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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동아일보 사람들- 김정실

Posted by 신이 On 10월 - 31 - 2018

 

김정실(金正實, 1904~1969)은 경남 고성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33년 3월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했다가 1935년 10월 퇴사했다. 1938년 6월 동아일보에 재입사했다가 1940년 8월 동아일보 강제폐간 때까지 사회부 기자로 활약했다.
 
 

김정실(金正實) (고성, 1904~1969) ▲ 1933. 3 사원(사회부), 1935.10 퇴사. ▲ 1938. 6 재입사, 사원(사회부), 1940. 8 폐간.〔단국대학장, 민의원의원〕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間島共産黨事件活動裏面記
東亞日報 金正實

『發端』

간도(間島) 갓다 오라는 명령을 밧은 날이 9월 14일이다.

「昭和 5년 5월 31일을 긔하야 간도일대를 중심으로 발발된 대폭동의 뒤를 이어 일어난 秋收暴動, OO기념폭동 廣東OO記念暴動 등 대소 100회의 소위 간도 공산당 사건으로 피검되여 경성지방법원 신축 대법정에서 264명의 피고가 공판을 밧게 된 것은 량과 질로 보아 일본은 물론 세게 공판사상에도 그 류례를 구하기 어려울 만치 대사건이다.

1. 폭동의 원인, 2. 피검상황, 3. 피검자의 가족상황, 4. 免訴者의 그후 상황, 5. 관계인물 및 건물장소사진수집, 6. 그후 간도사상계의 一瞥 등의 조사를 목적하고」

라는 목적아래 5일 이라는 려정을 가지고 오후 5시 25분 경성발 상삼봉행 급행열차를 청량리역에서 탓을 때에는 해가 서산을 넘으려는 때이엇다.

가방을 들고 2등차실로 들어서자 텅비인 좌석에서 뜻박게 동업 「中央」의 魚君을 맛낫다. 쉬쉬하고 출장은 가면서도 비밀을 지키어야 하는 新間道에 잇서서 나는 직각적으로 「올치! 魚君도 역시 간도행이로구나.」 하엿다. 魚君 역시 나를 맛난 것이 의외엿던지 반갑게 맛어 한 자리에서 소정의 목적지를 서로 교환하엿다.

魚君의 행정이 咸興法院에서 열리는 永興農民組合事件公判記事를 쓸 책임을 지고 함흥까지인 것을 알때에 나는 친한 魚君에게까지 나의 간도행을 숨길 필요를 늣겻섯다.

공판을 압두고 社에서 朱乙溫泉에 5, 6일 정량하고 오라는 팔자 조흔 려행이라는 어물럭한 것으로 당장을 흐리고는 자리에 안즈나 원래 먼 곳에 가는 맘 갈아 안지 못하는 사람이고 보매 좌불안석격으로 가슴은 잠잠할 수 업섯다.

이 걸음이 어떳케 되나. 가는 길에나 답사하는 동안에도 몸을 특별히 조심하라는 재삼 당부를 들엇지마는 호긔심과 욕심이 가득찬 성미라 그래도 넓은 세게에 가서 무시무시한 불콩알떼를 실지로 당하지는 못할지언정 실감에 가까운 것은 좀 상미해 보앗스면 하는 충동이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기는 하지마는 염려되는 것은 기실 한둘 이 아니엇다.

지내 놋코 보매 그 까짓것 하는 소리를 공중에다 방송을 하지마는 당한 그때는 까마득한 것이 첫재 몸이 완전해 가지고 돌아올지가 문제고, 둘재로는 신문으로서 부끄럽지 안코 보람이 잇슴즉한 재료를 구해올지가 의문이다.

일은 고약하게 되는 모양이다. 마침 京元線에 기차 탈선으로 시간은 예정이 전부 꺼꾸로 되고 말지경이다. 漣川서 한 두시간 지체하고는 大光里에 다여서는 압헤 탈선 현장이 잇다 한다.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두덜거리는 사람은 버단 우리뿐 안이라. 간도는 갈망정 이것도 그대로 놋칠 것은 업다하고 조사해 가지고서 전보지에다 썻섯다. 그러나 기차 련락은 그리 쉽게 되지 안엇다. 안타가운 가슴으로 鐵原에 다이매 발서 11시 반이다. 전보 취급시간이 느젓고 부근에 우편소문을 부서저라 하고 두들겨도 종무소식이라. 끙끙 알으면서 北行車에 몸을 실엇다.

새벽인지 아츰인지 자다가 일어나매 魚君이 나리는 함흥역을 지난다. 아침해가 드문드문 선 白沙에 松林 사이로 동해에 붉게 물들이고 돗아 오르는 것을 보는 느낌은 만일에 내가 좀더 자유스러웟더라면 시를 생각하고 휘파람<14> 노래를 부르면서 關北의 정취를 느꼇슬 것이나 유감이다. 솟뚜껑가티 나려 누르는 짐이 맘을 끄을고 멀리 曠野 만주벌로 옴기게 한다.

『上三峰의 밤』

會寧서 자고 아침 첫차 車를 타는 것이 낫다는 차장의 말을 듯고 십지 안엇다. 기차가 연착되고 보매 아침 시간과 점심시간을 마추지 못하고 또 직행이 아니라서 식당차가 련락되지 안코 보매 그리 손님만치 안턴 驛벤도 파리들의 두서너 그릇 밧게 안되는 것으로는 도저히 세음을 잡을 수업서 주문해 주마고 두 번 세 번 명언하던 車掌의 말을 밀다가 오후 5시 지나서 겨우 아침인지 점심인지 모르는 벤도 한그릇을 차지 하엿으니 일이 안되는 판이로구나 하는 생각까지 해 보앗섯다.

會寧을 지나서는 어둠이 산과 골작을 덥는데 泰嶺을 허덕이면서 숨차하는 기차에 저기에서 바로 몃 십 명의 馬賊團이 뛰어나와 달여오지나 안을가 해서 소름이 쪽 끼친다. 사실 산간에 조그만한 역들이 첫 가을 찬바람에 올올 떨고 잇는 것을 볼적이나 무시무시한 경관의 6穴砲 겨누고선 서슬에 더한층 선듯해 진다. 車掌이 바뀌이더니 자긔 깐은 2등차실에 하나 뿐인 손나를 위로하여 주노라는 것인지 작년 재작년 통계까지 주어대가면서 마적단이니 OO단이니 하는 무장단들이 바로 지내온 역에 나타낫다 거니 압프로 오는 고개에서 차를 습격햇다거니 하는 바람에 눈치챌 줄 모르는 이 사람의 얼굴을 나는 참아 바라볼 수도 업섯다. 어둠은 점점 더해가고 새대와 갈입흘 뒤흔드는 바람이 캄캄한 산간을 지내가는 길손에게는 결코 조흔 소리가 되지 못햇다.

조곰 지나서는 고개를 넘는지 번적하며 힌빗치 자리를 편듯이 겻흐로 달겨 든다. 머리가 쭈빗해지면서 알어보니 豆滿江의 上流라 한다. 새삼스럽게 국경에 이르럿는가. 교과서에서 보던 두만강이란 이것인가 하는 사랑스런 생각이 떠오름을 느끼엇다.

어데가 어데인지 분간조차 할수 업는데 上三奉이라니 나렷다. 국경의 거리를 거니는 맘과 국경의 밤을 느끼는 꿈은 나만이 보앗다. 기차에 시달려서 피곤도 하련마는 잠이 잘 오지 안엇다. 鴨綠江을 끼고서 밀수입출이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을 연장시킨다더니 여기도 다름이 업다는 소리다. 이 三峰旅館 주인도 이 골의 명물로서 일즉부터 전해 오는 습격당한 이야기를 들려주엇다. 그러고는 혼자 덧문을 잠그고서 몸을 새우 등갓치 꼬부리고서 잠들기를 바랏다. 그러나 잠은 힘쓰는데 반비레격으로 더 멀어저 갓다.

무슨 사변을 일으키려는 압잡이로 오는 무거운 침묵 갓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안헛다. 바람소리만이 창문을 두들기고 진간다. 좀더 부드럽게 국경을 넘을려는 사람을 접해 주련만은 북만벌의 거친 냄새는 이 으릉거리는 바람에서도 넉넉이 짐작할 수가 잇섯다.

『領事館의 地下室』

264명의 피고의 사진을 구해야 한다. 영사관에는 잇을 것이다. 龍井 나려서는 지국장 韓군을 맛나던 길로 곳 물엇‹¤. 이게 만일에 뜻대로 되지 못한다면 일이 글럿다는 생각을 하엿슴으로 좌우간 영사관에 차저가 보라고 주장을 세웟다.

좀 까다로운 것으로 알엇기에 나역시 중임을 지고간 만큼 호의에 거실닐까하고 조심하는 수밧게 업섯다. 마참 승락은 낫다. 100여 명의 사진을 구할 수 잇다는 것을 알 적에 적지 안은 기쁨이 낫다. 천리 이역에 이 사건을 위해서 일부러 왓스니 재료를 모을 수 잇는데 까지 모아보자 하얏다.

피검 당시의 상황은 물론 공비들이 활동하던 방법, 련락, 격화해진 경로 등을 물엇섯다. 그러고는 머리에 색이고 긔억할 수 잇는 데까지 긔사(記寫)햇섯다.

寫眞臺帳을 빌렷다. 사진관의 후원을 어더 암실로 쓸 수 잇게 까지된 영사관 지하실에로 들어갓다. 콱하고 잠그는 날이면 고흔이 되엿지 별도리가 업슬 것은 더 말할 것이 업다. 굵은 쇠창살이 덜컥하고 다치는 문과 컴컴한 빗에 무거운 침묵 마치 암굴고에 나오는 장면 갓햇다.

당시 검거할 때에는 1,200여 명이엇섯다니 트랙으로 실어 다 나르는 판에 이 방에서도 여러 사람이 지냇슬 것으로 생각이 낫다. 여기서도 間島긔분이 난다. 한 장 두 장 박는 동안에 밤은 초조하면서도 호긔심에 움즈겻다. 맘은 쉴새업시 물결치고 잇섯다. 국경은 무사히 넘엇으나 여기서 다시 한번 채워지면 그만인가 하는 생각도 낫섯다.

이 날도 험상 굿은 사람을 두서넛 다려 왓다. 그들이 무엇을 하다가 불려 왓는지는 모르지마는 매우 껄껄하고 거치른 성격을 가질 것만은 더 말할 것 업다.

龍井, 局子街, 老道溝 – 電燈公司, 鐵橋, 학교, 民會를 불질르고 파괴하던 당시를 생각하여 보앗다. 그러고는 총 끗에 칼을 꼬츤 중국병장이 지나가는 사람을 상관 갓치 보아서 그런지 뚤어지게 보는 것이 어쩐지 조치 못하였다. 더욱이 밤거리를 거닐면서 마다치면 전선에서 보는 처참한 늣김을 일으킨다. 습격당하던 집이 바로 저 집입니다. 저기 들창이 그 폭탄 맛은 자리입니다. 海蘭江鐵橋라는 것은 저것입니다.<15>

여긔서 모여서 龍井습격을 계획하엿고 불지를 꾀를 내엿더라오」 하는 韓군의 말을 듯고 영사관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들으며서 사진이 어찌되엇나 하고 굴안갓튼 지하실에로 들어가면 머리 끗이 하늘을 가르치곤 햇섯다.

『來皮溝 압마을』

자동차 한대를 세내가지고 사진반과 한가지로 출발하엿다. 서속과 기장들이 누러케 된 벼이삭과 함께 풍년임을 고하고 잇는데 간도명물로 보이는 마차에 실려 가고 오는 호인들의 얼굴에는 하나도 정든 맛이 떠오르지 안엇다. 저 무리들이 터세를 하고서 우리네 동포를 못살게 굴엇거니 하는 생각도 떠오르나 저들이 만일에 우리 일행을 보고서 덤벼들면 어쩌나 하는 어림 업는 생각도 해 보앗다. 琵岩村에서 제일 만히 부뜰려 갓다기로 차저 단이면서 정황을 물엇다. 그들의 잠행운동을 하던 이른바 사실상의 지하운동은 나에게 이양(異樣)의 소리가 되엇슴은 물론이다.

「저기가 領警 단원 10여 명이 밤을 새이면서 파수 보던 곳이오.」

「바로 저마을 압 언덕진데가 지하굴을 파고 잠복햇다가 아침 김연기로 발각되여 체포되던 지점입니다.」

하는 소리를 듯고보매 평화한 듯한 가을별에 혀선 농촌의 과거가 험상 굿은 얼골로 환영을 보이는 것 갓다. 쫏고 쫏기고 숨고 숨기고 하던 당시를 회상하면서 天涯一方에 자제를 보내고 또는 남편을 옥중에 생각는 사람들이 행여나 서울소식을 듯고 십퍼해서 내달어 모여 들엇다.

자동차는 덜덜거리면서 산비탈길로 달렷다. 길가에 흙벽만이 놉게 담친 듯이 들려잇는 것을 지적하면서 (2字 略-원문) 土豪들이 (9字 略-원문) 불에 태워지고만 집터라고 한다. 도야지를 몰고서 國師堂 뒤으로 지나가는 異國무리들이 그 당시를 말하는 것 갓다.

길가에 비가서고 철책이 들렷다. 三勇士가 잇다더니 전란에 학살당한 병사의령을 긔렴한다는 곳이다. 부근일대가 불바다로 화하고 砲擊, 彈擊이 소란을 곡하던 당시를 회상해 보고 또다시 아니 언제 그런 격난이 이 땅을 방문하지 안흘지 의문이다.

우리 길보다 연길로 긴 군경을 실은 자동차 두 대가 전 속력을 노아서 북으로 달린다. 들으매 무장공비 5인 一團이 권총으로 위협하고 행인의 소지품을 배앗어갓다는 급보를 접하고 출동하는 모양인데 그 지점이 20리 남짓하다고 한다. 듯고 보매 정신이 앗득해지나 긔자의 호긔심으로 뒤를 추격해 볼 생각도 낫으나 원래 使命(?)이 다르고 보매 내길로 발을 몰렷다.

얼마전에 운전수가 바로 이 자동차에 손님을 태우고 가다가 老道溝에서 한 10리 되는데 강을 조구만한 다리로 건너랴는데 압헤 보매 밀가루를 가득히 실은 구루마 세챼를 붓잡고 하나는 직히고 5, 6명은 실어다가 산중으로 옴기는 광경을 보고 손에 맥이 업서지고 정신이 아득햇으나 오는 자동차를 보고 군경이 이 소식을 듯고 무장해 가지고 달려오는 것으로 알아채고 산중으로 달려가서 세사람과 말이 생명을 보전해 갓다는데 얼마 아니면 그곳이 보일 것이라고 한다. 어떠게 되는 모양인지 점점 위험지대를 들어가는 것도 갓햇다.

산에는 나무를 베히고 들에는 수수대를 심으지 못하게 해서 그다지 으슥한 곳은 업스나 神堂 부근에는 잡나무 7, 8그룹이 서서 바람에 위슬렁하니 그러치 안어도 놀낸가슴이라 선듯해 진다.

2道溝, 3道溝를 지나서 內皮溝를 저기에 바라 보앗다. 최후까지 동해지방의 대소동을 지휘하던 총 본부가 잇던 곳이라 한다. 지하에 굴을 파고 膽寫版으로 비라를 박히고 중요분자들이 각지의 정보를 밧고 련락을 취하면서 여러 가지 비밀획책을 햇다는 것이다. 기어히 가보리라고 서두는 통에 갓치 동반하는 이는 얼골을 일엇다.

제일 갓가운 곳 말하자면 첫 잠행운동지라는 곳을 차저 보앗다. 나무 사이에 북으로 뚤어지고 동으로 면한 굴이 7, 8명은 넉넉이 수용하고도 남앗다. 외부와의 교통을 끈키에는 문작 하나이면 묘하게 보인다. 지금이라도 어데서 뛰어나오는 것 갓흔 늣김을 주는데 몰려 온 주민들이 구사일생을 한 회고긔담을 제각금 이야기해 준다. 더 잇고 십지 안엇다.

압 마을에는 반 넘어 불타고 죽은 사람도 적지 안타. 참변은 여기가 중심지는 아니라 하더래도 상당한 모양이다. 요사이로 지내가는 행인들을 납치해 가는 일이 례사라고 하며 더 갈용긔보담도 뒤로 물러갈 생각이 간절햇다. 저기가 內皮溝 산골이다. 말을 달린 즉 훈련한 공비들이 棍椊, 석유, 권총, 도끼, 대창 등으로 습격해 들어오자 이여 응전하는 자위단원, 순경 등으로 전쟝화 해진 당시에 도망질 치던 사내들과 부녀자들이 겨우 모진 목숨을 건저서 그래도 쫏겨 갓다가 지금 다시 와서 임시로 의거하고 목숨을 보전해 가는 중이라 한다.

아들 일은 사람 애비 타 죽은 사람 等 數가 업다. 요사이도 밤으로 도망갈 준비를 해가지고서 문을 잠그고 허리를 새우등 갓치 오그린다고 한다.<16> 만리 이역에서 생명선을 개척해 가는 무리들의 용긔도 가상스러웟든 것이다.

『豆滿江渡船場』

領事館에서 각처에 들어온 정보를 들으매 만주사변 2주년 기념으로 소동을 이르키려는 테로운동이 적지 안케 일어나고 잇는 모양이다. 豆滿江渡船場에는 兩名의 권총 共비가 渡船客을 위협하고 또 순사 한 명을 총살하고는 산중으로 잠적햇다는 소식이다. 돌아갈 길에서 난 사실이다. 압흐로 뒤로 좌우에 일어나는 사건이 그리 심상치 안타. 여러 곳에서 재료는 수집햇고 보고 드를 것은 독자에게 알으켜야 되겟다고 하로가 삼추도 갓트나 과연 이 난관을 돌파할 수가 잇슬 것인가가 문제이다.

保護兵을 부치고는 십지안코 불행이 당하고서 다시살면 중요재료도 나오겟고해서 욱이고서 전진하는 수밧게 업다. 局子街에 갓다가 新與國際都市 灰幕洞을 보고 가자는 권고를 곱게 사절하고서 자동차로 龍井을 하직하엿다.

걱정은 세관의 검사에서 수집한 재료가 압수는 당하지 안을가 하는 것이다. 사진도 잇도 원판도 잇다. 계통도는 물론 筆蹟 等 地點略圖도 들엇다. 이것을 빼앗기는 날에는 못숨만 살아가서는 본의의 반 넘어를 일은 것이다. 담배 열갑을 압수당햇기로 그야 문제될 것이 아니엇다. 세관은 과연 엄중하엿다.

그러나 여기서는 조선경찰의 비상한 경게가 시작된다. 전긔 武裝團이 지나가고 난 후 임으로 행인의 신체를 일일히 수색하려고 든다. 경성서 갓다는 것과 사건의 탐방을 간 동긔 등을 이번에는 재판소 이야기로 어물어 대고서 겨우 면햇다.

午後 5時에 上三峰의 東行車에 몸을 실리매 모도가 한바탕 악몽같햇다. 三防의 淸流壁도 보는 듯 마는 듯하고 淸凉里에 나렷다. 二十일 正午엿다.<17>

(김정실, ‘間島共産黨事件活動裏面記’, 별건곤, 1934년 6월호, 14~17쪽) 
 

 

 

法窓閑話
金正實

閑話는 長竹을 물고 秋夜長깊은밤을 담배와 씨름해보내는 老翁들의 쓸데없는 짓거림이련마는 世上이란 가끔 약념格으로 이런부즈럽슨소리에도 귀를 기우리는일도 더러잇으니 編輯者으 請대로 頭緖없는 젊은사람의 閑話를 몇마대해볼가한다 勿論아무런 色彩를 부치지안은 것만은 附言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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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臣에게 死를주오』

옛날 羅馬나라에는 「카라카라」라는 皇帝가 살앗섯다. 些少한 言爭으로 親弟「게-타」를 殺害한다음 當時大法律家「파푸아누스」(papu nus)를 御前에 불러세운後

「朕이 方今「게-타」에게 罪를주엇다. 卿은 맛당히 其賜罪의 理由를 案出하야 罪案을 起草하라」

는 命令을 나렷다. 그러나 「파푸아누스」는 卽刻에 王을 우르러보면 儼然한 態度로

「이미 無辜한 사람을 殺害한 後 오히려 不足하야 更히 死者에게 罪惡을 뒤집혀 씨우려하니 이는 곳 第二의 謀殺입니다. 殺親罪를 辯護하는 것은 이를 犯하는 것보담 難事입니다. 陛下여 萬一에 臣의 붓을 이 大罪惡에다 더럽히실진대 차라리 臣에게 罪를나리소서」

一毫의 假借가업는 이말에 王의 怒는 衝天하여 神色이 若如하였섯다. 滿廷의 群臣이 땀을 쥐이고 잇는 中에 「카라카라」王이 震怒는 萬雷一時에 激發로

「퇴! 朕은 너의 所願대로 死刑을 나리노라」

白刃人閃에 이 絶世의 高士도 暴惡王의 앞에서 首身을 달리하엿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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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壐

玉壐는 王의 印으로 西洋에 잇어서는 이 玉壐를 所藏한 大臣을 實로 重要視하는 傾向이잇고 따라서 掌壐大臣을 『王의 良心을 守直하는者』(Keeper of the Kings Conscienece)라는 別名지 붓이게되엇던것이다. 玉壐로 因<37>하야 傳하는 佛蘭西이야기둘을 紹介하겟다.

「샤-ㄹ」七世王은 殺人罪를 犯한 一寵臣의 死刑을 特赦하려햇섯다. 그러나 掌壐大臣「모르비에」(Morvillier)는 王의 勅赦狀에 玉壐를 찍는 것이 不法이라해서 내어주기를 不肯하엿섯다. 이에 王은 怒하야

「玉壐는 朕의 거이다」

하고 强制로 빼앗어 찍은 後에 돌우돌려 주엇다. 그러나 「모르비에」는 玉壐를 밧지안엇다.

「陛下 이 玉壐는 臣에게 두 번 至大한 光榮을 주엇습니다. 第一回는 일즉 陛下로부터 이것을 尙藏하라고 받을때요 第二回는 지금 陛下로부터 이것을 밧지안흘때입니다」

하고 掌壐大臣은 卽席에서 辭任하고 말엇다 한다.

「루이」十四世王이 一貴族의 重罪를 赦免해주려고 勅赦將에 玉壐를 찍을려고하엿섯다. 當時掌壐大臣「보아산」(Vorsan)은 盡心으로 諫止하엿으나 王은 聽而不聞格으로 强奪하야 은 後에 돌려주엇다. 그러나 「보아산」은 受領을 拒絶하고

「陛下 이 玉壐는 임 더럽혀젓습니다. 臣은 더럽혀진 玉壐의 寄託은 밧을수업습니다.

하고 辭職할 決心을 보이매 王은

「頑固한 男子로군」

하고 赦免狀을 火中에너허 불살워버리고말엇다. 그러자 嚴格한 態度를 取햇던 「보아산」은 얼굴에 和氣를 우고

「陛下 불은 모든더러운 것을 긋이합니다. 玉壐도 다시 깨끗하게 되엇으니 臣은 이것을 尙藏하겟습니다.

하고 밧앗다한다.

(…)

「하네피야」와 判官

回敎徒中에 法律家는 四派로난호여잇다. 「하네피야」「마리크」「샤페이」「할발」은곳 그 創始者로서 後人이 그 學派를 그대로 命名하엿던 것이다.

「하네피야」는 「神授의 才」라고 이르는만큼 卓越한 才能과 識見은 實로 當代師表가 될만하엿지마는 그는 名譽나 地位 黃金等을 度外視하고 法學硏究에 平生을보내려고하엿섯다.

「쿠파」太守는 先生의 聲名을듯고 訪問하여 「후베라」判官에 就任해주기를 懇請하기 再三再四에 「하네피야」는 固辭不聽하엿다. 가장 重要하고 名譽스런 地位를 몸소 懇請해도 應諾하지안는데 激怒한 「쿠파」太守는 强制로 屆服시켜보자하여 先生을 부어 市中에 을어다내세우고 萬人環視中에 每日笞十杖식 十日을 繼續하엿다. 그러나 初志를 조곰도 動하지아니하는 先生에 對하야 그맘을 돌리기 不可能하므로 畢竟放免하고 말엇던 것이다.

數年後「마스를」의 「필립」이 先生을 「박다드」에 불러 그 學說을 듯고 크게 感動한바잇어 기어히 判官의 榮職을 마려햇으나 亦是「하네피야」는 頑强히 辭하고 밧지아니하엿다 性急한 王은 震怒를 發하야 先生을 獄에 가둔 後 드디어 鐵窓속 孤魂이되게<41> 하엿다고한다.

×

爲先 이것으로 閑話를 막어 두고 限이업는 이야기 주머니는 後日機會에 열어드리기로하겟다.

(김정실, ‘法窓閑話’, 개벽, 1934년 12월호, 37~42쪽)

 

 

 

김정실 [Kim, Jeong-sil, 金正實]

1904∼1969. 교육자·정치인.

1904년 출생으로,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정치공작대(政治工作隊)에 참여해 총무로 활동했으며, 1947년 국가 건설을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건국실천원양성소에서 조소앙, 조완구, 신익희, 지청천 등과 함께 강사로 참여했다.

이후 잠시 목재사업을 하다가 건국실천원양성소 이사장으로 있던 장형(張炯)과의 인연으로, 단국대학교 재단설립 이사와 부학장을 거쳐, 단국대학교 제2대 학장을 맡았다.

1950년 제2대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고성군 지역에서 당선되었다. 1954년 형사소송법 초안에 대한 공청회에서 공청회 위원장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69년 11월 26일 사망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 의정총람』(국회의원총람발간위원회, 1994)
「2대 의원 김정실 씨」(『동아일보』, 1969.11.27)
대한민국헌정회(www.rokps.or.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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