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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동아일보 사람들- 김동진

Posted by 신이 On 10월 - 19 - 2018

 

김동진(金東進, 1902~1950 납북)은 평양출신으로 평양에서 광성학교를 다니다 러시아로 이주해 블라디보스토크 알렉산드로프스코예 국립중학원과 극동대학 일어과에서 공부했다. 1923년 귀국해 1924년 1월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했고 1933년 5월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사회부 기자와 운동기자로 이름을 날렸다. 1940년 9월 매일신보에 입사해 발행인까지 역임했으나 이 때문에 해방후 반민특위에 체포돼 기소됐다. 6.25 전쟁 중 납북됐다.

김동진(金東進) (평양, 1902~ ) ▲ 1924. 1 기자(사회부), 1933. 5 퇴사.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노농노국(勞農露國)의 언론계(言論界)- 그 연혁(沿革)과 현상(現狀) = 김동진(金東進)

노농노서아(勞農露西亞)의 창립(創立)이 이미 7주년(七週年)이다 혁명후(革命後)의 노서아(露西亞)의 정치(政治) 경제급사회제도(經濟及社會制度)의 사정(事情)은 세상(世上)에 보도(報道)되는 언론기관(言論機關)으로 이미 기진수(其眞髓)를 알앗스려니와 시대(時代)의 선도(先導)이며 인간사회(人間社會)의 반영(反映)인 언론계(言論界)는 혁명이래(革命爾來)에 엇더한경로(徑路)로 엇더케 변천(變遷)하여 왓는지 한번 알아 볼 일이다.

노서아(露西亞)의 언론계(言論界)는 기시대(其時代)의 정치제도(政治制度)에 따라서 이리저리변(變)하야 엇던때는 자기(自己)의 중대(重大)한 사명(使命)을 엄연(儼然)히 직힌 때도 업지 안엇지만은 대개(大槪) 기시대(其時代)의 정권(政權)에 억압(抑壓)되야 자기사명(自己使命)을 충실(充實)히 행(行)하지 못하고 다못 한 선전기관(宣傳機關)에 지나지 못하엿섯다.

노농정부(勞農政府) 수립전(樹立前)까지는 신문(新聞)의 전성시기(全盛時期)라 할만하야 전국각도회(全國各都會)에 신문(新聞)이 발간(發刊)되지 안는 곳이 업스며 백만부이상(百萬部以上)을 발간(發刊)하는 세계적(世界的) 대신문(大新聞)도 한두곳이 안이엇섯다. 1917년(千九百十七年)『레-닌』일파(一派)가 정권(政權)을 획득(獲得)하자 분분(紛々)한 민심(民心)을 수습(收拾)하며 반대당(反對黨)의 반란(叛亂)을 두려워하야 극단(極端)의 무력(武力)으로 자파이외(自派以外)의 결사(結社)를 박멸(撲滅)하고 노농정부(勞農政府)를 찬성(贊成))치 안는 언론기관(言論機關)을 일제(一齊)히 폐쇄(閉鎖)하야 혁명후(革命後) 기개월(幾個月)은 암흑세계(暗黑世界)를 일운 감(感)이 업지안엇다.

문맹(文盲)이 아닌 노서아인(露西亞人)의 신문(新聞)을 즐겨함은 도저(到底)히 우리의 상상(想像)할바가 안이다. 그러나 그때의 그들에게는 신문(新聞)을 구(求)함보다도 자기(自己)의 목숨을 구(求)할 신세(身勢)이엇다. 노농정부(勞農政府)는 민심(民心)의 통일(統一)을 위(爲)하야 인민(人民)의 갈구(渴求)하는 언론기관(言論機關)의 설립(設立)이 급(急)함을 깨닷고 이삼(二三)의 기관신문(機關新聞)을 발간(發刊)하엿다. 그러나 이것은 신문(新聞)이라함보다도  찰아리『소웻트』정부(政府)의 안내보(案內報)요 혁명(革命)을 옹호(擁護)하는『푸로파간다』적(的) 교과서(敎科書)라 함이 적합(適合)한 명칭(名稱)이라 할만하엿다. 기기사(其記事)는  무슨 문학적(文學的) 취미(趣味)가 잇섯슴도 안이요 실제생활(實際生活)에 이익(利益)을 주는것도 안이엇다.

그러나 그때 사람들은 이  가치(價値)업는 것이나마 환영(歡迎)하야  닑을수 밧게 업는 처지(處地)이엇다. 순관보적(純官報的) 신문(新聞) 외에도 상당(相當)한 신문(新聞)이 아주 업섯슴은 안이로되 당시(當時) 노은(勞銀)의 폭등(暴騰)과 국제관계(國際關係)의 두절(杜絶)로 지류(紙類)의 결핍(缺乏)이 심(甚)한데다 관헌(官憲)의 간섭(干涉)이 엄(嚴)하야 거개(擧皆) 조출석몰(朝出夕沒)에 비운(悲運)에 빠지고 여전(如前)히 기관보(機關報)만의 독점적(獨占的) 천하(天下)이엇다.

노농정부(勞農政府)도 기당시(其當時) 인간생활(人間生活)의 실이익(實利益)을 주는 민중(民衆)의 희망(希望)하는 언론(言論)의 출현(出現)을 희망(希望)치 안은 것은 안이엇다. 그러나민중(民衆)의 이익(利益)보다 실제생활(實際生活)의 향상(向上)보다도 자기(自己)의 주의(主義)가 최종(最重) 하엿스며 기기반(其基盤)의 확립(確立)이 최급무(最急務) 이엇든 혁명완성(革命完成)의 과도기(過渡期)이엇다. 이것이 혁명후(革命後) 언론계(言論界)의 제1기(第一期)이다.

기후(其後) 노농정부(勞農政府)가 근(僅)히 소강(小康)을 득(得)하야 서서(徐々)히 건설시기(建設時期)에 입(入)할 때에 의전(宜傳)으로만 유일(唯一)한 본능(本能)을 삼든 기관보(機關報)의 색채(色彩)가 점점(漸々) 변(變)하야 농촌생활(農村生活)의 상황(狀況)도 얼마큼 기재(記載)하게 되엿다. 그러나 이것도 정부시설(政府施設)을 과장(誇張)하는 역시(亦是) 선전적기사(宣傳的記事)에 불과(不過)하고 도리혀 제1기시대(第一期時代)에 비(比)하야 공산주의(共産主義) 선전(宣傳) 한가지가 더 늘어 완전(完全)한『선전(宣傳)의 무기(武器)』란 칭호(稱號)를 밧게되야 주의(主義)에 불니지안는-온화(溫和)한 사상(思想)을 품은『인텰리겐치야』계급(階級)의 비상(非常)한 반감(反感)을 산다. 이것이 건설시기(建設時期)에 잇든 제2기(第二期)의 대략(大略)이다.

근년(近年)에 지(至)하야 노농정부(勞農政府)의 무력주의(武力主義)가 점점(漸々) 완화(緩和)하야 평화정책(平和政策)을 쓰게 되엿스며 극단(極端)의 공산적(共産的) 색채(色彩)가 얼마큼분홍(粉紅)빗을 띄게야 사상(思想)보다도 경제회복(經濟恢復)에 역(力)을 주(注)하는 등(等) 왕시(往時)의 면목(面目)이 일신(一新)하게 되얏다. 이에따라 언론(言論)의 자유(自由)도 관대(寬大)히 되야 혁명전(革命前)의 상태(狀態)를 복구(復舊)하게 되엿스니 각신문(各新聞)은 지금(只今)껏의 기계적(機械的) 활동(活動)이 변(變)하야 염미(艶美)한 문학적(文學的) 필치(筆致)와 독특(獨特)한 기사(記事)로 각 방면(各方面)으로 사회생활(社會生活)에 공헌(貢獻)하는바이 다(多)하야 신문(新聞)의 가치(價値)를 점점(漸々) 발휘(發揮)하게 되엿다-이것이 즉(卽) 근자(近者)의 제3기(第三期)이다.

금일(今日)의 노서아신문(露西亞新聞)은 완전(完全)한 발달(發達)을 수(遂)하엿다 할 수는 업스나 발간(發刊)되는 신문수(新聞數)가 점점(漸々) 늘어 인구(人口)가 오륙만(五六萬)에 불과(不過)하는 소도회(小都會)에도 보통(普通) 삼사종(三四種)의 신문(新聞)이 잇다한다. 기중(其中)에도 막사과(莫斯科)에서 발행(發行)되는『이즈웨스치아』나『푸라우다』등(等)은 근백만(近百萬)의 독자(讀者)가 유(有)한 대신문(大新聞)이다

노동계급(勞農階級)의 실제생활(實際生活)의 지도자(指導者)라는 영칭(榮稱)을 밧는『푸라우다』지(紙)의 혁명후(革命後) 처음 생긴 정부비평란(政府批評欄) 시조란(詩藻欄) 급단평(及短評) 등(等)은 엄정(嚴正)한 태도(態度)와 공정(公正)한 논조(論調)로 정치(政治)의 선악(善惡)을 평(評)하며 민중생활(民衆生活)의 실정(實情)을 논(論)하야 선도자(先導者)란 책임(責任)에 억으러짐이 업섯다. 이것이 혁명후(革命後) 언론계(言論界)에 일대기원(一大紀元)이라고 한다.

관민간(官民間)에 절대(絶大)한 세력(勢力)을 잡은 언론기관(言論機關)의 문구(文句)가 아직일반노농계급(一般勞農階級)의 난해(難解)할 점(点)이 잇다하야 전노집행위원회(全露執行委員會)에서는 진정(眞正)한 민중문학(民衆文學)을 보급(普及)하기를 전국언론계(全國言論界)에 권고(勸告)하얏다 하며 각 언론기관(各言論機關)도 진개(眞個)의 민중언론(民衆言論)을 창설(創設)하기에 노력(努力)하는 중(中)이라 한다.

노농정부(露農政府)가 근일(近日)에 언론(言論)을 존중(尊重)하게 되엿슴은 민중정치(民衆政治)를 표방(標榜)하며 절대자유(絶大自由)를 창도(唱道)하는 국가(國家)의 당연(當然)한바 이지만 아직 언론(言論)의 검열(檢閱)이 상당(相當)히 엄중(嚴重)하야 노농정부(勞農政府)에 불리(不利)한 기사(記事)는 전연(全然) 기재(記載)치 못하는 처지(處地)에 잇스니 언론(言論)의 절대자유(絶大自由)라 함에는 아직 시간상조(時間尙早)의 감(感)이 엄지안으며 노농정치(勞農政治)의 선전적(宣傳的) 경향(傾向)이 업지 아니하다.(끗)

(김동진, 동아일보 1923년 12월 3일자 4면)

 

 

▲ 1902년 9월 평양서 출생
▲ 사망 연월일 미상
▲ 평양 광성학교 재학중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에서 알렉산드로프스코예 국립중학원과 극동대학 일어과 졸업
▲ 1924년 1월 동아일보 정치부 · 사회부 · 체육부 기자
▲ 1933년 5월 조선일보 동경지국장
▲ 1940년 9월 매일신보 총무국장 · 전무, 동년 11월 상무취체역
▲ 1943년 3월 同 전무 겸 발행인

□ 일제하 입지전적 행적 남겨……

김동진. 그는 평기자로 출발해 신문사의 전무이사를 거쳐 발행인 까지를 역임했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반면 그가 기자로서 활동한 시기가 일제치하였고 그중에서도 가가 입신양명한 국면에 일제말기였다는 점 때문에 김동진의 출세는 썩 개운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김동진의 개인적 출세와, 그가 속했던 사회상황의 최악의 수렁텅이는 ‘화해로운 쌍곡선’을 긋기 보다는 그 정반대였다. 편집인협회가 펴낸 언론인 인명사전에 보면 화려한 그의 약력 뒤끝에 사망연대는 빈칸으로 남겨두고 있는데, 해방직후 김동진이 여하간에 공적이 없었고 또 그것을 확인할만 한 계제가 아니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현재 그에 관한 몇몇 기록이 전혀 없지는 않아 평기자로 활동당시의 역량과 사람됨을 추측은 그리 어렵지않다. 반면 1940년이후 매일신문의 상무, 전무와 발행인 역임등 당시 ‘경영자 김동진’ 역시 재고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필름의 네거티브(음화)를 뒤집어 보듯이 당시 매일신보의 경영상태를 통해 그의 약력을 유추해 보는 일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선 다행스럽게도 서른두살 젊은 나이 김동진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어 곰곰이 뜯어볼 가치가 있다. 34년 <신동아> 3월호 <운동(스포츠) 기자 열전(列傳)> 속에 실린 요즘의 여권사진 크기만한 이 사진은 그가 상당한 호남야였음을 보여준다. 숱이 많은 머리칼을 하이칼라식으로 가리마를 타 빗어넘긴 뒤약간 비스듬한 눈초리로 날카롭게 찢긴 논매 등이 그런 느낌을 준다. 하관이 빨라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샤프하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신동아에 실린 기록에 따르면, 그는 1902년 9월 평양 태생이다. 그곳에서 평양제2공보를 마친뒤 광성학교를 다니던 중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현재의 대학교육 기관인 알렉산드로프스코예 국립중학원과 블라디보스톡 극동대학 일어과를 각각 나왔다. 따라서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그의 기자생활은 24년 동아일보서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주로 정치부 · 사회 · 체육부에 근무하면서 총독부 출입, 부청 출입, 이왕직 출입기자 등을 했다. 33년 5월 동아일보를 나왔던 그는 조선일보에 입사, 동경지국장, 선만척식회사 참사를 거쳤다.
동아, 조선 양 신문의 강제폐간시 서춘, 홍종인, 성인기 등 동료 기자들과 함께 매일신보로 옮긴(40년 9월) 김동진은 여기에서 <경영자 김동진>으로 변신, 승승장구를 계속했다. 그해 9월 총무국장, 11월 상무, 43년 3월 전무이사 겸 발행인 역임 등이 그의 약력이다.

□ 미문(美文) 쓴 스포츠기자, 동아지면 장식

민완기자로서 김동진의 모습은 크게 평가받을만한 것이었다. <신동아>에 실린 기사는 <운동(스포츠)기사에 있어서 미문(美文)을 나열하는데 있어서는 물론이요, 4~5년간 그 활동이 당대 동아일보의 지면을 찬란하게 장식한 것으로 족히 군(君)의 공적을 엿볼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군은 기자단 야구팀의 명포수였으며, 또 동아일보사 팀의 주장으로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진두에 나서서 활약했다>
<신동아>의 기록중 ‘운동기자단’이라는 용어가 눈에 띈다. 친목과 정보교환을 위한 기자단은 24년 기존 동아-조선에 이어 시대일보가 창간되면서 출입처 취재분야별로 9여개가 생겼다. 31년 <삼천리>지 11월호에 실린 9개 기자단중 김동진의 이름은 총독부, 창덕궁, 운동기자단 등 3번이나 나온다. 김을한의 경우는 무려 4번 나오니 당시 기자 한명이 여러개의 출입처를 동시에 담당했다는 반증이고, 또 그 해당기자는 그만큼 유능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알만한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고 9개 기자단 명단을 훑어보는 일은 흥미롭다.

△ 북악구락부(총독부 기자단) = 국기열, 김동진, 이선근, 박윤석, 김형원, 홍종인, 고영한, 김을한
△ 경기구락부(경기도청 기자단) = 임봉순, 김형식, 김을한
△ 광화문구락부(체신국 기자단) = 최용환, 홍종인, 이태운
△ 이화구락부(창덕궁 기자단) = 김동진, 정인익
△ 사법기자단(경성지방법원 기자단) = 박면, 양재하, 유도순
△ 정부기자단(서울시청기자단) = 김형식, 최용환, 이춘득
△ 철도국기자단 = 신경순, 박윤석, 김을한, 이길용
△ 경제기자단(은행·회사·시장 등) = 신태익, 주윤, 윤기로
△ 운동기자단 = 이길용, 김을한, 이원용, 김동진

이중 27년 8월 27일자로 결성됐던 운동기자단은 다른 기자단과 또 달리 기자이면서도 체육활동을 겸하는 독특한 위상이었다. 예를 들어 김동철과 이원용은 조선체육회의 산파역이기도 했고 발기인 또는 이사로 활약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김동진의 기자역량이 드러난다. 말이 체육 전문기자이자 디테일한 경기상황에 대한 묘사나 용어가 개발되지 못한 20년대 상황에서 스포츠기자는 평면적인 스코어 보도에 살을 약산 붙인 성격의 것이었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 김동철의 경우 체육인으로서의 사회활동과 달리 정작 기사는 형편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동아>에 실린 그에 대한 설명대목은 차라리 웃음이 나온다. <당시 그가 취급한 기사는 주로 축구에 자신이 있었는데 한번 대회기사를 쓰면 거의 반페이지 이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스코어도 모르고 기술에 관한 술어도 잘 몰라서 말끝마다 ‘능방선공(能防善功)’이란 문자투성이었다. 이리하여 어떻게 많이 썼던지 공장의 활자가 모자란 일도 있고, 심지어는 교정보는 기자가 “김선생은 능방선공이라는 문자밖에는 모르오?”하고 농담을 문선공으로부터 받은 일이 많다고 했다>
선배 김동철의 경우와 달리 김동진이 <미문 나열에는 물론이요, 4~5년동안 그 활약이 당대 동아일보 지면을 찬란하게 장식한 것>은 발군의 역량으로 보인다. 각부처 출입과, 동아일보 사퇴직후 조선일보에서 동경지국장 등을 담당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또 매일신보에서 경여인으로서 출세가도를 달렸던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44년도 매일신보 간부진 명단(서울신문社史 p.56)에 따르면 사장 이성근 외에 전무가 김동진을 포함해 2명이었다. 나머지 한명은 총무부장을 겸임한 오노(小野)라는 일본인이 있다. 따라서 김동진 운신의 폭은 상대적으로 좁았음이 드러난다. 당시 매일신보 간부는 겉으로는 한국인들이 상당부분 포진해 있었지만 경리부장, 후생부장, 교열부장 등은 일본인으로 배치하던 시절이었다. 일본인 실세 전무 밑에 김동진의 역량발휘가 얼마나 가능했었는지도 다소 의문이다. ‘입지전적 기자’ 김동진의 경영인으로서의 행적은 뒤끝이 역시 씁쓸하단 확인이다. 나라주권을 빼앗겼던 시절에 신문기자로서의 영광은 부역(附逆)으로 둔갑하는 패러독스인 셈이다.

 ※ 참고자료 : <신동아> 1934년 3월호 <운동기자列傳>, <삼천리> 1931년 7월호.

(조우석 전 서울신문 사사편찬담당, ‘일제하 입지전적 행적 남겨’, 韓國言論人物史話-8.15後篇(下), 1992, 231~235쪽)

 

金東進(김동진·48)은 일제시대 매일신보 전무를 지냈던 사람으로 9월10일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녹촌리 321에서 내무서원에게 납북되었다. 평양출생으로 어려서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자라 러시아語에 능통했다.

 1924년 1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정치부와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다가 1933년 5월 퇴사하여 조선일보 東京지국장을 지냈고, 1940년 9월에는 매일신보로 옮겨 총무국장, 상무를 거쳐 1943년 3월에는 전무 겸 발행인이 되어 광복될 때까지 재임하였다. 1949년 2월에는 반민특위에 체포된 적도 있었는데 되었다가 이듬해 5월 31일에 보석으로 출감하였는데 납북당한 것이다.

(정진석, 6·25 납북자 명단에서 찾아낸 200여 언론인 공개, 월간조선, 2002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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