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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동아일보 사람들- 문명호

Posted by 신이 On 11월 - 6 - 2018

 

문명호(文明浩, 1940~2017)는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1965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워싱턴특파원과 외신부장, 논설위원 등을 지냈고 이후 문화일보 논설실장과 논설주간이사를 거쳐 고려대 신방과 석좌교수,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공정언론시민연대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문명호(文明浩) (대전, 1940~ ) △ 65.2 수습(편집국), 기자(사회부, 월간부, 경제부, 외신부), 주미특파원(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3권, 동아일보사, 1985)

 

 

 

`아침바다 갈매기…`여 편히 쉬소서…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지난 1월3일 하늘로 떠난 문명호(文明浩) 형이 국민학교 5학년때 지은 동시다. 이 시가 소년세계라는 잡지에 실리고 작곡가 권길상 선생의 곡을 얻어 바다라는 동요가 되었고 어린이 세계에서 널리 애창되었다. 서울중고등학교 6년 서울대 문리대 4년을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가까운 사이였지만 그가 동요 바다의 작사자라는 사실은 까마득하게 모르고 지냈다.

그러다 동아일보에 입사한 한참 뒤 동료들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듣고 인사겸 말을 건넸는데 그가 달갑지 않아 하는 반응을 보였던 기억이 있다. 머쓱한 기분이었지만 잊고 지냈는데 먼후일 한 잡지에 실린 글을 보고서야 아 그래서 그랬구나 뒤늦게 그의 당시태도에 납득이 갔다. 그가 외신부장을 할 때 ‘동요 바다의 작사자 문명호와 작곡가 권길상의 만남’ 이라는 대담기사가 객석에 실린 일이 있다. 그 대담에서 그는 당시 동아일보에는 쟁쟁한 문인들이 많이 계셨는데 어릴 때 지은 동시 단 한 편으로 시인처럼 불리는게 매우 부담스러웠다고 술회했다.

그의 겸손한 일면이다. 그는 기억력이 남달라 보였다. 우리가 서로 잘 아는 많은 사람들의 일화를 그는 많이, 그것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으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우스운 대목만을 골라 요즘 말로 퍼나르는 데 능했다. 가령 어떤 이를 만나 언제 어디서 어떠셨다면서요? 화제로 올리면 엉~? 그거 어디서 들었어, 명호한테 들었지? 답이 오는 경우가 많았다. 논설위원으로 가까이서 지낼 때 보면 그는 신문 스크랩을 철하지 않고 책상에 수북이 쌓아두는 일이 많았는데 사설이 맡겨지면 용케도 그 스크랩더미 속에서 필요한 자료를 신속하게 찾아내 글을 쓰곤 하였다. 부러울 만큼 불가사의한 기억력이었다. 그는 부지런하였다. 동아일보에서의 활약은 물론이거니와 동아일보 퇴직후의 경력들이 그의 부지런한 면모를 여실히 말해 준다. 문화일보로 자리를 옮긴 뒤 논설실장과 논설주간을 거치고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을 맡는가 했더니 대한언론인회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부회장을 지냈다. 언론인이면 많은 이들이 거치는 이력이긴 하지만 맡겨지는 일을 피하려 하지 않는 적극적이고 부지런한 태도가 그런 여러경력을 더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런 태도 때문에 그는 고려대학교의 석좌교수직도 맡았고 공정언론시민연대 공동대표로서 우리 방송사들의 편파, 불공정 보도를 비판하는 일에 적극 참여했다. 그런가하면 김진현씨가 초대회장을 맡아 1994년 창립한 동해연구회의 학술,홍보활동에도 적극 참여해 국제세미나 참가 후기를 신문에 기고한 것을 본 적이 있다. 항상 약속시간을 놓친 사람처럼 분주히 오가던 그의 모습이 벌써 그리워 진다.

동아일보 재직시 그가 사장실 비서부장으로 발령받았을 때 주위에선 ‘어? 그의 차례가 아닌데’ 의아해 하는 수근거림이 있었다. 한창 넓은 세상을 휘젓고 다니고 싶고 편집국장 쯤을 욕심내던 장년기자들에게 사장실 비서부장 직책은 누구라도 가능하면 피하고 싶을 분위기였고 인사 관례상 다음은 누구일 것이다. 예측하고들 있었는데 누군가 그 관례를 흔들어 만만한 문명호를 그 자리에 밀어 넣은 게 아니냐는 수근거림이었다. 하지만 문명호 그는 그 직책을 충직하게 수행하며 황금보다 귀한 인생교훈을 챙겼다는 생각이다. 그는 언젠가 사석에서 일민을 모시고 영국을 갔을 때의 얘기를 하며 그 어르신 와이셔츠의 칼라와 소매깃이 나른나른 헤졌더라면서 마음 깊은 존경심을 표하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어르신이 돌아가셨을 때 많은 사람이 지켜 보는 자리였지만 그 영전에서 펑펑 눈물을 참지 못하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같이 선하게 살지 못한 사람이야 하늘에서 그대를 다시 보지는 못할테지만 편히 계시게. 6개월 전에 먼저 떠난 부인도 만났을 테고 워싱턴 특파원을 마치고 귀국하며 미국에 유학시킨 외동아들도 어엿한 국제변호사가 되어 유수한 IT기업의 대표가 된 것을 보고 떠났으니 걱정할 게 뭐 있겠나. 평화의 안식을 누리시게.

故 문명호 동우를 추모하며

(강황석 전 논설위원, ‘아침바다 갈매기…여 편히 쉬소서- 故 문명호 동우를 추모하며’, 동우회보, 2017년 1월 23일 10면)

 

 

[취재 여담] 취재 현장에서 뛴 40년

문명호 | 대한언론인회 주필 전 문화일보 논설주간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동아일보 사회부, 경제부, 워싱턴특파원, 외신부장, 부국장, 논설위원
■문화일보 이사 겸 논설주간
■고려대 석좌교수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공정언론시민연대 공동대표

‘취재….’ 이 말은 국내외 일선현장에서 40여 년간 사건을 쫓으며 지 내온 내게 참으로 가슴을 뛰게 만드는 말이다. 이 말은 어쩌면 언론인으로 살아온 지나간 내 삶의 원동력이었다.
1985년 5년간의 동아일보 워싱턴특파원 임무를 마치고 본사 외신부장 (현재의 국제부장) 직으로 돌아온 내게 당시 편집국장으로부터 떨어진 지시는 타사에 앞서 모스크바특파원 파견과 소련 미디어와의 협력 구축 길을 추진해 보라는 것이었다. 다른 메이저 신문들도 은밀하게 모스크바 파견을 뚫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나는 우선 도쿄와 워싱턴 지국에 모스크바 개척에 필요한 정보를 입수해 보내도록 비밀전문을 보내고 모스크바 길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소련 내 한 국계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떠오른 인물은 전부터 명성을 들어 알고 있던 한국계 사학자로 당시 소련 과학아카데미(IMEMO)의 동방학연구소 제1부소장을 맡고 있던 게오르기 김이었다. 그는 학계에서 존경받는 학자로 소련 정부의 대한반도 정책에도 많은 자문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순회특파원으로 전쟁 중인 사이공에 가다

1974년 10월 당시 전쟁 중이던 베트남을 비롯해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선 연일 데모가 일어나는 등 정정이 혼란스럽고 불안정했다. 나는 동남아 순회특파원으로 먼저 홍콩에서 ‘청천백일기와 홍기’란 칼럼 글 한 쪽을 송고하고 곧바로 사이공으로 날아갔다. 독립궁 가까운 파크호텔에 짐을 풀고 우선 국내 정정을 알아보기 위해 티우 정부에 비판적인 ‘다이단 톡'(베트남어로 ‘대민족’이란 뜻) 지를 찾아가 발행인 겸 편집인인 보 롱 트리우 씨를 만났다. 그는 ‘디엔 틴’, ‘송탄’ 지 등 29개 언론사와 함께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을 하고 있었는데 국내외 정세를 자세히 설명해줬다.
그러곤 티우 정부에 비판적인 정계지도자 부 반 마오 씨나 트란 반 튜엔 씨를 만나보라고 권했다. 곧 부 반 마오 씨에게 연락했지만 그는 지방에 나가 사이공에 없었다. 마침 트란 반 튜엔 씨가 자택에 있어 곧장 달려가 장시간의 인터뷰를 가졌다. 역시 같은 동료인 기자는 1차적이며 가장 좋은 뉴스 소스였다. 트란 반 튜엔과의 인터뷰 기사가 동아일보에 나가자 티우 정부는 한국 정부를 통해 유감을 표시했다. 사실 티우 정부는 탄압과 부패로 비판받고 있었지만 한국엔 매우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그때만 해도 밤이 되면 매일같이 사이공 가까운 전선에서 ‘쿵, 쿵’ 하고 대포 소리가 들려 잠을 잘 이룰 수 없었다. 내 일과는 아침에 소금 한 줌과 물병을 차고 취재에 나가고 저녁이면 호텔로 돌아와 서울 본사에 보낼 기사를 작성, 사이공 전신전화국으로 달려가 기사 송고를 마치고 난 후 밤 12시가 넘어 호텔로 돌아와 빵 몇 조각으로 허기를 때우는 형편이었다. 송고 기사를 들고 전신전화국으로 달려갈 때면 으레 양담배 몇 갑을 준비했다. 지금도 기억하는 전신 타자수는 ‘미스 하’란 베트남 여성이었는데 다른 영어권 기자들의 송고 기사는 영어로 되어 있어서 텔렉스를 치기가 익숙했지만 한글 기사는 달랐다. 예를 들면 ‘나는 간다’ 하면 로마자 표기로 ‘naneun ganda’로 되어 있어서 내가 한글에서 텔렉스 문자로 바꾼 기사를 베트남 사람인 ‘미스 하’로서는 잘 알아보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한 자 한 자 내 설명을 들어가며 친 텔렉스 기사를 본사에 보내고 나면 밤 12시가 가까워 호텔로 돌아오곤 했다.
지금도 기억에 또렷한 것은 언젠가 취재를 마치고 7시쯤 파크호텔로 돌아오니 정문 앞 정원에 호텔 주인이 앉아 있었다. 그때 호텔엔 주로 외국인 손님들이 거의 다 베트남을 떠나 몇 사람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지친 몸으로 호텔에 들어서자 파크호텔 사장이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봐요, 좀 쉬어 가면서 일하지그래요. 여기 호텔 꼭대기에 근사한 나이트클럽이 있어요. 베트남 아가씨도 있고 프랑스 혼혈 아가씨들도 있으니 올라가서 좀 즐기세요. 요즘 손님이 없어요. 마지막 손님이니 특별히 무료로 서비스하겠어요.” 지금도 후회되는 것은 기사 작성과 송고에만 정신을 쏟아 그때 사이공에 접근하는 베트콩 공세 소리를 들으며 한창 전쟁 중의 나이트클럽 분위기 취재를 하지 못했던 일이다. 나는 그 사장에게 물었다. “월남인들은 호찌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의 대답은 “호찌민은 민족주의자다”였다.
이제 워싱턴과 뉴욕의 유엔 취재 시기로 옮겨 본다. 1983년 9월 1일, 알래스카를 떠나 서울로 오던 대한항공 747여객기가 사할린 남단 해상에서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된 사건이 발생했다. 269명의 무고한 승객과 승무원들이 기체와 함께 바다에 추락해 희생됐다. KAL 승객 가운데는 미국의 래리 맥도널드 하원의원 등 미국인 승객 21명과 일본인 승객 27명도 있었다. 한국은 소련의 만행을 규탄하고 국제여론을 일으켜 사건조사와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미국과 협력했다. 9월 2일 미국은 일본, 캐나다와 함께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소집을 요청, 9월 3일부터 안보리 회의가 열렸다. 조지 슐츠 미 국무장관은 진 커크 패트릭 주유엔 대사에게 유엔이 소련의 민간항공기에 대한 무력사용을 규탄하고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의 사건진상 조사 및 보고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도록 외교력을 다하라고 훈령했다.

열 띤 공방을 벌인 유엔 안보리의 대소련 규탄결의안

안보리 회의는 12일간 6차에 걸쳐 열렸다. 한국은 유엔 회원국은 아니었지만 (남북한은 1991년 9월 17일 동시가입) 피해 당사국이었기 때문에 김경원 주유엔 대사가 참석했다. 안보리에선 매일 대소 규탄결의안을 둘러싼 찬반 공방이 회의장을 열띠게 만들었다. 한국은 비록 옵서버 국이었으나 미국 등 서방 대표단과 긴밀하게 협력해 나갔다. 당시 나는 사안이 사안인 만큼 워싱턴을 비우고 거의 뉴욕 유엔본부에서 살다시피 했다.
안보리 투표권을 가진 나라는 상임이사국과 비상임이사국을 합쳐 15개국이었다. 문제는 과반수 지지를 확보해야 규탄결의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미국은 유엔 본부 맞은편에 위치한 미국 대표부와 유엔 플라자호텔을 거점으로 회원국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막후 로비활동을 벌였다. 워싱턴에서 특별지원팀이 파견되고 투표전략으로 결의안 상정이 늦추어지기도 했다. 나는 매일같이 유엔과 한국, 미국, 일본 대표부 등을 뛰어다니며 지지표 확보 여부를 취재하는 것이 일과였다.
긴장된 나날의 연속인 가운데 마침내 채택에 필요한 9표가 확보됐다는 정보가 유엔 최고위 외교관으로부터 입수됐다. 미국이 마지막으로 지지표 획득에 성공한 나라가 지중해의 조그만 섬나라 키프로스이며 상당한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다는 확실한 정보도 함께 들어왔다. 당시 키프로스의 유엔대사는 유엔 경력이 가장 긴 노회한 인물이었다. 사안에 따라 서방 측과 소련 측을 왔다 갔다 하는 그에겐 그와 협상을 가진 미 외교관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다. 마침내 대소 규탄결의안이 9월 12일 안보리 제16차 회의에서 가 9표, 부 2표, 기권 4표로 채택되는 것이었으나 끝내 상임이사국인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채택되지 못했다.
내가 취재한 키프로스 표 확보와 미국의 경제지원 약속은 대소련 규탄결의안이 채택되느냐, 못 되느냐로 신경이 온통 유엔에 집중되고 있는 마당에 서울로 송고하면 단연 1면 톱뉴스였다. 그러나 나는 이 특종기사를 송고하지 않았다. 안보리 표결을 앞두고 이 기사가 나간다면 소련이 어떤 방해공작을 펼지 모른다는 국가이익 차원에서의 고려와, 그보다 이 톱뉴스 정보를 ‘오프 더 레코드’로 들었기 때문에 유엔 외교관과의 신뢰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 더 특기할 것은 고 김경원 유엔대사가 피해당사국 대표로서 특별 발언권을 얻어 소련의 “KAL기 첩보비행”이라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분투한 것과, 싱가포르의 토미 코 유엔대사가 분연히 일어 나 소련 주장을 논리정연하게 반박하며 한국 입장을 적극 지원한 일이다. 단정한 학자 타입인 토미코 대사는 후일 ‘유럽-아시아 포럼’에서 몇 번 만 나 가깝게 된 ‘내가 만난 잊을 수 없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신문사 후배들에게나 대학 저널리즘 강의에서 내가 가장 강조하는 말이 “기자는 현장을 지켜야 한다”다. “현장을 뛰지 않는 기자는 기자가 아니다” 라면 지나친 말일까? 나는 취재활동을 통해 현장을 뛰며 많은 것을 얻고 또 많은 경험을 했다. 때론 운도 따라야 한다.
1988년 4월 서베를린에서 동서독 관계 전망 국제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다. 그때만 해도 그 1년 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그다음 해인 1990년 동 서독 통일이 이루어지리라곤 독일인도, 누구도 몰랐다. 주말, 나는 일행과 함께 동베를린 검문소로 들어 갔다. 동독 경찰은 내 여권과 얼굴을 대조해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서류에 통과 스탬프를 찍 어 주었다. 11년 전 신년특집으로 그곳에 갔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아마도 호네커 동독 공산 당 서기장의 고향 (서독 사란트 지방) 방문으로 동서독 관계 완 화와 그해 88서울올림픽 분위 기 영향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검문소를 통과해 동베를린으로 들어간 나는 브란덴부르크 쪽으로 간 일행과 떨어져 중심가인 ‘운터 덴 린덴(‘보리수나무 아래’란 뜻)’ 가를 걸어 국립오페라하우스와 훔볼트대학을 지나 서베를린에 서 오는 고속전철 S반 종착역이 있는 알렉산더 플라츠(광장)에 이르렀다.

동베를린 광장에서 우연히 만난 ‘이산가족’

나는 그곳 광장 분수 앞 벤치 에서 우연히 노인 부부와 젊은 내외, 어린이가 서로 껴안고 볼 을 부비며 기뻐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60대의 노부부는 동베를린에서 8km 떨어진 알트라 우드스버그에 사는 한스 페트 리 씨와 아내 시즈비아 페트리 씨였고, 30대의 건장한 아들은 서베를린에 사는 기계공 쿠르트 페트리 내외와 손자였다. 누이도 동독의 부모와 함께 왔다. 그야말로 큰 뉴스거리였다. 아 들 가족은 갖고 온 바나나, 초 콜릿, 담배 등 식료품을 부모와 누이에게 건넸다.
아들 쿠르트는 18세 때인 1970년 서독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채포돼 5 년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석방되자 다시 서베를린으로 탈출해 나왔다고 했다. 서베를린의 아들은 비자 없이도 서베를린에서 S반을 타고 아무 때나 동베를린에 올 수 있기 때문에 동서독 이산가족들에겐 동베를린이 가장 편리한 상봉 장소였던 것이다. 페트리 씨의 동서독 가족은 한 달에 두 번씩 은 꼭 만나 가족의 정을 나눈다고 했다. 서베를린 가족은 밤 12시까진 돌아가야 했다. 그러고 보니 페트리 씨 가족뿐 아니라 광장 곳곳에서 동서독 가족들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당시 동서독 가족들의 만남을 취재하며 남북한 이산가족상봉이 그렇게도 어려운 우리의 현실과 너무도 비교되어 서글펐다. 지금도 기억되는 것은 동독의 페트리 씨에게 “노인이라 아들이 사는 서독으로 옮겨갈 수 있는데 왜 가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이렇게 자주 만날 수 있는데 무엇 하러 가겠는가. 나 같은 노인은 고향에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 이었다. 이 동서독 가족의 동베를린 만남 기사는 사진과 함께 동아일보 한 면을 차지해 보도됐다(1988년 4월 30일자).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동서독 분단 상황에서 한국 기자가 어떻게 동베를린 대광장에서 몇 시간 취재를 했는지, 아마도 젊은 시절의 도전적인 프로페셔널리즘과 운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아직 못다 한 얘기가 많지만 이제 마칠 때가 됐다. 한 가지 면구스러운 것은 취재 여화를 쓰다 보니 잘한 일들을 주로 쓰게 된 것이다. 그러나 때론 판단을 잘못하고 실패한 일도 적지 않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가 미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긴 연설 중발이 저렸든지 한쪽 신발을 벗은 모습을 상원 2층 기자석에서 내려다보며 카메라를 가져오지 않아 일대 특종을 놓친 것, 핀란드-소련 관계 취재를 위해 국경쪽으로 무작정 달려가다 국경선에 서 소련군이 기관총을 들고 불쑥 튀어나와 혼비백산한 일, 파키스탄 페샤와르에서 소련군에 대항하는 아프간 반군을 찾아 이 또한 무작정 카이버령을 넘어가다 강도 출현 얘기를 듣고 되돌아온 일, 월남 패망 직전 사이공 파크호텔 나이트클럽 분위기 취재를 못 한 것 등등….
그러나 나는 지난 40여 년을 일선기자로 또는 논설위원으로 취재보도 현장을 지켜온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감사한다. 
 
(문명호, ‘취재 여담- 취재 현장에서 뛴 40년’, 관훈저널, 2014년 6월호)

 

 

우리는 진정 신문을 사랑했다

“나는 선배들처럼 언론인으로 평생‘외길’을 걸어 온 것, 그리고 조금이나마 사회를 위한 건전 비판과 여론 형성에 일조했다는 것을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1980년대 중반, 워싱턴으로부터 본사 외신부장으로 귀임한 내게 편집국장으로부터 모스크바 특파원 파견과 소련 미디어와의 업무협력을 추진해 보라는 지시가 떨어 졌다.
물론 당시 한국과 구 소련 간엔 국교관계가 없는 상태였다. 동아일보뿐 아니라, 조선 중앙 등 중앙의 메이저 신문들도 각기 은밀하게 모스크바 특파원 파견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나는 우선 도쿄와 워싱턴 지국에‘비밀사항’으로 전문을 보내 본사의 이 같은 계획을 알리고 모스크바 개척에 필요한 정보를 입수해 보내도록 지시했다.
본부의 나도 빠르게 움직였다. 먼저 소련에 살고 있는 한국계로 특파원 파견 추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유력자가 누구인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조사해 본 결과 전에부터 익히 그 이름을 알고 있던 첫 인물로 당시 소련 과학아카데미의 동양학연구소 제1부소장을 맡고 있던 한국계 사학자 게오르기 김(1989년작고)이 떠올랐다.

(…)

37년의 아쉬움과 감사

지난 37년간 동아일보와 문화일보에서 활동한 언론계 생활을 돌아보며 일말의 아쉬움과 회한이 없을 수 없다. 무엇보다 왜 더 좋은 글을 더 많이 쓰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특히 책을 더 많이 읽고, 또 몇 권의 책을 더 펴내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 하버드대학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기획해 동아일보에 15회 가량 연재했던‘하버드 일기’를 더 보완해 책으로 내지 못한 것도 후회스럽다. 또 5년간의 워싱턴 특파원을 마치고 돌아와 모아 두었던 취재 자료들을 활용해 더 내용이 깊은 책을 쓰지 못한 것도 후회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아쉬운 것은 그 긴 생활동안 만난 많은 좋은 사람들과 돈독한 관계를 다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중엔 지금까지도 관계가 이어지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나는 언론계 선배들처럼 언론인으로 평생‘외길’을 걸어 온 것 그리고 조금이나마 사회를 위한 건전 비판과 여론 형성에 일조했다는 것을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고락을 함께 한 언론계 선·후배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복 받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몇 해 전 한 언론지에 기고한 글을 옮기며 마치려 한다.
“그 시절 존경하는 후석 선생의 가르침대로 지사정신, 선비정신으로 밤낮 없이 일했던 기자들에겐 신문이 모든 것이었다. 신문은 소중한 뉴스원이었을 뿐 아니라 점심 저녁시간엔 책상위에 깔고 음식을 먹던 상이었고 낮잠 때는 얼굴에 뒤집어 쓴 가리개였으며, 책상 위에서 잘 때는 깔고 잔 요와 이불도 되었다. 공무국에선 일할 때 접어 쓴 모자도 되었으며, 세종로 일대를 메운 민주화 시위 때는 길게 말아 학생 시민들에게 흔들던 깃발도 되었다. 우리는 신문을 만드는데 열정을 다 했고, 진정코 신문을 사랑했다.”

☆ 필자 : 1940년 1월 28일생,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신문대학원 신문학 석사,
미국 하바드대 페어뱅크 동아시아연구소 연구원, 동아일보 워싱턴특파원, 논설위원, 문화일보 논설주간, 세종대 겸임교수 고려대 석좌교수 공정언론 시민연대 공동대표(현) 
 

(문명호, ‘우리는 진정 신문을 사랑했다’, ‘실록 언론언론인의길(1)-그때 그 현장 못다한 이야기’, 2011, 179~188쪽)

 

 

 

2 Comments »

  1. Es sind maximal 0 von 37 Trophäen erspielbar.

    Comment by Bridgett — 2019/08/28 @ 10:40 오전

  2. Die Kosten sind von den Teilnehmern selbst zu tragen.

    Comment by Bernardo — 2019/08/29 @ 9:2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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