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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동아일보 사람들- 박팔양

Posted by 신이 On 11월 - 8 - 2018

 

박팔양(朴八陽, 1905~1988)은  배재고보와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4월 동아일보에 사회부 기자로 입사해 언론계에 발을 디뎠다. 앞서 1923년 5월 동아일보 지령 1000호 기념 현상공모에서 시 ‘신의 주(酒)’와 ‘봄비’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박팔양은 이상협 편집국장이 퇴진하면서 4월과 9월 두차례에 걸쳐 기자들이 조선일보로 옮겨갈 때 여기에 합류해 동아일보에서의 기자생활은 6개월에 그쳤다. 조선일보와 중외일보에 근무하면서도 활발하게 시를 썼다.

 

박팔양(朴八陽) (서울, 1905~ ) ▲ 1924. 4 기자(사회부), 1924.10 퇴사.〔시인〕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현상 당선 신시(懸賞當選新詩)
신(神)의 주(酒) 외(外) 1편(一篇) (賞乙)

昭格洞(소격동) 박승만(朴勝萬)

취(醉)하지안코는 못살세상(世上)이어든
사람아! 무엇에취(醉)할가 근심하여라
붉은술이잇스나 깨임을엇지하며
아름다운님이잇스나 사랑이길지못함을엇지하랴
아々! 사람아! 무엇에취(醉)할까근심하여라

세상(世上)술은 괴롭고취(醉)하지아니하니
사람아! 신(神)의궁전(宮殿)에붉은술을마시라
그리고깨이지안는 즐거움에취(醉))하여
너의적은입을 마음껏버리어 불보다 더뜨거운 너의노래를부르라

세상(世上)님은정(情)업고쌀々하니
사람아! 신(神)의궁전(宮殿)에 아름다운님을안으라
그리고끗업는즐거움에 취(醉)하여
너의간열핀팔다리를 기운(氣運)껏놀니어
끗々내 쉬임업는 너의춤을추라

 

봄 비

창(窓)밧 봄비에 버들이젓고
시름겨운졂믄이 턱을고이고 잇서라

재빗 하날이 집우에 무겁고
먼산 놉흔봉(峯)이 안개속에 자도다
참새떼 첨하끗헤 소리업시 모히고
시들한 봄비만 끗침업시 나려라

(동아일보 1923년5월25일자 5면)

 

 

三大事件에 苦心하든 이약이
朴八陽

新聞記者-더욱이 社會部記者란 언제든지 긴장한 공기 속에서 사는 사람임니다. 그들은 늘 자기자신이 전쟁 마당에 나선 兵卒이나 將校와 갓흔 몹시 긴장한 의식을 가지고서 그날그날 일어나는 복잡한 여러 가지 사건을 料理하여 나가는 것임니다. 따라서 『放心大敵』이라는 日本 격언은 군대에 적용되는 동시에 新聞戰線第一線에 나선 前衛隊 社會部記者에게 가장 적절히 적용될 말인 줄 암니다. 사실 선지자나 예언자가 안인 이상에 어느 날 어느 時에<29> 어떠한 天下를 놀래일 大事件이 이러날지 누가 엇떠케 암닛가. 그럼으로 사회부 기자야 社會的感覺이란 놈은 寢食중에라도 일시를 그의 신경에서 떠나지 안는 것이라고 말슴하여야 되겟지오. 만일 일시라도 방심하엿다가 자기가 맛흔 책임권 내에서 의외의 대사건이 이러나서 평소에 用意가 업섯든 탓으로 보기조케 실패를 하엿다면 그야말로 신문기자 일대의 恥辱이라 할 것임니다. 만일 그런때 日本武士道의 정신으로 본다면 맛당히 割腹自決로써 그 실패에 辯答할 밧게 다른 아모 도리도 업겟지요 엇떠튼 신문기자란 지독한 책임 관념 하에서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으로 보도기자의 고통이란 것도 대개 그러한 곳으로부터 이러나는 것이요 또 보도기자의 명예와 자랑이란 것도 또한 그러한 곳에 잇는 것이라 할 것임니다. 성의잇게 기민하게 그리고 기자로서의 인격을 손상하지 안이하고 자기 책임을 다 하는 사람=그런 사람이라야 훌륭한 기자라 하겟지요.

신문기자에 대한 서두가 너무 길어젓슴니다. 本誌 編輯者로부터 바든 부탁은 그러한 쓸데업는 말보다도 『新聞記者라는 직업을 가지고 그대가 어떠한 사건을 취급할 때에 제일 스라린 고통을 늣겻나?』 하는 문제엿슴니다.

그런데 필자로 말하면 원래 신문기자 생활 시작한지도 그리 오래지 안이하지만 또 근래에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사회부 외근보다는 내근 편집을 만히 하게 된 관계상 자연 對外部 社會的活動이란 것이 적엇섯슴니다. 그럼으로 그 방면이나 또 다른 방면이나 老將과 先輩가 만흔 오늘날 우리 신문사회에서 별 경험을 싸허 보지 못한 내가 이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 보아 들린 수작일는지 몰음니다. 그러나 외근 기자로 활동하여 본 동안에 당한 몃 가지 감상이란 것이 아조 업지는 안엇스닛까 그대로 써 보겟슴니다. 제일 첫재 외근 기자의 늣기는 고통은 불행하게 된 사람을 방문하는 때임니다. 가령 아들이 慘死를 하엿는데 그 어머니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잇서 그를 방문할 때라든지 혹은 남편의 불행에 울고 잇는 부인을 방문하고 비애에 잠겨 잇는 이를 붓잡고서라도 념치 업시 말을 물어 보아야 하게 된 때라든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방면으로 불행한 일을 당한 이들을 방문할 때임니다. 그런때 신문기자란는 직업이 눈물 잇고 피 잇는 멀정한 사람을 鐵面皮를 만들어 줌니다. 그저 눈 꽉 감고 물을 말 못 물을 말 죄 뭇고야 맘니다.

내가 경험한 일 중에는

-(以下 60행 삭제-원문)-<30>

그러고 또 한 가지 외근 기자에게 고통되는 것은 『時間 대이는 고통임니다. 어떠한 새로운 사실을 보도하는데 이것이 오늘 신문에 들어가지 안이하면 來日 신문으로 들어가게 된다=즉 滿 하로를 늦게 보도가 된다. 그것은 시각을 다투는 신문기자에게 잇서서 실로 중대한 문제임니다.

年前 洛東江大洪水 때 龜浦에서 本社=지금은 中外日報에 잇슴니다만은 그때는 朝鮮日報에 잇섯슴니다.=이 電報를 노을 때 시간 대이는 고통을 늣겻슴니다. 그때 龜浦驛 건너편의 大渚島의 촌락의 큰 제방이 문허저서 거의 물 속에 잠긴 형편에 잇서 그 섬과의 교통은 끈허지고 시체 200개가 떠나려왓다는 풍문까지 잇든 때라 나는 그 眞否를 알려고 배를 타고 거세인 洛東江의 탁류를 헤치며 向島에 건너가서 大渚島를 바라보앗슴니다. 물론 거리가 너머 멀어서 肉眼으로는 잘 보이지 안엇슴니다. 그리자 조곰 잇댜가 大渚島로부터의 최초의 배가 와서 大渚島이 避難民은 한 사람도 죽지 안엇다는 확실한 보고를 하엿슴니다. 大渚島 3000 주민 全滅이라고 몹시 근심하고 잇든 向島 사람들은 모다 깃버하엿슴니다. 나는 그 사실을 그날 夕刊에 보도하려고 急急히 고가의 賃金을 주어 배 한 척을 사서 『어서어서!』 재촉하며 일변 시계가 오후 한 시 반이나 된 것을 노려보면서 洛東江을 건너 龜浦에 와서 郵便局까지 驅步를 하야 郵便局에서 『生死不明이든 大渚島의 三千住民 全部生存한 것으로 判明』 이라는 電報를 노앗슴니다. 그날 오후 세 시 본사 사회면 締切(시메끼리) 前에 이 전보가 드러가서 그날 신문에 큰 활자로 그 사실이 大書特書된 것을 수일 후 釜山 어늬 旅館에 편히 드러누어서 볼 때에 당시에 넙적 다리까지 빠지는 물구덩이 속으로 단이며 또 시간 대이느라고 고생하든 것을 회상하고 엇떠한 愉快를 늣긴 것은 물론 임니다.

쓸데업는 이약이가 길어젓슴니다만은 이러한 고생 외에 신문기자에게는 좀 다른 의미의 고통이 이슴니다. 신문기자라면 刑事 이상으로 실혀하는 사람과 대하는 고통이라든지 소위 高官이란 이들을 맛나면 그들의 거드름 빼는 모양을 보는 고통이라든지 그 외에도 무엇을 알려는데 알 수 업는 때라든지 자기책임권 내에서 큰 실패를 한 때라든지 말슴하랴면 한이 업슴니다.

그러나 괴로움이 만흔 대신에 愉快한 때도 잇는 것만은 또한 사실임니다.

그러나 나도 신문 기자라면 차차 엇전지 실症이 날 때가 만히 잇슴니다.<31>

(박팔양, ‘各新聞·社會部記者의 苦心談, 날마다 새로나는 소식은 엇더케 모흐나’, 별건곤, 1927년 1월호, 29~31쪽) 

 

 

1905∼1988. 시인·평론가·신문기자.
여수(麗水), 여수산인(麗水山人), 김니콜라이

1905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했다. 1916년 제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20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0년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 1923년 졸업했다. 19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신의 주(酒)」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경성법학전문학교 재학 시절 정지용(鄭芝容)·박제찬 등과 함께 동인지 『요람』을 간행했다. 1924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근무했고, 1925년 서울청년회에 가입했다. 1926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담했다. 1928년 『중외일보』·『조선중앙일보』의 사회부장을 지냈으며, 1934년 ‘구인회’에 참여했다. 이어 만주로 건너가 친일신문인 『만선일보』의 사회부장 및 학예부장을 지내다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194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했고, 조선문학가동맹에도 가입했다. 그리고 평안북도 당위원회 기관지 「바른말」 신문사 편집국장,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을 지냈다. 1946~49년 당중앙위원회 기관지인 『정로』의 편집국장 및 그 후신인 『노동신문』의 편집국장과 부주필 등을 지냈다. 1949년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 신문학과 강좌장이 되었으며, 1950년 6·25전쟁 초 종군작가로 활약한 공을 인정받아 국기훈장 3급을 받았으며, 1951년 김일성종합대학에 복직했다. 1956년 조선작가동맹 부위원장, 1957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58년 조소친선협회 중앙위원을 역임했다. 1966년 반당종파분자로 숙청되어,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는다.

(‘박팔양[朴八陽]’,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박팔양은 1924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이후 12년 동안 일제강점기의 거의 모든 한글신문에서 활동했다. 신문사들의 경영부실이나 내분이 영향을 주었고 부당한 현실에 맞섰던 그의 성향도 작용해 여러 신문사를 옮겨 다녔던 것이다. 그럼에도 박팔양이 기자와 편집자로서 식민지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언론활동을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1937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만주국기관지 <만선일보>에서 근무했다. 광복 후에는 북한으로 가서 <로동신문>에서 활동했다. 그가 재직했던 <동아일보>, <만선일보>, <로동신문> 세 신문의 이름만으로도 그의 삶이 얼마나 크게 요동쳐 왔는지를 알 수 있다. <만선일보>와 <로동신문>에서의 활동으로 인해 그는 ‘친일’과 ‘월북’이라는 두 가지 멍에를 짊어지게 되었다. 박팔양은 좌와 우, 항일과 친일, 남과 북, 숙청과 복권 등 식민지와 분단체제 속에서 파란만장하고 복잡다단한 삶을 살았다. 만주행이나 북한행은 그에게 ‘어려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이자 ‘새로운 희망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현실에서 나름대로 이상을 추구하다 좌절을 경험하기도 했던 것이다.

(…)

2. 서울시기 전기(1924-1930) : 잦은 신문사 이직과 비판적 언론활동
박팔양은 1924년 3월에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조선신문> 1924.3.21, 3면), 바로 다음 달인 1924년 4월에 <동아일보>에 입사하며 언론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배재고보 동기로 훗날 카프를 이끌었던 김기진이 적극적으로 시도했지만 실패했을 정도로 당시 <동아일보> 입사는 매우 어려웠다(김팔봉, 1978, 211-212쪽). 박팔양이 만 19세의 나이로 <동아일보>에 입사했던 배경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923년 5월에 <동아일보> ‘현상당선 시’를 게재한 이후 여러 편의 시를 실었던 것이 발탁의 배경이 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4) 또한 입사 이후의 활동을 보면 이상협과의 인연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의 <동아일보> 재직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 1924년 4월에 송진우가 친일파 박춘금의 협박에 굴복한 것을 계기로 사원들의 개혁운동이 일어났다(장신, 2006, 252-256쪽). 경영진과 대주주들은 사원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1924년 5월 17일에 일부 사원과 간부가 퇴사했다. 박팔양도 입사 6개월만인 1924년 10월에 <동아일보>를 퇴사했다(<동아일보사사> 권1, 423쪽). 입사한 지 얼만 되지 않아 개혁운동 과정에서 퇴사했던 것은, 박팔양이 신문사 내의 불합리한 상황에 맞서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것을 의미했다. 박팔양은 <동아일보> 퇴사 직후 혁신된 <조선일보>로 옮겨갔다. <동아일보>의 개혁운동 과정에서 이상협 계열의 기자들이 퇴사해 <조선일보>로 옮길 때 함께 이직한 것이다(박용규, 2009). <동아일보> 측에서도 박팔양 등의 퇴사에 대해 ‘이상협 계열이 이탈’한 것이라고 평가했다(<동아일보사사> 권1, 235쪽). <조선일보>는 1924년 9월에 신석우가 송병준으로부터 인수하면서 민족주의 진영 신문으로 혁신되었고, 초기 편집진은 <동아일보>에서 퇴사한 이상협계 기자들과 홍증식을 통해 입사한 화요회계 기자들로 구성되었다. (…)

(박용규 상지대 교수, ‘문인기자 박팔양의 생애와 언론활동- <동아일보>에서 <로동신문>까지‘, 한국언론학보, 2017년 61권 6호, 87쪽)

 

 

자연(自然)과 생명(生命) (一)
전원예찬(田園禮讃)의 일절(一節)

박팔양(朴八陽)

(一)
푸른 한울과 힌구름.
넓은 드을과 맑은 시내.
그것은 시인(詩人)이 항상(恒常) 놀애하는 아름다운 정경(情景)의 한 구절(句節)이으 화가(畵家)가 즐겨 그림 그리는 조흔 풍경화(風景畵)의 일폭(一幅)이다 비단(非但) 푸튼 한을 힌구름과 넓은 드을 맑은 시내 뿐이아니라 춘하추동사시(春夏秋冬四時)를 통(通)하야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부절히(不絕)히변화(變化)하는 자연(自然)의 경개(景槪)는 그것이 폐허(廢墟)에서 보는 녀름의 황혼(黃昏)이거나 정원(庭園)에서 보는 가을의 명월(明月)이거나 또 혹(或)은 치운 겨을밤의 눈보라 일은 봄 야반(夜半)의 폭풍(暴風) 모도가 읇조릴만하고 그림 그릴만한 풍경(風景)이오 그러치 아니한 것은 하나도 업슬것이다.
그러나 자연(自然)은 예술가(藝術家)에 잇서서만 귀중(貴重)한 것이 아니다 인생(人生)이란 그것이 이미 자연(自然)의 일부분(一部分)인 이상(以上) 자연(自然)은 실(實)로 우주(宇宙) 그것인 동시(同時)에 인생(人生) 그것이오 인생(人生) 그것인 동시(同時)에 실(實)로 전생물계(全生物界)의 유기체(有機體)들이 갓는바 생명(生命) 그것일 것이다. 목연(目然)이 업는 곳에 생명(生命)이 업다. 보라 태양(太陽)이 업스면 공기(空氣)가 업스면 물이 업스면 또 흙이 업스면 그 무슨 생명(生命)이란 것이 잇슬수 잇겟는가.
그러타! 자연(自然)은 생명(生命)이다. 자연(自然)을 찬미(讃美)하자. 빗나는태양(太陽)을 신선(新鮮)한 대기(大氣)를 맑은 물을 향기(香氣)로운 흙을!거릿김 업시 예찬(禮讃)하자.
나는 지금 이러한 견지(見地)에 서서 우리들의 도회(都會)와 전원(田園)을 바라본다.
×
도회(都會)!사람과 사람이 개아미 색기 끌틋하고 골목과 골목이 바둑판 줄가티 종횡(縱橫)으로 뚤린 곳에 아름다운 근대문명(近代文明)의 꼿이 피어잇다. 화려(華麗)한『떼파|트멘트스토어|』백주(白晝)를 비웃는 수천촉(數千燭) 전등(電燈) 구비(具備)한 교통기관(交通機關) 라듸오 오폐라 시네마 거긔에는 진실(眞實)로 사람들의 행복(幸福)이 길바닥의 죠약돌가티 데굴데굴 굴러 잇슴즉하다.
그러나 우리는 도회(都會)라는 그곳에서 데굴데굴 굴러 잇슴즉한『행복(幸福)』대신에 실상 무엇을 보는가 거긔에는 매연(煤煙)에 가리워 암황색(暗黃色)이 된 음울(陰鬱)한 태양(太陽)이 잇다. 무수(無數)한 사람들이 마섯다가 배아터 노흔 하수도(下水道)물가티 불결(不潔)한 空氣(공기)가 잇다. 오물(汚物)로 더럽힌 식컴언 냇믈이 잇다.『세멘트』와『애쓰팔드』미테 그 향기(香氣)로운 냄새를 유폐(幽閉) 당(當)한『흙』이 잇다. 이리하야 도회(都會)사람들은 태양(太陽)의 유쾌(愉快)히 미소(微笑)하는 얼굴을 숩속나무 닙새속에서 속삭어리는 미풍(微風)의 숨소리를 또 지줄대며 흘러나려가는 시냇물의 경쾌(輕快)한 발자최를、무성(茂盛)한 풀과 오색(五色)가지 꼿을 복도드고 길르는 옥토(沃土)의 인자(仁慈)를 모르고 니저버리고 빼앗기고 살아가는 반면(反面)에 폐병(肺病)과 신경쇠약(神經衰弱)과 우울증(憂鬱症)과 권태(倦怠)와 미관(悲觀)을 어더가지고 회색(灰色)의 인생(人生)을 저주(咀呪)하면서 잇다.
이것은 결(决)코 나의 과장(誇張)이 아니다. 사실(事實) 부자연(不自然)한 도회(都會)의 강렬(强烈)한 색채(色彩)와 착잡(錯雜)한 소음(騷音)과 또 못된 취기(臭氣)와 몹시 감각적(感覺的)인 분위기(雰圍氣)에 말초신경적(末梢神經的)이 아니된 근대(近代) 도회인(都會人)이 어대잇스며 신경쇠약적(神經衰弱的) 증후(症候)업는 도회인(都會人)이 멧사람이나 되는가.
오오 자연(自然)을 이저버린 문명인(文明人)의 불행(不幸)이여 병(病)들은 도회인(都會人)의 비애(悲哀)여 만약(萬若) 생각하는 사람일 것 가트면 이 불행(不幸)과 이 비애(悲哀)를 진심(眞心)으로 탄식(嘆息)할 것이다. 그리하야 장차(將次) 인조인간(人造人間)이 횡행(橫行)하려고 하는 시가(市街)를 향(向)하야 파멸(破滅)되어가는 도회인(都會人)의 영육(靈肉)을 슯허하는 통곡(痛哭)의 소리를 올릴 것이다.

(동아일보 1928년 8월 8일자 3면)

 

자연(自然)과 생명(生命) (二)
전원예찬(田園禮讃)의 일절(一節)

박팔양(朴八陽)

그러나 여긔에 전원(田園)이 잇다! 진실로

푸른 한울과 힌구름 넓은 드을과 맑은 시내 백양(白楊)나무숩 우거진 그곳에 사람사는 촌락(村落)이 잇다. 봄이면 산(山)에 개나리 진달래가 픠고 녀름이면 맑은 시냇물 속에 고기가 놀고 가을이면 갈대밧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일고 겨을이면 사람들이 한가(閑暇)하야 동리 큰사랑에 모혀 이야기책 보는 곳이다. 봄에 씨 뿌리고 녀름에 김 매고 가을에 거두어서 겨을에 먹는 그들의 물질생활(物質生活)이 물론(勿論) 그리 풍족(豊足)한 것은 못된다. 밥은 조밥 물은 냉수(冷水) 그리고 일은 오륙월(五六月) 폭양(暴陽)미테 땀 흘리는일 그러나 그들은 자연(自然)에게서 은혜(恩惠)로운 선물을 만히 밧는다.

첫재 자연(自然)은 그들을 건강(健康)케 한다. 소독(消毒)을 몰르는 그들에게 자연(自然)은 태양광선(太陽光線)을 보내며 주사(注射)와 의약(醫藥)을 몰르는 그들에게 자연(自然)은 신선(新鮮)한 공기(空氣)와 물로써 무병장수(無病長壽)의 법(法)을 아르키며 정신분석학(精神分析學)과 심령요법(心靈療法)을 몰르는 그들에게 자연(自然)은 그 변화무궁(變化無窮)한 전원(田園)의 경치(景致)로 그들의 마음과 정신(精神)을 깃브게 한다. 가장 과학적(科學的)인 의사(醫師)가 가장 난치(難治)의 모든 환자(患者)에게 전지요양(轉地療養)과 자연치료(自然治療)로써 요법(療法)의 제일의(第一義)를 삼는 것을 보라. 아지못하는 중(中)에 밧는 자연(自然)의 은혜(恩惠)가 과연(果然) 얼마나 큰 것인가. 이리하야 전원(田園)의 그들은 육신(肉身)으로나 정신(精神)으로나 건전(健全)한 생활(生活)을 영위(營爲)하고 잇다.

그러나 오해(誤解)하야서는 아니 된다. 내가 이러케 말하는 것은 결단(决斷)코 현재(現在)의 농촌(農村)-지주(地主)에게 여지(餘地)업는 착취(搾取)를 당(當)함으로 말미암아 무수(無數)한 소작인(小作人)이 아사선상(餓死線上)에서 방황(彷徨)하고 잇는 현재(現在)의 농촌(農村)을 암연(暗然)히 시인(是認)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케 말하면 농촌(農村)의 소작인층(小作人層)과 가티 도시(都市)에도 소수(小數)『뿌르조아-지』에게 여지(餘地)업시 착취(搾取) 당(當)하고 잇는 무수(無數)한『푸로레탈리아-트』가 잇다. 그것들은 당면(當面)한 우리의 가장 중대(重大)한 생활(生活)의 문제(問題)이니 여긔에서 말하기에 넘우나 크나큰 문제(問題)가 된다. 이는 도시(都市)니 전원(田園)이니 할 것 업시 착취(搾取)와 피착취(被搾取)의 관계(關係)로 조성(組成)되어 잇는 자본주의(資本主義)와 밋그 현단계(現段階)의 근본적(根本的) 구명(究明), 비판(批判)으로부터 출발(出發)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문제(問題)다. 그러나 그 결론(結論)될바를 여긔에서 말하려는 것이 이글의 목적(目的)이 아닌 까닭에 나는 지금 그 문제(問題)를 가지고 말하고 십지안타.
×
녀름이다. 맑은 시냇물 홀으는 고요한 전원(田園)의 녀름이다. 자연(自然)의 은총(恩寵)에 감사제(感謝祭)를 지내자. 갑 업는 보배가 흐터저잇는 전원(田園)을 예찬(禮讃)하자. 소란(騷亂)과 진절머리와 두통(頭痛)이 잇는 도회(都會)로부터 해방(解放)되어 전원(田園)의 넓은 드을 푸른 풀밧우에 뒹그러보자. 모든 일답지 아니한 적은 일, 감정(感情)답지 아니한 소소(小小)한 감정(感情) 근심답지 못한 신경과민(神經過敏)에서 생기는 적은 근심을 전원(田園)의 넓은 드을 푸른 한울 미테서 불살러 버리자. 그때에 자연(自然)은 우리에게 생장(生長)을 놀애하는 숩과 풀과 과수(果樹)나무와 곤충(昆虫)을 보이면서 이러케 속삭일 것이다.『자연(自然)을 찬미(讃美)하라! 생명(生命)을 찬미(讚美)하라! 너이들 자신(自身)의 보배로운 생명(生命)을 지키기 위(爲)하야 굿세게 싸울『힘』을 이곳에서 길러라! 아츰의 청신(淸新)한 공기(空氣)에서 저녁의 아름다운 새암물(泉)에서』

1928년 8월(一九二八年八月)

(동아일보 1928년 8월 9일자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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