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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동아일보 사람들- 노일환

Posted by 신이 On 11월 - 5 - 2018

 

노일환(盧鎰煥, 1914~6.25때 월북)은 전북 순창 출신으로 배재고등보통학교와 보성전문 상과를 졸업하고 1936년 3월 동아일보 정리부 기자로 입사해 정치부 기자로 활약했으나 1940년 8월 폐간당시 직책은 경리부 사원이었다. 노일환은 해방후 동아일보가 복간될 때 정경부 기자로 재입사해 정경부장을 역임했다. 동아일보를 퇴사한 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소장파 의원으로 활발하게 의정활동을 하다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의원직을 사퇴하고 항소심 계류중 6.25 전쟁이 일어나 월북했다.

 

노일환(盧鎰煥) (순창, 1914~ ) ▲ 1936. 3 사원(정리부, 정치부, 경리부), 1940. 8 폐간. ▲ 중간후 재입사, 이하 권2 참조.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노일환(盧鎰煥) (순창, 1914~ ) ▲ 폐간전 정치부기자. ▲ 45.12 기자(정경부), 정경부장, 퇴사연월 불명.〔국회의원〕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폐간 당시 종업원 총수는 215명이었으며 간부와 사원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사 장 백관수

고 문 송진우

상 무 임정엽(발행인 ? 편집인 겸)

취 체 역 양원모 김용무 현준호 장덕수

감 사 역 현상윤 장현중

▲편집국장 고재욱(경제부장 겸)

정치부장 김장환

사회부장 임병철

지방부장 임봉순

정리부장 안승회

사진주임 송덕수

(※ 학예부 ? 조사부장은 공석)

▲영업국장 국태일(지배인 ? 판매부장 겸)

영업국차장 김승문(도쿄지국장 겸)

광고부장 신태익

서무부장 정내동

경리부장 김동섭

오사카지국장 김정국(석중)

경판주임 박범서

▲공 장 장 장석태(인쇄인 겸)

공장차장 이언진

▲기자(입사순)〓고영환(政) 전홍진(經) 이강성(社) 홍순준(整) 최형종(地) 홍익범(政) 양재하(地) 이근영(地) 장현칠(經) 박승호(學) 윤필구(寫) 백남교(政) 곽복산(社) 김완기(整) 조중옥(社) 오남기(政) 백운선(寫) 윤흥학(寫) 김용선(社) 노수현(調) 고재환(整) 이해방(地) 김정실(社) 이규봉(整) 최익한(?) 이상돈(社) 김한주(政) 이하윤(學) 양효손(經)

(※ 政〓정치부 ? 經〓경제부 ? 社〓사회부 ? 地〓지방부 ? 學〓학예부 ? 調〓조사부 ? 整〓정리부 ? 寫〓사진부 ? ?=소속불명)

▲사원(입사원)〓김유권(공) 한우성(평양지국장) 조종헌(광) 남익(광) 권인채(광) 김권동(광) 임종우 이종태(판) 이필헌(공) 김제영(판) 정균철(판) 차기섭(판) 김우성(경) 고재섭(인천지국장) 노일환(경) 이치종(광) 김관호(판) 김용기(판) 김우선(평양지국) 구제중(판) 박찬혁(오사카지국) 김재철(서) 이원춘(공) 이규진(공) 이용구(공) 장상룡(공) 조능식(광) 김광형(서) 홍원길(인천지국) 민병기(광) 유흥준(평양지국) 김태종(오사카지국)

(※ 광〓광고부 ? 판〓판매부 ? 서〓서무부 ? 경〓경리부 ? 공〓공장)

(이상은 정식사원이며 고원 이하는 생략하였음)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순창군 출신의 언론인이자 정치인.

본관은 풍천(豊川). 조선 전기 예조 판서를 지낸 옥계(玉溪) 노진(盧禛)의 14세손으로, 아버지는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인 송계(松溪) 노병권(盧秉權)이다.

노일환(盧鎰煥)[1914~1958?]은 1914년 순창군 쌍치면 운암리에서 출생하였다. 배재 고등 보통학교를 거쳐 1936년 3월 보성 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하였다. 1936년 『동아 일보』 정치부 기자로 입사, 1941년 8월 폐간될 때까지 정경부 기자로 있었다. 1946년 1월 『동아 일보』가 복간된 뒤 재입사하여 정치부장과 사회부장을 지냈으며, 조선신문 기자 협회 조사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5월 제헌 국회 의원 선거 때 한국 민주당 소속으로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국회에서 소장파 그룹 동성회(同成會) 소속으로 있으면서 「국가 보안법」 제정에 반대하고 미군의 철수를 주장하는 등 혁신파 국회 의원의 리더로 활약하였다. 1949년 1월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 특별 검찰부 차장에 선출되어 반민족 행위자 처리에 앞장섰으나, 그해 6월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었다. 세칭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1950년 2월 의원직을 사퇴하였고, 3월에는 제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항소하였다. 항소심 계류 중 6·25 전쟁이 일어나 월북한 뒤 재북 평화 통일 촉진 협의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58년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평양특별시 용성구역에 있는 재북 인사 특설 묘지에 안장되었다.

참고문헌
『경향 신문』(1950. 2. 16)
대한민국 헌정회(http://www.rokps.or.kr)

(‘노일환[盧鎰煥]’,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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