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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동아일보 사람들- 김한주

Posted by 신이 On 11월 - 5 - 2018

 

 

김한주(金漢周, 1913~월북)는 함남 홍원출신으로 일본 호오세이(法政)대학을 나온 뒤 1939년 4월 정치부 기자로 동아일보에 입사했으나 다음해 8월 일제에 의해 동아일보가 폐간되는 바람에 1년 4개월의 짧은 기자생활을 마감했다. 창간사를 썼던 장덕수 취체역의 지시에 따라 폐간사를 썼다. 함남 출신의  고려대 철학과 박희성(朴希聖,1903~1988)교수의 생질(누나의 아들)로 해방후 월북해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강좌장을 지냈다.

 

김한주(金漢周) (홍원, 1913~ ) ▲ 1939. 4 사원(정치부), 1940. 8 폐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경찰 당국은 강제폐간의 인상을 남기지 않으려 하였음인지, 8월 초 백관수 송진우 임정엽 국태일을 석방하고(김승문 김동섭 김재중 등 3명은 9월 상순에 풀렸음), 폐간일자를 8월 10일로 잡아 자진폐간의 형식으로 문을 닫도록 했으며 그 때까지 이를 세상에 알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경찰은 기자와 사원의 언동을 감시하고 미행하며 8월 10일까지 동아일보의 폐간을 보도 관제하였다. 누구도 쓰기 싫어 서로 미루는 가운데 장덕수의 지시에 따라 김한주가 집필한 폐간사는 다음과 같다.

 

폐간사

1

본보는 자못 돌연한 것 같으나 금 8월 10일로써 소여(所與)의 보도 사명에 바쳐오던 그 생애를 마치게 되었으니 오늘의 본지 제6819호는 만천하 독자제위에게 보내는 마지막 지면이다.

회고하면 제1차 사이토 총독 시대의 문화정치의 일단으로 반도 민중에게 허여된 언론기관의 하나로서 다이쇼(大正) 9년 4월 1일 본보가 화동 일우의 추루(醜陋)한 사옥에서 고고(呱呱)의 성을 발한 이래 실로 춘풍추우 20년, 저간에 사회 각반의 진운과 함께 미력하나마 본보가 신문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여 조선문화운동의 일익적 임무를 다하여 왔음은 저윽히 독자 제위의 뇌리에도 새로울 줄 믿는 바이다. 그러나 이제 당국의 언론통제에 대한 대방침에 순응함에 본보는 뒤를 보아 한(恨)됨이 없고 또 앞을 보아 미련됨이 없는 오늘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제위도 이 점에는 깊이 서량(恕諒)하는 바 있을 줄 믿는다.

2

무릇 보도기관으로서의 신문의 사명이 결코 새로운 뉴스의 제공에만 그치지 않고 일보 나아가서 변전하는 시류에 처하여 능히 엄연한 비판적 태도와 부동의 지도적 입장을 견지함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의의는 특히 과거 조선에 있어서 더욱 광범하였음을 볼 수 있으니 그것은 극도로 뒤진 이 땅의 문화적 수준에서 귀결되는 필연적 사실이었다. 이에 오인(吾人)은 다시금 본사 주최 급(及) 후원의 방계적(傍系的) 제반 사업과 행사에까지 상도(想到)치 않을 수 없으니 그 중에는 이미 적으나마 결실된 것도 있고 또 아직 개화성육 중의 것도 있다. 그러나 한번 뿌려진 씨인지라 오늘 이후에도 싹 밑엔 또 새싹이 트고 꽃 위엔 또 새 꽃이 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3

속담에 일러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거니 20년의 세월은 과연 기다(幾多)의 괄목할 변천을 보이고 있다. 더욱이 제2차 구주대전의 발발로 말미암아 국제정세의 명일(明日)은 거연(遽然) 역도(逆睹)키 난(難)한 바 있으니 이때 지난날을 반성하면 오인은 온갖 성의와 노력의 미급(未及)에 오직 자괴하여 마지않을 뿐이다. 그러나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이때껏 한결같이 연면(連綿)된 독자 제위의 심절(深切)한 편달(鞭撻)과 수호에 대해서는 충심의 사의를 표하는 동시에 그 마음 그 뜻에는 새로운 감격의 염(念)을 금할 수 없는 바이다. 끝으로 20년간 본보를 위하여 유형무형의 온갖 지도 원조를 불석(不惜)하신 사회 각반 여러분의 건강을 심축(心祝)하며 간단한 폐간의 사(辭)를 마치려 한다.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고하는 동경의 일본 정계 요인들과 접촉하여 일본 귀족원에서 조선총독부의 민간신문 폐간 강요 문제로 파문이 일어나도록 하였으며, 서울서는 총독부 고관들의 심저(心底)를 살피는 등 백방으로 자구(自救)수단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동아’ ‘조선’ 두 신문의 강제폐간 책략을 담당한 경기도 경찰부의 사이가(齊賀七郞)라는 경부(警部)가 무심껏 내뱉은 한마디 말, 즉

“사실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이렇게 다루고 있는데 ‘동아일보’가 자진폐간하기만 하면 만사는 해결되오!”

이 한마디 실토를 들은 순간, 고하는 ‘동아일보’의 명운은 이미 경각에 다다랐음을 깨달았다. 이제 남은 것은 폐간사(廢刊辭)를 실은 신문을 부고장처럼 발행하고, 피와 땀으로 얼룩진 ‘찬연한 깃발’을 내리는 일뿐이다. 그때 설산은 주위 동료와 후배들에게서 ‘창간사를 썼으니 폐간사도 설산이 쓰는 게 어떻겠느냐’는 종용을 받았으나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폐간되는 이 마당에 명론탁설(名論卓說)을 쓰건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되건 그것은 써봐야 알겠지만, 그것조차 검열에서 삭제되고 햇볕을 못 본다면 인사말 한마디도 못하고 문을 닫게 될 것 아니오. 그러니 김 형이 좀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써보는 편이 좋을 거요”

김한주(金漢周)는 설산의 생각을 곧 알아차렸다. 자칫 잘못하면 한마디 유언도 못하고 낙일(落日)하게 되기 쉬우니 만천하 독자들에게 차분하고 격조 있는 인사말이나 전하는 편이 오히려 상책이라는 생각인 것이다. 김한주는 설산의 뜻을 따랐다. 그러면서도 의미심장한 구절을 보석 박듯이 폐간사에 담았다.

…이제 당국의 언론통제에 대한 대방침에 순응함에 있어서 본보는 뒤를 보아 한(恨)됨이 없고, 또 앞을 보아 미련(未練)됨이 없는 오늘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창간 이래 20년, 민족의 대변지로서 비풍참우(悲風慘雨)를 참고 이기며 한국 민족은 결코 일본 민족에 동화(同化)될 수 없다는 증표로서 형형(炯炯)한 불빛을 밝혀 왔으니 이제 신문은 폐간된다 해도 한(恨)없는 긍지를 간직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면, ‘앞을 보아 미련됨이 없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집필자의 주석(註釋)은 비록 없었다 하더라도, 더욱 광폭해질 일본 군벌과 더욱 악랄해질 총독부의 탄압 정책이 강요와 회유정책을 총동원하게 될 앞날을 예견하는 경우 ‘동아일보’가 훼절(毁節)하여 민족의 진로를 오도(誤導)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자폭(自爆)하고 가사(假死)하여 윤전기를 멈춤으로써 먼 앞날을 기약하겠다는 비장한 경의의 표시인 것이다. 그러므로 폐간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잊지 않았다.

…한번 뿌려진 씨인지라 오늘 이후에는 싹 밑엔 또 새싹이 트고 꽃 위엔 또 새 꽃이 필 것을 의심치 않는 바이다.

‘동아일보’는 1940년 8월 10일 이 폐간사를 끝으로 일제 하에서의 운명을 다했다.

(이경남, ‘雪山 張德秀’, 동아일보사, 1981, 274-276쪽) 

 

 

나는 당시 저서를 통해서 학문적 영향을 받은 김한주씨가 어떤 분인지 전혀 몰랐다. 고려대학교 강사로 나갈 때였는데, 학부 때 강의하신 철학과 박희성 선생님이 어떻게 아셨는지 “자네 논문에 김한주를 인용했던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하고 물으셨다. 놀라서 “김한주씨를 어떻게 아십니까” 했더니 바로 박선생님의 생질 즉 누님의 아들이라 했다. 그러면서 김한주씨는 일제시기 일본 호오세이(法政)대학을 나온 동아일보 기자였으며, 일제말기 그 신문이 폐간될 때 폐간사를 썼고, 해방후에는 월북해서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강좌장을 지냈다고 했다.

(강만길, 역사가의 시간: 강만길 자서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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