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25. 동아일보 사람들- 김찬승

Posted by 신이 On 11월 - 1 - 2018

 

김찬승(金燦承, 1911~1950 납북)은 일본 유학 후 1932년 5월 동아일보 평남 안주지국 기자로 입사한 뒤 1935년 12월 함남 원산지국 홍천길 지국장이 사망하자 후임이 됐다. 1939년에는 함북 청진에서 특파원생활을 했다. 해방 후에도 언론계에서 활약했으나 6.25때 납북됐다.

 

 

함남 원산(元山)……남충희(南忠熙, 1920. 4~) 정봉점(鄭鳳漸, 1921. 6~) 조종구(趙鍾九, 1923. 1~) 남충희(南忠熙, 1925. 5~) 전경식(全瓊植, 1926. 7~) 김하선(金河善, 1929. 3~) 홍천길(洪千吉, 1935. 9~) 김찬승(金燦承, 1935.12~) 김철환(金鐵煥, 1938. 8~)

(역대지국장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김찬승(金燦承,41세) (전략)…동아일보의 원산 청진 특파기자였다. 광복 후 …(중략)…한성일보 편집국장이 되었다(각주:오양동,‘김찬승’,“한국언론인물사화” 8. 15 후편, 상, 대한언론인회, 1993, pp.191~197.).1950년 7월 15일 9시경 동대문구 신설동 363의 6 자택에서 내무서원 5명에게 연행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된 후 납북당했다.

(정진석, (6·25전쟁) 拉北:끌려가고 살해된 언론인 284명 목사·신부·종교인 371명의 비극, 기파랑, 2006, 105쪽)

 

 

[謹告]

김찬승 김진두 임기자(金燦承 金鎭斗 任記者), 기자 김여섭 의원해직(記者 金礪爕 依願解職) 소화칠년 사월 이십팔일(昭和七年四月二十八日) 동아일보사 안주지국(東亞日報社 安州支局)

(동아일보 1932년 5월 5일자 3면)

 

 

[社吿]

김찬승(金燦承) 원산지국장(任元山支局長)
원산지국장(元山支局長) 홍천길(洪千吉) 사망해직(死亡解職)

금반(今般) 폐사(弊社) 원산지국(元山支局) 총무(總務) 김찬승 군(金燦承君)을 고(故) 홍천길 군(洪千吉君)에 대(代)하야 지국장(支局長)으로 임명(任命)하고 일체(一切) 국무(局務)를 계승(繼承)케 하엿사오니 조량(照亮) 하소서.

소화10년 11월29일(昭和十年 十一月二十九日)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동아일보 1935년 12월 1일자 3면)

 

 

ㅁ 납북으로 지워진 행적

김찬승은 왜정때 동아일보 원산지국장, 청진특파원을 지냈다. 광복후에는 조선일보 사회부장, 한성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하는 등 투철한 언론인으로 촉망받았었다. 그러나 6.25때 그가 납북됨으로써 광복전의 행적은 거의 알 길이 없고 그가 남긴 글과 가까이 지낸 친지들이 그의 행적을 어설프게 나마 전해줄 뿐이다.
작가 안수길은 김찬승을 자기와 동향동갑이라고 적었으니 1911년 함남 원산 출생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와 청진에서 함께 특파원 생활을 한 김윤환(전 경향신문 기자)은 평남으로 알고 있다. 김찬승의 말에 의하면(신천지 · 48년 8월호, 신문기자가 겪은 8.15좌담회 기사) 그는 일본 유학시절 관부연락선을 타고 다닌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일본 유학을 마친 그는 25세쯤 동아일보 원산지국 기자에 임명된다. 35년 10월 29일 홍천길 지국장이 사망하자 그 후임이 됐다. 그는 39년 여름 일·소 양군 충돌이 발생한 장고봉(1938.7.11~8.15)사건 현장탐방기 ‘두만강하류풍물첩’을 연재했다. 이 글은 두만강 하구의 서수라에서 국방도로를 따라 토리촌, 조산동, 용현, 장고봉에 이르는 국경선을 탐방한 기사다. 그는 가는 곳마다 당시로선 쓰기 어려운 망국민의 설움을 숨김없이 한탄하고 있다.
서두 ‘사적풍운의 진원지’에서 그는 국경선 두만강은 멀리 고구려에서 이조에 이르기까지 1천5백년동안 영지수비를 위한 온갖 풍운이 계속, 그 흔적은 역사의 파편이 되어 혹은 고적, 혹은 옛이야기로 우리 겨레의 혈맥에 흐르고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다시 일·만·소가 국경 푯말을 세워놓고 영지수비를 위해 활동하고, 그러나 변방을 수비하는 선인의 자취조차 찾아 볼 길이 없는 이 길이 더 한층 공허롭다“며 이곳이 이미 이민족의 지배하에 있다는 역사의식을 부각시키고 있다.
또 그는 “두만강입구 서수리에서 장고봉사건 이래로 출어 못하는 어민들이 가난과 굶주림을 헤어나고자 발버둥치고 있음을 안타까워 했다. 소련의 포세트만과 연해주 넓은 벌판을 바라보며 약 10리쯤 대안의 평야에 지금은 사람 하나 없는 폐허지만 재작년(1937년) 5월까지 조선인 농가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들은 몇세기를 두고 피와 땀으로 황무지를 개최, 옥토를 만들어 조선땅 못지않게 잘 살아 왔다. 그러나 일·소 관계가 악화해감에 따라 이고장 사람들과 정보교환이 되는 것을 알아차린 소련측은 재작년 농사를 시작한 주민을 중부아시아 지방으로 이주시켜버리고 말았다”고 수십만 연해주 조선민족의 강제이주 사실을 고발하고 있다.
서수라에서 토리촌에 이른 그는 또 이렇게 쓴다. “소련령 토리촌은 10여호의 작은 촌락, 옛날부터 러시아를 출입하는 관문 녹도와 더불어 이땅 백성들의 수많은 로맨스를 갖고 있는곳, 제정러시아때 토리는 1백여호의 국경소도시, 조선농가들은 돈 그리운줄 모르고 잘지냈다. 그리고 이땅의 우국지사들이 온갖 박해를 물리치고 그들의 근거지였던 해삼위로 드나들던 길도 토리에서 녹도로 건넜다라고 한다. 토리와 독도 주민은 국적은 다를망정 같은 민족. 서로 결혼하고 밤중에 주붕을 찾아 오가고 했다. 그들의 넋은 지금 어디를 헤미고 있는지?… 슬픈 역사를 살고 흘러가는 두만강 물굽이를 하염없이 들여다보는 젊은 기자는 그 시절의 그들을 연상하면서 세태의 무상함을 서러워한다. 흘러간 그들! 쫓겨간 그들! 청춘에 끓는 피는 뉘게다 맡겨놓고 가고 말았는지? 그것이 그들의 뜻이 아니었을 것을 생각하면 더욱 안타깝다.
연해주를 기름진 땅으로 개척하기에 검은 머리가 백발을 휘날리게 된 노구를 이끌고 또다시 중부아시아 거칠은 땅을 파헤치면서 고향 소식에 목말라 하지않으면 안될 우리 민족의 울고싶은 운명을 나는 지금 한탄한다. 약소 민족이 아니었다면 결코 인간 최대의 비극은 잇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노래부르던 나루터의 나룻배는 어디로 흘러가 또 슬픈 역사를 빛내고 있는가? 아 천고수 부를 곳이 어디메뇨? 석양낙조가 이 마을을 물들일 뿐이다“라며 그는 망국민의 설움을 하염없이 슬퍼하고 있다.

□ ‘두만강 하류 탐방기’에 담긴 기자혼

젊은 시절의 그는 열혈애국지사형의 기자였다. 40년에 동아일보가 폐간되자 조선상공신문 특파원으로 함북도청 출입을 하다가 그만두고 시골에 가 있었다. 광복 1년전부터 함경도 지방에는 소련서 잠입한 지하운동자들이 있어 블라디보스톡과 연안 등과 무선연락하며 파괴공작도 계획하고, 소·만 국경 관동군의 허상도 폭로했다.

(…)

그는 건강한 체격, 활달한 성품, 좋은 대인관계, 예리한 필봉 등 우승규가 평한 것처럼 ‘저널리즘 조선’을 육성하고 이끌어나갈 원동력이 되고 대성할 날이 있을 언론인의 한사람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납북되어 큰 뜻을 펴지 못하고 말았다. 김찬승을 잘아는 극작가 최금동에 의하면 그는 6.25당시 동대문구 신설동 탑골 승방(현 보문사) 부근에서 부인과 아들이 함께 살았다한다. 지금은 성북구 보문동으로 바뀌고 가족들도 찾을 길이 없다.

※ 참고자료: 신문백년인물사전, 동아일보60년사, 일선 기자의 고백, 두만강하류풍물첩

(오양동 전 경기일보 편집국장, 납북으로 지워진 행적, 韓國言論人物史話-8.15後篇(上), 1992)

 

 

 

실향사민신고서(失鄕私民申告書)- 김찬승

 

댓글 없음 »

No comments yet.

RSS feed for comments on this post. TrackBack URL

Leave a comment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