한 아쉬움을 남긴다. 그것이 공인(公人)으로서의 사명감(使命感)에 철(徹)한 보람있는 죽음일때 더욱 그렇다. 사지(死地)의 길목을 지켜보다 장엄하게 간 백광남특파원(白光男特派員)의 최후(最後)는 아마 그 표상(表象)이 될 것으로 믿는다. 누가 저널리스트를 일컬어 역사(歷史)의 파수병(把守兵)이라 했던지 초연(硝煙)속을 누비며 세계(世界)를 앞서가던 그, 비정(非情)의 이역(異域)을 달리며 인간(人間)의 단면(斷面)을 알려주던 성실(誠實)한 그는 벌써 우리 곁에 없다. 그러나 그가 젊음을 불태우던 이상(理想), 밤낮으로 뒤쫓던 숭고한 목표(目標)는 불사조(不死鳥)처럼 우리와 더불어 영생(永生)할 것이다. 이제 그의 편모(片貌)와 회상기(回想記), 그리고 그가 렌즈로 잡았던 마지막 사진을 모아 가누기 어려운 우리의 슬픔을 달래보고자 한다.

내가 마지막 본 백광남 기자(白光男記者)
박 대통령 방월시(朴大統領訪越時) 공동취재(共同取材) 회상기(回想記)

다음의 글은 지난 10월21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월남(越南)방문에 수행, 백광남(白光男)특파원과 6시간을 함께 보낸 본사(本社) 정치부(政治部) 남시욱 기자(南時旭記者)의 회상기(回想記)다.

이름하여 “내가 마지막 본 백광남 기자(白光男記者)-편집자주(編輯者註)

다낭 공항(空港)에서 상봉(相逢)
월남(越南) 수뇌진(首腦陣)과 접촉(接觸)

그날 우리는 함빡 소나기를 맞았다.
하늘에 햇볕이 난 채 월남의 소나기는 물을 뿌리듯 지나갔다.
종군기자(從軍記者) 휘장을 단 그의 군복은 땀에 절인 듯 했으나 열대의 찌는듯한 무더위 속에서 옷을 적신 소나기는 오히려 시원했다.
그는 그날따라 PRESS라는 유난히 큰 완장을 작업복 왼쪽 팔에 차고 티우 원수, 키 수상 등 월남정부 수뇌들과 가까운 자리에서 박대통령의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닐라 회담을 취재하러 가는 도중 대통령 일행과 함께 다낭 공군기지에 도착한 나는 금세 그가 주(駐)) 사이곤 한국특파원단의 풀기자로서 공항 램프 안까지 들어온 것을 알았다.
서울을 출발하던 그날 아침 다낭 기지에서 우리를 기다리겠다는 전보를 받은 나는 기쁨에 못 이겨 그와 함께 서로 손을 덥석 잡았으나, 박대통령의 도착광경 취재 때문에 우리는 서로 얘기를 나눌 틈은 없었다.

환영의식(歡迎儀式) 공동(共同)취재
통신방법(通信方法) 줄곧 걱정

그 헌칠하고 환한 얼굴은 고된 종군활동 때문인지 약간 수척해 보였으나,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밝고 착한 표정 그대로였다.
그는 비를 맞으면서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로 나와 함께 사진촬영에 열중했다.
다낭 기지에서 한·월 두 나라 원수들의 인사와 간단한 환영절차가 끝나자 우리는 약 20분후에 각각 다른 수송기편으로 퀴논의 맹호부대까지 갔다. 비행기는 베트콩의 지상포화를 피하기 위해 해안선을 타고 서서히 저공비행으로 날았다.
퀴논에서 대통령일행이 우리 장병들을 시찰하는 동안 그와 나는 비로소 나란히 걸으면서 얘기를 할 수 있었다.
나중에 사단본부에서 서울까지 직통전화가 열려 문제가 없어졌으나 우리는 줄곧 통신문제로 걱정을 했다. 그는 사이곤에서 텔렉스로 본사에 연락하는 것이 가장 빠른 통신방법이라고 해서 나는 잠자코 내가 쓴 기사원고를 그에게 맡겼다.
“월남종군은 서울에서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어려 운데…”
그는 한국기자들이 가진 여러가지 제약 때문에 월남에서의 취재는 상당히 고되다고 말했으나 그의 투지는 어느때보다도 왕성했다.

신형무기(新型武器) 보급(普及)강조
“평양냉면 먹고파”

“한국군 장병들에 대한 평가는 서울에서보다 이곳에 오니까 훨씬 더 좋더군. 미군 쪽에서는 가장 믿을 수 있는 군대고 월남인들에게는 가장 용감한 군대라는 거지. 그러나 우리 장병들에게도 M16 같은 신형무기가 빨리 전원에게 보급돼야지…”
그는 되도록 자세한 월남 정세를 내게 얘기해주려고 애썼다. 내가 “여기서 무슨 불편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껄껄 웃으면서 구수한 평안도 사투리로 말했다. “이렇게 더우니 냉면이 가장 생각나는데…. 얼른 우리도 통일이 돼야 진짜 평양냉면을 먹지…”(그는 신의주(新義州) 태생이다)

소나기에 옷 적시며
다낭에서 최후(最後)작별

이렇게 잠시동안이나마 우리는 화제의 꽃을 피우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본사(本社) 사진부의 홍성혁(洪性革) 기자가 달려왔다. 세 사람이 먼 남국(南國) 땅에서 만난 기쁨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홍 기자는 방콕아시아올림픽에 가는 도중 월남에 들렀던 것이다.
우리는 연거푸 오락가락하는 스콜을 맞으면서 옷을 흠뻑 적셨으나 세 사람의 ‘공동취재’는 한결 기분에 가벼웠다.
“역시 우기에 접어든 건가?”
“매일 이렇게 비가 내리지…”
그는 그날의 비 때문에 기온이 오히려 시원한 편이라고 내게 말했다.
취재를 다 마치고 우리가 미군버스 안에서 C레이숀을 한통씩 먹는 동안에도 비는 여전히 내렸다.
그는 사이곤에서 일찍 떠나느라고 그날 아침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했다.
“미군 보급품이라 레이숀이 맛있군…”』
무더위와 허기 때문인지 레이숀은 참 맛이 있었다. 그날 오후 늦게 어둠이 스며들 무렵 나는 그와 6시간동안의 공동취재를 끝내고 퀴논에서 헤어졌다. 퀴논에서 다낭까지 각각 다른 비행기로 가서 그는 사이곤으로, 나는 홍콩으로 가게 됐다.

부인(夫人)에게 문안(問安)글발
“서울서 만납시다”

퀴논 공군기지에서 발동이 걸린 비행기 승강구까지 나를 전송 나온 그는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내게 전해주면서 마닐라에서 잘 싸우라고 했다.
“부인에게 틀림없이 전해줄테니 부디 몸조심하게… 자 그럼 서울에서 만납시다.”
우리는 서로 손을 흔들었다.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이야! 이것은 바로 엊그제 같은 지난 10월 21일의 일이었다.
그가 비명에 젊음을 빼앗긴 소식을 라디오에서 듣고 나는 처음에는 도저히 정말 같지가 않았다. 그때 내가 받은 충격은 내 평생을 통해 도저히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제 나는 그의 헌칠한 키와 선량하기만 했던 그의 모습을 영영 볼 수 없게 됐다. 이미 타계(他界)한 그를 회상하면서 지금 이글을 쓰는 나의 아픔이여…

남시욱 기자(南時旭記者)

(동아일보 1966년 12월 1일자 4면) 

 

 

취재현장(取材現場)서 진 동아(東亞)의 기자(記者)들

동아일보사상 두번째 순직기자인 백광남(白光男) 기자는 66년 11월28일 월남(越南)의 베트콩 출몰지구인 디안 부근에서 취재를 마치고 사이공으로 귀환하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졌다. 당시 나이 31세로 월남전에 종군한 한국기자 중 최초의 희생자였다.
60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한 백(白) 기자는 66년10월 주월특파원으로 부임했었다.
백(白)기자는 순직 하루 전인 11월27일 사이공과 비헨호아의 중간인 디안 부근에 주둔한 한국군 비둘기부대를 방문, 비둘기부대의 활약상을 취재한 후 하루 묵고 28일 오후2시경 부대를 떠나 오토바이로 급히 사이공으로 돌아오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부근에서 잠복근무중이던 한국군 병사들에 의해 비둘기부대로 옮겨지는 도중에 숨졌다.
사고지점은 베트콩이 자주 출몰, 비둘기부대 병사들이 이들의 출몰에 대비해 항상 잠복근무를 하던 위험지구로 백(白) 기자는 기사를 서울 본사에 급히 송고하기위해 혼자 이곳을 지나다 변을 당한 것이다. 실제로 백(白)기자가 숨진지 20분후에 베트콩의 습격으로 한국군과의 접전이 벌어졌었다.
파월 된지 한달반도 채 안되는 짧은 기간에 눈부시게 활약하다 순직한 백(白) 기자는 그후 화랑무공훈장을 추서받고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동아일보 1983년 10월 10일자 5면)

 

 

동아일보 백광남 기자가 베트남전쟁 취재 현장을 돌아보고 있다. 백 기자는 1966년 11월 베트남에서 순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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