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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동아일보 사람들- 남상일

Posted by 신이 On 11월 - 5 - 2018

 

남상일(南相一, 1896~1979)은 충남 천안출신으로 서울교동공립보통학교와 사립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일하다 그만두고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편집국장 이상협의 배려로 초대 광고부장이 됐다. 해방 후 국제통신에 이어 합동통신을 창설하고 이사를 맡았다.

 

남상일(南相一) (천안, 1896~ ) ▲ 1920. 4 광고부장, 1921. 3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창간 50주년 기념특집) ‘그 때 그 사람 그 정열 창간 전후를 말한다’

남상일(74·초대광고부장)

– 당시 서울에는 일어(日語)로 된「경성일보(京城日報)」와 그 부속지(附屬紙)인 우리말신문「매일신보(每日申報)」에 일인(日人)들의 영자(英字)신문「서울 프레스」가 있었는데「서울 프레스」사장(社長)인「야마가다 이소오(山縣五十雄)」가 3(三)개의 우리말 신문을 허가해 주기로 했다는 총독부 방침을 당시「매신(每申)」의 편집장으로 있던 하몽(何夢 李相協)에게 귀띔해줬다더군. 하몽(何夢)은 곧 인촌(仁村)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리고 이때부터 인촌댁(仁村宅) 사랑방에서 본격적으로 창간(創刊) 준비를 서둘렀는데 신문(新聞에 관해서는 활자(活字) 호수며 광고(廣告)에 이르기까지 모르는게 없는 하몽(何夢)이 진두지휘를 했지.

-그때「야마가다」가 나이 50은 넘었지. 무턱대고『대황(大皇)폐하 만세』하는 그런 인물(人物)은 아니었어. 당시로서는 퍽 지성적(知性的)이고 진보적인 일본인(日本人)으로 우리들 망국(亡國)의 청년(靑年)들을 좋아했었지.

-그(창간사-인용자 주) 내용이야 3.1정신(三·一精神)을 구체화한 것이지. 동시에 그것은 일반민중 전체의 뜻이기도 했고.

-「매일신보(每日申報)」기자(記者)로 있던 나는 하몽(何夢)선생을 따라「동아(東亞)」로 옮겼는데 내가 저명 인사(人士)들을 많이 안다고 영업부에 잠시 가있으라는 거야. 그래서 초대 광고부장을 했지. 그런데 창간축하광고를 받는데 앉아서 아는 변호사나 돈 있는 사람들에게 전화로만 받아낸 것이 6찬(六千)원이 넘었어요. 요새 돈으로 6백만(六百萬)원도 더 되는 큰 돈이거든.

-취재차 시골에 내려가 여관에 들르면「동아일보(東亞日報)」기자(記者)가 와서 묵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는 정도였지.

-아니야. 시대(時代)의 변천과 더불어 문화(文化)가 향상되고 사회구조(社會構造)가 달라짐으로써 기자(記者)의 사명도 달라진다고 봐야지. 단순히 그때와 비교해서 새 세대(世代)의 기자(記者)가 기백이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선배로서 무책임한 발언이 아닐까. 아무쪼록 여러분들은 보도기관 본래의 사명에 충실해 주기를 바랄뿐이야.

(동아일보 1970년 4월 1일자 11면)

 

 

나는 그 이듬해 1920년 1월 매신(每申)을 퇴사하고 하몽(何夢)의 배려로 동아일보(東亞日報) 광고부를 담당하게 되었다. 창간축하(創刊祝賀)만도 그야말로 힘을 들이지 않고 상당한 거액(巨額)의 청탁(請託)을 받았지만 전후(戰後)재계공황(財界恐慌)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광고(廣告)담당은 기자와는 다르기 때문에 동아시대(東亞時代)의 이야기는 접어두고 동아시대(東亞時代)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적어볼까 한다. 그 전해 5월경 영국인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가 일병(一兵)의 야만적(野蠻的) 탄압(彈壓)에 분개해서 경향(京鄕) 각지에서 그 잔학한 죄적(罪蹟)을 낱낱이 사진(寫眞)을 찍어 가지고 매신(每申) 편집국에 들어와서 항의를 하고 사진을 신문에 실어 달라는 것이다.

그 이듬해 4월 동아일보가 창간된 후 이 스코필드 박사가 극성스럽게도 그 불인(不仁)한 다리를 이끌고 화동으로 동아일보 창간을 축하하며 내방했었는데 편집국엘 가 보아도 매신에서 보던 얼굴이 있고 영업국엘 와 보아도 매신에서 보던 얼굴이 있어서 박사 자신은 의아하게 생각을 하고 나를 가리키며 썩은 능금을 성한 능금과 함께 두면 성한 능금도 썩는다고 조롱하기에 나는 박사를 보고 『썩은 능금이 거름이 되어서 후일 더 좋은 능금을 많이 열게 하는 이치도 알아두어야 합니다』하고 응수한 일이 있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말년 대한민국의 훈장도 받았고 유해도 대한(大韓) 땅에 묻혔다. 스코필드 박사는 영국 시인 바이런과 같은 정열적(情熱的)인 정의(正義)의 사도(師徒)요 의협(義俠)의 권화(權化)라 하겠다.

(남상일, 언론비화 50편, 한국신문연구소, 1978, 233~234쪽)

 

 

그토록 철저히 비밀이 지켜진 예는 아마 고금동서에 드물 것이다. 3월1일 전야 우정을 비롯한 ‘매일’ 사원들은 뜬눈으로 온밤을 설친채 아침을 맞는다. 그리고 온 장안을 함성으로 누빈 3.1독립만세의 시종을 낱낱이 기록해나갔다.

이듬해들어 동아일보가 창간되면서 우정은 ‘매일’을 떠나 광고부장으로 ‘동아’창간에 참여한다. 약관 25세의 그가 그 같은 중책을 맡게 된 것은 전적으로 편집부장으로 함께 일했던 하몽이 그의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4월 들어 신문이 나가기 시작하자 화동(花洞)사옥에는 모처럼의 민족지 창간을 축하하는 하객들의 발길이 연일 이어졌다.

그중에는 영국인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도 불편한 다리를 절면서 끼어있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1년전 ‘매일’ 편집국에서 말석에 앉아있던 우정을 만난적이 있었던 스코필드는 ‘동아’에서 그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자 처음엔 매우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때 스코필드는 일본군인들의 야만적인 탄압에 분개한 나머지 경향 각지에서 저질러진 만행의 현장들을 찍은 사진을 들고 ‘매일’ 편집국에 찾아가 격렬하게 항의한 끝에 그 사진들을 신문에 싣도록 요구했던 것…… 그러나 그같은 사진이 ‘매일’의 지면을 장식할 계제는 못되었다.

그래서 그때 만난 우정임을 확인한 박사는 “썩은 능금을 성한 능금과 함께 섞어두면 성한 능금도 썩는데……”라면서 웃었다. 이에 우정은 “썩은 능금이 거름이 돼서 훗날 더 좋은 능금을 더많이 영글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라고 응수…… 함께 웃고 말았다.

그의 ‘동아’생활은 1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만다.

(이종윤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심의실장, 雨亭 南相一, 韓國言論人物史話 8.15前篇(上),  1992)

 

 

「동아(東亞)」기자시절(記者時節)의 천리구(千里駒)」

고(故) 김동성(金東成)선생을 애도(哀悼)함

남상일(南相一)

아! 선생은 가시고 말았습니다그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인생(人生)의 정석(定石)이라고 한다면 팔십상수(八十上壽)를 누리셨으니 무슨 부족함이 있겠습니까마는 선생 평생의 업적에 견주어 보아 만년(晩年)의 생애가 너무나 쓸쓸하셨던 것이 한스럽습니다.

선생은 일찍이 약관(弱冠)도 못되었을 때 고향 개성(開城)에서 그때 학생의 신분으로 한영서원(韓英書院) 창립(設立)에 참획하여 고(故) 윤치호(尹致昊)선생을 교장으로 모시는데 접반사(接伴使)의 소임을 성공적으로 해치운 총명하고 조달하신 분이었습니다.

마침 그때 일로전쟁(日露戰爭)이 끝나고 고(故) 이갑(李甲) 씨가 개선장군의 늠름한 기세로 돌아와서 토색질한 탐관을 위하해서 빼앗겼던 재산을 도로 찾았다는 소문을 듣고 선생의 선친(先親)께서 개성유수(開城留守)에게 억울하게 빼앗겼던 막대한 재산을 도로 찾아보려 하시다가 마음을 돌리고 장래대성(大成)하실 꿈을 안고 19(一九)세 되던 해 중국(中國) 소주(蘇州) 동오대학(東吳大學)을 거쳐서 도미(渡美) 하셨습니다. 그후 30년(十三年)동안 체미(滯美) 하시면서「오하이오」주립대학(州立大學)에서 신문학(新聞學)을 전공하시고 귀국, 이때부터 필자(筆者)와의 50년(五十年) 교분(交分)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선생의 두드려진 업적은 3.1운동(三·一運動)후「동아일보(東亞日報)」창간(創刊) 당시부터 많았습니다. 그때 우리들의 속셈은 이 기관(機關)을 매개체(媒介體)로 삼고 조국광복(祖國光復)과 민족해방(民族解放)의 돌파구(突破口)를 모색하는데 전심하였었습니다. 그리하여 창간(創刊)호에 중국(中國)의 정계요인(政界要人)과 혁명투사(革命鬪士)들의 축사(祝辭)와 휘호(揮毫)를 많이 실어서 그 위세(威勢)를 일본(日本)과 세계(世界)에 자랑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 사명(使命)을 띠고 선생은 북평(北平)에 출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풍습에 북평(北平)에서 요인(要人)을 만나기가 지극히 어려워서 허다한 세월과 심력을 허비하여야했는데 선생은 요행히도 동오대학(東吳大學)의 은사(恩師)인 미국인(美國人)을 우연히 만나서 그의 안내로 그 난제(難題)를 며칠 안가서 해결(解決)하였던 것입니다.

그다음 1920년(一九二三年) 범태평양신문기자대회(汎太平洋新聞記者大會)에 참석하여 부회장(副會長)의 영예(榮譽)를 받고 우리 민족(民族)의 위의를 중외(中外)에 떨치게 했으며 뒤이어「워싱톤」군축회의(軍縮會議)에 취재차(取材次) 특파원(特派員)의 사명(使命)을 띠고 미(美) 본토(本土)로 출장(出張) 하시어 일인기자(日人記者)들을 제쳐놓고 군축회의장(軍縮會議場)과 대통령기자회견장(大統領記者會見場)에 출입(出入)하며 솔선취재하여 일인(日人)들을 크게 놀라게 하셨습니다.

이 두가지 업적을 다시 주필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선생과 함께 전국을 순회하면서 그 사실을 보고 선전함으로써 전민족(全民族)의 사기(士氣)를 북돋았던 것입니다。

선생은 관후인자하여 남의 곤궁한 사정을 흘려듣지 아니하시고 동지와 동료들에게 많은 도움을 이바지하여 뜻밖에 재산을 많이 줄이고 해방(解放) 후에는 토지개혁(土地改革)과 인플레항진(亢進)으로 많지는 아니하나 선비 살림으로는 요족했던 가산이 거의 기울어지고 6.25(六·二五)동란과 1.4(一·四)후퇴로 대대로 전해오던 귀중한 골동을 잃고 휴전협정(休戰協定)으로 마침내 고향조차 잃어버린 문자(文字)그대로의 전재민(戰災民)이 되시고 말았습니다.

더욱 선생은 만득(晩得)의 독자(獨子)마저 미국(美國)에 두시고 쓸쓸하게 악질(惡疾)과 싸우면서도 또한 자기의 고통 때문에 가족이나 남을 괴롭힘을 꺼리시어 감내하기 어려운 병고와 굶주리는 고통을 조금도 내색 아니 하셨습니다. 운명하실 때도 조금도 고통을 호소하지 않고 잠들듯이 영면하셨습니다. 악질(惡疾) 암의 환자로 이러한 현상은 보기 드문 일이라고 전문의도 차탄합니다.

선생을 마지막 뵙던 것이 바로 3(三)일 전입니다. 평소와 같이 유연한 태도로 뒷일을 부탁하시고 늙은 나를 아껴서 혹서에 실섭하기 쉬우니 어서 돌아가라고 재촉하시며 따님 김옥열(金玉烈) 박사(博士)를 불러서 모시고 나가서  점심 대접을 해드리고 배웅하라고 신신히 말씀하시는 것이 평소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때 선생은 선생 자친을 선영에 모시지 못하고 고양 벽제에 권폄한 것을 한탄하고 자신도 우선 그곳에 묻혔다가 다음날 고향선영에 귀장(歸葬)할 것을 기대하시더이다. 『한(恨)이 국토통일(國土統一)을 못 보는 것』을 언외(言外)에 시사하시더이다. 해방(解放)후 가지가지 혁혁한 업적을 찬양하는 것은 눈물이 앞을 가리어서 다음날로 미루오니 영령(英靈)은 용서하시옵소서.  (전 합동통신 이사(前合同通信理事))

(동아일보 1969년 8월 21일자 4면)

 

 

불구(不具) 이끌고 일(日) 탄압(彈壓) 폭로

50년전(年前)의 스코필드 박사(博士)

남상일(南相一)

1919년(一九一九年) 3월(三月) 상순 수원(水原) 발안(發安)장터 예배당(禮拜堂)에다 많은 신도(信徒)들을 모아놓고 일제(日帝)가 총화(銃火)로 학살하던 그 무렵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때 나는 매신(每申)에 재직하고 있었다.

편집국에서 기사(記事)를 쓰고 있었는데 다리를 절뚝절뚝 절면서 들어서는 백인(白人)이 있었다. 사진을 한손에 듬뿍쥐고 숨을 헐떡거리며 들어선 그는 그 사진들을 신문에 내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 사진들은 수원(水原)일대에서 우리 농민들이 만세를 부르는 것을 일제군경(日帝軍警)들이 학살 방화(放火) 파괴로 탄압하는 처절한 기록을 담은 것이었다.

그가 바로「스코필드」박사였는데 그때 박사의 그 샤프한 얼굴에 한없는 노기(怒氣)가 감돌고 있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당시 매신(每申)은 경성일보(京城日報)의 번역판이나 다름없어서 제호(題號)만 달랐지 경일(京日)의 일부로 종속되어 있었다.

「스」박사(博士)는 사진과 아울러 기사(記事)를 내달라고 요청을 했는데 그의 말은 요청이 아니라 항의(抗議)나 다름이 없었다. 당시 일본(日本)의 국제적(國際的) 좌지(坐地)로서「스」박사(博士)의 요청을 강경히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완곡하게 거절하는 교섭에 내가 통역의 소임을 맡았었다.
그때 그가 영국시인(英國詩人)「바이론」의 후신(後身)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인상을 받았었다. 「바이론」경(卿)은「그리스」독립운동(獨立戰爭)에 종전(從戰)하여 마침내는 성풍(腥風)의 전진(戰陣)에서 산화(散華)했었다. 공명을 탐내서가 아니며 누가 부탁한 것도 아닌 오직「그리스」인의 숭고한 독립정신(獨立精神)에 그 자신이 의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의 불후의 명작(名作)과 현란한 일생(一生)은 상하(上下) 천재(千載)에 깊은 감명이 아닐 수 없다.

그 이듬해 4월(四月)초였다. 내가 고(故) 하몽(何夢) 이상협(李相協) 씨를 따라서 동아일보(東亞日報) 창간(創刊)에 참여했을 때다. 하루는「스」박사(博士)가 사(社)에 나타나서 나를 잊지 않고 가리키며 『썩은 능금이 성한 능금에 섞이면 성한 능금까지 썩어』하고 우스개를 던졌다.

나는 박사(博士)의 표정이나 어조(語調)가 분명 해학이었지만 일제(日帝)의 기관지(機關紙)에 재직(在職)하였기 때문에「스」박사(博士)가 가져온 빅뉴스나 스쿠프한 사진을 못내 드린것이 내 죄나 되는 것 같은 겸연쩍은 생각이 들어서 한편 부끄럽기도 했으나 남들이 듣는데 썩은 능금소리를 듣는 것이 섭섭하기도 해서 얼핏 대꾸하기를 『썩은 능금이 좋은 비료가 되는 줄은 모르시오!』 했었다.

그 후 그는 그 불인(不仁)한 다리를 절면서 경향(京鄕)으로 구치(驅馳)하며  일제(日帝)의 잔폭(殘暴)을 은근히 세계(世界)에 선전(宣傳)하면서 우리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을 도우려고 반일활동(反日活動)을 하다가 1921년(一九二一年) 필경 일제(日帝)에 퇴거(退去)를 당했던 것이다. 열혈남아(熱血男兒)「바이론」경도 또한 다리가 불인(不仁)했던 것으로 안다. 두 분이 어찌그리 방사(倣似)한가.

아아! 인생(人生)은 짧고 호기(浩氣)는 길이 남는 법. 영령(英靈)이시여, 천국(天國)에서 길이 안식(安息)하옵소서.  (합동통신이사(合同通信理事))

(동아일보 1970년 4월 16일자 5면)

 

 

 
통신사에서는 일제의 동맹통신 경성지사를 한인사원들이 접수하여 8월 16일부터 해방통신을 발행하였고, 이어 남정린이 연합통신을, 김용채가 조선통신을 창간 발행하였다. 그 후 해방통신은 공립통신으로 흡수되어 좌파통신의 소임을 다했고 동맹통신을 군정당국으로부터 정식 이양 받은 김동성 남상일은 연합통신과 합동하여 합동통신으로 등록 AP통신과 계약하였다. 조선통신도 UP통신과 계약한 후 외신을 제공하였으나 일부 좌파사원들의 움직임으로 좌파통신의 아성이 되었다.

(이진섭 코리아헤럴드 상임 편집위원, 조국해방과 군정하의 언론, 한국의 언론, 한국의언론간행위원회, 문화공보부, 1968년,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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