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수(金良洙, 1894~1971)는 1917년 일본 와세다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1922년 10월 동아일보 논설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 1923년 5월부터 1924년 5월까지 동아일보 논설부장으로 있다가 조선일보로 옮겨 주필까지 지냈으나 1925년 6월 유학차 도미했다. 같은해 7월 하와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에 송진우 김활란 신흥우 서재필 유억겸과 함께 참석해 총독정치의 진상을 알렸다. 1926년 뉴욕에서 발행된 삼일신보 주필을 지내고 컬럼비아대와 영국 런던대에서 수학한 뒤 1931년 귀국했다. 1935년 조선어학회에 참여했고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돼 고문과 악형을 당했다. 광복 후 제2대 민의원에 당선됐다.
김양수(金良洙) (순천, 1894~ )▲ 1922.10 논설기자, 논설부장, 1924.5 퇴사.〔민의원의원, 원자력원장〕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舊友回顧室] 내가 있던 시절
「東友」편집실에서 회고기를 써달라는 부탁(付託)이나, 그러나 나 스스로 생각할 때 동아의 초창기인 1921․2년경의 옛 시절이라 나 기억부터 희미한 터이라 별로 기록할 것이 없다. 다만 고하 설산 하몽 등 제선배요우(諸先輩僚友)들의 기억뿐이요, 지금 남아있는 사람으로 유광렬 씨 같은 이가 문필에 종사하여 있을 뿐 참으로 요요적막(寥寥寂寞)한 감(感)이 있다!
「(노병불사쇠잔거)老兵不死衰殘去」라 할까. 기자생활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으로는 일종의 기자「기질(氣質)」이라 할지 무엇이 남아 있게 된다. 이 기질이 종생(終生)토록 사라지지 않는 기백(氣魄)으로! 더욱이 신문사라해도 유만부동(有萬不同)의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요, 또 그때 기자생활을 하던 때로 말하면 조선총독부를 상대로 하는 민족주의의 아성(牙城)이던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인지라 남모르게 불굴불요(不屈不撓)의 기개(氣槪)가 몸에 배어 있었다할까.
나이도 30전후의 팔팔한 때인 만큼 내심 기개세(氣蓋世)하던 자부(自負)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기자들의 박봉(薄俸)이란 체면유지(體面維持)도 어려웠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기자들의 생활고(生活苦)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경영에 견실(堅實)하기로 유명한 동아일보사이니 사원으로는 고통이 컷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그러고 사원의 복지사회혜택이라 할까, 그런 점의 결함(缺陷)이 우심(尤甚)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사운(社運)이 점점융융(漸漸隆隆)하여 외관상으로도 동아방송이 개국되는 일면이 타사의 추종(追從)을 불허하는양하다. 따라서 사원의 대우개선(待遇改善)도 잘 되는 줄 짐작한다.
혁명정부(革命政府)때에 신문의 「기업화(企業化)」를 많이 주장한 것 같은데 그 주장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혹 이런 결함(缺陷)이 우리나라 신문사업이 너무나 정치적으로 흘렀다는 말인가. 나는 오히려 우리나라 신문계가 침체부진(沈滯不振)한 것은 관권(官權)의 압박(壓迫)과 간섭(干涉)으로 인한 장애(障碍)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점에 대해서는 특히 우리 동아일보사가 왜정시대(倭政時代)부터 많은 수난과 고초를 겪어 왔으므로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동아일보사는 출생초부터 우리 민족문화에 천생의 혁신아(革新兒)였고 투쟁적(鬪爭的)인 사회제도(社會制度)이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민족주의, 민주주의, 신문화운동의 여명기적(黎明期的) 선구자(先驅者)이었던 것이다. 이런 빛난 전통을 유지하는데는 때때의 비약(飛躍)이 필요하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동아신문대학(東亞新聞大學)」의 창설을 요망한다. 故·인촌선생(仁村先生)의 경영인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에 신문대학이 없는 것을 유감(遺憾)으로 생각한다. 연차계획(年次計劃)의 시설(施設)이므로 혹 일후(日後)에 시설이 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선생의 탁견(卓見)으로 어찌 신문학과를 창설치 아니하였는가. 미·소·독 선진국가의 대학시설에 신문대학이 없었던 종래의 전통 그대로를 모방(模倣)한 것 같으나 또 그 당시의 서양의 시대상으로는 혹 그랬을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 시대의 진운(進運)은 신문의 중요성이 날로 더하여 「매스·코무니케이션」의 상징이라 할 신문이 학문으로도 특수전공의 가치관이 뚜렷한 것을 누구나 부인치 못할 것이다. 비교적 신진국가 맛이 있는 저-미국에서는 콜럼비아대학에 신문대학이 있고 또 미주리주에 유명한 신문대학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안다. 자세히는 모르나 이두 학교의 창립연대도 1세기를 넘지 못할 것이다. 말하자면 19세기 후반에 들어와서야 독특한 단과대학으로 등장이 되었는가 싶다.
그리고 미·영 대학교에 이런 단과대학의 신문대학은 이상과 같이 굴지의 수에 불과한 것 같으나 미국의 각 대학교에 신문학과의 시설은 거개(擧皆) 없는 학교가 없다할 만큼 다 있다. 설사 신문학과로서 정식의 독립과별은 없으나 학교내의 신문활동이 괄목(刮目)할 만큼 민활신속(敏活迅速)하다. 그러므로 이곳에 학적을 둔 학생은 누구나 신문학도의 상식과 활동을 얻게 된다. 이 근래 우리나라 학원내에서도 이런 신문학의 연구와 활동이 활발한 것을 알겠으나 아직 신문대학이나 신문학과가 시설되었다는 소식은 없다. 오히려 어떤 강습소 형식으로 신문학연구·활동이 있을뿐이다. 이런 현상을 가지고 보아도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이 방면 요구가 어떠한가를 짐작하겠다. 다시 말하면 사회의 실요구(實要求)는 이렇게 절실한 것을 알겠고 이 요구는 금후(今後) 더욱 성장할 것을 깨닫게 된다.
나의 짧은 기자생활의 경험으로 보아서도 약 반세기전의 동아일보 초창기라 할까 「화동(花洞)」시대에 「빠라크」식의 사옥에서 불충분한 시설을 가지고 신문을 제작하였던 그 당세(當世)와는 가위격세(可謂隔世)의 차이가 있는 오늘날에 신문의 발달이 얼마나 고속도적(高速度的)으로 성장하였는가를 생각하면 이상에 말한 강습소식 신문연구로써 능히 충족할 수 있을까가 문제 중에 의문에 속한다 하겠다.
이런 최신 세대의 진운과 요구에 따라 신문기자의 소질도 급속도적(急速度的)으로 향상발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신문기자들을 높게 평가한다면 소위 「사회(社會)의 목탁(木鐸)」이니 「무관(無冠)의 제왕(帝王)」이니를 허무한 말로 생각하지 않는다. 참으로 「신문기자(新聞記者)」야말로 존귀(尊貴)한 권위(權威)와 사명(使命)이 있다. 이런 신문기자를 양성하려면 훌륭한 신문대학이 있어야 한다.
물론 다른 대학이나 학원같은 데서 충분한 교양과 훈련을 받고도 좋은 기자가 될 수 있고 또 지금 동서양 각국의 현역기자들이 결코 신문대학 출신만이 아닌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신문대학은 특수한 교육기관인만큼 더욱 적절한 교육·훈련을 가할 줄 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서도 신문대학이 꼭 필요하고 이 대학의 창설이 동아일보사에서 선창(先唱)이 되었으면 하는 요망(要望)이다 이런 구상(構想)이 동아일보 수뇌급(髓腦級)에서 반드시 없지아니할 것을 나는 믿는다. (前 국회의원)
(김양수, ‘舊友回顧室- 내가 있던 시절’, 東友, 1964년 1월 21일, 15쪽)
김양수
1896. 10. 10 ~ 1971. 1. 19
애국장 (1990)
서울 종로(鐘路) 사람이다. 1925년 7월 미국 하와이에서 개최된 범태평양회의(汎太平洋會議)에 서재필(徐載弼)·신흥우(申興雨) 등과 함께 참석하여 일제 식민통치의 참상을 각국 대표에게 알리었다. 1926년에는 미국 뉴욕에서 『삼일신보(三一新報)』가 창간되자 주필에 임명되어 교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31년에는 귀국 도중 중국에 들려 임시정부 요인들과 국내 독립운동의 향방을 협의하는 한편 김두봉(金枓奉)과 국어국문의 부흥문제를 협의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조선어학회의 기관지인 『한글』의 편집비용을 후원하고, 1935년에는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사업을 촉진하기 위한 비밀 후원회를 조직하여 거액의 재정지원을 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운동자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1945년 1월 징역 2년에 4년간 집행유예의 선고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