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문(金勝文,1901~1983)은 1928년 동아일보 판매부 서기로 입사한 뒤 도쿄지국장까지 지냈고, 해방 후 동아일보 복간 당시 영업국장 겸 발행인으로 일하다 1947년 2월 발행인에서, 1949년 3월에는 영업국장직에서 각각 물러났다. 1950년 3월 상무취체역을 맡았으나 곧 6.25를 맞았고, 전쟁 중인 1951년 5월 인촌 김성수가 제2대 부통령에 취임했을 때 비서실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1947년 2월부터 1966년 7월까지 취체역으로 있었다.
김승문(金勝文) (덕천, 1901~ ) ▲ 1928. 9 서기(판매부), 경리부장, 광고부장, 도쿄지국장, 영업국차장, 1940. 8 폐간. ▲ 1945.12 재입사. 이하 권2 참조.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김승문(金勝文) (덕천, 1901~ ) ▲ 폐간전 영업국차장. ▲ 45.12 영업국장, 발행인, 취체역 영업국장, 상무취체역, 취체역, 66. 7 퇴사.〔화신산업부사장〕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막중한 동경지국(東京支局) 교포(僑胞) 돌보는 본영(本營)
『당신 사교학(社交學)을 공부한 일이 있소?』
『뭐 별로. 』
『지금 일본에는 우리의 대사관(大使館)이 없으므로 지국장(支局長)인 당신이 대사(大使) 역할까지 겸해야 할테니 그럼 내 얘기를 잘 들어 보시오. 』
일제(日帝)의 탄압이 날로 심해져가던 1937년 11월(一九三七年十一月) 송진우(宋鎭禹)는 당시 광고부장 김승문(金勝文)을 동경지국장(東京支局長)으로 임명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사교(社交)의 목적은 먼저 자기자신을 지지(支持) 해주는 사람을 많이 만드는 것이요. 그러니 첫째 어떤 경우에나 남의 단점을 얘기하거나 급소를 찌르지 말고 언동(言動)에 성실하고 금전에 담박하고-. 자! 이제 사교학(社交學)의 대략을 말했으니 낯선 고장에 가서 나라를 대표하는 대사(大使)란 처지를 잊지 말고 잘해 주시오』「나라 없는 신문사(新聞社)의 장(長)」으로서 적지(敵地)나 다름없는 동경(東京)에 지국장(支局長)을 보내면서 송진우(宋鎭禹)는 그것이「대사(大使)」의 역할임을 누누이 강조하는 것이었다.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는 창간 7년(創刊七年)만인 1927년 9월(一九二七年九月)에 동경지국(東京支局)을 설치했었다. 주로 광고(廣告) 등 업무관계 일을 위한 것이었지만 지국(支局) 사무실에는 좋은 일을 알리고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수많은 동포(同胞)들이 찾아들었고 일본당국(日本當局)으로부터 무정부주의자(無政府主義者) 등으로 지목되어 강제출국 당하는 교포들이 지국(支局)에 들러 여비(旅費)까지 타가기도 했었다.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의「민족대표기관(民族代表機關)」자임은 동경지국(東京支局)에 한한 것이 아니었다. 전국지국장회의(全國支局長會議)가 열릴 때면 송진우(宋鎭禹)는 농담 섞인 어투로『오늘 우리 모임은 단순한 지국장회의(支局長會議)가 아니라 전국각도대표자회의(全國各道代表者會議)요』하고 말하곤 했었다. 김승문(金勝文)·신호균(申浩均)
(동아일보 1970년 4월 1일자 22면)
일선 동료들에게 한 마디
동아의 같은 집안식구의 한 사람으로서 일선에 나서서 일하고 있는 동료들을 위해 한마디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무엇보다 기쁘게 생각한다. 내가 동아일보의 일선에서 물러난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잠시도 잊지 못하고 동아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단지 내가 동아일보에서 광고부장으로 영업국장으로 또는 동경지국장으로 일해왔다는 사실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그러면 무슨 까닭인가 하고 궁금하게 생각하는 동료들이 있겠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이렇게 한평생을 살아가는데, 동아는 나에게 뚜렷한 인생의 길을 가르쳐 주었으며 그 길을 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내 가슴속에 뿌리 박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좌우명이랄까 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본다. 어떤 이는 정직하게, 원만하게, 요령있게, 즐겁게, 꾀있게,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말고 등으로 여러 가지를 내세울 수가 있겠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네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가 동아의 광고 부장으로 있다가 동경지국장으로 임명을 받을 당시의 일이다. 그때 송진우(宋鎭禹) 씨가 사장이었다. 동경지국장이란 중책을 짊어지고 떠나려던 참이다. 송 사장은 사장실로 나를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30분 동안의 훈화(訓話)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지금 일본에는 대사관이 없으니 지국장인 당신이 대사역할까지 해야 합니다. 그러니 사교학을 공부한 일이 있소?』하고 대뜸 묻는 바람에
『별로……』하고 잠잠히 있었다. 『그러면 내가 이제부터 말할 터이니 들어보시오. 사교의 목적은 먼저 자기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을 많이 만드는 것이오. 자기 의견에 또 자기 일에 공명하고 찬성해주는 사람을 되도록 많이 가지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볼 수가 있소.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어떤 경우에나 남의 장점만을 이야기 하시오. 인간은 누구나 장단점을 가졌소. 단점은 그저 눈으로 보고 그대로 넘겨버리시오. 결코 그것을 입밖에 내서는 안되오, 입밖에 내는 것은 오직 장점뿐이요, 그것이 어떤 사람이거나 막론하고 한결같이 그렇게 하도록 해야하오.
다음은 상대방의 급소를 찌르지 마시오. 비록 규탄을 해야할 부정한 일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해도 그것을 규탄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급소를 찌르지 말도록 하시오. 당신이 만일 상대방의 급소를 찌르면 그 상대방이 다시는 당신을 만나려고 하지 않을 터이니 당신이 하고자하는 사교학은「제로」에 돌아가고 말아요.
셋째는 언동에 성실하시오. 항상 책임이 있는 말을 해야하오. 실천에 옮기지 못할 말은 아예 입밖에 내지 말도록 하시오. 말 값을 갚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 하는 것을 똑똑히 이번 기회에 명심해 두도록 하시오.
이제 마지막으로 금전에 담박하고 정확하도록 하시오. 금전관계와 인간관계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오. 예를 들면 비록 부자관계일지라도 자식이 계산에 어둡고 돈에 흐리면 자식에게 그 관리를 못맡기는 것과 같이, 어디까지나 금전관계에는 담박해야 하오. 무엇보다 돈을 쓸데없이 탐내어서는 안되오. 자! 이제 사교학의 대략을 말했으니 낯선 고장에 가서 나라를 대표하는 대사관이란 처지를 잊지말고 잘 해 보도록 하시오.』
물론 모두가 우리가 항상 들어오는 평범한 말들이요 또한 모두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일들이라 할 수 있겠다. 하나, 같은 말도 환경과 분위기와 심경에 따라서 달리 작용하는 것같은 느낌을 내가 자주 하는데 그 까닭이라 하겠다. 30분 동안의 송사장의 훈화는 내가 살아가는데 가슴속에 살아 있는 좌우명이 되었으며 나의 일평생을 좌우하는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동경지국장으로 일할 당시에도 많은 악조건이 있었으나 좋은 성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내가 동아를 떠나지 못하고 나의 일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것도 그 탓이라 하겠다. 지금 현재의 나의 경력을 본다면 관청생활 2년, 동아일보 20년, 화신산업에 12년이다. 그러면서 커다란 실수 없이 꾸준히 자기의 자세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수시로 송사장의 훈화하실 때의 그 음성, 표정, 말의「액센트」가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살아오는 것은 웬일인지 모른다. 일선에서 싸우는 동료들을 위해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모두가 사교가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마다 자기대로의 어떤 자세가 있어야 할줄 안다. 하는 일이야 그가 무엇이든 저대로의 올바른 자세를 갖추어 두도록 하자.
(김승문, 일선 동료들에게 한 마디, 東友, 1964년 9월 29일 8쪽)
[퇴임중역 대담기] 동아를 떠나며
7월30일 본사 제40기 주주총회에서 양원모 감사, 김승문 이사, 우승규 이사 세 분이 정년퇴임 하셨다. 양 이사, 김 이사 두분은 동아 초창기부터 오늘날까지 40년 이상을 일선에서 또는 경영의 측면에서 활약, 오늘의 동아를 길러내셨다. 이제 두 노장은 동아의 밑거름이 되기를 자처하고 중진들에게 길을 열어주려 동아를 떠났다.
그들의 소회의 일단을 물어 동우 여러 분에게 전한다, <편집자 註>
김승문 이사
신진대사(新陳代謝) 위한 용퇴(勇退)
기자_ 용퇴하신 소감을 우선,
김이사_ 글쎄… (이 한 마디 후에는 한동안 침묵이다. 기자는 그분의 완벽한 풍모에 새삼 감탄하였다. 모모(某某)하신 분들을 많이 대해 보았지만 이분처럼 짜임새 있고 당당한 사람을 본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소감이란 게 별로 없군요.
기자_ 40년간 일해오신 덴데 그래도 한 말씀쯤은 사우들을 위해서
김이사_ 꼭이 말하자면 내가 이번 그만둔 건 신진대사 원리에 의한 용퇴입니다. 보아하니 나이 많은 양 이사하고 나만 남았는데 내 나이 이제 67세이고 창간이래 아직까지 있었으니 너무 오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후진들에게도 길을 열어 줄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젊고 유능한 분들이 경영면에 참여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분들의 발랄한 패기와 참신한 아이디어를 경영에 반영해야죠. 그리고 내가 동아(東亞)를 떠났다고는 하지만 연(緣))마저 끊긴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평생을 관계한 곳인데 우선 내 자신이 그걸 쉽게 끊을 수 있게었요? 이제는 동아의 울타리 밖에서 동아를 지켜보기로 하고……
기자_ 김선생께서 입사하신게 언제입니까?
김이사_ 소화(消和)3년이니까 1928년 9월이죠. 일본서 학교를 나오고 그 해에 입사한거죠. 고하(古下)가 사장으로 계실 땝니다.
기자_ 특별히 동아(東亞)를 선택하신 이유라도 계신지요?
김이사_ 있지요. 3.1운동이후 대한독립단체건(大韓獨立團體件)으로 평양형무소에 3년간 투옥된 일이 있었지요. 죄명(罪名)은 소위 제령위반죄(制令違反罪)입니다. 그때 옥중에서 민족주의지사들과 교류하며 많은 감화를 받았어요. 그때 동아는 항일의 총본산(總本山)이었으니 자연 마음이 끌렸고 후에 일본 가서 공부하면서도 동아일보를 교과서 이상으로 탐독했습니다.
기자_ 근무하시면서 많은 사건을 겪으셨을 텐데 특히 기억에 남는 얘기 몇 가지만 들려주세요.
김이사_ 어쩌다 사건이 있는게 아니고 사건의 연속이었으니…… 일제말 폐간 얘기를 하죠. 동경지국장으로 있을 땐데 고하(古下)께서 급히 귀국하라는 통지가 왔어요. 대개 짐작은 했지만 와보니 모두 잡혀갔더군요. 양원모 씨, 국태일 씨, 김동성 씨, 백관수 사장 등. 총독부는 동아를 자진폐간 시킬 속셈이고 우리는 이걸 거부하는 형편이니 쌍방간에 자연 공방전이 벌어졌어요. 그래 총독부는 비상수단으로 우리 쪽 사람들을 모두 잡아 가두어 사람의 씨를 말리면 자연 폐간될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내가 잡혀간 분들 대신 영업국장 일을 보며 정상적으로 신문은 냈지만 언제 잡혀갈지 촌각문제(寸刻問題)였지요.
결국 고하와 한날 투옥되면서 동경지국장 시절에 사귀어 둔 정계나 일본 유지들에게 전보를 쳤지. 「드디어 잡혀간다, 뒷일을 도와달라」고. 그때 일본의 여론이 총독부의 민족지 신문 폐간에 대해서 좋지 않았기 때문에 여론을 환기시켜달라는 말이었지. 결국 신문이 폐간됐으니 그때 심정이야말로 비장했지.
봉급(俸給)은 많이 일은 적게
기자_ 사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 몇 가지만 해주세요.
김이사_ 동경지국장 시절에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 사장 쇼리키(正力)를 만나 신문경영의 비결을 물었습니다. 요미우리(讀賣)는 쇼리키(正力) 사장의 지도로 단시간에 삼류지(三流紙)에서 대신문(大新聞)으로 비약(飛躍)했지요. 그의 말이 「기자(記者)와 교수(敎授)는 봉급을 많이 주고 일은 적게 시켜야 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기자가 돈에 구애 없이 책도 사보고 충분한 시간 공부해야 좋은 글을 쓴다. 좋은 글이 많이 실리면 자연 신문은 많이 팔린다」 이거지요. 결국 기자는 돈에 담백하고 이를 사(社)에서 뒷받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고하(古下)께도 돈에 담백하고 정확하라는 말씀을 들었어요. 내 딴에는 이 교훈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지내왔습니다만 언론인이 신문제작에 임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근자(近者)에 동아기자(東亞記者)만은 돈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말을 여러번 들었습니다. 이게 바로 동아정신(東亞精神)이지요. 이 정신을 계승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또 맹자(孟子) 말씀에 「자득사의(自得思義)」란 말이 있습니다. 돈이나 명예를 막론하고 득(得)을 보면 먼저 의(義)를 생각하라, 의(義) 아니면 절대 취(取)하지 않아야죠. 이것도 동경지국장 때 얘긴데 하루는 동대졸업(東大卒業) 기사(記事)로 총장훈시(總長訓示)를 각 신문이 톱으로 게재했어요. 그 속에 이런 말이 있어요. 「출세(出世)와 성공(成功)을 생각지 말라」 즉 출세를 너무 서둘면 선배나 동료를 앞질러야 할 경우도 있으니 자칫하면 선배나 동료를 모함하는 수가 있다. 또 마땅히 이끌어 줘야 할 선배를 못본체 하기도 한다. 비록 속도가 늦더라도 황소처럼 한발 내딛되 절대 후퇴는 말라 이거죠. 이 점도 사우들께 특히 당부하고 싶습니다.
기자_ 바쁘신 중에 대단히 감사합니다. 귀중한 말씀 동우(東友)들에게 잘 전하겠습니다.
( ‘퇴임중역 대담기- 동아를 떠나며‘, 동우, 1966년 8월 31일, 13쪽)
東亞 그때 그 시절-舊友 回顧記 ② 金勝文
나는 내나이 26세이던 1925년9월에 동아일보에 입사, 20년간 동아와 함께 세월을 보내다 1948년 동아를 떠났다. 내나이 이제 80. 되돌아 보면 동아와 더불어 살았던 세월이 더없이 그립고 생각할수록 더더욱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게된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1919년3월1일은 ‘독립만세’사건으로 전국이 들끓었다. 나는 이때 20세의 나이로 평양고보 2년에 재학중이었다.
독립에 뜻을 둔 학생 대표들이 지하조직을 통해 3.1운동에 나설 것을 나에게도 알려왔다. 그래서 나는 평양고보 동창생 4백여명을 이끌고 3월1일 아침 7시30분까지 숭실대학 운동장으로 나갔다.
숭실대학운동장은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인파가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회자는 연단에 올라가 조선은 이미 독립이 됐다. 그래서 축하 행진을 해야겠다고 언성을 높여 외쳤다.
행진 코스는 숭실대→서문통→평양경찰서앞→일인들이 사는 신시가지 정거장으로 되어 있었다.
신시가지 앞을 지날 무렵 일본 순사들이 행렬을 저지했다. 처음에는 공포를 쏘았다. 그러다가 정조준자세로 사람을 쏘았다. 하나 둘 행인이 쓰러지나 대열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평양에서의 3.1독립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어 4일동안 계속됐다. 학교에서는 독립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무기정학처분을 내렸다. 학교에 가고 싶어도 갈 수는 없고 마음 속에는 반일 감정만이 눈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이 무렵 만주에 있는 독립군이 국내에 잠입, 독립을 위한 지하운동을 하고 있었다. 일본 순사들을 몰래 사살하거나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일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나도 비밀 결사 대한독립단에 가담, 지하운동을 했다. 그러나 학교측의 무기정학 처분 해제로 지하운동을 잠시 멈추고 학생으로 되돌아갔다. 평양고보를 마친 뒤 전수학교에 진학을 하려는데 신원조사과정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실이 말썽이 되어 징역 ‘3년’을 받았다. 3년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나와 다시 공부를 하기로 작정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리쓰메이칸대학 전문부 경제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나서 1925년 9월 동아일보 영업국 사원으로 직장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지금 같으면 취직이겠지만 그때 나의 뜻은 취직이라기보다 동아일보의 주의주장이 내 생각과 똑같아 독립운동의 연장과도 같은 기분이었다.
월급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고 사상적인 이념을 펴기 위한 수단에서였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동아일보에 들어온 뒤 나의 역할은 평소 내가 하고팠던 뜻과 일치가 됐다.
기억이 흐려 연도를 들먹일 수 없지만 함경북도에 큰 수해가 난적이 있었다. 이때 나는 회사 명령으로 수재민 구호를 위해 현지에 나가 여러 가지 사업을 한 적이 있다.
또한 충무공을 모실 현충사 건립비용을 갹출하기 위한 사업도 전개했으며 단군의 영정을 보존하는 일도 기꺼이 맡아했다.
이 모든 사업은 바로 일제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조선사람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독립심을 고취하기 위한 발로에서였다. 일선에서 오직 기쁜 마음으로 열과 성을 다해뛰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럭저럭 동아일보에서 잔뼈가 굵어갈 무렵인 1935년 5월 나는 경리부장 광고부장 동경지국장을 거쳐 영업국장이 되었다. 광고부장직에서 동경지국장을 맡으라고 할때 古下 사장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을 나는 오래도록 잊을 수가 없다.
古下선생은 내 생각으론 이충무공 다음의 위인이라고 본다. 그 양반의 말씀 행동은 어느것 하나 흐트러지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게 된 원인을 나는 뒤늦게야 알게 됐다. 저녁 나절에 나를 불러 당장 내일 아침 동경지국장직을 맡으라는 분부였다. 그때 古下 선생의 한토막의 사교학 강의가 있었다.
古下선생은 대뜸 “자네 대학에서 사교학 강의를 들어 본 일이 있는가?”하고 물었다.
(…)
古下선생의 處世訓은 그때부터 내 행동철학의 강령이 되어 잠시도 잊은 적이 없다. 해마다 古下先生 묘소에 가면 그때 생각이 선연하며 하고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1940년 5월 나는 상무취체역을 맡아 1948년 2월 농림부장관 비서실장이 되기까지 東亞에 몸을 담았다. [동아일보 사사 2권에는 1945년 12월 영업국장 겸 발행인이 됐고 1947년 2월 발행인에서, 1949년 3월 영업국장에서 각각 물러난 것으로 돼 있다-인용자 주]
1951년5월에는 仁村先生께서 불러 부통령 비서실장으로 잠시 있었으며 그 다음부터는 東亞로부터 점차 멀어져 개인회사 중역을 맡기도 했다.
아무튼 내가 젊음을 바쳐 일했던 동아는 민족의 양심과 지성이 한데 뭉친 민족의 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오직 민족을 위해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선각자들의 높고 깊었던 뜻을 되새기노라면 언제나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제 세월은 흘러 모든 사물이 많이 변했다. 혹자는 동아의 모습을 보고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은 줄 안다.
그러나 仁村 이후 동아일보 고려대학 중앙학교 등 여러 기업이 착실한 전진을 해온 사실에 대해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나는 선친의 유업을 받들어 이같은 착실한 발전을 가져온데 대한 金相万회장의 노고에 칭찬을 하고 싶다.
사람은 언젠가는 눈을 감고 저승으로 간다. 그래서 나는 요즘 남을 위해 마지막으로 갑진 인생을 살고파 고향인 德川군민회장통일촉진회 장학사업 주례보기등으로 바쁜 날을 보내고 있다.
(김승문, ‘東亞 그때 그 시절-舊友 回顧記 ② 金勝文’, 東友, 1979년 5월 31일, 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