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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동아일보 사람들- 김태등

Posted by 신이 On 11월 - 5 - 2018

 

김태등(金泰登, 1889~ 몰)은 평양출신으로 1908년 4월부터 평남 용강군 사립 보명학교, 서울 사립 중동학교, 서북학회농림강습소, 관립 한성고등학교, 서울 기독교청년회학관 영어부를 다니거나 수료한 뒤 1913년 4월부터 중국 길림성 사립 명동학교, 정주 오산학교, 재령 명신학교, 평양 사립 숭실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는 1920년 4월 장덕준의 소개로 동아일보에 입사한 뒤에도 내근을 하면서 중앙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기독교청년회학관 영어부를 1년여 다닌 것을 제외하고 그의 영어실력은 거의 독학에 의한 것이었다. 하루에 몇자씩 단어를 사전을 보아가며 외우고 문법과 숙어도 외어서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 10대 후반에 학교를 다니면서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쓰는 성실함을 보였다. 같은 창간기자 이서구는 김태등이 한복을 입고 다녔다고 기억했고, 유광열은 “조사부 기자로 3.1운동 48인의 공판 때 인물 사진을 구하느라 애썼다”며  “성실한 사람이었으나 폐병으로 30여세에 요절하였다”고 기록했다.

 

김태등(金泰登) (평양, 1889~ 몰 ) ▲ 1920. 4 기자, 1922. 2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김태등(金泰登)

창간 당시 기자

1893년~불명

평양 신양리 159 출생. 

1908년 4월 (평남-인용자 주) 용강군 다미면 사립보명학교 입학. 동년 12월 동교 중퇴.

1909년 2월 서울 사립 중동학교 입학. 동년 9월 중퇴. 동년 9월 서북학회농림강습소 입학. 1910년 10월 동소 수료

1911년 4월 관립 한성 고등학교 입학. 동년 동교 중퇴.

1912년 서울 기독교청년회학관 영어부 입학. 1913년 4월 동관 수료

1913년 4월부터 1915년 3월까지 중국 길림성 동남로 화룡현 사립 명동학교 교원.

1915년 4월부터 1917년 5월까지 정주 오산학교 교원.

1917년 5월부터 1918년 12월까지 재령 명신학교 교원.

1919년 9월부터 1920년 2월까지 평양 사립 숭실학교 교원.

1920년 4월 1일 본보 창간되자 기자 피임.

1922년 2월 28일 본보 사임.

(동아인명부, 동우(東友) 1963년 8월호 10쪽)

 

 

창간 40주년 기념 좌담
-내가 겪은 대로 본대로 들은 대로 본보(本報) 창간당시(創刊當時)를 말하는 좌담회

△김동성(외신부장,합동통신사장)
△유광렬(사회부기자, 한국일보 논설위원)
△최두선(중앙학교장, 본사 사장)

○김=그때 멀지 아니해서 ‘워싱톤’에서 군축회의가 열리게 될 예정이어서 영미불일이(英美佛日伊) 등 강대국들이 군축문제를 토의하게 되어서 각국 대표가 모이는 때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와이’ 가는 것을 핑계 삼아서 ‘하와이’신문인대회가 끝나면 ‘워싱톤’으로 가기를 혼자 다짐하고 표면은 ‘하와이’간다고 떠난 거예요. 그런데 그 때 사(社)를 떠날 때에 ‘워싱톤’ 얘기를 나는 이상협 씨한테도 말 안했습니다. 또 그때 일본사람 중에 영어께나 하는 사람은 대개 ‘군축회의’에 갔습니다. 여기 한국에 와 있던 일본인 중에도 영어께나 하는 사람 다 갔어요.

신문기자만 51명이 갔어요. ‘워싱톤’ 군축회의에… 그런데 내가 거기에 갈 생각이 있는데 내가 간다고 말만 해 보아요? 그렇게 되면 ‘하와이’도 못가게 되기 때문에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말 하지 않고 혼자만 알고 갔어요. 주된 목적지가 ‘워싱톤’이기 때문에…(중략)

○최=‘워싱톤’에 간 것은 부산물이지.

○유=하몽(이상협 씨) 보고도 얘기를 안했다니 말씀인데 천리구(김동성-인용자 주)가 ‘워싱톤’에 갔다는 것이 알려지자 큰일 났다고 애를 썼어요. 동아일보 이름을 가지고 ‘워싱톤’에서 독립운동이나하면 큰일 났다고 해서 수군수군하고, 김태등 씨를 끌고 딴방으로 간단 말이야. 그래 슬그머니 따라가 봤더니 ‘워싱톤’에 가지 말라는 전보를 치라고 하몽이 그러는데 영문으로 전보로 치되 조선말로 “왜가오(WEGAO) 정치활동은 불가라고”이렇게 쓰더군요(웃음)

○김=알지못했어.받아도 내가 오나?

○유=그때 그 전보를 쳤는지는 모르겠어요…

(동아일보 1960년 4월 1일자 4~5면)

 

 

(창간 50주년 기념특집) ‘그 때 그 사람 그 정열 창간 전후를 말한다’

이서구(71. 편집국기자)=그때 편집국에서 한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나하고 ‘애게게’가 있었지. 중앙학교 영어선생하다 온 김태등(金泰登) 말이야. 사옥이랬자 지금 중앙학교 자리인 화동 138에 있는 양철지붕 단층에, 바로 옆 기와집과 연결하는 복도가 있었고 길다란 책상이 세 개 놓여있을 뿐,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

(동아일보 1970년 4월 1일자 11면)

 

 

정치부에 통신을 번역하던 이로는 김태등이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중학교로 北星學校(?)를 나와서 지방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왔다는 것이다. 퍽 성실한 사람이었다.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하여 중학교에서 영어시간도 맡아 가르친다고 하였다. 학교에 다닐 때부터 몇 십년동안 줄곧 日記를 계속하였다고 몇 십 권을 보이는데 놀래었다. 또 일기에는 날마다 반성하고 격려하는 글이 쓰이어서 刻苦勉勵하는 그의 열심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폐병으로 퇴사한 후 永眠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유광렬, 舊友回顧室, 동우(東友) 1963년 11월호 7쪽)

 

 

(1920년) 7월에 중요한 일로는 그동안에 예심이 결정된 48인의 공판이 12일부터 열린 일일 것이다. 조선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는 33인이나 이들과 협력하여 그 운동을 추진하는데 중요성을 띤 이로 그 비중이 거의 33인과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이 15인이 있어서 48인의 공판이 한 때에 열리게 된 것이다. 12일 전날 예보를 준비하느라고 나는 분주하였다. 그들의 사진을 구비하는 것만도 그때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여기에 협력한 이로는 그때에 조사부 기자로 있던 김태등(金泰登)이가 많이 애썼다. 그는 평안북도 사람으로 일찌기 오성학교를 졸업하고 자습으로 영어를 공부하여 그 때에 중앙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동아일보’사 기자를 겸하였던 것이다. 그는 성실한 사람이었으나 폐병으로 30여세에 요절하였다.

(유광렬, 기자반세기, 서문당, 1969, 139쪽)

 

 

신념과 노력의 짧은 일생
김태등 – 우국과 독자적인 역사관

필자가 동아일보사에 있을 때에 함께 일하던 기자로 잊혀지지 않은 두어사람의 기자가 있다. 한 사람은 김태등 씨요 다른 한사람은 변봉현 씨이다. 두사람이 다 평안북도 사람이던 것만 생각나고 어느 군 사람이던지는 생각이 안난다. 김씨는 필자보다 7, 8세 위이니 지금까지 살았으면 80세 가까울 것인데 30대에 요절하였다. 변씨도 필자보다는 4, 5세 위였다. 김씨는 서울에서 서북학교를 고학으로 마쳤다고하나 그의 학문은 대부분이 自習인것으로 들었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는 황해도 載寧邑에 있는 명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3·1운동때에는 김도태 씨와 연락하여 그 운동에 가담할 민족대표들을 찾아다닌 일도 있었으나 현저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경찰의 검거는 면하였고 동아일보사에 입사하기는 재령이 고향인 장덕준 씨의 소개로 들어왔었다. 그는 사에서 일본말로 들어오는 통신을 번역하는 한편으로 중앙고등보통학교의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에게 영어를 어떻게 배웠느냐고 물었더니 하루에 몇자씩 영어 單字를 사전을 보아 가며 외우고 문법과 숙어도 외어서 중학교의 교편을 잡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개의 외국어를 정복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의 집에 어느 해에 들렀더니 마침 김도태 씨가 감옥에서 나와서 그집에 유숙하고 있었으므로 아직 출옥하지못한 옥중동지들의 소식도 듣고 우리 민족의 장래도 이야기하느라고 하룻밤을 새우면서 세사람이 이야기하던 것이 회상된다. 우연히 그는 서북학교의 고단한 중학생으로 지낼 때부터 10여년에 걸친 일기책을 꺼내보이는 것도 보았다. 그책에는 감상적인 소년시대에 인생으로서 자신의 앞날과 한국민으로서 조국의 앞날을 어느 책에나 빼지 않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 필자는 놀랐었다. 15, 6세의 소년으로 어떻게 그렇게 생각이 성숙하였을까도 놀라우려니와 10여년 동안을 하루도 빼지않고 일기를 쓰는 그 성실과 근면에 감탄하였다.

그는 독특한 역사관을 가졌었다. 우리나라가 몇천년 동안 강한 민족의 압박을 받아왔기 때문에 사대주의인 듯이 아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그때의 난국을 처리하는 임시방편이요 민족으로서 손색이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세계 역사를 볼 때에 지금의 영국이나 佛國같은 강국도 어떤 때에는 남의 나라에게 짓밟힌 때가 있었으나 오늘같이 세계의 강한 나라가 되지 않았느냐. 또 미국은 백수십년밖에 안되는 짧은 역사를 가졌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 백만의 군대를 보내서 세계를 리드하고 있지 않느냐. 자기는 우리 민족의 힘을 믿는 것이다. 지금은 비록 일시적으로 일본에게 짓밟히고 있으나 장래 기회를 붙잡으면 반드시 세계적으로 우뚝 솟는 나라가 될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위하여는 쉬지않고 노력하고 싸우고 희생해야한다고 하였었다.

그는 이 신념 아래 지나친 과로때문에 폐병에 걸려서 30여세로 별세하였다. 그 짧은 일생은 신념과 노력의 일생이라고 때때로 그를 회상한다.

(유광렬, 한국의 기자상, 기자협회보, 1968년 12월 27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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