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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동아일보 사람들- 남중구

Posted by 신이 On 11월 - 5 - 2018

 

남중구(南仲九, 1940~2008)는  경북 의성 출신으로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정치부장과 런던특파원, 논설주간을 지냈다. 남중구는 국제문제에 해박하고 균형감각을 지닌 명문의 칼럼니스트로 유명했다. 논설실장과 논설주간으로 있으면서 연재한  ‘남중구 칼럼’은 사회 현안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대안 제시로 이름을 알렸다.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41대 총무(1994년), 제12대 신문방송편집인협회 회장(1999∼2001년), 제10대 신영연구기금 이사장(2005∼2007년), 동아일보 부설 화정평화재단 이사장(2006~2008년)을 역임했다.

 

남중구(南仲九) (의성, 1940~ ) △ 65.2 수습(편집국), 기자(사회부), 사회부차장, 정치부장, 편집위원, 논설위원(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3권, 동아일보사, 1985)

 

 

 

 

南仲九(1940~2008)

○1940년 5월 10일 경북 의성 출생, 2008년 1월 15일 별세

◇학력 경북고, 서울대 정치학과 졸(61), 미시간대 저널리즘 펠로십 연수(83)

◇주요경력 동아일보 기자(65), 정치부장, 논설주간, 런던특파원, 이사, 21세기 평화연구소장(2000) 관훈클럽 제11대 총무(94)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 제10대 이사장(2005) 연세대 사회학과 겸임교수(2005) 동아일보 화정평화재단 이사장(2006)

기사를 아름답고 부드럽게 쓰던 사회부기자

남중구, 그는 한마디로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다정다감한 동료애로 후배들을 보살피고 이끌어 준 인정 많은 선배였다. 필자의 2년 선배인 그는 늘 과묵하고 성실한 일꾼이지만 유머감각도 뛰어 났다.
그는 다채로운 언론계 경력을 기록한 활동가요, 행운아였다. 동아일보 정치부장, 런던 특파원, 논설주간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친 실력파요, 또한 언론계의 대외활동도 폭 넓어 관훈클럽 총무, 편집인협회 회장, 신영연구기금 이사장, 서울대 출신 언론인모임인 관악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언론계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68세의 일생가운데서 40여년을 언론계 외길을 지키면서 동아일보의 부설 평화재단을 위해 헌신했다. 그가 동아일보와 언론계에 남긴 족적을 뒤돌아보면 결코 짧은 일생이라 할 수 없다.
1965년 동아일보 수습기자로 언론계에 투신한 그는 기사를 아름답고 부드럽게 쓰는 사회부 기자로 손꼽혔다. 눈에 띄는 마땅한 머리 기삿감이 없는 날이면 사회부 데스크들은 날씨나 절기 등을 곁들인 스케치 기사를 그에게 쓰도록 해서 싣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그는 일할 때는 대범하기보다 세심했고 취재의 기사 작성에서는 조그만 빈틈도 없을 정도로 매우 치밀했다.
그는 점잖은 선비형 영국신사 같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저녁 술 자리 같은 데서는 현란한 말솜씨로 좌중을 매료시켰고 멋진 노래 가락을 뽑아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는 감정을 잘 나타내지 않았다. 속이 깊었다. 그래서 겉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동료들로부터 이까(오징어의 일본말) 또는 크렘린 같다는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는 동료나 후배들에게 살갑게 굴 줄 몰랐다.
그는 늘 기자이기에 앞서 사람이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원칙을 중시하면서도 융통성을 발휘할 줄 알았다. 그가 1982년 2월 동우에 쓴 글이 ‘신문사에 걸려오는 전화’에 관한 것인데 그의 인간적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 글의 대목을 소개하면―“한 친구가 신문사는 원래 그렇게 불친절한 곳이냐고 따진 적이 있다. 한 번은 전화를 걸어 아무개 있느냐고 물었더니‘지금 외출중입니다’ 한마디 하기가 무섭게 짤각 끊어 버리는 것이다. ―전화 한 통 제대로 친절하게 받아주지 않는 신문사가 무슨‘독자의 신문이냐’고 그 친구는 말 속에 가시를 박았다. ―독자와의 연계성을 높인다는 측면에서 신문사에 걸려오는 전화는 괴로운 것일지라도 무조건 친절하게, 그리고 성의 있게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그의 성품을 단적으로 대변해주는 대목이다.

주영 특파원으로 실력 발휘

남중구, 그는 논설위원을 거쳐 주영특파원이 됐다. 동아일보 주영특파원은 세계석유의 보고이며 분쟁지역인 중동과 동유럽 공산권 뉴스도 맡아야 하는 자리였다. 그는 공산권이 붕괴되고 냉전이 종식되는 중요한 시기에 동아일보 주영특파원으로 평소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특히 그가 논설위원실장으로 재직하면서 연재한‘남중구 칼럼’은 가와 사회 현안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대안제시로 정평이 나 제2회 삼성언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취재기자 시절에도 돋보이는 기사 및 보도로 특종 상을 두 번, 노력 상 다섯 번, 그리고 두 번의 특별상을 받았다.

억울한 필화사건으로 곤욕치러

그는 동아일보에 입사한지 얼마 안 되어 기사관계로 구속됐다 풀려난 일이 있다. 그가 경찰기자로 한창 뛰고 있을 1965년 10월 1일 오전, 전날인 9월 30일부터 이날 새벽사이에 서울시내 도심지 여러 곳에서 북한 신문이 가정에 배달되고 북한에서 보낸 불온 삐라 수십 장이 주택가에 살포된 사실이 있었다 그는 이 사실을 발견하고 기사화 했는데 그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정원)가 문제 삼은 것이다.
이 기사는 이날 자 동아일보 사회면에‘서울에 북괴신문’제하의 4단기사로 활자화 되었다. 중앙정보부가 문제 삼은 것은 기사 가운데 ‘북괴신문이 가정에 배달되었는가 하면―’이라는‘배달’이라는 단어와‘서대문구 창천이발관 문틈에 북한신문‘광명’이 끼어있는 것을―이라는 대목이었다. 북한신문이 어떻게 해서 배달되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배달’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북한을 고무하고 찬양할 의도에서 고의로 왜곡 보도했다는 것이 중정의 트집이었다.
중정은 이 기사와 관련하여 남중구를 비롯, 사건 데스크인 신용순 당시 사회부 차장(후에 편집국장, 편집담당 상무 역임, 작고)과 시경 캡인 이연교(작고) 경찰기자 이상하(후에 편집부국장, 국회의원 지냄, 작고) 등 5명을 연행해 갔다. 그 후 남중구만이 구속됐다가 적부 심에서 풀려났지만 이일로 남중구 선배는 마음고생이 컸으리라 짐작된다.

신영연구기금 이사장으로 기금 100억 확충

그는 1994년 관훈클럽 제 41대 총무로 선출되면서부터 여러 언론 단체에 적극 참여하여 언론발전과 창달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는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 클럽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고 특히 관훈클럽의 재정적기반을 튼튼히 다지는데 크게 기여했다. 행운이 따르기도 했지만 그가 관훈클럽 총무와 신영기금 이사장으로 재직한 기간에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을 100억원이나 확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관훈클럽 총무 재직시 종로구 관훈동에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 회관을 건립(1994년 5월 24일 준공)한 것이나 신영연구기금 이사장 재직 중 이 회관을 리모델링 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만든 것은 그의 노력에 행운이 보태진 결과라 하겠다.
그는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고통을 무릅쓰고 그야말로 열과 성을 다해 관훈클럽 회관 리모델링을 추진했다. 그가 건강문제만 아니었다면 더 활발하게 활동을 계속 할 입장이었다. 그가 언제부터 투병 생활을 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4~5년간이나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일에 열정을 보이던 모습은 그가 얼마나 성실한 인간이었던가를 단적으로 대변해 준다.
그렇듯 가족을 제외하고는 병을 숨기고 지냈던 그가 약해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친지들의 병문안도 받지 않은 것은 그의 깔끔한 성격과도 무관 하지 않아 보인다.
‘백자 같고 질그릇 같고’‘언론인 남중구, 그가 그립다’그를 추모하는 문집(2009년 1월 15일 발행)에는 이 땅의 기라성 같은 언론인들이 추모의 글을 싣고 있다.

참고 : 관훈저널 2008년 봄호, 남중구 추모문집

(김정서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기사를 아름답고 부드럽게 쓰던 사회부기자‘, 한국언론인물사화 제7권,  2010)

 

 

 

관훈클럽 제41대 총무 故 남중구를 생각한다

김정서|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기사를 아름답고 부드럽게 쓰는 사회부 기자’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독일 통일이 현실화되던 1989년 11월 10일(현지 시각) 남중구 동아일보 주영특파원은 천신만고 끝에 한 좌석을 얻은 런던발 밤비행기를 타고 서베를린에 들어갔다. 국민들의 대량탈출에 당황해하던 동독 공산정권이 ‘국경 전면개방’이라는 폭탄선언을 한 다음날이었다.

베를린에 들어간 남특파원은 독일 통일의 현장소식을 이렇게 전해왔다.

“베를린은 전체가 인파와 차량홍수이고 흥분의 도가니다. 그렇게도 위세당당하던 동독 공산정권이 ‘국경 전면개방’이라는 폭탄선언을 하면서 무너지자 서쪽으로 넘어오는 동독인과 차량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게 몰려들었다. 독일인들은 아무나 부둥켜안고 껑충껑충 뛰는가 하면 샴페인을 터뜨리며 환호하고 만세를 불렀다. 베를린장벽 위로 올라가 덩실덩실 춤을 추는가 하면 ‘장벽해체’를 외치며 망치와 정으로 담벼락을 쪼아대는 시민도 있었다.”

(…)

훌륭한 언론인…고인의 명복을 빌며

1940년생인 그는 건강문제만 없었더라면 활발하게 활동을 계속할 입장이었다. 실제로 그는 그의 병이 악화되기 약 한 달 전까지 대외활동을 했다. 그가 언제부터 투병생활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4, 5년쯤 된다는 말이 있다. 그는 가족을 제외하고는 지병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지냈다. 그러던 그가 지난해 10월쯤부터 본격적으로 상태가 나빠진 것처럼 보였고, 12월 18일 신영연구기금 이사회에 수척한 모습으로 참석한 후에는 일절 외부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올 1월초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했으며, 약해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친지들의 병문안도 받지 않았다.
그는 2008년 1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안타깝게도 한 자녀의 결혼도 보지 못한 채 부인과 세 자녀를 남겨놓고….

고인의 외곬 언론인 생활 43년, 고인의 활동 주무대는 동아일보와 관훈클럽이었지만 고인이 언론계,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 남긴 발자취는 매우 크다. 고인의 부음은 주요 신문·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수많은 친지들, 특히 많은 언론계 선후배와 동료들이 고인의 빈소를 찾아 애도했다.

고인은 거의 흠 잡을 데 없는 훌륭한 언론인이었다. 고인은 후배들이 본받아야 할 바람직한 언론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우리 곁을 떠났다.
얼마 전 고인의 유가족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상례를 무사히 마쳤으며, 위로와 격려의 말을 보내주어 큰 힘이 됐으며 고맙다는 인사였다. 그리고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바른 마음가짐, 몸가짐을 지키고 조금이나마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삶을 이어갈 각오임을 다짐하는 내용이었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행운이 고인의 유가족과 늘 함께하기를 충심으로 기원한다. 

(김정서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관훈클럽 제41대 총무 故 남중구를 생각한다’, 관훈저널, 2008년 3월호)

 

 

 

“싸움 붙이기식 정치기사는 이제 그만”
남중구 신문방송편집인협회 회장

(…)

“정지기사 너무 많다”

한국 언론사 보도편집국의 부장 이상 언론인의 모임인 한국신문빙송편집인협회 회장을 지난 1월부터 맡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 정치부장 출신으로서 정치 관련 보도에 오랫동안 종사해왔음은 물론 최근에는 사설과 칼럼을 통해 주로 정치분아에 대한 무게 있는 논평을 지속해온 남중구 동아일보 통일연구소장을 찾아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정치보도의 일선에서 오랫동안 근무했지만 지금은 논설위원으로서 정치보도와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난해 1월 “시의적절한 사회 현안의 예측과 분석, 대안제시로 건전한 여론형성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삼성언론재단이 수여하는 제2회 삼성언론상(논평 비평부문)을 수상할 정도로 한국 사회의 정치현상과 관련하여 지금까지도 그 어느 누구보다 많은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이고도 객관적인 진단과 처방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먼저 한국 신문의 정치보도에 대해서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대답은 역시 그렇다는 쪽이었다.
‘우선 정치기사가 너무 많다. 신문의 종합면을 사실상 정치뉴스가 다 차지하고 있다. 아직도 종합면이라기보다 정치면으로 보일 수 있는 정도다. 후진국일수록 정치보도가 과잉인 법인데 아직 한국 사회도 정치권력이 국가와 사회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나라여서 자연스럽게 정치에 많은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통신사를 통해 들어오는 외신의 70~80%가 경제뉴스라는 점에 비해 매우 대조적인 내용이다. 한국에선 아직도 정치부가 핵심부서로 남아 있지만 예를 들어 영;국의 더 타임스 같은 신문에서는 직제 서열상 사회부장 밑에 정치부장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정말 중요한 정치기사가 아니면 1면에 들어가지 않고 2면 등의 속지로 들어가는 것이 상례이다:”
이념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정당, 많지 않은 몇 사람의 인물에 의해서 지난 수십 년의 정치가 징악되어 온 사실을 시장의 독과점 구조에 비유한 내용은 독과점 시장구조가 언제나 그러하듯이 소비자인 국민의 바램을 정치권이 무시하고 자신들의 생리대로 정국을 그토록 오랫동안 운영해 올 수 있게 한 이유를 매우 적절하게 설명해주는 재미있는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

“게으른 유능보다 부지런한 무능”

“33년 넘어 신문기자로서 글을 써오지만 이직도 수습기자 때의 심리적 압박과 불안 공포감이 글을 쓸 때마다 따라 다닌다. 특히 칼럼을 쓸 때가 그렇다.”고 삼성언론상
의 수상소감을 밝힌 남중구 회장. 모든 기사를 상식이라는, 진부하리만치 당연하지만 그러나 오늘의 한국사회와 같이 상식이 통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너무나도 신선한, 기준이 모든 기사의 잣대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그의 소박한 바람이 “게으른 유능보다는 부지런한 무능이 언론인의 자질로서 더욱 중요하다:’는 그의 우직함께 맞물려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라는 무게 있는 조직을 통해 힘있게 개진되길 기대해 본다.

<남중구회장 약력>

학력 :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64년)

경력 : 동아일보 사회부 정치부 기자 . 사회부 정치부 차장 . 정치부장(65~82). 편집위원 . 논설위원(82-87) . 런던특파원(87-91). 편집국 부국장(91-93). 논설위원 . 수석논설위원 . 논설위원실장(93ㅡ97). 이사대우 논설주간(98-99.2) 이사대우 통일연구소 소장(99.2-현)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 이사(95-현),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이사(97-현). (재)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기금 이사(97-현). 2002년월드컵축구대회 문화시민운동추진협의회 이사(97-현). 감사원 부정방지대책위원회 위원(98-현), 서울평화상 심사위원 (99.1-현) .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96~99.1).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회장(99.1-현)

상훈 : 제2회 삼성언론상(논평 · 비평부문. 98)  

(정연구,  ‘정연구의 언론인물 탐구(13)- 남중구 신문방송편집인협회 회장 ‘, 신문과방송, 1999년 10월호)

 

 

 

[동우칼럼] 신문사에 걸려오는 전화

남중구(편집국 정치부장서리)

어느 사석에서 한 친구가 “신문사는 원래 그렇게 불친절한 곳이냐“고 따진 적이 있다. 아마도 마감시간 가까운 무렵에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다. 아무래 있느냐고 물었더니 ”지금 회의중입니다“ 한마디 하기가 무섭게 짤깍 끊어버리더라는 것이다.
메모를 부탁할 겨를도 없이 매정하게 끊어버리는 바람에 몹시 기문이 상했다는 그 친구는 전화 한통 제대로 칠정하게 받아주지 않는 신문사가 ‘독자의 신문’은 무슨놈의 ‘독자의 시눈’이냐고 말속에 사뭇 가시를 박았다. 불난 호떡집 같은 마감시간을 몰라서 그러느냐, 그 시간에 그 정도로 받아준 것만 해도 대접을 받은 편이라고 어물쩡 그 친구의 입을 막아버리긴 했지만 가슴은 찔렸다.
그 친구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신문사 사람들의 전화 받는 태도는 대체로 그리 친절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抄를 다투며 기사 받고 넘기기에 정신들이 나가있는 마감시간은 또 그렇다손 치더라도 한가로운 낮 시간에도 보면 친절이 몸에 배어있는 것 같지가 않다. 신문사에 전화를 걸려면 어쩐지 마음이 쓰인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가끔 보는데 아마도 신문사 사람들의 퉁명스럽고 무성의한 전화대꾸도 그런 이유 중 하나가 아닌가 한다.
전화벨리 세 번 울릴때까지도 받지 않는 신문사가 있다면 별볼일 없는 신문사라는 말이 있다. 처지지 않는 지면을 만들려면 편집국 분위기 자체부터 그만큼 민첩하게 돌아가야 하고 특히 독자 제보에는 민감해야한다는 강조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신문사만큼 전화가 많이 결려오는 곳도 드물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억울한 호소나 하소연으로부터 궁금증을 풀기위안 각종 문의전화, 돌발사고나 사건의 제보, 보도가 나간 기사에 대한 이해당사자의 항의나 공연한 시비, 심지어 지겨운 장난전화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가지가지다. 그런가운데 더러는 경쟁지의 탐색적인 목소리ㄷ가 숨어서 끼어들기도 한다. 취재부서의 내근 당번기자 한둘이서 하루종일 그 많은 전화에 응대하다보면 짜증과 신경질도 나게 마련이다.
일종의 정보산업인 신문사로서는 신속하고도 친절하게 전화를 받아야겠지만 때로는 도저히 친절하게 받을 수 없는 전화도 있다. 특히 마감무렵에 별것도 아닌 한가로운 용건을 들고나와 그렇지 않아도 쫓기고 있는 마음을 한없이 물고 늘어지면서 괴롭힐 때는 부아가 절로 치민다.
요증은 그래도 많이 뜸해진 편이지만 장난이나 시비를 위한 시비전화는 주로 밤중에 많이 걸려온다. 반말은 고사하고 대뜸 원색적인 육지거리로부터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이봐, 거기 신문사야”
“……”
“당신들 도대체 이 따위를 신문이라고 만들고 있어. 용기들은 뒀다가 어디다 써먹을 거야. 그러고도 신문값은 잘도 받아쳐먹는구나…”
“누구신지는 몰라도 말씀이 좀 지나치지 않습니까. 약주를 꽤 드신 것 같은데 이만 전화 끊겠습니다” 몇초 못가서 다시 울리는 전화벨 소리.
“이것봐/ 누구 허락 맡고 함부로 전화 끊는거야. 당신, 오늘 저녁 나하고 밤새울 각오하라구. 다시 말하지만…”
“밤새우실 것까지는 없고… 몇분만 통화를 계속해 주십시오. 지금막 전화번호 자동탐지기를 작동시켰으니까 2,3분이면 선생님이 지금 거시고 계시는 번호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
그제서야 철거덕 황급히 끊어지는 전화. 물론 전화번호 자동탐지기 같은 것이 신문사에 있을리 없지만 숨어서 전화하는 그 남자의 용기도 별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런 전화를 받고나면 까닭없이 우울해진다. 그러나 좋은 기사가 나간 날에 걸려오는 격려 전화 한통은 모든 피로를 잊게 한다. 이 맛에 고된 기자생활를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독자들이 제돈 들여가며 신문사에 전화를 걸때면 다 그만한 사연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독자층 확보를 위한 신문사간의 경쟁은 비단 어제오늘에 비롯된 것이 아니지만 특히 요즘 들어서는 그것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독자와의 연결성을 높인다는 측면으로 보더라도 신문사에 걸려오는 전화는 괴로운것일지라도 무조건 친절하게 그리고 성의를 다해 받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언젠가 한때 두툼한 독자제보록을 편집국에 비치해두고 운영한 적이 있었다. 모든 제보전화는 즉각 제보록에 올리고 해당 부에서 즉각 처리한뒤 그 결과를 반드시 기재토록 했는데 얼마안가서 흐지부지 돼버렸다. 이 제도가 계속됐더라면 지면이 훨씬 좋아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남중구, ‘동우칼럼- 신문사에 걸려오는 전화’, 동우(東友), 1982년 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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