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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동아일보 사람들- 박승호

Posted by 신이 On 11월 - 6 - 2018

 

박승호(朴承浩, 1897~1950 납북)는 도쿄 쓰다영학숙(律田英學塾)을 졸업하고, 유학시절 만난 최승만과 결혼한 뒤 1934년 8월 최승만은 잡지부장으로, 박승호는 학예부 기자로 입사했다. 최승만은 일장기말소사건으로 퇴사했으나 박승호는 동아일보 폐간때까지 활동했다. 해방 후 여성운동에 투신했으며 6.25 때 납북됐다.

 

박승호(朴承浩) (시흥, 1897~1950 납북, 여) ▲ 1934. 8 사원(학예부), 1940. 8 폐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3·1운동이 일어나 독립운동에 관계했던 나는 숨어서 변성명(變姓名)을 하고 살아야 했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학자금이 없었다. 장덕준 씨가 그것을 알고 요시노(吉野 · 법학교수, 신진 사상가)에게 부탁하라는 것이었다. 요시노 교수는 장덕준 장덕수 형제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의 어떤 실업가가 장학금을 맡겼다고 생각하고 학비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나중에야 그게 인촌 선생인 줄 알았으나 그때는 몰라 거절했다. 그러다 받기로 했는데 내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내 애인이 문제였다. 내 애인(朴承浩)은 당시 박현숙 씨와 감리교회에서 일을 보고 있었는데 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  요시노 교수에게 그 뜻을 비쳤더니 얼마 안 되어 고국에서 장덕수 이름으로 백 원이 우편으로 부쳐져 왔다. 그 때 돈 백 원이면 거금이었다. 우리 내외는 1934년 귀국하여 동아일보에 함께 봉직하게 되었다.
(최승만(崔承萬),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 356~357쪽)

 

 

엄마 다화회(茶話會)

최이권(연전교수 백낙준 씨 부인)
조영숙(세전학감 윤일선 씨 부인)
임정혁(의사 정윤용 씨 부인)
이준숙(시인 노자영 씨 부인)
최명렬(동아일보 기자 임병철 씨 부인)
정찬영(약전교수 도봉섭씨 부인)
박승호(최승만 씨 부인)
임효정(동아일보 기자 최용환 씨 부인)
주성은(의사 정보라 씨 부인)

주요섭(잡지부장)=바쁘신데 이렇게 와주십사고 한 것은 통지할 때도 간단히 말씀하였습니다마는 이번 신가정 5월호가 어린이특집호기에 엄마들만 모여서 귀여운 아기네 이야기를 해볼까 한 것입니다.

최이권(연전교수 백낙준 씨 부인)=조선가정에서는 아들을 더 기다리는 것이 상정이예요. 우리 생각 같아서는 딸이나 아들이나 마찬가진데 왜 그럴까요. 아까도 말씀합디다마는 실상 귀엽기로 보면 계집아이가 더하죠. 재롱을 피우는 점에도 그렇고 집안을 화락케하는데도 그런데….심하면 입는 것 먹는 것까지 차별하는 집안이 있더군요. 이렇게 늘 남자는 집안의 왕이라는 관념을 길러놓으니까 이것이 커서 다음 우리 여성계에도 큰 영향이 돼요.

박승호(최승만 씨 부인)=그것도 모두 아버지들이 나빠서 그래요. 다른 나라 아버지들은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도 가는데 못난 조선아버지들은 집에서는 귀애하면서도 데리고 나가라면 뺑소니를 쳐요.
그리고 유치원에서는 월사금이 비싸요. 동경서는 4원씩이나 주었는데 정말 그만한 효과가 나는가 의심돼요. 

이준숙(시인 노자영 씨 부인)=어쨋든 조선옷은 좀 개량할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조선 어머니들의 옷에 대한 관념도 좀 고치고 새 옷을 해주고는 더럽힌다고 주장질을 하니 아이들이 새 옷 입는 날이면 징역살이예요. 그런 옷은 왜 해주긴 한답니까.

(신가정 1934년 5월호 113~123쪽)

 

 

주택문제 좌담회

출석자
연전(延專) 수물과(數物科) 강사  이만학 씨
건축가   박길용 씨
이전(梨專) 가사과 교수  김몌비 씨
협성여신 교수  고봉경 씨
동덕여고 교유  송금선 씨
여자고보 교유  손정규 씨

【본사측】변영로, 황신덕, 박승호

일시-11월 23일 오후 6시

(동아일보 1939년 1월 3일자 2면)

 

 

3대(三代) 여성이 본 문화반세기

사회적 진출도 이때의 일

사회봉사가 일반의 신념

질풍노도 겪은 2대(二代)

고민속에 헤엄치는 3대 여성의 모습

◇출석하신 분들(무순)

一代 김누세 최활란

二代 우봉운 유각경 박순천 허영숙 한소제

三代 임효정 장화순 김복진 모윤숙 김선

본사측 박승호 황신덕 기자

(신가정 1936년 1월호 60~65쪽)

 

 

입법진두에 이채

네분 여성대표에 기대

해방의 종소리 울려 어언 1년 반에 오는 12일에 열리는 임시 입법의원의 민주진두(民主陣頭)에 이땅 여성을 대표하여 활동할 네 명의 부인의원이 나서게 되었다. 1면 보도와 같이 입법의원 관선의원이 7일에 발표되었는데 이중에는 전 여성의 주시속에 네 명의 부인의원이 있어 민주조선 건설의 새날을 위하여 이채를 던지고 있다.…(중략)…이번 선거된 부인의원은 황신덕, 박승호, 신우경, 박현숙 네 씨다.

(동아일보 1946년 12월 8일자 2면)

 

 

전쟁이 터진지 사흘째 되던 날 팔판동 집에서 중앙청에 걸린 인공기를 보며 충격을 받았다. 이어 학교로 달려가 보니 이미 이곳에도 ‘인민공화국 만세’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학교도, 집도 본인과 아무런 의논 없이 이미 그들에게 접수당한 것이다. ‘공화국’에 협조하라는 협박과 회유를 피하며 고심하던 중 그는 피신을 의논하려 안국동 덕성여고 송금선 교장을 찾았으나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며칠이 지나자 끝내 올 것이 왔다. 서울이 그들에게 점령당한지 한달이 지난 7월 27일 나는 ‘정치보위부’로 끌려가 3백여명이 빽빽이 들어찬 유치장에서 고통스런 심문을 받았다. 생지옥 같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주로 입법의원, 교육자, 종교인, 법조인들로 이들과 함께 낯익은 언론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서양 선교사도 있었다. 경호병들은 “너희들은 미군 스파이로서 최고 악질분자다. 만일 도망치려는 자가 있으면 총살할 것이다”고 겁을 주었다. 밤이 되자 이들은 대기하고 있던 트럭에 분승, 북송길에 올랐다. 내가 탄 차에는 국회부의장을 지낸 김동원 씨, 서울대 총장이던 이춘호 씨 등이 함께 있었다.(…)

트럭은 개성에 이어 38선을 지났다. 차는 밤새껏 달렸다. 그리고 황해도 남천에서 멎었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차는 어느 건물 앞에 멈췄다. 재판소인지 정보기관인지 알 수 없는 곳이다.(…)

이곳에 이르러 확인한 바로는 서울에서 함께 납북된 것으로 알고 있는 여러 언론인들, 예컨대 같은 동아일보 동료였던 이길용 기자 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다시 수감된 방엔 여자만 있었다. 여기서 만난 박승호 여사, 고황경(서울여대 설립자) 여사와 여류비행사 이정희 씨가 나를 반갑게 맞았다.

(황신덕, 나의 6.25 체험기,‘돌아오지 못한 언론인들’, 대한언론인회, 2003, 168~173쪽)

 

 

박승호(朴承浩, 54세) 일제강점기의 여기자. 1934년 8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1940년 8월 폐간때까지 학예부 기자로 근무했는데 6.25 당시에는 창덕여중 교장으로 재직중이었다. 7월 5일경 종로구 사직동 311의 17 자택에서 연행되어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던 보위부에 구금되었다. 그 후 평양교화소에 구금되어 있었다는 소식은 평양에서 같은 감방에 있다가 탈출에 성공한 황신덕이 가족들에게 들려주었다. 황신덕은 1929년 중외일보에 입사했다가 1935년 6월부터는 동아일보 ‘신동아’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같은 여기자로 잘 아는 사이였다. 박승호는 1957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발기인 겸 집행위원으로 동원되었으나 1958년 이후에는 신병으로 요양소 생활을 했다(각주:“이산가족백서”, p.200.).

박승호의 남편 최승만은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신동아부장(1934.8~1936.9)이었고 후에 제주도지사, 이화여대 부총장, 인하공대 학장을 지낸 인물이다.

(정진석, (6·25전쟁) 拉北:끌려가고 살해된 언론인 284명 목사·신부·종교인 371명의 비극, 기파랑, 2006, 89쪽)

 

 

[현대사와 함께한 신동아 700호] ‘조선민족 대경륜’ 제시한 86년

‘전람회, 토의장, 온양소’ 된 최장기 종합잡지

일제강점기 신동아에 근무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후에 학자 또는 문인으로 대성했음을 보면 신동아 편집진이 당시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요 인물을 살펴보자.

박승호(朴承浩·1897~1950년 납북) : 1934년 8월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하여 1940년 8월 동아일보 강제 폐간 때까지 근무. 6·25전쟁 때 납북. 납북 당시에는 창덕여중 교장으로 재직 중이었음. 잡지부장 최승만의 부인.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조선민족 대경륜 제시한 86년‘, 신동아, 2018년 1월호)

 

 

[한국여성인물사전] 61. 박승호

해방 후 부녀동맹애국부인회 참여한 여성운동가

박승호(朴承浩, 1896~?)는 도쿄 쓰다영학숙(律田英學塾)을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활약하였다. 도쿄 유학시절과 동아일보사 시절에 함께 활동한 최승만(‘신동아’ 잡지 부장, 이화여대 부총장, 인하대학장)과 결혼했다. 유학시절에는 여학생단체 발족에 참여했으며, 기자로 활동할 때는 양재봉강습회에서 재봉강습을 맡기도 했다.

해방 직후 좌우익 여성이 함께 조직했던 건국부녀동맹에 참여했으나, 찬탁과 반탁을 두고 분열하였다. 박승호와 박순천 등 우익 여성들은 1946년 4월 5일 독립촉성애국부인회를 발족시켰다. 이 단체의 회장에 박승호, 부회장에 박순천·황기성이 선출되었다.

1946년 11월 15일 대한여자국민당, 불교여성총연맹, 가톨릭여자청년연합회, 여자기독교청년회, 독립촉성애국부인회, 천도교내수회, (미군정)부녀국 등은 ‘독립 완수는 여성의 단결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국여성단체총연맹을 결성하였다. 총연맹은 국가건설 과제 외에 여성의 권익 향상과 관련하여 여성의 공적 영역, 즉 국회와 행정부 진출 또한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힘입어 박승호는 다른 3명의 여성과 함께 1946년 12월 출범한 과도입법의원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입법의원에서 통과한 공창 폐지령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창 단속을 담당하는 여자경찰서를 지원하고자 황신덕과 함께 여자경찰서 후원회를 조직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47.11.1.).

1948년 2월에 박승호는 박순천, 유각경, 최은희, 황신덕, 황애덕 등과 함께 독립촉성애국부인회와 서울시부인회를 통합하여 대한부인회를 발족시켰다. 한편으로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여성의 투표참여 운동과 여성후보 지원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이 선거에서 박승호는 박순천과 함께 국회의원 입후보 의사를 밝혀 용산에 출마하였으나 전국적으로 출마한 18명의 여성후보는 전원 낙선하였다.

1948년 8월 15일 제1공화국(대통령 이승만)이 출범하자 박승호는 사회부 부녀국장(이사관보급)에 임명되었다. 당시 전진한 초대 사회부 장관에게 박순천, 김활란, 유각경, 황신덕 등이 박승호가 최고 적임자라고 적극 추천했기 때문이다. 박승호 국장은 대한부인회를 전국적인 여성단체로 조직하는 데 행정적 뒷받침을 하여 1949년 5월 2일 전국에서 200여 명의 대의원이 참여한 가운데 제1차 대한부인회 전국대회를 열 수 있었다.

이 대회에서 초대 회장에 박순천, 부회장에 박승호·유각경이 각각 선출되었다. 최초의 거대한 전국적 여성조직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사업으로 의식주 생활개선 사업, 문맹 퇴치, 사상 및 예의범절교육을 실시했다.

1949년 11월 창덕여중·고 교장으로 발령 받아 부녀국장에서 퇴임하였고, 교장 재임 중 6·25전쟁이 발발하여 납북되었다.

(정현주 국립여성사전시관장, ‘한국여성인물사전- 박승호’, 이투데이, 2017년 2월 27일자)

 

 

실향사민신고서(失鄕私民申告書)- 박승호

 

 

6.25拉北 女流 朴勝浩 사망
[서울內外] 북괴의 위장평화선전단체인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발기인 겸 집행위원을 역임했던 납북여류 朴勝浩(82)가 지난 30일 병으로 사망했다고 2일 北傀의 평양방송이 보도했다.

(동아일보 1978년 12월 4일자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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