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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동아일보 사람들- 김장환

Posted by 신이 On 10월 - 31 - 2018

 

김장환(金章煥, 1902~ 몰)은 제주출신으로 서울 휘문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한 뒤 옥고를 치렀고 1924년 12월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들어와 1940년 8월 폐간 때까지 정치부에서만 있었다. 1935년 4월 1일 정치부장으로 있을 때 근속 15주년 표창을 받았다.

김장환(金章煥) (제주, 1902~ 몰 ) ▲ 1924.12 기자(정치부), 정치부장, 15년근속표창, 1940. 8 폐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내가 본 내 性格

헛 믿는 性質
東亞日報社 金章煥

세상 사람 중에는 하나도 믿을 사람이 없는 것을 번연이 알면서도 그대로 작고 믿습니다. 믿엇다가는 실패를 하고 실패를 하고는 후회를 하면서도 또 믿읍니다. 남이 나에게 악의만 표시치 않으면 남을 무조건하고 믿는 것이 나의 최대의 결점인 듯 합니다. 그러지 않겟다고 애를 쓰나 성격은 하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金章煥, ‘내가 본 내 性格’, 동광, 1932년 4월호)

 

 

一九三一年의 總決算, 過去 一年間의 世界大勢

1929年 秋 世界 金融資本의 總本營 紐育 월드街까지 掩襲한 恐慌은 其后 遂年 擴大 甚刻化하야 財政 權威者들의 1931年度부터의 景氣恢復 豫言에 不拘하고 그 底止할 바를 推斷치 못하게 하고 잇다. 生産이 急激히 縮少되는 結果 失業者는 街頭에 물밀듯 하야 이것은 또한 失業保險金의 支拂을 激增케 하며 (英佛 等) 國民所得이 急激이 低下하야 財政上의 歲入은 激減되엇으나 이와 正比例로 歲出을 激減할 수는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歲出의 增加를 招來하야 決算面에 所謂 「赤字」 卽 豫算 缺損이 生하게 되엇다.(日英米佛獨伊 等 帝國主義 列强뿐아니라 植民地 半植民地까지 다.) 이리하야 官吏減俸, 失業基金減額, 豫定事業의 中止, 或은 繰延 等 行財稅政 整理를 絶呌하고 各國이 모다 緊縮節約政策을 採用하고 잇음은 財政의 破綻을 防止하려는 畢死的 努力에 不過할 것이다. 이 恐慌場은 國內 國際的임을 勿論하고 모든 問題에 影響하고 또한 모든 事件을 惹起하엿으니 國內的 大事實로는 南米 諸國의 革命과 各國의 總選擧에 「經濟國難」이 一般 民心을 促하야 無産派의 淍落, 右派의 行勢를 招來하야 獨英 兩國에는 獨裁政治 傾向까지 잇어 世界的 大勢는 右傾하고 國際的으로는 獨墺關稅同盟, 후버氏의 모라토리움 提案, 各國 首腦者의 相互 訪問, 米國의 關稅引上 및 各國의 關稅對抗, 又는 經費節約 租稅輕減을 爲한 軍備制限 問題 等이다. 右와 如히 各國이 恐慌으로 헐덕어리고 잇는 가운데 홀로 超然한 國家는 社會主義 國家 勞農露西亞로서 其 五條年計劃은 着着 實行되고 잇으며 小麥 等의 投賣로 가득이나 豊作으로 어쩔 줄 모르고 잇는 各國을 괴롭게 하고 잇다. 이 恐慌과 別 關係 없는 問題로 重要한 問題는 滿洲事變�, 印度反英運動, 西班牙革命 等인데 一九三一年 外交問題의 中心이 된 것은 軍備制限 問題 一個年 支拂猶豫案, 滿洲事變 等이다. 이제 世界的 大勢 決定的, 關係 잇는<2> 重大 問題만 紹介하면 如左하다.

軍費制限 問題

倫敦 海軍條約이 1930年 10月 27日부터 效力이 發生하게 되엇슴으로 軍縮의 努力은 1932年 2月 開催될 軍縮會議에 쏠리게 되엇다. 그러나 지금 形勢로 보아서는 伊外相의 提唱한 一箇年休日案에 各國의 條件附 會議參加 受諾이 잇엇으나 그 前途는 자못 悲觀視 된다. 또 他方 倫敦會議에서 決定되지 아니 한 英佛伊의 大陸派 海軍問題는 二月 헨더손 英外相의 活躍으로 一時 妥協 成立을 傳하엿으나 佛伊의 均等이 解決困難한 데다가 六年 佛海軍側의 海軍建造計劃 言明으로 反復 紛紏되어 언제 解決될지 모르는 狀態에 잇다.

支拂猶豫案

獨逸賠償은 영案에 依하야 年賠償 平均 10億 2千 540萬圓 當分 8億臺로 定하얏으나 世界恐慌, 物價暴落으로 獨逸은 約 三割 負擔을 增加한 셈으로 되엇다. 이에 잇어서 獨逸首相과 外相은 英國을 訪問하야 救濟策을 請하고 他의 列强과도 呼訴하엿다. 此結果 米大統領 후버氏는 6月20日 賠償戰債支拂 一個年 延期案을 提議하얏다. 이러기前 米國政府는 藏相 멜른氏를 渡歐케하야 世界不況의 一因이 獨逸의 財政的 破産에 잇는 與否를 調査케 하엿다. 후버氏의 猶豫案 提議는 實로 멜른 藏相의 「獨逸危殆」라는 一電에 依하야 決定된 것이라 傳한다. 후버, 멜른 兩氏 此 猶豫案에 依하야 1930年 9月의 總選擧 以來 獨逸의 不況에 乘하야 賠償 蕩減을 슬로간으로 俄然 得勢한 國粹社會黨의 革命을 防止하고 米國의 對獨 債權을 保障할 수 잇으리라 信하얏섯으나 獨逸의 破産的 狀態는 그만한 注射로는 듣지 않앗다. 一方 獨逸의 政治的 不安은 그 對外信用을 損傷하야 二箇月 間에 約 九億馬克의 資本逃避로 되고 獨逸 財界는 아주 破産의 奈落으로 떠러젓다. 이에 英米佛伊 等 賠償關係 七國은 7月 倫敦에 會合하야 獨財界 救濟의 三箇 條項을 決定하엿다. 그러나 此 支拂猶豫案이 一時的 캄풀 注射인 줄 아는 各國 金融財政家와 識者間에는 賠償戰債 蕩減論이 有力하게 提唱되는 中이며 十月 中 渡米한 佛 라발首相과 후버 大統領 會見에 잇어서도 或種의 諒解가 成立되어 將次 歐洲側에서 다시 猶豫 或은 輕減案을 提議하기로 되엇다 한다.

(…)

露國五個年計劃

資本主義 各國이 모다 不況으로 헐덕어리고 잇는 가운데 홀로 超然한 國家는 社會主義國家 勞農露西亞로서 모든 産業部門에 잇어서 「資本主義的 先進國을 追跡하야 追越한다」는 目的을 第一 速히, 第一 巧妙하게 수행하기 爲하야 國民經濟發展 五個年 計劃이란 것이 出來하게 되엇다. 此 五個年 計劃은 1929年度부터 33年度까지를 包含한 各 産業部門에 亘한 廣汎한 것인데 此 計劃의 骨子가 되는 것은 工業化와 農業經濟의 社會主義化이다. 第一年度, 第二年度에 잇어 豫想 外의 好成績을 發揮한 바 1930年 10月부터 開始 되는 第三年度에 入하야는 全農家의 半數 以上을 協同經營化하고 又 工業化를 行하야 此 年度만으로 戰前의 工業生産에 匹敵케 하려는 中이다.

滿洲事變

1931年度 弱小民族運動으로는 오죽 印度의 反英運動을 들 수가 잇으나 前年의 猛烈한 抗爭이 잇엇슴에 比하야 今年에는 깐디, 어윈卿의 協定 및 第二 圓卓會議參加等으로 反英運動은 休戰狀態에 入하얏으며, 半植民地運動으로는 中國이 希望많은 新年을 迎하야 國定 稅率을 元且부터 實施하고 意氣 軒昻한 바 잇엇다. 그러나 領事裁判權 撤廢, 治外法權 廢棄는 英美佛日 等 列强의 强硬態度로 聲明 或은 便法公布에 불과하얏고 和蘭 諾威 兩國과의 交涉에 成功하얏을 뿐이다. 그리고 日中間에는 萬寶山事件, 朝鮮事件 等이 發生하야 交涉도 開始하기 前 中村大尉事件이 起하고 滿洲事變이 勃發하얏다. 이는 一九三一年度 國際戰爭의 最重大事實로서 그 發端은 滿鐵爆破로 起하엿다 하나 南滿鐵道 問題를 비롯한 諸 懸案의 紛擾로 險惡한 感情이 싸히고 싸혀 爆發 되엇다는 것이 妥當한 觀察일 것이다. 世界的 大衝動을 惹起하엿음은 勿論으로 米國이 動하고 國際聯盟이 問題解決에 努力하고 잇는 中인데 今番 事變과 日中間 諸 懸案 解決은 別 問題라 하야 11月 16日까지에 于先 日本에 撤兵을 要求하는 決議案까지 滿洲事變으로 開催된 理事會에 提出되엇다. 그 結果는 13對 1 卽 日本만의 反對投票로 可決되엇는데 效力發生에는 滿場一致를 要하는 關係로 成立은 못게되엇으나 理事會報告에는 儼然히 남아 잇게되어 日本에 對한 國際的關係는 不利하게 되엇다. 11月 16日, 다시 開催될 聯盟理事會에서 形勢가 어떠케 돌아갈지는 豫測할 수 없으나 此 事變의 解決 如何는 日中兩國의 死活에 關한 重大問題이다. 此 事變에 刺戟되어 中國에는 南廣統一運動이 起하얏으나 最近 形勢로는 아주 樂觀은 不許하게 되엇으니 中國은 現在 重大 國難엊� 處하여잇는 南廣統一會議가 最初의 氣勢에 比하야 시원치 않게 된 것은 蔣氏의 下野 取消로서 그 裏面에는 英公使 람프손氏가 蔣張兩氏의 下野를 <4> 斷念케 하고 支援하는 態度를 表示한 關係로서 英國의 南中一帶 利權을 保障하기 爲함이라 認한다. 英國의 이 態度는 聯盟理事會에도 表現 되엇으니 이는 極東 關係에 重大한 影響을 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以上 述한 諸 事實은 此를 要컨대 언제 好轉될지 알 수 없는 慢性的 不況은 資本主義의 崩壞를 招來하야 國內 國際的 諸 問題를 提起하엿다 할 것이다.

 (金章煥,’一九三一年의 總決算, 過去 一年間의 世界大勢’, 동광, 1931년 12월호)

 

 

上海事件의 原因과 顚末  

問題의 發端

北滿의 曠野에서 馬占山軍과 錦州軍이 日本軍에 저항하고 잇을 쯔음에 靑島, 上海 福州, 汕頭등의 각지에서는 抗日排日貨運動이 점차 확대되고 잇엇으며 去一月 上旬에는 國民黨의 기관지인 靑島 及 上海의 民國日報가 不敬기사를 揭載한 일이 잇엇으므로 上海 村井日本總領事는 上海 吳鐵城市長에 대하야 엄중한 항의를 제출하야 책임자의 사죄 처벌 及 今後의 取締를 요구하얏으나 마츰 이때 日本日運宗徒의 殺傷事件이 勃發하얏다.

去 1월 18일후 大崎啓昇, 水上秀雄外 3명의 日運宗僧徒가 부채북을 두다리며 寒行나갓다가 돌아오는 길에 上海 교외 引翔巷에서 三友實業社라는 수건맨드는 공장 職工에게 습격을 당하야 그 중 3人은 별 理由없이 톡톡히 毆打당하고 水上秀雄은 24일 福民病院에서 드디어 사망하엿다. 不敬記事이래 대립상태에 잇든 抗日會와 日本居留民은 이 殺傷事件으로 急角度로 험악화하야 沸騰點에 達하얏다. 이에 분개한 日本靑年同志會員 수명은 20일 심야 2시 반 퍼붓는 비를 무릅쓰고 三友實業社를 습격하야 報復하고 巡警과 大亂鬪를 하야 쌍방에 死傷을 내엇다. 同日 午後 1시부터 日本人俱樂部에서 개최된 居留民大會에서는 「陸海軍을 派遣하야 自衛權의 發動으로 抗日運動의 絶減을 期함이라」 決議를 可決하고 1,000명의 大示威行進을 하야 村井總領事를 방문하고 陸戰隊本部에 향하얏는데 北四川路에서 中國人이 2층에 맥주병을 던진 것으로 大亂鬪를 이루고 制止하려 갓든 外國人巡査에게 日本人 수명은 重輕傷을 당하얏다.

(…)

戰爭은 繼續

東에서의 右와 如한 교섭에는 하등 관계없이 上海의 戰爭은 계속되고 잇엇다. 租界外 居住者와 警備區域外 日本人 居留民은 전부 虹口로 피난케 하고 更히 婦女子는 속속 日本 혹은 靑島등지로 송환케 하는 동시 男子는 陸戰隊에 협력하야 自警團을 조직하야 警戒에 당하며 혹은 後方 勤務에 종사하는 등 共同一致의 행동을 취하고 잇는데 2일부터는 空軍까지 출동하야 空陸呼應하야 中國軍을 攻擊하고 잇다.

目下 上海附近의 中國軍隊는 對日强硬論을 唱하든 廣東派의 第19路軍인데 그 總司令은 蔣介石이며 蔡廷楷, 戴戟 등이 그 수뇌이다. 蔡廷楷는 특히 對日强硬論者로서 최후의 一兵까지라도 屈치 안는다고 豪語하고 잇다. 更히 蔣介石直屬의 顧祝同軍 5萬이 上海부근에 집결되어 잇으며 학생 청년등의 便衣隊가 盛히 活躍하고 잇다.

이에 대하야 日本側은 鹽澤少將의 인솔하는 第一遺外艦隊와 第一水雷戰隊 제15驅逐隊 제22驅逐隊 제23驅逐隊 제 26驅逐隊 제 30驅逐隊 航空母艦 能登呂를 配하야 上海前面의 黃浦江上에 잇고 又 吳淞부근에는 堀少將의 인솔하는 第三戰隊 加藤少將의 인솔하는 제일 航空戰隊가 잇으며 陸上에는 鮫島隊長하에 OOO명의 陸戰隊員이 잇고 此를 통솔하기 위하야 野村吉三郞中將이 第三艦隊司令長官으로 新任되엇는데 去7일에는 陸軍까지 派遣하게 되엇다. 又 日中間 調停에 立한 列國도 目下 속속 上海에 增兵중인데 米國은 이미 軍艦 17隻에 陸兵陸戰隊 합계 6,200명 英國은 1萬噸級 巡洋艦 4隻에 砲艦 6隻이 잇는데 陸戰隊 陸兵 합계 6,600명인데 현재 英本國에서 陸軍 1大隊가 오는 중이며 佛國은 陸戰隊陸兵 合計 4,200 伊太利는 二千等인데 目下 增艦중이다.

日中兩軍의 戰勢는 一進一退중이나 中國軍에는 歐洲大戰에 경험잇는 某國將校등 30명이 지휘하므로 日本軍이 苦戰하고 잇으며 여러날 전 함락되어 日章旗가 휘날린다든 吳淞砲臺는 아직도 砲擊중에 잇다.

聯盟總會召集

7일 聯盟事務局에 달한 上海事件 現地調査委員의 보고내용은 規約 제15條에 의하야 英佛米등 諸大國으로 하야금 對日共同通告를 하게 되리라 觀測한다고 電通은 報하나 보고는 일체 비밀이므로 그 내용을 알 길이 없으며 그리고 日本에서는 上海事件후 처리에 관하야 外務 陸海 三省協議에서 上海共同租界 2,30哩 周圍를 한하야 非武裝區域을 設하고 점차 漢口, 天津, 靑島등 각처에 及케 한다는 中立地帶案을 결정하고 關係列國에 교섭중이라는데 米國은 中國의 영토분할을 초래하는 것이라하야 국무성에서 즉시 비공식으로 반대하얏다 하며 중국이 反對聲明을 한 것은 물론이다. 地方 駐中 英米佛國公使가 日中停戰을 알선키 위하야 上海에 會集하고 日中兩當局과 상의중인데 전도가 유망하나 日中兩國의 주장이 懸隔한 만큼 여하히 될지 推測키 難하다. 그런데 前者 上海事件에 대하야 規約 15條를 적용키로 聯盟理事會는 顔惠慶代表의 12일 聯盟總會召集 요구에 의하야 聯盟總會가 자동적으로 召集케 된다니 規約 15條와 관련된 16條 制裁事項이 어떠케 될지 上海事件의 國際關係는 最高頂에 달하엿다 할 것이다. 顔代表의 聯盟總會 召集要求를 때를 동일히 하야 英國聯盟協會에서 日中紛爭에 대하야 制裁規定을 擧用하자고 결의한 것도 매우 주목되는 사실이라 할 것이다.(2월 14日記).<12>

(金章煥, ‘上海事件의 原因과 顚末’, 동광, 1932년 3월호)

 

 

(政治科) 賠償問題란 무엇인가, 紙上 夏期大學

1919년 6월의 巴里媾和條約 조인 이래 항상 세계의 정치와 경제에 불안을 주든 소위 전패국 獨逸의 배상문제도 6월 16일부터 개회된 로산느의 배상회의에서 去 8일에 완전히 해결되엇다. 이것은 단지 獨逸과 獨逸人에만 대한 희소식일 뿐 아니라 실로 全歐洲의 경제적 갱생의 제1보이며 전세계의 경제적 부흥의 第1步이다. 과거 14년간 歐洲를 괴롭게 하고 세계를 음울케하야 일반 인심을 불안케 하든 일대 화근이 제거되엇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어찌하야 이 배상문제는 이다지도 중대한가. 우리는 먼저 배상문제의 유래부터 考究치 않을 수 없다. 7백만명의 인명사상과 6천억만원의 煙化소실과 6개년의 腥風血雨의 歐洲大戰이 종료되자 어디까지 대전에 대한 獨逸의 책임을 問하여야 된다 하야 제국주의 獨逸을 미래 永却 매장하려고 벨사유조약 제8편 제231조에 『동맹 及 연합국정부는 獨逸 及 其 동맹국의 공격에 의하야 강제된 전쟁의 결과 그 정부 及 국민의 蒙한 일절의 손실 及 손해에 대하야 그 책임이 獨逸 及 그 동맹국에 잇음을 단정하고 獨逸은 此를 승인함』이란 규정에서 獨逸의 배상은 문제되게 된 것이다. 그리하야 대전 후로부터 금일까지 또스案, 영案 及 후버모리토리움에 의하야 일시적 대책을 경과하야 왓다. 그러나 모다 어느 것이나 위기를 일시적으로 糊塗할 뿐이요, 결국은 弗자본의 歐洲, 특히 獨逸에의 보다 큰 진출과 英米佛의 새로운 대립을 초래하엿음에 불과하엿다. 과거의 배상정리가 단지 일시적 대책이엇음은 또스案 특히 영案의 운명이 사실로 입증하엿다. 영案은 그것이 협정에 참여할 관계로 각국의 전문가들이 최종협정이라 稱하엿음에 불구하고 실시 후 겨우 1년이 얼마 못되어 獨逸을 지불곤란에 陷케 하고 개정의 불가피성을 發露하고 말앗다.

문제의 4계단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獨逸의 배상지불로는 금일까지 左의 4계단을<52> 밟아왓다.

1. 제1기 벨사이유평화조약에 의하야 배상의무가 부과된 후 또스案에 의한 新정리의 확립실시 되기까지 1919년 6월부터 1924년 9월에 至하는 5개년 3개월간.

2. 제2기 또스案의 실시로부텨 영案 新배상의 성립실시에 至하기까지 1924년 9월부터 1929년 9월에 至하는 5개년간.

3. 제3기 영案실시의 1929년 9월부터 후버모라토리움선언에 至하는 1931년 6월 20日까지 약 1년 1개월간.

4. 제4기 후버 모라토리움案 선언으로부터 로산느 배상협정 성립에 至하는 1931년 6월 21일부터 1932년 7월 8일까지 약 1년간.

此 과거 십수년간에 至한 역사는 다못 배상문제 해결의 곤란 가중을 示하야 왓음에 불과하엿다. 실로 그것은 「배상비극」의 史的 발전사이엇다.

천문학적 數字

이제 제1기의 배상시대로부터 述하면 벨사유조약 규정에 基한 『배상위원회』가 1919년 1월 성립되엇으나 중요한 배상총액의 결정은 그 기초가 될 「大戰이 연합국 국민에 與한 손해액」을 평가하기에 곤란하므로 1920년 6월 브로뉴의 정치가회의와 배상총액을 2,690억馬克 지불기간을 1921년 5월부터 42개년으로 정하엿다.

실로 경이할 만한 거액의 배상의무로서 「천문학적 수자」라는 倫敦협정액에 비하야는 약 2배에 當한다. 그 뒤 1921년 1월의 巴里회의에서 협정된 것은 42개년간의 지불금 총액을 감하야 2,260억馬克으로 정하얏으나 獨逸이 승인치 아니하므로 연합국측은 벨사이유조약 규정에의하야 그 지불을 확보할 수단으로 同年 3월 라인右岸의 지점을 점령하고 말앗다. 그러나 이같은 무력적 위협도 문제해결에 하등 기여치 않을 뿐 아니라 反히 獨逸의 궁핍을 격화케 하야 배상지불의 곤란을 증대케 하얏음에 불과하다. 이에 배상위원회는 배상금 총액을 1,320억馬克으로 정하는 제 1, 2, 3종 공채에 의한 지불방법을 결정하얏다. 이것은 소위 倫敦협정안이란 것이며 이 배상총액은 「천문학적 수자」로 형용되는 거액이다. 獨逸의 실정으로 보아 만족히 지불할 수 없음은 누구나 예상한 바이나 獨逸은 佛國의 루얼 점령 威嚇 하에 드디어 1921년 5월 승인치 않을 수 없엇든 것이다.

과연 지불불능

이와 전후하야 연합국 간에는 배상금 분배문제가 일어낫다. 그리하야 1921년 7월 스파에 회의하고 佛 52%, 英 22%, 伊 10, 白八, 日 0.55 등 분배비율을 정하엿으니 이는 소위 「스파협정」이란 것이다.

하여간 이와 같이하야 벨사이유조약의 규정에 기한 獨逸의 배상의무는 우선 결정되엇다. 그러나 獨逸은 과연 이를 지불할 수 잇엇는가. 대전 조약에 의한 獨逸탄압책의 결과로 대전<53> 전 獨逸경제의 근간을 이루든 해외상업, 석회 及 철의 채굴 及 그 우에 건설된 제공업 등은 거이 완전히 유린되고 말앗다. 倫敦협정에 의한 1,320억馬克의 천문학적 수자는 이와 같이 지불기초가 殆無한 폐허에 대한 부과에 불외하얏든 것이다. 따라 獨逸이 지불할 수 없음은 英米의 유명한 학자나 재정가가 공언하든 바이다. 과연 獨逸은 1921년 8월 제1회분을 지불하고는 지불이 곤란하게 되엇다. 이에 연합국 측의 大小 種種회의가 頻頻히 반복되엇는데 1923년 1월의 파리회의에서 명백히 된 것은 獨逸에의 배상부과에 비상한 무리가 잇다는 것과 英佛태도의 背離가 심한 것이엇다.

(…)

배상문제의 해소

그리고 이 공채의 발행이 『3개년 후 시장의 정세가 공채발행에 적당할 시기』라고 까지 보류된 점은 종래의 지불방법에 비하야 매우 실제적이라 할 것이다.

이 해결의 의의와 효과는 실로 광대하다. 제 1로는 獨逸 及 獨逸人이 경제적 질곡으로부터 의 해방이며 제 2로는 세계 금융공황의 일대 요인이 此에 의하야 제거되는 일이다. 제 3으로는 국제무역의 점차 회복될 것, 제 4로는 세계불황의 일대 원인으로 간주되는 소위, 金의 偏在가 점차 교정될 것을 擧할 수 잇을 것이다.

다음은 戰債蕩減

그러나 此等 諸사항이 완전히 진행하려면 당연 戰債문제의 해소를 불가결의 요건으로 한다. 배상과 戰債는 불가분의 관계가 잇으니 그 一方만이 해결되어도 他方의 현상대로 잇으면 세계경제를 파행상태에 두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의 태반은 의연 잔존한다. 즉 戰債의 해결을 요하는 所以이다. 그런데 米 國務省은 「개별적으로 각국의 제안을 고려할 준비가 잇다」고 성명하얏다. 賠償戰債의 모라토리움 제창자인 米國이 본 문제해결에 그리 야속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즉 米國으로서는 歐洲의 重荷인 戰債를 탕감함은 동시에 자국의 불황을 타개하는 所以임을 알고 此 필연의 인과관계에 향하야 적극적 태도를 취하리라고 관측되는 바이다. 그리고 5개국이 일치하야 米國의 戰債문제에 대하고 잇으니 米國이 거절한다면 배상문제해결의 실패, 歐洲부흥의 지연, 세계 경제불황의 퇴치책 실패의 대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물론 전채와 배상문제는 米國의 주장과 같이 하등 관계가 없다 하야도 배상을 탕감하면 전채는 반환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米國은 전채탕감을 원칙적으로 용인치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잇다.(7월 11일)<58>

(金章煥, ‘(政治科) 賠償問題란 무엇인가, 紙上 夏期大學’, 동광, 1932년 8월호)

 

 

외면받는 제주 조천만세운동 독립투사

(…)

김장환은 출옥 이후 동미회에 참여하고 서울로 상경해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다가 평양 태생의 부인과 재혼한 후 평양으로 거주지를 옮겼다가 38선이 그어진 후 남한으로 내려오지 못해 생사를 알 수 없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공적심사위원회가 해방 이전까지 행적은 문제가 없지만 해방 이후 사망 시까지 일부 행적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사항”이라며 “제주4·3사건 당시 행적 등이 관련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봉철 기자, ‘외면받는 제주 조천만세운동 독립투사’, 제주일보, 2017년 2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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