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원(朴琦遠, 1908~1978)은 강원 강릉 출신으로 1928년 니혼대학(日本大學)을 졸업한 뒤 1929년부터 시작활동을 했다. 1940년 6월 동아일보 강릉지국 지국장에 임명돼 동아일보가 일제에 의해 강제폐간될 때까지 있었다.
강원 강릉(江陵)……최돈제(崔燉濟, 1921. 3~) 정호태(鄭鎬泰, 1925. 1~) 김설기(金卨起, 1926. 9~) 최돈기(崔燉起, 1928. 5~) 정윤시(鄭允時, 1930.10~) 유응천(兪應天, 1932.12~) 김인걸(金仁杰, 1933.11~) 염근수(廉根壽, 1937.10~) 김명회(金明會, 1939.11~) 최장순(崔長洵, 1940. 4~) 박기원(朴琦遠, 1940. 6~)
(역대지국장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동아일보 강릉지국(江陵支局) : 朴琦遠 任支局長, 支局長 崔長洵 依願解職
(동아일보 1940년 6월 22일자 조간 4면)
[東亞春秋] 憤怒의 기억
1940년(一九四○年) 8월 11일(八月十一日). 생각하면 15년전(十五年前) 일이나 오히려 또렷하다.
이제 한 인생이 걸어온 사십(四十)고개를 넘어선 언덕 밑에 서서 가마니 눈을 감아본다. 치욕(恥辱)과 회한(悔恨)과 허무(虛無) 속에서 쓰고 단 맛을 골고루 체험(體驗)해 오는 생활(生活) 보표(譜表) 속에서 또 하나의 쓰라린 추억(追憶)을 다시 씹어본다는 것은 그다지 유쾌(愉快)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한갖 생각해 보면 인생(人生)의 희망(希望)을 송두리 채 바쳐온 청춘시대(靑春時代)라 그 한다면 그 쓰라리고 억울하던 일들이 도리어 아름다운 추억(追憶)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치 한 인간의 반생(半生)을 축도(縮圖)하여 무슨 심판대(審判臺)에 올려 놓는것 같은 인생의 결산(決算)이 아닐진대 추억(追憶)은 어데까지나 아름다워야 할 것이고 어데까지나 슬픈 곡절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름답다는 것은 그만큼 청춘시대(靑春時代)가 맺어온 황홀(恍惚)이 있다는 것이요 슬프다는 것은 그만큼 순수(純粹)한 감정(感情) 속에서 걸어왔다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여기까지의 족적(足跡)을 하나씩 토막 질려 놓고 보면 태반(殆半)이 신문(新聞) 또는 잡지사(雜誌社), 기자생활(記者生活)을 빼고는 섯뿔리 문학(文學)을 뜻하고 시(詩)가 처음 발표되던 기쁨을 맛보던 소년시대(少年時代)가 내게는 가장 아름답고 황홀(恍惚)하던 시대일 것이다.
서투른 문학청년(文學靑年)인 나는 이 황홀한 기쁨을 누를 수 없어 신문사(新聞社)나 잡지사(雜誌社)에 입사(入社)를 하면 자기작품(自己作品)을 더 많이 발표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기자(記者)를 지망한 것이 얼마를 못간 도중에서 오산(誤算)인 것과 하루하루의 부닥치는 사회상에 염증(厭症)을 느끼면서도 뛰쳐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20년(二十年)이란 세월을 기자생활(記者生活)로서 세파(世波)에서 호흡(呼吸)해 왔던 것이다.
1940년(一九四○年) 8월10일(八月十一日). 아침에 사(社)에 다다르니 사내는 중압(重壓)된 공기(空氣) 속에 싸여져 금방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직전(直前)과 같이 불안(不安)에 싸여 있고 이층 중역실(重役室) 문(門)을 들어서니 지금은 이미 고인(故人)이 되신 송진우(宋鎭禹)氏 장덕수(張德秀)氏 두 분을 위시(爲始)하여 백관수(白寬洙)氏, 김용무(金用茂)氏의 침통(沈痛)한 얼굴들이 혹은 천공(天空)을 응시(凝視)하거나 가두(街頭)를 예시(睨視)하거나 하여 눈물 없는 통곡(痛哭) 그것이었다.
우리의 말이 없어지는 날이다. 오직 우리의 말로 우리의 의사(意思)를 민족(民族) 앞에 대변(代辯)할 수 있는 동아일보(東亞日報)와 조선일보(朝鮮日報)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가슴을 치고 울지도 맘대로 못하는 슬픔과 누구보다 억울한 분통(忿痛)을 하소할 자유(自由)도 없는 치욕(恥辱)의 날은 오고야 말았었다. 일제(日帝)의 폭정(暴政)을 그대로 강압(强壓)하는 총독(總督)『아베(阿部)』의 최후의 발악(發惡)이었다. 소위 국책(國策)에 순응(順應)하여 폐간(廢刊)에 날인(捺印)을 하라고 강요(强要)했다. 그러나 사장 송진우(宋鎭禹)氏는 끌까지 응(應)치 않았다.『동아일보(東亞日報)는 삼천만(三千萬)의 의사(意思)에 있는 것이다. 삼천만민족(三千萬民族)이 허락(許諾)하지 않는 한(限) 내손으로는 날인(捺印)할 수 없다』고 최후까지 항거(抗拒)했으므로 왜제(倭帝)는 끝으로 폐간승낙서(廢刊承諾書)에 날인(捺印)을 하면 일절(一切)를 불문(不問)에 부(附)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최후 조처(措處)를 하겠다고 발악(發惡)했다. 결국(結局)은 응(應)하지 않음을 구실(口實)로 행정처분(行政處分)을 당하는 오늘 8월11일(八月十一日)이다.
아침 11시(十一時)에 폐간식(廢刊式)을 거행(擧行)하는데 이것마저 사장 송진우(宋鎭禹)氏로는 못하게 되어 임시사장(臨時社長) 백관수(白寬洙)가 식장에 나타나자 만장(滿場)은 숙연(肅然)해지며 여기저기서 명인(鳴咽)이 가쁜 숨을 삼키었다. 그러나 장내는 경무국 형사대가 삼엄(森嚴)한 경계(警戒)를 하고 있어 누구하나 일언(一言)의 사담(私談)도 못하게 사원 하나 형사 하나씩 자리를 차지한 속에서 백(白) 사장의 비분(悲憤)한 폐간사(廢刊辭)로 식은 끝나고 지금 국회의당(國會議堂)인 그때 부민관(府民館) 식당(食堂)에서 폐간위로연(廢刊慰勞宴)이 있었는데 모(某) 지국장(支局長)은 신발 신은채로 연석(宴席)을 난무(亂舞) 고함(高喊)치다가 왜경(倭警)에게 잡혀가고 나는 모자(某者)에게 폐간(廢刊) 정책(政策)을 비난(非難)한 것이 10분(十分) 후에 경무국에 밀고(密告)되어 결국(結局)은 종로서(鍾路署)에 잡혀가고 말았었다. 믿었던 자(者)의 밀고(密告)로 화(禍)를 입게 된 나는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다. 일후(日後) 관서(寬恕)한다는 조건(條件)으로 석방(釋放)되었으나 일개(一個) 말석기자(末席記者)인 나는 왜헌병(倭憲兵)과 일경(日警)이 와글거리는 사문(社門)을 힐끔힐끔 처다보고 하는 슬픔을 삼킬 뿐이었다.
(박기원 시인, ‘東亞春秋- 憤怒의 기억’, 동아일보 1955년 4월 28일자 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