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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동아일보 사람들- 노자영

Posted by 신이 On 11월 - 6 - 2018

 

노자영(盧子泳, 1896~1940)은 1919년 매일신보에 시가 당선돼 등단한 뒤 1921년 8월 21일 동아일보에 기자로 입사했다. 입사 당시 평남 송화 출신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고 밝혔으나 황해도 장연 출신에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學)과 도쿄 제일외국어학교 영어과에서 수학했다는 얘기도 있다. 창간기자 유광열은 자신과 동갑(1898년생)이었으며 기자로서 그리 활발한 편은 못되어 “그는 몇 번인가 신문기자 생활이 성격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며 “어느 때에는 사회부 데스크로부터 몹시 나무라는 말을 듣고는 그의 하숙처인 청진동에 가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울고 있는 것을 내가 가서 위로한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1923년 연애서간집 ‘사랑의 불꽃’이 베스트셀러가 된 뒤 1924년 5월 퇴사했다.

 

노자영(盧子泳) (송화, 1896~ ) ▲ 1921. 8 기자, 1924. 5 퇴사. 〔소설가, 호 춘성(春城)〕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기미이후(己未以後) 15년간(十五年間) 조선문독자(朝鮮文讀者)의 동태(動態)(下)

시장(市場))의 인기(人氣)는 일시(一時)지만 그때에는 춘원(春園)이 첫째, 다음이 노자영씨(盧子泳氏)였다. 홍수(洪水)같이 불어가는 저급독자(低級讀者)는『춘원(春園)』하면 몰라도『춘성(春城)』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연애서간집(戀愛書簡集)『사랑의불꽃』은 과연(果然) 많이 팔린 중(中)의 하나이다. 백발(白髮)이 성성(星星)한 영감쟁이도 젖 떨어진  소년소녀(少年少女)도 점잖은 신사(紳士)도 기생(妓生)갈보도 누구나 그 책(冊)을 안본 그때사람이 없을 것이며 그 노씨(盧氏)가 이『사랑의불꽃』에서 번 돈으로 10여종(十餘種)의 『시(詩) 수필(隨筆) 감상(感想) 연애서한(戀愛書翰)』을 난재(亂載)한 단행본이 쏟아져 나왔다.

(정동규, 동아일보 1933년 9월 2일자 조간 3면)

 

 

석송 김형원과 춘성 노자영의 데뷔

이 무렵 나(남상일-인용자 주)는 독자문예란의 고사(考査)와 시상(施賞)을 담당하였었다. 당시 신문이 매신(每申) 하나밖에 없었고 신문예가 발흥하기 시작했을 때다. 이 난(欄)의 사무가 점차 바빠졌을 때였다. 그런데 그중 우수한 시를 보내준 분이 석송 김형원씨와 고(故) 춘성 노자영씨였다. 두 분은 이 투고(投稿)로 계기가 마련되어 언론계에 등장하여 우리나라 사계(期界)의 중흥을 이루었었다. 조국 광복 후 초대 공보차관으로 관계에 진출했다가 6.25때 불행(不幸) 납북되어 지금은 그의 생사존몰조차 알 길이 없게 되었다.
춘성도 이 투고로 시작해서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불행 조세(早世)했다. 그러나 이 문예란은 두 분을 위해서 등용문이 되었음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며 또 내가 이 난을 다루었기 때문에 두 분의 앞길을 인도하는 소임을 맡았다는 영광을 지금도 오히려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남상일, ‘언론비화 50편- 원로기자들의 직필수기’, 한국신문연구소, 1978, 231쪽)

 

 

春城 盧子泳

▲ 1898년 평남 송화 출생
▲ 1940년 서울에서 별세
▲ 평양 숭실중학교 졸업 후 일본 유학
▲ 20년 白潮 동인 박종화 등과 시조 활동
▲ 21년 8월~24년 5월 동아일보 기자
▲ 24년 문학지 <詩人文學> 창간
▲ 경향신문을 거쳐 조선일보에서 잡지 <朝光>과 <女性> 편집담당
▲ 중편소설 <사랑의 불꽃> 시집 <백공작>과 <처녀의 화환> 수상집 <인생안내>

□ 고독한 미문(美文) 기자

노자영은 고독한 기자였다. 신문사에서 말벗이 없었고 밖에 나와서도 말이 적었다. 더욱 집에 가면 가족도 없이 혼자였다. 그는 술 보다도 독한 고독을 씹으면서 그저 묵묵하게 글만 썼다. 그래서 그는 신문기자이면서 문사(文士)로 더욱 널리 알려졌다.
필명은 춘성(春城). 1898년 평안남도 송화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때 부모를 잃고 외롭게 자랐다. 노자영은 1940년 어느날, 41년간의 짧은 생애를 마치기까지 20년간을 신문사와 잡지사, 문단 등에서 고독하게 살다가 고독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 폐결핵으로 몸져 누웠다가 마지막 숨을 거둔 원서동 셋방에서 그의 글에 반해서 늦게 결혼했다는 부인이 쓸쓸한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노자영은 20년대 초, 그리 흔지 않던 선구적 사상을 가진 기자답지않게 섬세한 성격의 문인이었다. 그의 센티멘틀한 미문의 시와 소설들은 때마침 개화의 물결을 타고 신문화에 눈을 뜨기 시작한 청소년층, 특히 많은 여성팬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그러나 그의 너무나 감상적인 미문의 시작 등은 그 언어의 꾸밈이 지나치다해서 일부 평론계에서는 비평이 있었고 더욱 시인 C씨는 정면에서 비난하고 나서기도 했다.그러는 가운데서도 노자영의 작품들은 상당한 부수가 팔렸으며 인쇄수입도 짭짤했다. 그는 오랜 떠돌이 신세를 면하고 원서동에 셋방을 얻어 그의 미문에 반해서 따르던 미모의 여인과 결혼, 고아로 자란 그는 오랜만에 인생으로서 행복한 한때를 이곳에서 보낸다. 춘성 노자영은 그동안 중편소설 <사랑의 불꽃> 시집 <처녀의 화환>과 <백공작> 수상집 <인생안내> 등 대표작을 남겼다.

□ 시 ·소설 등 언어의 꾸밈에 비평도

일찍이 부모를 여윈 노자영은 향리인 송화에서 외로운 소년 시절을 보내고 평양으로 와 숭실중학을 졸업한다.
신문화에 눈을 뜬 문학소년 노자영은 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어느 대학(미상)의 문과에서 수학했으나 고학의 쓰라림을 견뎌내지 못하고 20년 학업을 중단, 귀국한 후 백조 동인으로서 월탄 박종화 등과 시작활동을 시작하면서 장도빈이 주도했던 잡지 <학생>의 기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동갑인 유광렬과의 만남은 그가 21년 8월 동아일보에 기자로 입사했을 때의 일이다. 그의 성장이 그러했듯이 항상 우수에 잠기고 내성적이던 그는 이곳에서 유광렬과 만난 후 그를 유일한 벗으로 사귀었다. 유광렬은 노자영이 세상을 떠난 28년만인 68년 그가 집필한 <한국의 기자상>에서 이렇게 썼다.
“노자영이 1898년생이니 나와는 동갑이며, 그가 1940년에 별세했으니 향년 42세요, 그가 간지도 28년이 됐다.
그와 같이 동아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여러해 하였으나 그는 기자로서 그리 활발한 편은 못됐다. 그는 그때 동아일보 주필이던 장덕수와 동향인이라는 인연으로 입사한 것이다.
그는 얼굴이 남달리 검어서 동료 사이에는 그를 흑인종이라고 놀려댔으나 글은 몹시 감상적인 동시에 미문을 쓰는 재주가 있었다.
이렇게 문재(文才)가 있는 관계로 20년에는 문예잡지 <백조(白潮)>의 동인으로서 감상적인 소녀시(少女詩)를 많이 썼다.
그후 34년 <시인문학(詩人文學)>을 창간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기자로 함께 있을 때 그는 몇 번인가 “신문기자 생활이 성격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고, 어느 때에는 사회부 데스크를 보던 K씨와 충돌하여 몹시 나무라는 소리를 듣고는 그의 하숙처인 청진동에 가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울고 있는 것을 필자가 가서 위로한 적이 있다.“
이렇듯 그는 본인의 말대로 신문기자 생활이 성격에 맞지 않는 연약한 성격의 소유자였을지도 모른다.
노자영은 24년 5월, 동아일보를 그만두고 시인문학지를 창간, 주재하다가 경향신문을 거쳐 조선일보에 근무할 때는 동사가 발행하는 잡지 ‘조광(朝光)’과 ‘여성(女性)’ 등의 편집을 담당했었다.

□ <백공작>보다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노자영이 20년대 초반, 그의 수려한 문학의 꽃을 피울때 사회에는 마침 진보적 사회주의 사상이 팽배하던 때였다. 어느나라 사회나 그렇듯이 비교적 진보세력의 집단체인 학원이나 젊은 지식인들은 이 신사조(新思潮)에 휩쓸려 들어가기 쉬웠다.
노자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당시 사회에서 파생되는 모든 부조리와 불평, 불만들이 자본주의의 병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말수가 적었던 그도 사석이나 공식석상에서도 자본주의의 병폐를 논리적으로 비판하곤 했다.
사회부 데스크로부터 꾸중을 듣고 이불을 뒤집어 쓴 채 흐느낄 정도로 감상적인 그였지만 사회환경을 둘러싼 사상토론의 경우 촌보도 뒤지려하지 않았다. 그는 후일 유광렬에게 “그때 내가 사회부 데스크를 본 K씨와싸운것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때문이었으며 내가 운 것은 자본주의의 냉혹함을 원망하면서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유광렬의 회고는 다시 이어진다. “그때 필자의 사고(思考)도 아주 미숙하였으나 그것을 신문기자의 규율(예를 들면 무슨 일이 있던지 소정한 시간에 원고를 내놓아야 하는 것)을 지키기에 그 문인적 성격이 맞지 않았던데서 나온 업무 진행상의 언쟁이지 크게 자본주의의 폐해라는 성질이 애당초에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필자는 속으로는 고소(苦笑) 하면서도 외롭기만 한 그를 좋은 말로 위로했다.”
노자영은 신문사를 그만두고 한때 미국 유학을 꿈꾸었다. 그러나 학비는 물론 여비조차 마련할 길이 없어 그는 몹시 괴로워 하다가 소년때부터 너무나 한 고생이 빌미로 폐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춘성 노자영! 유광렬이 붙인 별명 ‘黑人種’처럼 그의 얼굴은 검었지만 그는 그가 남긴 작품 <백공작>보다도 하얗고 <사랑의 불꽃>보다 붉고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들을 우리들의 가슴에 남겨둔채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 참고자료: 한국의 기자상(유광렬), 신문백년인물사(한국신문편집인협회)

(김재영 대한언론인회 전문위원, ‘春城 盧子泳’, ‘韓國言論人物史話-8.15前篇(下)’, 92~95쪽) 

 

 

노자영의 시는 향토적 정조를 담았으며, 1920년대에 청춘기의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작문방법을 보여주었다.

호 춘성(春城). 필명 꿈길. 1901년(혹은 1898년) 2월 7일 황해도 장연 출생.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였고, 니혼대학(日本大學), 도쿄 제일외국어학교 영어과에서 수학하였다.

한성도서주식회사, 동아일보사, 조선일보사 등에서 기자생활을 했으며, 청조사를 경영하며 『신인문학』을 주재하기도 했다. 1937년부터 『조광』지 편집을 맡았다. 1922년 『백조』 동인으로 가담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처녀의 화환』(1924), 『내 혼이 불탈 때』(1928), 『백공작』(1938) 등의 시집과 『청춘의 광야』(1924), 『표박(漂泊)의 비탄』(1925), 『사랑의 불꽃 : 연애서간』(1931), 『나의 화환-문예미문서간집』(1939) 등의 문집, 그리고 『반항』(1923), 『무한애의 금상』(1925) 등의 소설집을 간행했다.

1940년 10월 6일 사망했다. 그의 시는 향토적 정조를 담기도 했으나, 청춘기의 감상이나 고독감을 영탄조로 표현한 것이 많아서 미문에 불과하다고 평가되어 왔다. 하지만, 1920년대에 청춘기의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작문방법을 보여준 점은 주목된다.

(권영민, ‘노자영[盧子泳]’,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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