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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동아일보 사람들- 김두백

Posted by 신이 On 10월 - 23 - 2018

 

김두백(金枓白, 1900~?)은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 때 서기로서 들어왔으나 같은 해 10월 퇴사하고 1925년 1월 재입사한 뒤 정치부와 사회부 기자로 활약했다. 1933년 8월 영남 일대 대홍수에 이어 태풍으로 피해가 발생하자 통영에 특파돼 취재활동과 구호활동을 벌였으나 그해 10월 퇴사했다.

 

김두백(金枓白) (동래, 1900~ ) ▲ 1920. 4 서기, 1920. 10 퇴사. ▲ 1925. 1 재입사, 기자(정치부․사회부), 1933.10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新聞記者 昨年中 第一 記憶되는 事件

正體모를 怪美人에게 속든 일
東亞日報 金枓白

戊辰은 조선의 災年이엿다. 나에게는 厄年이엿다. 私로는 슯흔 일만 당하면서 公으로는 밧부게만 지나게 된 이 해도 나의 일생에도 모지 잇처지지 안는 만흔 기억을 남겨두고 무정히 지내갓다. 갑업는 나희에 또 한살을 더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웁기가 그지 업다. 그러나 災厄의 戊辰이 간 것만은 식원한 일이다. 己巳란 금년이 피폐한 조선에 엇더한 현실을 가저달 줄 것인지? 그것은 지금 안저서 알 일이 못된다 己未의 풍년도 간지가 십년이니 흉년든 이 땅에서 새해에 대한 희망이나 가저야 할 것이다. 금년부터는 나의 붓으로 전하는 소식이 반갑고 깃부고 희망에 넘치고 광명에 빗나는 그것이기를 바라거니와 기왕 戊辰의 일년간 기억에 남은 사건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바닷스니 상서로운 일이라고는 한가지도 업든 작년 중의 『事件』이나마 머리 속이 구석 저 구석에서 더듬어 보기로 하자.

그러나 某某 사건은 모다 정치 시사에 관한 문제로 이 지면에서 논할 範園 이외의 일이닛가 그양 OO사건에 붓치고 말할 밧게 업다. 그리고보니 남은 재료라야 모다 시시하다. 아쉬운대로 말하자면 극히 무가치한 일이엿스나 아즉까지<46> 나의 머리 속에 이상하고 야릇하고 怪惡하고 한심한 기억을 남겨둔 市井雜事 중의 『수수격기 사건』 한 개를 들어보자.

작년 느즌 봄 어느 날. 당시의 편집국장 C씨가 매우 은근한 태도로 『이런 투서가 왓구려』하며 편지 한 장을 나에게 보엿다. 나는 그의 목소리와 안색으로 곳 비밀을 요하는 중대사건임을 直覺하고 투서를 보니 요지는 이러하얏다. 開城某高等女學校를 졸업한 K라는 여성이 자기 남편과 이혼을 하고 위자료청구소송을 제기할 次로 상경 체재 중에 그 本夫와 친분이 잇는 C경찰서 洪警部에게 가즌 위협을 다 밧다가 결국 백주 경찰서 내에서 강간까지 당하얏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을 조사하랴면 並木町 XX번지 OOO을 차자가서 그 여자을 맛나보라고까지 附記되어 잇섯다.

그곳을 차자갓다. 30분 후에 주인이 나와 K는 지금 경찰부로 갓슨즉 자기가 대신 말하겟다고 나를 안내하더니 투서에 쓰인 사실을 전부 시인하면서 경찰부장이 이 사실로 오늘 K를 불러갓다고 말을 한다. 나는 그의 의분에 떨리는 목소리와 엄숙한 얼골 빗으로 이 사건이 확실히 잇섯든 것을 미덧다. 나는 기사에 필요한 일시와 장소며 기타 세세한 경로를 알고 K와 주인과의 관계까지 물은 후 그 집을 나와서 경찰부와 C署에 출입하는 D·Y 양군에게서는 사실이 無根한 것갓드라는 斷案을 들엇다. D군의 말은 그런 여자가 昨日은 커녕 이 일주일 이내에 경찰부에는 그림자도 나타낸 일이 업다는 것이요 Y군의 말은 C경찰서 高警部는 잇서도 洪警部는 업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에 不服이엇다. 투서는 金村서 우편으로 온 것인데 가라는 곳에 가보니 과연 틀림업시 전후 사실을 설명해주는 사람이 잇지 안흔가. 이 명백한 사실을 無根이라 하는 Y·D 양군이 도리혀 원망스러웟다. 일본어로 『コウケイプ』면 洪警部도 될 수 잇고 高警部로도 들될수 잇슨즉 한번 다시 가보아달라고 의뢰한 결과 Y군이 다시 출동을 하게 되엇다. 그는 미구에 전화로 고경부 소행을 조사 중 某警官이 『酒』字와 『女』字를 써보이더라고 통지를 하야 주엇다. 그러나 본인과 서장이 그런 여자는 알지도 못한다고 부인하는 것은 물론이다.

최후의 一策은 이 사건에 대한 비밀의 열쇠를 쥔 K女를 맛나는 것이다. 授恩洞 X번지로 갓슬지 몰른단 말을 듯고 달려갓더니 얼골에 분을 셋치式이나 발른 신여성(?) 몃사람이 나와 『K는 일전에 일본으로 갓는데요!』하며 증그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추파를 보낸다. 이에서 나의 第六感이 눈뜨기 시작하얏다. 『隱君子』의 소굴이 아닌가하는 疑念이 번개가티 나의 머리를 따린다. 『K라는 여성이 隱君子인가보다. C署 그 경부에게 톡톡한 원한을 가지고 이러한 風說을 만들어 낸 것인가 보다』 이러케 생각하니 나의 직업적 호기심은 방면을 곳쳐가지고 나의 활동을 더욱 맹렬하게 맨드러 노앗다.

나는 그날 종일 이 수수걱기사건을 풀기 위하야 이 정체모를<47> 여성을 차자 京城全市로 헤매엿다. 茶屋町 某旅館에서는 『너도 그의 情夫더냐』 하는 듯한 여러 시선 중에서 모욕을 늣긴 일까지 잇섯다.

이러케 차자단이다가 그날 석양에 並木町 네거리에서 20전후로 보이는 反醜反美의 그를 맛나 그 주인과 한가지로 從容한 자리에서 이 사실을 뭇기 시작하얏다. 그는 C署 洪警部에게 강간당튼 전후 경로를 조리맑게 이약이하면서 부대 신문에는 내지말어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러나 그의 語聲에서 그의 태도에서 나는 『거짓말할 때에만 가지는 여자의 독특한 표정』을 발견하엿다. 『그 경부 얼골이 엇더케 생겻드냐』고 쏘아뭇는 나의 말에 그는 갑작이 쥐구녕에라도 숨을 듯한 낭패의 빗을 보이면서 머리가 압허 말을 할 수 업스니 내일 오전 8시에 다시 맛나자고 하면서 두말도 업시 안방으로 드러가 버린다. 이 苦答 중에서 나는 이 여자가 投書人의 情婦인 것을 알아내엿다. 나는 그 익일 오전 8시에 그 여자를 차자갓스나 『정처업시 떠난다는 편지 한 장을 남겨놋코 어듸로 가버렷다』는 주인의 말에 역시 나의 추측이 틀이지 안엇구나 하고 돌아섯다.

自初至終으로 수수걱기인 이 사건에 대하야 나는 당시에 이러케 판단을 하고 수첩을 덥허버렷다.

『K라는 타락한 여성이 어수룩한 농촌청년인 투서인을 맛나서 가티 살기를 恨願하야 그의 허락을 어덧다가 투서인 一去後에 소식이 업슴을 보고 자기 몸이 危境에 빠젓다 하면 남자인 투서인이 구해주리라는 천박한 생각으로 간특한 譎計를 꿈인 것이겟다.』고…. 니야기가 길어저서 이 판단의 근거까지는 설명치 아니한다. 『기억에 남은 사건』으로는 넘어도 갑업는 것이다마는 요러한 여성에게 속아 넘어가는 어리석은 남성이 세상에 얼마든지 잇슴을 생각함에 얼른 이저버리기도 실흔 사건이다. 

(김두백, ‘新聞記者 昨年中 第一 記憶되는 事件’, 별건곤, 1929년 1월호, 46~48쪽)

 

 

靑春의 자랑 나의 寶物

新聞記者의 寶物
金枓白

무명한 文筆 노동자 중의 한사람인 나에게 『新聞記者로서의 나의 寶物』이라고 내여 노흘 만한 것이 잇슬 것갓지 아니하다. 설사 잇다하여도 다른 사람이 인정하야 주기 전에 내 자신이 말하기는 쓱스러운 일이다.

사 년 남짓한 신문기자 생활에 나는 흔히 나의 수양중에 기자로써의 『廢物』은 발견한 때가 잇섯지만은 이것 만은 다른 사람이 추종할 수 업는 보물이라고 自矜할 만한 무엇을 발견하야 본 기억은 업다.

여러 가지 躊躇하는 생각으로 내가 처음 신문 기자 名啣을 가지고 나설 때에 斯界의 선배 여러분은 이 직업에 필요한 여러 가지 요건을 만히 일너 주엇다. 透徹한 관찰 敏活한 동작 공평한 心思 정확한 판단 등은 사건에 접하는 기자의 태도이요 주체적 구상 간명한 기술 똑똑한 글시 통속적 필법 등은 신문기사에 가장 중요한 기술이라고 들은 듯하다. 지금 생각에도 이 모든 점을 구비하얏스면 내가 당당한 신문기자로 출세할 수도 잇슬 것갓고 이것이 나의 보물이라고 내여노을 거리도 잇슬 것 갓다. 나는 무슨 사건을 대할 때나 기사를 쓸 때에 흔이 거기에 너무 열중하는 까닭에 그 당시에 잘 되고 못 되는 것을 모른다. 내가 활동하야 쓴 기사가 신문에 나타난 이후에 여러번 여러번 그것을 닑어 보고 또 활동하든 경과를 생각해 본 뒤에 이번 사건만은 귀감이 업시 활동을 하얏다. 이 기사만은 별노 붓그럽지 아니하다고 스스로 만족할 때보담 남에게 이것이 내가 쓴 기사라고 내여노키가 붓그러울 만콤 수집을 만콤 불만을 늣기는 때가 만앗다. 혹 남이 나의 무슨 기사를 칭찬하여 주는 이가 잇스면 도리혀 얼골이 붉어질 만콤 듯기가 거북하엿든<46> 것이 前例이엿다. 이러한 나에게 무슨 보물이 잇다고 내 스스로 말을 하랴. 그러나 신문기자에게 필요한 성격 한 가지가 나에게 잇는 것을 나는 아모도 몰내 나 스스로 밋는 점이 잇다. 아직 未成한 自我에 만족치 안는 것 이것이 내가 지금 이 직업을 내여 노치안코 견듸는 다만 한 가지 신조이다. 만족치 못함으로 다소간이라도 노력이 따른다. 이 노력이 혹 나의 보물이라고 말하여 줄 사람이 잇슬는지? 아직 無名한 一個 신문기자인 나에게는 노력이 잇다. 건강한 몸-부단의 노력-이것은 나에게만 보물이 된다고 할가? 
 
(김두백, ‘靑春의 자랑 나의 寶物, 별건곤’, 1929년 6월호, 46~47쪽)

 

 

名探偵과 新聞記者 競爭記

死刑囚의 奇怪한 瞬間
東亞日報 金枓白

三千里社에서 모처럼 나의게 과거의 功名談을 자항할 만한 기회를 주엇다. 『어려운 사건을 맛나 남보담 뛰어난 활동을 하든 경험담을 한 개 쓰라』고―突發한 대사건을 맛나 애쓰고 쪼차 다니든 이야기 쯤은 사회부 기자로는 누구에게나 수두룩 할 것이다. 그날 그날 『뉴-쓰』를 보도하기에도 힘이 부족한 주제에 묵은 기억을 뒤저기면서까지 『나는 과거에 이러한 활동을 하엿소』하고 새삼스럽게 내어 노키란 쑥스럽기 짝이 업는 일이다.

사건에 따라서는 보통 사람이 좀처럼 상상하기도 어려운 難境을 당하는 때도 업지 안치마는 흔히 그것은 그 기자 자신의 滋味잇는 추억꺼리에 지나지 못한다. 그럼으로 나의게는 이 기회를 이용하야 나를 광고할 만한 거리도 업고 그러할 욕심조차 염치도 업다. 차라리 나의 머리속에는 영구히 의문으로 남어 잇스면서도 신문에 완전히 발표하지 못하엿든 괴상한 사건 한 가지를 독자 압헤 내어 놋켓다.

東亞日報가 제 2차로 無期停刊을 당하든 때이니 지금으로부터 6년 전―1925년 3월 경이리라. 당시 재판소를 맛타 출입하든 나는 覆審法院 書記課에서 『사형논고를 들은 피고가 피를 토하고 昏倒하엿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엇다. 그 법정으로 달려가 본즉 문제의 피고는 여러 사람의 應急手當을 바더 이러나 안젓는데 햇쓱한 얼골에도 경악과 공포에 얼이 빠진 듯한 눈이 따로 나도는 것과 반쯤 열린 입(口)에서 샛빨간 피가 좌우로 흘러 나린 것이 얼른 눈에 띄웟다. 그는 5尺 남짓한 여윈 몸에 푸른 未決囚 옷을 입고 뼈만 난은 수족을 싸시나무 가치 떨고 잇는 27, 8세의 남자엿스니 살인강도란 무서운 죄명으로 이 법정에 섯든 것이다. 『증거가 확연하니 죽여야 하겟다』고 주장하는 검사와 자기를 죽이겟다는 법의 『손』이 몸에 닷키도 전에 피를 토하고 너머진 이 피고를 압혜 놋코 滿廷한 사람들은 한참 동안 정신을 일흔 것 가티 멍 – 하엿슬 뿐이엇다. 직업적 냉정으로 도라간 재판장이 言渡期日을 말하고 廢廷을 선언하자 『용수』를 쓸 때에 피고의 눈에서 발하는 이상한 광채! 법관도 보고 변호사도 보앗는지? 나는 그것을 보고 전신에 쏘름이 끼침을 늣기엇다.

天山서 牙山으로 통하는 길거리에서 30 內外되는 남자의 시체 한 개가 발견되엇다. 검증한 결과 그의 입에서는 피가 나와 잇고 목에는 손으로 눌른 듯한 말로 밝은 듯한 흔적이 잇고 허리에 찬 주머니 끈이 풀리어 잇고 그 겨테 송편 한 게가 노히어 잇는 것이 경찰의 눈에 띄엇다. 남은 송편 안에는 무서운 독약이 싸이어 잇는 것까지 본 형사들은 이 죽음에 의심이 생겻다. 목에 잇는 상처와 주머니 끈이 풀린 것으로 보아서는 타살이 분명한데 독약 싼 송편을<69> 자기 손으로 먹은 것이 해부한 결과로 판명되엇스니 자살이 아닌지도 모르겟다 하엿다.

(…)

林圭學이가 목이 말라서 물을 떠오라고 소리를 치기에 그릇이 업서서 자기가 신엇든 고무신에 물을 떠오니 발서 絶命이 되어 잇섯다. 아모러한 죄는 업스나 자기가 가젓든 독약으로 사람이 죽고 보니 떨이고 겁이 나서 그대로 도망을 하다가 수중에 돈 한푼 업는 것이 생각 나서 다시 林圭學의 시체가 누어잇는 곳에 가서 멀니가는 路資나 하려고 그 돈을 내어갓다.

는 것이 피고의 주장이다. 그러나 검사측으로 보면 경찰서에서 이미 전후 罪狀을 자백한 피고가 이러한 변명을 한다고 何等 경청할 가치가 업섯슬 것이다. 더구나 이 범죄에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어슬 것 가튼<70> 현금 6원 문제를 피고도 시인치 안는가? 자기가 형으로 섬기든 사람을 돈 6원에 눈이 어두어 독살하고 시체의 처치도 아니하고 간 피고에게 것침 업시 사형논고를 하엿슬 것이다.

그러나 피고측으로는 또한 말이 업지 아니하다. 경찰에서는 고문에 견듸지 못하야 뭇는 대로 그러타고 하엿슬 뿐이다. 산골에 자라나 여호나 잡어서 살든 무식한 피고로 아모도 업는 곳에서 자기 藥에 사람이 죽고 보니 전후를 생각할 여지도 업시 겁이 낫다. 의심은 꼭 밧게 된 터에 다라나려니 路資가 업서서 가지고 간 것이다. 義兄의 橫死도 억울커늘 살인죄로 사형이라니? 원통하고 긔가 막혀 피를 뿜고 너머진 것이나 아닐가?

이 의문의 살인사건은 기록에 나타난 내용 중 의심하는 점만 신문에 소개가 되다가 東亞日報가 停刊이 되는 바람에 끗을 막지 못하고 말앗다. 『문제의 독약 「싼치가루」는 냄새가 몹시 나는 약으로 林圭學이가 만약 자살할 의사가 업섯다 하면 먹엇슬 리가 업섯스리라』고 변호사의 재심청구까지 잇섯스면 재판소측에서는 『술 취한 사람이라 여간 냄새 가튼 것은 몰으고 먹을 수가 잇슬 것이랴』 하고 모든 증거가 너무 昭然타 하야 畢竟 언도는 사형으로 되엇다. 상고까지 하엿스나 소용이 업섯다. 그가 집행을 당할 때 입회햇든 某 書記의 말을 들르면 그는 최후까지 범죄를 부인하엿다 한다.

『사람을 이러케 죽이는 법도 잇소』 하고 사형대에 올라섯다 하니 그의 이 최후의 말과 법정에서 끌려갈 때 發하든 그 이상한 眼光과 함께 나의 머릿속에는 영원한 의문이 남어 잇다. 지금은 발서 사형대의 이슬도 살어진 그의 일이나마 하도 괴상한 사건이어서 때때로 생각날 때가 만타.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가며 이에라도 소개를 하고래야 견딀 것 갓태서 귀중한 지면을 빌린 것이다.(完) 

 
 (김두백, ‘名探偵과 新聞記者 競爭記’, 삼천리, 1931년 10월호, 69~70쪽)

 

 

『피해자(被害者)는 세상(世上)을 비관(悲觀)하고 독병(毒餠)을 먹고 자살(自殺)하엿소』

피고로부터 재판댱에 밧친 변명서

경찰취조에는 자백한 사실이 잇다

복심(覆審)에서 심리중(審理中)인 의문(疑問)의 살인강도사건(殺人强盜事件)

강도살인사건(强盜殺人事件)의 피고 최암이(崔岩伊)는 그가 일심공판에붓터 잇슬때에 공주디방법원댱(公州地方法院長)에게 진정서를 뎨출하야 자긔의 무죄함을 주장한 것이 잇섯스나 그것은 뒤로 밀고 위선 경성복심법원에서 말광(末廣)재판댱의 심문에 대한 그의 변명의 요령을 이에 긔록한다. 피고 최암이는 작년 삼월십이일에 자긔의 절친한 친구이며 겸하야 자긔가 결의(結誼)를 하야 의형(義兄)으로 공경하는 피해자인 강수길(姜秀吉)이가 자긔의 집으로 차저온 것을 보고 어려운 사정을 말하는 동시에 돈 이원을 꾸어주든지 백미(白米) 닷되를 사주든지 하라고 청구한 일이 잇다는 사실만은 시인을 한 후 자긔의 이 청구에 대하야  강수길은『나도 우리 매부(妹夫) 김서방을 차자보고 돈이나 얼마간 꾸어쓸가 하엿더니 그는 돈이 업다고 거절을 하니 대톄 세상인심이 이럴 도리가 어듸 잇는가』하며 세상을 비관한 후『맛츰 나에게 돈이 업슨즉 나를 따라오면 돈이나 쌀을 구하여 주겟다』고 말을 함으로 최암이는 강수길을 따라나서면서 자긔집 안방 텬정(天井)에 감추어 두엇든 문뎨의 독약(독촉산)을 가지고 나섯다 한다. 두 사람이 얼마동안 가다가 진천군 덕산면 한천리(鎭川郡德山面閑川里)장터 리수복(李壽福)의 술집에 이르러 두 사람이 술을 먹은후 떡 다섯개를 싸가지고 그중 두개에 독약(독촉산)을 그 자리에서 강수길도 보는데 너흔후 다시 그곳을 떠나 얼마동안 가다가 음성군 맹동면 통동리(陰城郡孟洞面通洞里)와 내중리(內中里)에 통하는 길 교차뎜에 이르러 잠간 다리를 쉬고저하야 두 사람이 안잣든바 피고 최암이는 술이 취하야 잠이 들엇다가 얼마뒤에 이러나본즉 강수길이가 자긔의 가젓든 떡을 먹고 신음하면서『나는 세상에서 살기 실혀서 자네가 가젓든 떡을 먹고 죽어버리겟스니 자네는 조곰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나의 주머니에 돈 륙원이 드러잇스니 이것으로 자네 부모를 봉양하게』하는 유언을 함으로 그는 즉시 부근에 달려가서 물을 물어다가 먹엿스나 효험을 엇지 못하고 부근 동리에 달려가서『나와 가치가든 사람이 방금 죽어가니 구원하여 달라』고 말을 하고 다시 피해자 강수길이 가누어 잇는 곳까지 가본즉 그때는 발서 강수길이가 죽어 버렷더라』는 의미로 변명을 한다. 원톄 사건이 아모도 보지못하는 틈에 이러낫고 겸하야 그때 광경을 아는 사람중 강수길은 발서 말못하는 황천객을 지엇슴으로 피고 최암이의 입을 빌지 안으면 이 사건의 정톄를 알기가 어려움으로 강수길의 죽음이 자살(自殺)인가 타살(他殺)인가하는 문뎨는 완여히 수수격기갓치 되여잇다. 이에 경찰의 심문조서에는 여러가지로 피고 최암이가 강수길을 죽엿다는 증거가 잇고 피고 최암이는 그 증거를 부인하며 자긔는 자긔의 은인인 강수길이가 자살코저 하는 것을 살리랴고 무한히 애를 쓴 것과 자긔가 강수길에게 약을 먹이지 아니하엿다는 증거를 그 독약의 성질에 빗처서 설명코저 하엿다. 경찰의 심문조서에는 무슨 증거가 잇스며 강수길의 설명에는 엇더한 리유가 잇슬는지―(계속)

(동아일보 1926년 3월 5일자 2면)

 

 

태풍(颱風)이 만재(滿載)한 해수(海水)를… 재지일대(災地一帶)에 난살(亂撒)

염분(鹽分)의 급습(急襲)으로 농작전멸(農作全滅)

설상가상(雪上加霜)의 우일재해(又一災害)

욕지도(欲知島)에서 특파원(特派員) 김두백 발(金枓白發)

통영군(統營郡) 원양면(遠梁面) 욕지도(欲知島)의 폭풍의 손해는 대략 8(八)만원 가량으로  8()일 아침까지에 판명된 피해를 보면

人命(인명) 사망(死亡) 49명(四十九名) 전답피해(田畓被害) 2만원(二萬圓) 선박피해(船舶被害) 2만원(二萬圓) 주가어구기타(住家漁具其他) 4만원(四萬圓) 계(計) 8만원(八萬圓)으로 이재민들은 농촌과 달러 그날그날 해초라도 따서 연명을 하야 당장에는 별로 큰 염려가 없으나 폭풍이 바다물을 불어 올려 연산 3(三)만원 이상의 특산 고구마(마령서(馬鈴薯))와 벼기타 농작물이 7(七)활 이상 못쓰게 되고 연산 50(五十)만원이나 된다고 자랑하든 해산물도 바다 가운데에 잇는 해초가 대부분 폭풍중 격랑에 떠나려 갓으므로 어류(魚類)가 서식할 곳을 잃어 자꾸 다라나서 잘 잡히지 않으므로 도내 농어부의 생활이 금후 크게 타격이 잇으리라 한다.

그리고 3(三)일과 4(四)일 밤 폭풍은 각각으로 그 방향(方向)이 동서남북으로 바꾸이어 해소(海嘯)를 일으키엇으므로 바다물이 공중에 올라가 소곰물비로 변하야 나려 뿌리엇든 까닭에 곡식은 물론 한창 제철을 만나 무성하든 모든 식물이 전부 말라서 때는 화씨 구십오륙(九十五六)도를 오르나리는 여름날이언마는 산천초목은 모다 누른빛으로 변하야 완연한 가한 풍경을 연출하고 잇는 기현상을 이루어잇다.

황폐(荒廢)한 재지(災地)… 역방(歷訪)하며 위문(慰問)

본사 위문반이 집집차자 위문

욕지도(欲知島) 주민(住民)의 감격(感激)

본사위문반 세 사람은 7(七)일 오후에 욕지도에 도착하야 재해지를 실지로 조사하고 이재민을 만나는대로 간곡한 위문의 말을 전한후 원량면장 서태민(徐太민)씨를 방문하고 불의에 내습한 천재로 면내에 다수한 인명피해가 잇고 전답어구 등에 대한 손해가 다대한것에 대하야 동정을 표한다는 뜻을 말하엿다.

씨는 동아일보사의 간곡한 위문을 비상히 감격한다고 답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엿다.

산간사람들과 달라 무엇이나 할일이 잇으므로 이재민은 많다하더라도 그다지 참혹지는 않읍니다마는 죽은 사람들 중 당장 걱정인 사람이 열가족 가량 잇는 것이 걱정입니다.

(동아일보 1933년 8월 10일자 석간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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