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평(金佑秤, 1897~1967)은 전남 여수출신으로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경제과와 콜롬비아대 대학원 경제과를 졸업하고 1927년 4월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반항의 수단으로 필탄(筆彈)을 날리겠다”며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김우평은 동아일보에서 조사부장(1928년 3월~1932년 4월) 경제부장(1932년 4월~1933년 6월) 정치부장(1933년 6월~1933년 8월)으로 활약했다. 정부수립 후 대통령국제친선특사단의 경제대표로 우방을 역방하고,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인정받은 제3차 유엔 총회에 장면, 장기영, 조병옥, 전규홍,김활란,정일형, 모윤숙, 김진구와 함께 대표로 참석했다. 초대 외자구매처장과 5대 민의원 및 제7대 부흥부장관을 지냈다.
김우평(金佑秤) (여수, 1897~ ) ▲ 1927. 4 기자, 조사부장, 경제부장, 정치부장, 1933. 8 퇴사. 〔민의원의원. 부흥부장관〕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人材巡禮(第一編), 新聞社側
調査部의 金佑平氏 中央高普 出身으로 仙台第二高를 지나 美國 콜롬비아大學 經濟科를 마춘 분 年 32 鄕里 全南 麗水.
(‘人材巡禮(第一編), 新聞社側’, 삼천리, 1930년 1월호)
一問一答記(4)
金佑枰
記 新聞社 調査部 일을 보시는 중에 제일 痛切하게 늣기신 것이 무엇임닛가.
金 무엇보다도 우리 民間에도 經濟調査機關이 잇섯스면 하는 그것임니다. 官廳 것만 밋고 잇자니 딱하지 안슴닛가. <33>
(김우평, ‘一問一答記(4)’, 별건곤, 1930년 12월호)
勞農露西亞의 通貨廢止問題是非, 「一記者」에게 寄함
去10월27일 哈爾賓發 露西亞貨幣整理에 관한 전보가 잇섯다. 그리하야 余는 11월 1일부터 東亞日報第一面에 「勞農露西亞의 通貨廢止問題」라는 제목으로 前後五回에 分하야 蕪論을 발표한 일이 잇섯다.
通貨廢止 問題는 원래 그 자체가 중대한 그것임으로 序論에 이러한 前提를 讀者諸賢에게 제시하얏다. 「일즉이 通貨廢止問題는 露西亞의 革命成功以來 一大問題이엇든 동시에 世界經濟學者는 물론 一般大衆의 注意까지도 恒時 끄을게 되엇든 것이다. 如斯히 중대문제에 관한 報導電文이 極히 간단하며 또한 불충분할 뿐 아니라 아즉 그 眞否까지도 확실치 못함으로 이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至難하다고 할 수 잇다. 그러나 문제가 문제인만큼 추상적이나마 試論하는 것이 퍽 흥미스러울가 하야 本論을 이에 草하는 바이다…」
(…)
然中 別乾坤 12월號에 「一記者」라는 無記名으로 「東亞日報가 無記名으로 그 一面에 게속 連載한 論文에 露國의 通弊廢止란 제목으로 方今露西亞에서는 通貨의 廢止를 계획하고 잇다는 것과 그가 不遠에 實施될 것이라는 의미의 글이 잇섯다」라고 論하고 「나는 東亞日報에서 다만 走馬看山의 格으로 그저 제목만 보고 말 안되는 소리 누가 이런 엉터리업는 소리를 대중업시 짓거리고 잇노하야 別노히 그 내용을 보지도 안엇섯다. 그렛더니 여기 저기서 드르니 그를 정말노 밋는 듯하야…」라는 虛無孟浪한 문구를 그야말노 대중업시 갈팡질팡 나열한 反駁文이 잇섯다.
그 소위 反駁文이란 것이 一種擔語와 가터서 足히 문제거리가 되지 못하나 東亞日報를 읽지 못한 人士로 別乾坤만을 본 이에게 誤解가 잇슬가 하는 마음과 또한 그 소위 「一記者」(드르니 別乾坤기자도 아니라 한다)라는 筆者의 너무나 경솔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야 數字 草한 바이다.
嗟呼! 「一記者」여, 타인의 논문을 反駁하랴거든 마저 자료가 되는 그논문을 정독할 필요가 잇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虛荒하게 他人이 논문도 읽지 안코 그저 錯覺에 의하야 무책임하게 論難하는 것도 온당치 못한 일이라고 할진대 況 「일부의 靑年 또는 人士의 中에는 그를 事實노 밋는 사람이 업지 안는 듯 십다. 그래서 나에게도 종종 그 문제를 뭇는 사람이 잇다」라는 우서운 한 前提下에서 타인에게 작의 책임을 幾分이라도 轉嫁식이랴는 것은 執筆者로서의 양심으로 보아 좀 생각할 바가 안인가 한다.
余를 가라처 虛僞의 構造者이니 착각의 소유자이니 하는 것보다 「一記者」 스스로가 虛僞의 構造者이며 착각의 소유자임을 自悟하고 後日에는 今番과 가티 氣分的 弄筆을 안토록 주의하는 것이 可할가 하는 바이다.
1930.12.15<67>
(김우평, ‘勞農露西亞의 通貨廢止問題是非, 「一記者」에게 寄함, 별건곤, 1931년 1월호, 66~67쪽)
新聞夜話
東亞日報에는 사설 쓰는 이가 퍽으나 만타. 李光洙, 咸尙勳, 徐椿, 金章煥, 朱耀翰, 金祐坪의 諸氏오 각금 사장 宋鎭禹氏와 편집국장 대리 薛義植氏도 붓을 잡는다든가. 그러나 분량으로 보아서 제일 만히 쓰는 이가 亦 「弱少民族」과 「協同組合理論」에 잇서서 단연 권위인 咸尙勳氏다.
창간 당초의 사설반은 張德秀, 金明植, 柳槿, 朴一秉氏 諸氏가 잇섯섯다. 그 때는 붓만 들면 「2천만 동족이어 마른 저 江山을 처다볼지어다」운운식으로 비분강개 일관의 다소 치기잇는 어조가 대부분이엇스나 이지음 사설은 과학적이요 훨신 이지적이 된 것이 격세의 感을 준다.<29>
(‘新聞夜話’, 삼천리, 1931년 7월호, 29쪽)
[東亞春秋] 萬寶山事件寸 前의 滿洲出張
때는 천구백이십칠년(一九二七年) 초(初)였다. 필자(筆者)는 미국유학(美國留學)을 마치고 귀국(歸國) 즉시(卽時)로 동아일보(東亞日報) 기자(記者)의 직(職)을 선택(選擇)하였다.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에 반항(反抗)하고 싶었던 때문이다. 반항(反抗)의 수단(手段)으로서 총검(銃劍)을 들지 못할진댄 필탄(筆彈)이라도 쥐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東亞日報) 기자(記者)라 하면 세상은 그네들을 지사(志士)로 대접했고 기자(記者) 자신(自身)도 제일선독립투사(第一線獨立鬪士)처럼 자처(自處)하였었다. 당시 일인(日人)의 안목(眼目)에는 동아일보(東亞日報) 사옥(社屋) 황색연와(黃色煉瓦)까지도 항일필탄(抗日筆彈)으로 보였을 것이다. 항일(抗日)·정의(正義)·파사(破邪)를 위한 투쟁(鬪爭)으로 인해서 정간(停刊)을 당한 것도 사차(四次)에 긍(亘)하였으며 압수(押收)를 당한 것은 부지기수(不知其數)이었다. 여사(如斯)한 시련(試練)을 받은 동아일보(東亞日報)의 불굴(不屈)의 정신(精神)은 드디어 우국애족(憂國愛族)의 투쟁사(鬪爭史)가 된 것이다
필자(筆者)가 입사(入社)한 그 해 겨울이었다. 당시 만주(滿洲)의 장작림정부(張作霖政府)는 재만동포(在滿同胞)가 일인(日人)의 앞잡이가 되어 만주(滿洲)를 침략(侵略)한다는 구실로 동포(同胞)를 압박(壓迫)하며 추방운동(追放運動)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동포(同胞) 수난(受難)의 통신(通信)이 매일접종(每日接踵)됨에 따라 국내(國內) 일반민중(一般民衆)의 대중국인(對中國人) 감정(感情)도 심상(尋常)치 않았다. 당시 사장 故 송진우(宋鎭禹) 선생은 재만동포(在滿同胞)의 수난진상(受難)眞相)을 조사보도(調査報道)하기 위하여 필자(筆者)에게 만주출장(滿洲出張)을 명령(命令)하였다. 당시 만주인(滿洲人)의 무지(無知)한 배한열(排韓熱)은 충천(衝天)의 기세(氣勢)이었다. 따라서 치안상황(治安狀況)은 암담(暗澹)하고도 불안(不安)하였다. 일 당국(日當局)은 여사(如斯)한 사태(事態)를 기화(奇貨)로 필자(筆者)의 신변보호(身邊保護) 불가능(不可能)을 운위(云謂)하며 출장(出張)의 부당(不當)을 주장(主張)하였다. 그러나 필자(筆者)는 수난(受難)의 동포(同胞)로 찾아 수명당야(受命當夜) 서울역을 출발 만주(滿洲)로 향하였다. 봉천(奉天)과 장춘(長春)을 거쳐 길림(吉林)으로 직행(直行)하였다. 길림(吉林) 재주(在住)의 애국지사(愛國志士)들은 필자(筆者)의 내방(來訪)을 고대(苦待)한 듯이 환영(歡迎)하여 주었다. 기중(其中) 오인화(吳仁華)氏는 길림성(吉林省)의 고관직(高官職)에 재(在)하여 동포(同胞)의 보호(保護)에 영일(寧日)이 없이 활동하다가 결국 친일파(親日派)에게 피살(被殺) 되었고, 손정도(孫正道) 목사는 망명생활(亡命生活) 중 교회에 재직(在職)하며 동포(同胞)의 지도(指導)에 여념(餘念)이 없었다. 그리고 때마침 직접행동가(直接行動家)로서 당시 신문지면(新聞紙面)을 다채(多彩)롭게 하는 동시에 젊은 애국동지(愛國同志)들의 사모(思慕)를 한 몸에 모으고 있던 故 오동진(吳東振) 의사(義士)는 필자(筆者)와 상봉(相逢)한 그 익일(翌日) 길림(吉林)-장춘(長春) 간(間)에서 일인(日人)에게 체포(逮捕)되어 신의주감옥(新義州監獄)에서 사형(死刑)되었다.
동포(同胞)의 수난(受難) 원인(原因)은 간단한 것이었다. 일본제국주의자(日本帝國主義者)가 만주(滿洲)를 침략(侵略)하기 위하여 친일분자(親日分子)를 앞잡이로 이용한 것이다. 국내에도 치부(致富)하기 위하여 영달(榮達)하기 위하여 혹은 보신책(保身策)이라 하여 일정(日政)의 권세(權勢)에 아부(阿附)하는 친일분자(親日分子)와 대두(擡頭)되었지만 만주(滿洲)에서는 권세(權勢)라면 맹목적(盲目的)으로 아부(阿附)하는 망국근성(亡國根性)의 소유자(所有者)인 매족도배(賣族徒輩)가 일정(日政)의 앞잡이로서 가위 경쟁적으로 중국인(中國人)의 권익(權益)을 침해(侵害) 하였었다. 이것이 저 유명한 만주사변(滿洲事變)의 서곡(序曲)이었던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의 준비공작(準備工作)이었다. 이리하여 만주인(滿洲人)의 증오감(憎惡感)은 드디어 한국인추방운동(韓國人追放運動)으로 화(化)하여 그네들의 박해행동(迫害行動)은 도처(到處)에 전파(傳播)되었다. 사태(事態)가 여사(如斯)하므로 재만애국동지(在滿愛國同志) 등은 응급책(應急策)으로 자위수단(自衛手段)을 취하는 동시에 친일파(親日派) 궤멸(潰滅)에 노력(努力)하였다. 필자(筆者)는 길림성정부(吉林省政府)는 물론 귀로(歸路) 봉천(奉天)에 들러 만주(滿洲) 장정권(張政權)의 총사령부 격인 성 정부(省政府)를 방문하고 섭외부장(涉外部長)에게 대의(大義)를 망치(忘置)하고 일신(一身)의 영달(榮達)을 위하여 권세(權勢)에 아부(阿附)하는 친일분자(親日分子)를 배후(背後)에서 조종(操縱)하는 것은 일인(日人)이라고 지적(指摘)하고 한만인(韓滿人)의 공동배일전선(共同排日戰線) 결성(結成)을 역설(力說)하였다.
필자(筆者)는 처녀특파기자(處女特派記者)로서의 임무(任務)를 마치고 귀임(歸任)하니 대다수의 전보기사(電報記事)는 압수(押收)되었고 구속협박(拘束脅迫)까지 당하였다. 구속협박(拘束脅迫)은 필자(筆者)의 애국정열(愛國情熱)을 부채질하였지만 다수(多數) 애국동지(愛國同志)와 동포(同胞)를 박해(迫害)의 제물(祭物)로 바친 친일분자(親日分子)의 맹목적(盲目的) 아부근성(阿附根性)이야 말로 민족(民族)의 적(敵)이었다.
(동아일보 1955년 5월 16일자 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