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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동아일보 사람들- 박원근

Posted by 신이 On 11월 - 8 - 2018

 

박원근(朴原根, 1932~2015)은 경남 남해군에서 태어나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59년 동아일보 수습기자 1기로 언론계에 입문했다. 동아일보에서 사회부와 정치부 기자로 활약했고 사회부장과 지방부장을 지낸 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해직됐다. 경북 상주로 낙향했다가 이후 국민일보 초대 편집국장과 경인일보 주필 등을 역임했다.

 

박원근(朴原根) (서울, 1932~ ) ▲ 59. 4 수습(편집국), 기자(사회부, 정치부), 사회부차장, 지방부장, 사회부장, 지방부장(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수습기자의 공모, 인재의 규합

이 무렵 본사는 편집제작진의 인력수급에 획기적 조치를 단행하였다. 즉 59년에 시작한 수습기자의 공모와 훈련이었다. 그때까지 결원이 생기거나 또는 증원의 필요가 생기면 타사에서 이미 훈련된 인재를 끌어오든가, 아니면 공개시험 없이 우수하다고 인정되는 자를 입사시켜 훈련시키는 관례였다.

그러나 그런 미온적인 방법으로는 급속도로 신장되는 사세에 호응할 수 없었고, 또한 50년대 후반기에 타사가 수습기자제도를 도입하여 우수한 젊은 인재를 직접 훈련하여 소속의식을 강화함으로, 본사로서는 타사에서 모집훈련한 기성기자를 끌어들여‘우리 기자’를 만드는 안이한 관행에 만족할 수 없었다.

1959년 3월 8일 실시된 제1회 수습기자시험은 약간명 모집에 무려 325명이 모여들었는데, 12명을‘수습사원’으로 뽑아 1년간에 걸친 본사 수습훈련 끝에 1960년 4월 1일로 본사기자로 발령난 것은 여규식(呂圭植) 박경석(朴敬錫) 박원근(朴原根) 남시욱(南時旭) 김재관(金在灌) 박동은(朴東銀) 장행훈(張幸勳) 이현석(李鉉奭) 남선우(南宣祐) 권영자(權英子) 등이었다. 이들은 서울대학 등 일류 명문대학을 나온 준재(俊材)들이었는데 박동은, 권영자등 2명의 여성합격자들이 남성본위의 신문사 편집국에 진출하여 이색을 띠었다. 이어 1960년 2월 29일에 두 번째로 수습기자를 공모하였는데 이번엔 인력의 수급계획에 따라 정형수(鄭亨壽) 이진희(李振羲) 신동호(申東鎬) 백광남(白光男) 김원기(金元基) 등 5명이 합격하였는데 응모자 수는 529명이었으므로 100대 1의 경쟁률을 보여 동아일보에 입사한다는 것은 국가고시와 한국은행 입사시험과 더불어 일류대학 출신들이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어려운 경쟁시험이라는 평가를 받기 시작하였다.

(…)

사카린 밀수사건을 파헤치고

당시 국내 최대의 재벌 삼성 산하 한국비료(韓國肥料)가 저지른 이른바 사카린 밀수사건은 60년대를 통틀어 소란하고 추악한 사건의 하나였지만, 집요하고 강력한 본보의 집중보도가 아니었던들, 과연 그렇듯 국민적인 관심사가 될 수 있었고, 그렇듯 정치적인 사건으로 확대되어 국무위원이 총사퇴하고, 밀수의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갔으며, 삼성이 마침내는 건설중인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했을까.

한비(대표 이병철)가 일본으로부터 대량의 공장건설 자료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공장건설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카린 원료 OTSA 58톤을 일본의 미쓰이물산(三井物産)에서 사들인 것은 1966년 5월초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비건설에 소요되는 차관자금으로 결제된 것이다. 그리고 삼성측은 밀수한 OTSA의 일부 1,403포를 사카린 메이커인 금북화학(錦北化學)에 매도하였는데, 이 모든 것이 드러나자 한비 간부사원 1명이 2천만원의 벌과금을 물게 함으로써 사건을 은폐하였다. 모두 5월에 일어났던 일이고, 그 후 경제계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 사건이 신문에 활자화된 것은 9월 15일의 일이었다. 재벌이 엄청난 밀수를 감행하고도 진상을 은폐할 작정이냐라는 국민감정이 순간적으로 폭발하였다. 2,000원어치의 외래품을 팔았다고 잡아가는 당국이 이 어마어마한 밀수비리를 4개월간이나 덮어 두었다는데 분노의 소리가 폭발하였다. 본보는 1면과 사회면의 보도 그리고 논설을 통해 국민여론을 반영하여 사회정의의 구현을 재촉하였다.

지상폭로 4일만에 박대통령은 대검에 지시하여 삼성재벌 밀수를 전면수사하라고 명령하였다. 국회에서 이병철을 즉각 구속하라는 열띤 추궁이 벌어지는 가운데 당사자 이병철은 9월 22일 한국비료를 국가에 바치는 동시에 자기가 대표로 돼 있는 중앙매스컴(중앙일보?동양라디오방송?동양TV방송) 및 학교법인을 비롯한 모든 사업경영에서 손을 떼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미리 준비된 성명으로 ‘저는 저로 인하여 야기된 사회의 물의에 대해 새삼 사과의 말씀을 드리는 동시에 어떠한 문책이라도 그것을 달게 받겠다’고 말하고 ‘특히 한국비료는 저 혼자만의 역량으로서는 도저히 순조로운 건설을 담당할 수 없다는 것을 이번 불미로운 사건으로 인해 절감하게 됐으며 연일연야 고민 끝에 이를 국가에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그의 심경을 밝혔다.

그는 또한 모든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고 말했으나 밀수사건에 관여했느냐의 질문에 ‘여러분의 상식에 맡긴다’고 말하였다.

이병철의 사과성명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가라앉지 않았다. 간단히 수습될 수 없는 일이었다. 대검이 다시 전면수사를 전개하고 국회가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해서 진상조사에 나섰다. 그러나 정부는 시종 삼성밀수를 감싸는 듯한 인상을 주자 김두한(金斗漢)의원의 오물투척사건이 일어났다. 즉 9월 22일 국회본회의에서 정부측 답변이 시종 책임회피로 일관하자 국무위원석에 오물을 가져다가 뿌린 것이다.

이 전대미문의 사건에 총리 정일권(丁一權)이하 국무위원이 총사직하고 그 결과로 밀수사건에 책임 있는 재무부장관 김정렴(金正濂)과 법무부장관 민복기(閔復基)가 인책사임하였다.

그러나 국회와 대검 조사과정에서 삼성측은 필사적 반격으로 나섰다. 한비와 삼성은 관계 없다는 것이고 한비대표이자 삼성총수 이병철은 무관하고 한비상무 이창희(李昌熙) 이일섭(李逸燮) 등의 개인소행으로 돌려 버렸다. 검찰 역시 이 두 사람만 기소하고 이병철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다’는 것으로 참고인 심문에 그쳤을 뿐이다.

(동아일보사사 3권, 동아일보사, 1985)

 

 

삼성재벌(三星財閥)서 밀수(密輸)
건설자재(建設資材) 가장(假裝) 사카린 2천(千)부대

판본(阪本)방적의 밀수사건에 이어 이번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재벌(財閥)이라는 삼성재벌(三星財閥)에서 ‘사카린’을 대대적으로 밀수한 사실이 드러나 일반의 적지않은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한국비료(韓國肥料)가 건설자재로 가장 사카린 2천부대(한부대42㎏)를 밀수입한 것을 뒤늦게 발견한 부산세관은 그중 1천5백부대를 몰수하고 벌과금 2천만원을 부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사건이 밝혀진 15일 재무부세관국에서는 사건내용을 모른다고 잡아떼고 있어 크게 주목되고 있다.

한편 울산(蔚山)세관에 들어온 한국비료 시운전용 포리에치렌 합성수지 1만부대(50㎏들이 1억원)에 대해서는 아직 통관하지 않고 있으며 밀수입 여부에 대해서는 판가름을 내리지 않고 있다.

(동아일보 1966년 9월 15일자 7면)

 

 

통관(通關)안된 합성수지(合成樹脂)도
시중(市中)에 일부유출(一部流出)

[釜山] 한국비료에서 얼마전 합성수지 폴리에틸린 1만부대(50㎏들이 1억원 상당)를 시운전용으로 수입, 울산(蔚山)세관에 통관도 안된 채 보관중이었는데 경찰은 이 폴리에틸린이 대량으로 시중에 유출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형사대를 동원, 울산(蔚山)에서 부산(釜山)으로 운반중인 트럭을 검색한 끝에 30부대(싯가 30만원 상당)를 적발함으로써  또 하나의 의혹이 짙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번 한국비료의 밀수사건이 표면화된 것은 한국비료가 수입한 이 합성수지를 훔쳐낸 도둑 때문이었으니 사건은 기묘한 동기에서 터진 셈이다.

지난 7월29일 한국비료의 면세수입품 폴리에틸린 일부가 도난당한 사실이 수사기관에 알려지자 피해자인 한국비료는 지나치게 당황, 쉬쉬하며 도난당한 사살을 잡아뗐다.

그 뒤 훔친 물건을 부산(釜山)으로 운반하던 장물아비가 경찰에 체포되고 현물까지 압수되자 한국비료는 즉시 현물을 찾아가고 부산(釜山)세관은 비밀히 통고처분만하고 그 사실을 감춰 왔다. (박원근기자)

(동아일보 1966년 9월 16일자 1면)

 

 

어물쩡의 연속(連續)… 삼성밀수(三星密輸)와 처리(處理)의 시말(始末)

교포반입재산(僑胞搬入財産)으로 속여
일본기항(日本寄港)때 몰래 실어
울산세관(蔚山稅關)에선 출고사실(出庫事實)조차 몰라

재벌들의 밀수, 특히 삼성(三星)재벌의 사카린원료밀수사건은 쉽게 말썽의 꼬리를 사릴 것 같지 않다.

우리나라 산업부흥을 표방하고 나선 판본(阪本)방적의 테토론밀수사건, 경남(慶南)모직의 원모부정수입사건과 곁들여 뒤늦게나마 노출된 삼성(三星)의 밀수사건은 정부의 밀수 강경정책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짓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나라 제일의 대재벌이라는 점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모으게 된 것이다.

이번 사건은 이러한 사회적인 문제 외에도 사건자체의 의혹과 이에 대한 처리 및 사건이 주는 교훈 등에 있어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사건은 울산한비(蔚山韓肥)를 건설중인 삼성(三星)재벌이 지난 5월5일 일본(日本)화물선편으로 건설자재를 들여 올때 사카린원료인 OTSA 2천4백부대(싯가5천만원)를 밀수입, 그중 1천4백2부대는 금북(錦北)화학에 팔렸는데 이 물품은 동회사 창고에서 적발되고, 나머지는 한비(韓肥)의 창고에서 임의제출 몰수되었다는 것이 그 줄거리다,

이 원료는 시멘트부대와 비슷한 부대에 넣은 것으로 한비(韓肥)가 미국에서 건설자재를 수입할 때, 도중기항지인 일본(日本)의 동양화학에서 밀수입, 시멘트와 함께 하역하여 그들의 타소장치장에 입고 시켰다가 몰래 빼돌려 금북(錦北)에 일부를 팔려다 적발된 것이라고 세관은 밝혔다.

이 원료는 아무런 수입면장 없이 울산(蔚山)세관 몰래(?) 반출해낸 것으로 울산(蔚山)세관의 책임 또한 따져야할 것 같다.

지난 5월24일 금북(錦北)화학 창고에서 이를 적발했을때 부산(釜山)세관은 이 원료를 화주불상으로 기록했었고, 뒷날인 5월25일 한비(韓肥)의 대표상무 이일섭(李逸燮)씨가 자수함으로써 이(李)씨 등 4명이 입건되고 이(李)씨 개인이 화주가 되는 한편 살존여부가 의심스러운 중간브로커 이창식(李昌植)씨에게 모든 책임을 미루었다.

이에 대해서 세관은 사건의 진상과 배후를 밝히려는 아무런 성의도 보이지 않은 채 가중처벌법에 정면으로 걸리는 사건을 단순한 통고처분으로 우물쩍했다.

이번 사건은 사카린 제조업자끼리 반목으로 노출된 것이며 사카린원료를 독점생산 하고 있는 J화학과 J물산이 실력도 없으면서 생산을 계속하고 있는 금북(錦北)을 감시 끝에 정보를 알아낸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강하게 나돌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금북(錦北)이 대금결제 전에 수입면장을 요구했고 한비(韓肥)는 교포의 재산반입으로 들여온 물건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거래를 끊는 동안에 정보가 새었다는 세관의 공식적인이야기다.

수사결과 이번 사건은 가중처벌법을 적용하지 않았다는게 가장 큰 불씨의 하나다.

판본(阪本)사건에 있어서도 검찰은 구속기소해봤댔자 보석으로 풀려나기 쉽고 흔히 있듯이 한2년 만에 집행유예나 벌금을 병과 않고 풀려나오면 오히려 실효가 없다는 이유로 관세법을 적용, 통고처분을 하려다 문제가 시끄러워 지자 가중처벌법을 적용했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이유로 통고처분을 했다고 하지만 시가 2천원 이상의 특정외래품거래자는 모조리 구속한다는 강경책을 세우고 있는 검찰이 어째서 대재벌의 밀수행위에 대해서는 알량한 세수를 핑계로 돈이면 해결되는 온정을 베푸는 것일까.

이 사건을 계기로 가장 시급한 것은 밀수범처벌에 있어 가중처벌법과 관세법의 적용한계에 분명한 지침이 필요하다고 수사관들은 지적했다.

현재 검찰은 두가지법에 다같이 해당하는 사건은 편리할대로 어느 법이나 적용하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그와 함께 정부는 특정재벌은 이러한 악질행위를 그들의 돈으로 바터하는 졸책을 버리고 법 앞에 평등히 모든 범법자를 다스리는 용기가 아쉬운 것 같다.

아뭏든 사카린원료 58t의 이번 밀수사건은 t당 88만원의 시가로 따지면 그 액수는 5천만원을 넘으며 이익금은 원가의 배액이상이 된다는 엄청난 이익을 노려 저지른 것 같은데 한비(韓肥) 이(李)상무가 자기 개인 앞으로 통고된 벌과금 2천4백만원을 물었다는 점에는 사건배후의 유무、엉뚱한 사건처리에 대한 책임문제, 앞으로 정부의 대책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국민들의 비상한 관심을 계속 모을 것 같다. (박원근기자)

(동아일보 1966년 9월 17일자 7면)

 

 

박원근 동우 유고집 ‘南村雜記’

1959년 동아일보 수습기자 1기로 입사해 정치부, 사회부 기자를 거쳐 지방부장, 사회부장, 기획조정위원을 지낸 박원근 동우(1932~2015)의 세 자제가 2016년 10월 부친의 1주기에 즈음하여 ‘남촌잡기’를 펴냈다. 남촌(南村)은 남해 촌놈이라는 뜻으로, 박 동우가 스스로에게 붙인 별호.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직돼 경북 상주로 낙향한 박 동우는 그곳에서 7년간 사과 농사를 지었다. 1988년 국민일보 초대 편집국장을 역임하고 그 후 부산매일신문 논설위원, 경인일보 주필을 지냈다. 2000년 미국 필라델피아로 이민을 떠나 2003년까지 미주동아일보 주필 겸 부사장으로 재직한 박 동우는 2015년 10월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박원근 기자의 특종으로는 1966년 한비 사카린 밀수사건이 유명하다. 삼성이 울산에 세운 비료공장에서 원자재인 사카린을 몰래 빼돌린 사건을 특종한 것. 이 사건으로 당시 삼성가의 유력한 후계자였던 차남 이창희 씨 대신 삼남인 이건희 씨가 새로운 후계자로 부상하기에 이른다.

미주동아일보는 필라델피아에서 교포들을 대상으로 발행되는 한인신문이다. 서울에서 보내온 동아일보에 현지 제작 2페이지를 붙여 배포한다. 박동우는 2000년 12월7일 첫 회를 시작으로 2003년 7월31일까지 137회 칼럼을 연재했다.

자연과 문화에 대한 평소 생각들, 이민자로서 바라본 한국과 세계의 정치 사회 문명 역사에 대한 비판적 시선, 소박하고 건강한 삶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디자인스튜디오 발행. 
 
(김일동, ‘박원근 동우 유고집 南村雜記’, 동우회보 제61호, 2018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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