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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동아일보 사람들- 박권상

Posted by 신이 On 11월 - 6 - 2018

 

박권상(朴權相, 1929~2014)은 전주 출신으로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52년 합동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 동아일보에는 1962년 5월 논설위원으로 입사해 1971년 4월부터 1973년 8월까지 편집국장을 지내고 1973년 8월부터 1977년 8월까지 영국특파원으로 활약했다. 1977년 9월부터 논설위원으로 복귀해 1980년 1월 논설주간에 올랐으나 그해 8월 신군부에 의해 강제해직됐다. 이후에는 1994년부터 1997년까지 동아일보 비상임고문으로 있었다. KBS 사장과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장, 고려대 석좌교수, 일민문화재단 이사장, 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위원회 이사 등도 지냈다.

 

박권상(朴權相) (전주, 1929~ ) △62.5 논설위원, 심의위원겸, 뉴스해설상임위원겸, 편집국장대리, 편집국장, 런던특파원, 통일문제연구소장, 논설주간, 80.8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3권, 동아일보사, 1985)

 

 

 

 

朴權相 선생을 추모하며

지난 2월초 박권상선생의 부음을 전해 듣는 순간 나의 느낌은 ‘이제야 그분이 편안하게 되셨구나’하는 안도감이었다. 만3년 8개월을 혼수상태로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며 병상에 누워 계셨으니 그 같은 고통에서 해방된다는 게 선생에게는 차라리 평안한 길이었을 것이란 게 그때 내 생각이었다. 선생은 세상이 다 아는 논객이요, 군사정권의 폭압 아래서 한국 언론의 바른 길을 지키려 혼신의 힘을 다한 한국 언론의 길잡이였다. 동아일보에 20년간 재직하며 편집국장과 논설주간, 편집인을 역임하고 만년에 KBS사장을 지냈으니 그의 언론 활동의 영역이 신문에서 방송으로까지 확대된 것은 의미 있는 변화였다.

내가 정작 선생을 가까이서 모시게 된 것은 1989년 장지연기념회를 창립하며 선생을 회장으로 모신 때 부터라 할 수 있다. 그 해 11월 1일 ‘장지연전집’의 완간을 계기로 학계와 언론계가 공동으로 장지연기념회를 창립했는데 선생이 첫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처음 회장 취임을 권했을 때는 선뜻 나서지를 않았다. 주지하다시피 선생은 주로 영미(英美)의 자유언론을 지향하는 입장으로 한국 근대언론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편이다. 나는 장지연이 황성신문 사장으로 ‘시일야방성대곡’이란 사설을 써서 신문이 정간되고 필자는 투옥되었으며 경남일보 주필로 매천 황현(梅泉 黃玹)의 절명시(絶命詩)를 실었다가 신문이 정간됐던 일 등을 앞세워 위암이 언론을 통한 민지(民智)의 개발과 일제에 대한 저항을 설명하며 특히 위암이 평생을 언론을 업(業)으로 삼은 직업언론인이었다는 점을 극구 주장하여 결국 회장취임 승낙을 받게 되었다. 아마도 위암이 박은식

신채호 등 다른 애국 선열들과 달리 언론활동만을 고집한 직업언론인이었다는 점이 선생의 관심을 끌었던 듯싶다.

기념회가 사무실을 열고 여직원이 회장을 돕게 하며 골치 아픈 잡무는 상임이사인 내가 도맡으니 선생은 사무실에 상근하여 글도 쓰고 손님도 맞고 각종 연락도 손쉽게 할 수 있게 됐다. 오랜만에 안정된 공간을 확보한 셈이었다. 그리고 기념회는 위암 장지연상을 제정하여 1년에 한번씩 언론상 한국학상 방송상을 선생의 명의로 수여하고 한국 근대언론 관련 학술회의를 개최하게 되니 내외의 관심도 모으게 되고 선생도 자연히 이들 사업에 대한 관심과 열의를 갖게 되었다. 1998년 KBS 사장 취임 때까지 10여 년 넘게 선생은 주로 기념회 사무실에 머물며 동아일보를 비롯한 몇몇 신문의 칼럼과 적잖은 저술활동을 펼쳤다. 또 기념회의 살림도 손수 꾸리고 위암장지연상, 학술회의는 물론 적잖은 출판 활동도 모두 선생의 손을 거쳐 이루어지니 장지연기념회는 선생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으리만큼 깊은 인연으로 얽히게 되었다. 그러나 선생의 50년에 걸친 언론활동의 백미는 동아일보를 무대로 이루어졌다 하겠다. 1962년 논설위원으로 취임한 이래 편집국장, 논설주간 겸 편집인으로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 퇴임한 이후에도 선생은 신문지면이나 신동아(新東亞)를 통해 많은 글을 발표하며 꾸준히 관계를 이어왔다. 퇴사 이후에도 동아일보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연재하고 신동아에 런던특파원 시절 몸에 익힌 일들을 연재하며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다. 그리고 선생의 중요 언론활동은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신군부에 이르는 군부통치 시대에 이루어졌으니 활동 내용도 자연히 권력의 폭압에 맞서는 저항언론의 궤를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생은 일찍부터 해외 연수의 기회가 많았던 편이어서 주로 서구 언론의 자유 평등 인권사상을 통한 권력과의 대결의 길을 찾았다. 이런 점이 선생이 오랜 기간 권력과 맞서며 언론활동을 지속한 힘이요, 방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20년 넘게 곁에서 본 선생의 인간적인 면모는 보기와는 달리 소탈한 성격과 언론인으로서의 신념에 대한 열정이다. 언론 이외에 아무 일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언론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권력의 유혹을 주저 없이 뿌리치는 것을 몇 차례 본 일도 있다. 언론으로 민주주의의 실현도, 국가발전도 이룩할 수 있다는 맹신에 가까운 언론관을 평생 가지고 살았다. 선생은 주로 글을 쓸 때나 필요한 대목에서는 서슴없이 주위 사람들에게 물었다. 불치하문(不恥下問)이랄까, 손아래 사람에게나 친숙치 않은 사람들에게도 거리낌 없이 물었다.

또 아무에게나 권위를 내세우거나 체면을 따지지 않았다. 누구와도 잘 어울리며 자리를 가리지 않는 편이었다. 선생의 주변에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정치인 학계인사 등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것도 선생의 이런 소탈한 품성에 기인했을 것이다. 만년에 5년간 KBS를 이끌면서는 영국의 세계적 공영방송인 BBC를 자주 언급했는데 선생의 주된 관심사는 BBC의 프로중 대형 기획물을 위한 제작진의 인내와 고도의 전문성, 엄격한 보도의 공정성 등을 아우른 높은 품격이었을 것이다. 방송뿐 아니라 선생이 평생을 몸바친 언론도 영미(英美)나 서구(西歐)언론의 그 같은 높은 품격을 지향해야 한다는 게 선생의 평생지론이며 우리 후진들에게 주고 간 교훈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이종석 전 논설실장, ‘朴權相 선생을 추모하며’, 동우회보 제36호, 2014년 3월 20일, 9면)

 

 

[부고]  박권상 前 KBS 사장 별세

“어느 경우든 사실은 신성하고 의견은 자유라는 철학, 바로 여기에 자유 사회의 힘이 있고 자유 언론의 빛이 있지 않을까.”(1989년 2월 7일 ‘동아시론’)

그는 언론의 힘을 믿었다. 자유롭고 공개된 시장에서 진실과 거짓이 경쟁하면 반드시 진실이 살아남는다는 믿음으로 신성한 사실을 좇는 기자로서, 시대를 통찰하는 글로 독자를 일깨우는 지식인으로서 평생을 살았다.

4일 별세한 언론인 박권상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23세의 나이로 합동통신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1962년 동아일보로 옮겨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지냈고 1973년부터 3년간 영국 특파원으로 활동했는데 당시 언론 선진국에서 목격한 자유로운 신문과 공영방송 BBC는 언론인으로서 그의 삶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전기가 된다.

자유로운 언론에 대한 믿음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으로 엄혹한 시험대에 놓였다. 동아일보 논설주간이던 그는 신군부의 검열에 5월 16일부터 5일간 사설을 게재하지 않는 ‘무사설(無社說) 저항’으로 맞섰다.

그해 7월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이 발표됐고 모든 신문이 김 씨를 죄인으로 단죄했다. 동아일보도 신군부의 압박을 받았다. 고인은 “10년 후 독자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며 버티다 결국 “공정한 재판으로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는 사설을 썼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사설이고, 계엄사는 검열에서 전문을 삭제했다. 동아일보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침묵을 지킨 유일한 신문이 됐고, 고인은 그해 8월 ‘언론대학살’ 때 희생됐다.

훗날 그는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술회했다. “진실을 밝히는 꿋꿋한 언론의 정신, 어떤 형태이든 전체주의를 배격하고 우리 사회를 민주적으로 개혁하려는 의지의 표명,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동기요 사명이었다.”(‘박권상의 시론’·1992년)

언론인으로서 고인의 인생 2막은 1998년 김대중 정부 시절 KBS 사장에 임명되면서 시작됐다. BBC를 세계 공영방송의 모델로 생각했던 그는 “BBC는 섣부른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다”며 엄정 중립과 품격 있는 방송을 주문했다. 홍성규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은 “내가 보도국장으로 있는 1년 반 동안 박 사장은 보도와 관련해 한번도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았다. 그것이 늘 감사했다”고 회고했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는 노력은 시청자들의 신뢰로 보답받았다. KBS ‘9시 뉴스’가 MBC ‘뉴스데스크’를 제치고 앞서 가기 시작한 것이 박 사장 재임 시절이다. ‘환경스페셜’과 ‘일요스페셜’ 같은 교양 프로그램으로 공영성을 강화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협의를 통해 남북 방송 교류의 물꼬를 텄다.

1980년 고인과 함께 해직됐던 소설가 최일남은 “고인은 언론인으로서 명성을 이용해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음에도 외길만을 걸었다. 언론인에게 모범이 되는 존재”라고 추모했다.

고인의 언론에 대한 믿음은 맹목적이지 않았다. 그는 “언론의 제일 기능은 뉴스를 순결하게 전하는 것”이라며 “광주의 비극이 있은 지 9년간 때 묻지 않은 진실이 전해질 수 없다는 데 또 하나의 비극이 있다”고 했다.

수많은 ‘언론’이 그보다 더 많은 ‘설’들을 쏟아내는 인터넷 시대를 내다본 선견지명이었을까. 언론 외길을 걸어온 고인의 생각은 ‘자유언론의 명제’ ‘영국을 생각한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비롯한 다수의 저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진영·우정열 기자, 동아일보 2014년 2월 5일자 A26면)

 

 

[박권상 추모 특집] 언론인, 언론학자, 언론경영인 박권상과 한국 언론의 세계화 

신문·방송·통신·학계를 누빈 ‘종합 언론인’

박권상(朴權相: 1929. 10. 25~2014. 2. 4) 선생은 그가 활동하던 시대에 가 장 다양한 활동을 벌인 언론인이었다. 1952년에 통신사 기자로 출 발하여 신문과 방송에 근무하여 신문· 방송· 통신으로 분류되던 전통적인 언론분야를 고루 경험하였다. 〈시사저널〉 창간 부사장으로 주간지 운영과 제작을 총괄하였으니 잡지 발행의 경력까지 있었다. 1950년대에 미국에서 언론학을 공부하여 서양 언론학 이론서를 국내에 번역 소개하고 대학 강 단에 서기도 하면서 언론의 질을 높인 이론가였다. 논설을 쓰는 논객이면 서 편집국장이라는 제작실무 책임의 자리도 맡았고, 해외특파원으로 근무 한 경력도 있었다. KBS 사장으로 국가 기간방송의 수장이자 방송협회 회 장을 맡아 남북한 방송교류에도 큰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언론단체를 통한 활동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관훈클럽 창립의 실질적인 주역으로 세 차례 총무를 역임했고, 50여 년 동안 클럽의 발전과 운영의 책임을 맡거나 여러 중요사업을 주도하고, 클럽의 운영방향을 자문하는 위치에 있었다. 1950년 후반의 IPI 가입을 비롯하여 한국 언론의 국제교류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언제나 국제적인 안목에서 한국 언론의 진로를 탐색하고 제시하였으며, 새로운 사업을 창안하고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박권상은 60년 언론인 생활을 다양하고 바쁘게 살았지만 때로는 권력의 탄압에 시달려야 했고, 해직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연구를 쉬지 않으면서 중요한 논문을 써서 학술지에 게재하는 저력을 보였다. 박권상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종합 언론인’으로 살았던 인물이다.

(…)

그의 KBS 사장 시절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을 생략한다. 다만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 이후 8월 5일부터 12일까지 언론사 사장단 46명의 북한방문은 잠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 KBS는 언론사 사장단 방북의 성과를 ‘남북한 언론인 공동합의문’ 채택과 김정일 면담으로 꼽았다.

남북한 언론사의 공동합의문 작성과 김정일 면담과정에서 박권상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북한은 처음부터 ‘민족의 자주’와 ‘6·15선언의 지지’를 공동선언문에 넣자고 주장했다. 박권상은 북측과 협상할 때에 확고한 입장을 취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우리 대표단에 전달했다. 방송협회 회장이자 방북 사장단 가운데 가장 나이 많은 원로 언론인이었던 박권상은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북측 협상대표 김원철(조선중앙방위원회 부위원장)에게 우리는 공동합의문을 작성할 필요가 절실하지 않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북측이 합의문 작성에 조바심 내는 눈치를 간파한 것이다. 설사 합의문을 작성하더라도 “우리는 자유사회니까 아무리 완전한 것을 만들어도 개인이나 회사의 입장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고 특히 비방·중상 같은 용어는 서로 법과 제도가 다르므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정의를 내릴 수 없다”면서 북측을 설득했다.

다만 방문이 끝날 때 초청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정중한 수준의 고마운 뜻을 발표하면 되고 합의문에 합의해도 다분히 ‘선언’적인 것이라야 한다고 박권상은 말했다. 나로서는 다수의견에 따르지만 직접 서명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북한의 정치체제와 언론을 오래 전부터 연구하면서 영문으로 연구 논문을 발표한 경력이 있는 박권상은 북한이 집요하게 요구하는 ‘공동합의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북한이 요구하는 ‘자주’라는 용어는 들어가지 않았고, ‘6·15선언의 지지 환영’이라는 부분은 “남북 공동선언이 조국 통일 실현에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인정하고…”로 바뀌었다. 박권상은 합의문에 서명 하지 않았다. 합의문에는 한국신문협회 회장 최학래(한겨레 사장)와 로동신문 책임주필 최칠남이 남북한을 대표하여 서명했다. 국방위원장 김정일 면담은 마지막 순간까지 불확실했는데 박권상이 조평통 부위원장 김영성을 불러 우여곡절 담판 끝에 성사되었다.
박지원 문화부 장관이 동행한 이 방북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참여하지 않았다. 방북 성과에 관한 평가는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박권상은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후 2003년 3월 10일 퇴임했다. 임기 만료는 5월 22일이었는데 임기 만료를 70여 일 앞둔 시점이었다.
박권상은 앞서 언급한 저서 외에도 많은 칼럼집을 출간했으나 생략한다. 평생을 논객이자 언론학자로 언론단체를 통한 합리적 언론개혁을 실천한 ‘종합 언론인’으로 살았던 인물이 박권상이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박권상 추모 특집- 박권상과 한국 언론의 세계화’, 관훈저널,  2014년 봄호)

 

 

[박권상 추모 특집] 박권상을 생각하는 몇 가지 단면

우리 곁을 떠난 박권상은 전후 1세대 기자의 선두주자였다. 앞에 섰다 는 점에서 선두주자였고, 시대를 앞서 갔고 이끌었다는 점에서 선각자였다.
혼자서 머리로 시대를 먼저 읽고 앞서 간 것이 아니라 꼼꼼하고 야무진 도전정신으로 벽을 뚫고 새 세계를 열어나가는 대열을 짜나가는 추진력도 갖춘 선비였다.
학업을 마치면서 바로 합동통신이라는 혜택받은 직장을 얻은 것이 그의 천직의 시작이었다. 고향에서 그의 형이 언론에 종사하는 것을 눈여겨보았 을 그는 합동통신에서도 그의 능력을 갈파한 선배를 만났다. 귀가 밝아서 정가의 온갖 잡음까지 다 듣는 마당발이었던 그 선배는 신입사원이 한눈 을 팔도록 놔두지 않고 지독하게 단련시켰다. 입이 험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던 김진학이라는 그 선배로부터 초년의 지도를 받은 것이 그의 평생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고 그 자신이 자랑삼아 회고했다.
평생을 기자로 올곧게 살다 간 박권상의 일생도 되짚어보면 여느 일생이나 마찬가지로 여러 단면을 볼 수 있다. 거의 반평생을 그와 더불어 지낸 나는 그가 보여준 둬 가지 단면을 통해 그를 추모하고자 한다.

(…)

48명이나 되는 언론사 사장단의 방북은 전례가 없었고, 더구나 그들이 서울로 돌아오기 전 11일에 발표한 남북언론인 공동합의문은 주목을 끌고도 남는 큰 사건이었다. 민족의 단합을 이룩하고 통일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언론활동을 적극 벌여나가기 위해 “민족의 화해와 단합을 저해하는 비방·중상을 중지하기로 한다”는 등 모두 5개항으로 된 합의문은 남북언론교류협력위원회를 설치할 것이라고도 예고했다.
박권상은 서울에 돌아온 뒤 한 모임에서 간략한 보고회를 가졌다. 현역이 아니면서도 그 자리에 나갔던 나는 보고가 끝난 뒤 참석자들이 궁금해하면서도 질문을 자제하는 듯한 분위기를 느꼈다. 관심이 없었다기보다는 대선배인 박권상에게 질문할 엄두를 못 냈다고 볼 수 있다.
궁금했던 내가 연단의 박권상에게 짤막하게 질문했다.
“이 공동합의는 앞으로의 모든 남북관계 보도의 준칙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이번 남북회담 보도에만 해당된다고 봐야 하는가?”
만일 남북관계 전반의 보도에 준용된다면 앞으로 한국 언론의 북한보도는 엄청난 자율 통제를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고 보고 그런 질문을 한 것이다. 질문을 받은 박권상은 그러나 엉뚱한 대답으로 얼버무렸다.
“나는 그런 합의를 전혀 몰랐다. 그건 최학래(당시 신문협회장)가 노동신문 주필과 합의한 거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정색을 한 박권상이 쑥 빠지는 대답을 천연덕스럽게 하는 걸 듣고 어이가 없었지만 굳이 질문을 더 하지는 않았다. 다른 질문이 없어서 보고회는 그것으로 끝났다.
이 합의문은 서울의 한국신문협회장과 평양의 로동신문 주필 공동명의로 돼 있다. 그런 점에서 박권상의 답변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문협회가 로동신문 주필과 그런 합의를 하면서 방송협회장 몰래 했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남북의 “언론사들과 언론기관들”의 합의라면 방송협회장은 당연히 알 수 있는, 알아야 할 입장에 있지 않겠는가?
보고회에 모였던 후배 현역 언론인들을 위해서 박권상은 몰랐다고 대답할 게 아니라 합의사항에 대해 좀 더 성실하게 대답했어야 옳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너무나 인간적인 단점들

박권상은 고향 전북 전주를 사랑했고, 그곳 출신 후배들을 챙기고 돌보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를 말할 때면 전언회(全言會)라는 모임에 관해서 언급하게 되고, 무책임하게 항간에 떠도는 소문들이 화제가 되는 것을 나는 많이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얼마나 인간적인가를 웅변해 준다는 의미로 보는 게 옳다고 본다. 박권상이 훌륭한 언론인인 동시에 마치 신처럼 완벽하게 공정하고 공평했다는 찬사 듣기를 기대하는 것은 오히려 박권상이 인간미가 없고 진공관 속에 가려진 무결점의 투명인간이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인간적인 약점이 있고, 그것이 실수로 비칠 수도 있으며, 때로 억울한 비난도 듣는 게 아닌가. 박권상은 그런 자기의 인간적인 면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 인간적이다.
그는 말년에 많은 고생을 하다 떠났다. 친구여, 잘 가게. 정말 고생이 많았네! 

(조용중 전 연합통신 사장, ‘박권상 추모 특집- 박권상을 생각하는 몇 가지 단면’, 관훈저널,  2014년 봄호)

 

 

[박권상 추모 특집] 박권상 선배를 추모하며

필자가 박권상 선배를 처음 뵌 것은 국제부 막내기자 시절, 그것도 상 면이 아니라 런던특파원으로 계시던 선배의 원고였다. 기억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기사를 편지봉투에 넣어 보내왔다. 유럽 특파원들이 우편 으로 기사를 보내오던 시절이었다. 어떤 분인가 싶어 흑백사진으로 된 사 원록을 찾아 얼굴을 확인한 것이 처음이었다.
천재는 악필이라던가! 박 선배의 기사는 200자 원고지 칸에 전혀 구애받 음 없이 글씨가 ‘그려져 있어’ 아무도 읽지 않으려는 기피 필체였다. 문선부 의 전담직원이 그 필체를 ‘해독’해 활자화해 주면 그 원고를 데스크 선배들 이 다듬어 게재하곤 했다. 병아리 기자로 대선배들인 해외특파원과는 거리 가 멀어 서로 얼굴 보며 마주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당시 언론사 해외특파원들은 2년에 한 번씩 정부 주선으로 며칠 동안 귀 국기회가 있었으나 박 선배는 오시지 않았다. 박 선배는 ‘대상에서 제외된 인물’ 또는 ‘정부비용부담을 거절한 선배’라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귓전으 로 들었다. 이 이야기에 당황했던 것은 필자가 정부비용으로 가는 2박3일간의 산업시찰을 다녀온 다음에 들은 말이어서 권력과 언론 관계를 처음 으로 느끼게 한 경우였다.

특파원 마치고 ‘영국을 생각한다’ 연재

당시는 엄혹했던 유신시대라 신문제작은 매일 살얼음 위를 걷는 분위기 였고, 데스크 선배들은 외부에서 걸려오는 전화에 시달리는 일이 빈번했 다. 민주주의와 자유언론이 기자들 마음속에 담긴 화두였다.
특파원을 마치고 돌아오신 박 선배는 논설위원으로 계시면서 신동아 78 년 7월호부터 ‘영국을 생각한다’는 제목으로 영국의 민주적 정치시스템, 신 뢰사회, 교육과 복지시스템 등 성숙한 사회제도들을 연재했다. 박정희 정 권과 우리 사회의 반면교사로 영국의 대의제도 등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가슴 답답한 독자들의 인기를 끌었다.
박 선배가 필자를 기억하기 시작한 것은 80년 2월 25일 인촌기념관에서 있은 3김 초청 만찬장소에서였다. 당시는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해 가는 과 정이었고 국민들은 ‘서울의 봄’을 기대하는 분위기인데도 욕심 넘치는 정 치판은 작두날 위에서 춤추는 형국이었다.

(…)

해직되고 후일 박 선배는 이 일을 두고 김상만 회장과 나눈 이야기를 들 려주었다. “일민 회장께서 어느 날 미8군 식당으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인 촌기념관 회동을 박 주간이 DJ를 위해 꾸민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면서 박 주간은 직책상 내 심부름을 한 것뿐이며 사령관에게 그리 전하라고 이야 기했다고 하시더라.” 종업원이 테이블 가까이 오면 대화를 영어로 바꾸어 했고, 특히 몸조심을 당부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고 술회했다.
광주항쟁 때인 80년 5월, 19일자부터 동아일보 2면에 실리던 사설이 없 어졌다. 박 선배가 논설책임자인 주간으로 계실 때였다. 필자는 광주 현장 에 있었지만 편집국 내에서는 제작거부 움직임도 있었고, 사설도 5일간이 나 실리지 않았다. 어렵게 송고한 현장기사는 검열에서 삭제되고, 시민들 에게 불편한 내용은 통과되어 게재되던 그런 시기였다. 사설도 검열 대상 이어서 보통 2개씩 실리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검열에 걸리면 하나만 게재 되고, 통째로 빠지는 날도 가끔 있었다. 5월 31일 발표된 국가보위 비상대 책위원회 출범을 경축하는 당국의 주문사설도 동아일보는 거부했다.

(…)

그는 언론의 힘, 진실의 힘을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론자유가 전제 돼야 한다는 소신과 신념을 갖고 있었다. 1989년 2월 7일 동아시론에서 박 선배는 자유언론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어느 경우든 사실은 신성하고 의견은 자유라는 철학, 바로 여기에 자유 사회의 힘이 있고 자유언론의 빛이 있지 않을까. 진실과 허위가, 선과 악이 자유롭고 공개된 시장에서 당당하게 경쟁하면 반드시 진실이 이기고 선이 살아남는다. 자유언론이 대의민주주의의 기본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52년 23세의 나이로 기자생활을 시작한 그는 동아일보를 거쳐 KBS 사장을 마칠 때까지 50년간 언론인으로 보내면서 편하지 않은 세월에도 웃음을 잃지 않으셨고, 和而不同의 좌우명대로 자기중심의 원칙을 유지해 온 선비기자였다.

(최맹호 동아일보 대표이사 부사장 , ‘박권상 추모 특집- 박권상 선배를 추모하며’, 관훈저널,  2014년 봄호)

 

 

[미니회고록] 참 쓰기 어려웠던 두 社說… 군사통치하에서 신문을 만든다는 것

언론생활 51년 반. 보고 듣고 쓰고 전달하는 보도적 기능은 대체로 젊었을 때 하는 것이고, 나이 들고 경험을 쌓으면서 기자들이 취재·수집한 수많은 정보 가운데 알려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을 골라 대소경중을 가려 지면에 배열하는 편집 작업을 맡고 지휘한다.

보도·편집하는 일과는 별도로 일단 알려진 사회현상에 관하여 해설·분석 및 가치판단을 내려, 독자들의 인식과 이해를 돕고 주장을 펴는 논설기능이 있다.

전자를 뉴스(보도)기능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의견(논설)기능이다. 선진언론은 뉴스와 의견을 가능한 한 엄격히 분리한다. 사실을 정확히 전달하고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을 자유롭게 제시하며 자기 주장을 내세우기도 한다.

(…)

유감스럽게도 할 소리를 제대로 못한 것이 아쉬웠다. 사설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것이었다. 부끄러운 일이다. 이 사설을 넘긴 후 나는 계동 인촌기념관에서 IPI 이사장 환영만찬에 참석하였는데, 밥 먹는 도중 쪽지가 들어왔다. 내가 쓴 사설이 검열과정에서 ‘보류’되었다는 보고였다. 검열장교들이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상부의 판단을 상신한 것이다. 그리고 1시간 후, 만찬이 끝날 무렵 다시 쪽지가 들어왔다. 전문 삭제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차라리 후련했다. 나 스스로도 무슨 말인지 무슨 뜻인지 분명치 않은 그런 사설인데, 그것이 활자화되어 독자 앞에 전달되는 것이 오히려 부끄럽고 쑥스러운 일이기에 차라리 ‘무사설’이 죄를 덜 짓는 것이라고 자위했다. 참고로 검열당국이 몰수한 이 부끄러운 사설 전문은 다음과 같다.

自由와 安全과 團結
-「金大中事件」의 수사발표에 관련하여-

이 時點에서 새삼 지적하고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하는 엄연한 현실이있다. 즉 우리는 北에 도사리고 있는 「스탈린」主義的 共産獨裁體制와 끊임없는 경쟁관계에 있다는 事實이다. 우리가 生存하기 위해서는 이 對決과 이 경쟁에서 항상 견디어내야 하고 반드시 이겨내야 한다. 그러기위해서 우리는 강해야 한다.

우선 物理的 힘을 갖추어 軍事的 도전을 물리쳐야 한다. 軍事的 勢力 균형으로 平和를 수호해야할 뿐 아니라 經濟的으로 北을 壓倒하여 統制經濟에 대한 自由經濟의 우수성을 과시해야 한다. 敵과의 대결에서 더 優位에 설뿐 아니라 政治體制에 있어 北韓共産獨裁를 눌러야 한다. 즉 自由와 民主主義가, 社會正義와 人道主義가 뿌리내린 自由基地를 굳건히 다져 이른바 「北半部革命基地」에 自由의 바람을 불어넣어야 한다. 自由體制의 구현, 그것이 3·1獨立선언에 明示된 民族의 비젼이요, 이것이 해방후 이룩한 建國의 理念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自由體制를 확립하는 과정에 있어 어쩌면 우리 모두 看過하기 쉬운 요소들이 있다. 法과 질서, 단결과 능률 등 諸價値의 體得없이 自由와 民主主義는 成立하기 어렵고 成立한다 해도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歷史의 교훈이다.

그런 상황 아래서는 民主主義는 우유부단이고 民主主義는 分裂이고 民主主義는 利己主義로 전락하며, 獨裁主義는 곧 능률이요, 단결이요, 忠誠心의 대명사가 되고 만다. 여기서 民主主義가 國民에게 自由를 주되 安全保障이라는 기본요소를 주는데 실패할 수도 있다.

언제나, 그리고 오늘의 현실에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安全保障없이 自由없고, 화해 단결없이 安全保障 없으며, 自由없이 화해 단결없다는 순환논리다.

이상의 論理에서 5·17사태와 5·17을 가져오게 한 일련의 사태는 실로 가혹한 民族의 시련이며 5·17에 앞서 일어난 學生中心의 社會混亂과 관련, 當局이 발표한 「金大中事件」에 접한 국민의 충격은 실로 크다고 본다. 戒嚴當局은 金씨등 37명을 『內亂음모 國家保安法 反共法 外國換管理法 및 戒嚴布告令위반혐의로 戒嚴普通軍法會議 檢察部 에 구속송치할 방침』을 밝힌바 있다.

國內外에 큰 충격을 준 이 事件에 대해 法의 審理과정에서 眞實이 소상히 밝혀질 것이고 公正한 法의 심판을 기대하거니와 新聞倫理要綱에따라 「재판의 判決에 영향을 주는 評論」을 삼가고자 한다. 다만 이 불행한 사건의 귀추를 지켜보고자 한다.

그런데 흥미있는 후일담이 있다. 그해 지루한 여름이었는데, 8월 9일 나는 동아일보를 떠났다. 그에 앞서 7월 말엔 편집인 겸 논설주간 자리가 떨어지고 ‘통일연구소 연구위원’으로 격하되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구출하고자 하는 회장, 사장의 충정인 듯싶었으나, 열흘이 못가 ‘자기 정화’라는 이름으로 사표를 쓰고 물러났다. 당연히 외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동아일보는 편집총책임자가 그만두었지만 단 한줄의 퇴직관련 기사도 인사발령도 내지 않았다. 검열에 통과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특히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샘 제임슨 기자는 내가 50년대 미국의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할 때 같이 다녔던 동창생 친구. 그는 8월 13일 ‘남한, 400명의 언론인 숙청’이라는 장문의 기사를 냈고, 거기에는 동아일보 편집인인 내 이름을 대표적으로 냈다. 노스웨스턴 출신으로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언론인의 한사람이라고 부연하였다. 그것이 LA타임스 신디케이트를 통해 수백개의 미국 신문에 보도되었으며, 노스웨스턴에 있는 시카고의 트리뷴지는 이 기사를 받아 8월 19일부 사설에서 내 이름을 거명하며 ‘남한의 병영민주주의’를 규탄하였다.

런던의 더 타임스는 8월 21일자 외신면 톱으로 동경특파원 피터 헤젤하스트 기자의 소상한 ‘언론숙청 캠페인’기사를 실었다. 그 기사 일부는 다음과 같다. “그들(숙청된 자들) 가운데는 동아일보 편집인 박권상 씨가 포함되어 있다. 동아일보의 전 런던특파원이었던 박권상 씨는 구속중인 야당지도자 김대중씨에 대한 공정한 재판을 요구한 사설을 군검열관에 제시함으로써 정부당국을 화나게 하였는데, 그 사설은 인쇄되지 못했다. 언론에 대한 테러 캠페인은 철두철미하다. 내가 오늘 아침 서울의 자택에 있는 박씨에게 전화했을 때 그는 ‘내 상태가 안 좋으니 지금 당신을 만나지 않는 것이 좋다. 추후에 만나자. 이해해주기 바란다’고 대답했다.”

이 기사는 동아가 또한 내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공정한 재판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리고 역사에 기록하게 한 것이다. 그후 얼마 안되어 헤젤하스트 기자를 만나, “아는 사람이 몇 없었을 텐데, 어떻게 계엄당국의 검열에서 전문삭제된 사설이야기를 들었느냐”고 물어보았다. 사실, 희한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대사관측의 확실한 소스로부터 들었다는 것이다. 진실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햇볕 아래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서양 격언이 생각난다.

독자가 읽지 않았고 읽을 수 없는 사설을 썼다는 것, 그것은 보람 있는 일이었다.

박권상
.서울대 졸업
.미 노스웨스턴대 대학원 석사
.미 하버드대 니만펠로 과정
.고려대 명예 정치학 박사
.합동통신 기자
.세계통신 정치부장
.한국일보 논설위원
.동아일보 논설위원, 편집국장, 영국특파원, 편집인겸 논설주간
.시사저널 편집인 겸 주필
.위암장지연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
.고려대 언론대학원 석좌교수
.일민문화재단 이사장
.KBS 사장 
  
(박권상 경원대 석좌교수, ‘미니회고록- 참 쓰기 어려웠던 두 社說’, 관훈저널,  2003년 가을호)

 

 

박권상
시 대 : 현대
출생지 : 전북 부안군
출생일 : 1929년

언론으로서, 언론인으로서 역사의 지식, 인간의 지혜, 통찰력, 표현력, 그리고 사물을 요약하는 지능, 어느 한가지도 소홀할 수 없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소중한 것은 디오게네스가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면서 추구했다는 「진실」에 대한 신앙이 아닐까. 그것은 어떤 단편적인 사실이 아니라 나타난 사실을 둘러싼 포괄적이고 완전한 진실이다. 그런 진실을 알리고 부추기고 가꾸고 꽃피우는 것, 그것이 곧 언론의 생명이요, 빛이요, 뜻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박권상칼럼 「대낮에 등불을 밝히고」중 일부)
언론인 박권상은 1929년 10월 25일 부안에서 태어났다. 전주고에 이어 서울대 영문과에 입한한 그는 대학시절 6·25전쟁을 겪어야 했고 52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졸업장을 받은 다음날 합동통신기자가 돼 저널리스트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
 
(‘박권상’, 인터넷 전라북도문화관광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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