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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동아일보 사람들- 권오기

Posted by 신이 On 10월 - 18 - 2018

 

권오기(權五琦,1932~2011)는 경북 안동출신으로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56년 경향신문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한 뒤 1959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과 논설위원, 워싱턴 특파원을 지낸 뒤 동아방송 보도담당 부국장을 거쳐 동아일보 편집국장, 논설주간, 부사장을 지냈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는 동아일보 대표이사 사장으로 재직했다. 사외에서도 한국신문편집인협회장, 아시아신문재단 한국위원회위원장, 국제신문협회(IPI) 한국위원회 이사 등을 지내며 활발한 국내외 언론활동을 벌였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말부터 1998년까지는 23대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을 지냈고 이후 동아일보 부설 21세기평화재단 이사장과 성곡언론문화재단 이사 등을 역임했다. 호는 연곡(蓮谷).

권오기(權五琦) (안동, 1932~ ) ▲ 59. 9 기자(사회부, 정경부), 주일특파원, 정치부차장, 논설위원, 주미특파원, 수석해설위원, 방송국부국장(보도담당), 편집국장(현).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도쿄지국의 개설과 해외취재의 강화   1961년 8월 본보는 도쿄에 지국을 개설하였다. 1940년 일제의 강제폐간으로 본보의 도쿄지국은 자연히 폐쇄된 것으로 그로부터 21년만에 도쿄에 다시 동아일보의 깃발이 오른 것이다. 초대 지국장으로는 업무측의 김권동(金權同)이 취임하여 업무연락부터 시작하였고 63년 3월에 김세주(金世柱․광고부장)와 교체하였다.
1963년 7월 정경부의 권오기(權五琦)가 외신부로 전속 초대 주일특파원으로 부임하여 65년까지 근무하였는데, 본보는 해방 후 처음으로 상주특파원을 외국에 파견했던 것이다.

(동아일보사사 3권, 동아일보사, 1985)

 

권오기차장도   앞서 지적한 대로 공화당 안에 나돌던 괴문서인 ‘정보보고’에는 본사 정치부 권오기(權五琦)차장이 최(최영철-인용자 주)기자사건을 정치문제화하기 위해 야당과 언론계를 선동하고 있다는 것으로 조작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괴문서의 출처가 밝혀지지 않는 가운데 권오기가 7월 20일 밤 11시 45분에 그의 집(서울시 서대문구 녹번동 126-29) 앞에서 두 명의 괴한으로부터 몰매를 맞고 전치 10일의 상해를 입는 테러사건이 발생하였다. 최기자에 대한 테러도 그의 집 앞골목에서 이루어졌듯이 권에 대한 테러도 그러했고, 두 사람을 때린 범인의 인상착의도 비슷하였다. 한 명은 키가 크고, 또 한 명은 키가 작고 통통한 청년이었다.
이날 권오기는 친구와 함께 다동에서 술을 들고 귀가하여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 괴한 2명이 나타나 왼쪽 뒷목덜미를 강타 당하여 실신한 후 약 15미터 가량을 끌려가 다시 폭행을 당하고, 소지품 중에서 로렉스 팔목시계, 파카만년필, 현금 약1천원을 강탈 당했다.
이날 권차장이 폭행 당하는 현장을 목격한 이웃에 의하면 괴한은 2명으로 한 사람은 검은 옷을 입은 키 큰 괴한이며, 또 한 사람은 흰 윗도리를 입은 통통한 괴한이었다.
경찰당국은 최기자 테러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범인을 색출하겠다고 큰 소리만 쳤지, 아예 잡을 수 없는 정치테러범들이었다.
본보는 7월 22일자 사설에서 ‘작년 9월 어느날 하룻밤 사이에 변영권 편집국장대리 댁이 폭파 당하고, 조동화 방송국 제작과장이 습격받아 중상을 입는 불상사를 당하였으나 아직까지도 진범이 색출되지 않아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없는 형편이고, 이어 금년 4월에는 최영철 정치부기자가 역시 습격을 당한 채 아직까지도 사건은 미궁에 빠져 있던 중에, 또 다시 이번 권오기 정치부차장의 피습사건을 당하게 되고 보니, 실로 아연한 심정을 금하기 어렵다’고 지적하고 이어 ‘어찌하여 이런 류의 테러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진상이 파헤쳐지지 못하고 말았으며 더구나 어떤 경우에는 범인을 조작까지 하는 구차한 속임수로 호도하려 했느냐’고 힐난하였고, “어찌하여 ‘신문이나 정치인에 대한 테러만이 그렇게 중요하냐’라든가, ‘이런 사건의 책임을 고위층에까지 파급시킬 필요가 무엇이냐’라든가, 사건을 성의 있게 해결할 생각보다는 되도록 이것을 경시해서 유야무야의 결과가 되어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경향을 보여 왔느냐”고 반문하였다.
권오기에 대한 테러사건이 일어나자, 23일 국회 내무위원회에서 엄민영(嚴敏永)내무부장관은 빗발치는 질문공격에 ‘수삼일 내에 범인을 잡겠다’고 선언하고 범인체포에 10만원의 현상금까지 걸었다고 말했으나, 경찰은 단순한 노상강도로 상정하여 아마도 고의로 수고만 하였을 뿐, 전혀 수사진전이 있을 수 없었다. 이 사건이 나자 언론계 전체가 큰 충격을 받았으며 22일에 편협과 기협은 이례적인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여 ‘자유언론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고 경고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① 권오기차장 피습사건은 그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단순한 노상강도라고 하기에는 수긍하기 어려운 많은 의혹이 있는 사건이라고 본다.
  ② 작년 9월의 동아일보 변영권 편집국장댁의 폭파사건과 조동화 방송제작과장의 피습사건이 10개월이 경과한 현재까지 범인의 윤곽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고 이어 동사 정치부 최영철기자사건이 발생한 후 다시 권오기차장 피습사건이 빚어지는 등 연달아 현직 언론인에 대한 협박 테러 폭행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은 법치국가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또 자유로운 전체의 언론활동에 중대한 위협을 주는 행위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③ 이와 같은 언론인에 대한 잇달은 불법행위가 자행되는 공포분위기를 근본적으로 해소하지 않는다면 자유언론에 부하하는 사명을 다하기 어렵다는 점에 비추어 진범을 속히 색출하여 만천하에 그 진상을 밝히고 다시는 그와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정부당국의 책임 있는 조처를 촉구하면서 자유언론의 수호를 위한 단결된 우리의 결의를 천명한다.

최기자 테러사건과 권차장 테러사건의 사이인 6월 9일 밤 민중당의 박한상의원이 역시 괴한 2명에 피습되어 전치 5일간의 상처를 입었으며, 국회는 정치테러사건 진상조사위원회를 6월 22일에 구성하였으나, 공화당의 비협조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였다.
이렇듯 언론인과 정치인에 대한 잇달은 테러사건은 전혀 단서도 잡지 못한 채 영원한 수수께끼로 묻혀버렸다.

(동아일보사사 3권, 동아일보사, 1985)

 

1965년초부터 광복 20주년을 기념하여 권오기 본보 정치부차장의 사회로‘정계야화’제하의 특집프로를 방송하였는데, 정계의 기복에 따라 부침하는 명멸상을 그 당시의 주역들과 대담형식으로 꾸미었다. 자칫 모르고 지나칠지도 모르는 정계 이면의 비화들이 서슴없이 공개되어 한편으로 흥미를 자아냈고, 한편으로는 우리 근대사의 귀중한 사료를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윤보선 박순천(朴順天) 이범석 이재학(李在鶴) 김종필 등 30여명의 인사가 출연, 약 2년에 걸쳐 계속되었다.

(동아일보사사 3권, 동아일보사, 1985)

77년 7월 28일에 최호 이사 편집국장이 방송국장으로 옮기고 이동수 이사 방송국장은 회장실 상근으로 위촉되고 편집국장에는 권오기 방송보도담당부국장 겸 수석해설위원이 승진 임명됐다.

(동아일보사사 4권, 동아일보사, 1990)

 

권오기 주필 ‘고재욱언론상’수상
권오기 주필은 6월21일 아시아신문재단(PFA)이 수여하는 ‘고재욱 기념언론상’ 84년도 수상자로 선정됐다.
아시아신문재단은 84년도 수상자를 발표하면서 ‘권오기 주필이 자유언론 활동과 한국 언론인들의 지위 향상을 위해 일생의 대부분을 바친 공로로 이상을 수상하게 됐다’고 밝혔다.
아시아신문재단은 77년 6월22일 본재단 한국위원회 초대 회장이었던 본사 고재욱 전회장의 1주기를 맞아 그의 공적과 유덕을 기리기 위해 ‘고재욱 기념언론상’ 기금을 창설했으며, 권주필은 이 상의 여덟 번째 수상자가 됐다.

(동아일보사사 5권, 동아일보사, 1996)

 

조간화 단행과 권오기 사장 취임
창간 73주년을 맞은 93년 4월 1일, 동아일보는 창간기념호를 조간으로 발행함으로써 30년의 긴 석간시대와 작별하고 새 출발의 첫발을 내디뎠다.
김병관 사장의 신년사를 통한 조간화 천명으로 점화된 조간화 작업은 1월 8일 권오기 부사장을 본부장으로 한 조간화 추진본부 발족으로 본격화됐다. 이어 조간화 대비 종합홍보안 확정(1월 20일), 추진일정 확정(1월 25일), 조간화 대비 인쇄시설 운용안 확정(2월 4일), 사내 조간화 추진 설명회(2월 5, 6일), 광고주초청 조간화 계획 설명회(2월 24일), 이사회 조간화 결의(3월 5일), 조간화 관련 조직개편 및 예산안 확정(3월 13일), 주주총회에서 조간화 계획 보고(3월 22일), 전 공장 32면 인쇄체제 준비완료(3월 25일), 조간화 관련 노사협약 조인(3월 30일), 수도권을 위한 석간 종간호 발행(3월 31일)의 과정을 거쳐 드디어 4월 1일 조간화가 단행됐다. 거사적인 역량의 결집과 총력을 다한 준비가 이루어낸 결실이었다.

(…)

창간 73주년 기념식 및 권오기 사장 취임식은 4월 1일 오전 10시 충정로 사옥 18층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병관 회장은 신임 권오기 사장에게 동아일보 사기와 함께 동아일보의 사장(社章)인 ‘파사현정(破邪顯正)’의 뜻을 지닌 ‘사인검(四寅劍)’을 전달했다.
권오기 사장은 취임사를 통해 “오늘, 1993년 4월 1일은 해마다의 창간기념일, 그리고 몇 해마다의 사장 이취임일에 그치지 않고 동아일보의 역사에 남을 날이 되지 않을까, 얼마간 벅찬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다”고 말하고 “73년의 긴 역사를 통해 어쩌면 가장 무거운 주사위―30년이 넘는 긴 석간발행을 하직하고 조간으로 변신하는 커다란 주사위를 던진 아침에 우리 모두가 모였다”고 취임의 감회를 피력했다.
권 사장은 이어 “동아일보의 키를 성큼 더 키우기 위해 먼저 ‘자기에게 엄한 신문’임을 스스로 다짐하고 남이 이것을 믿게 되도록 해야 하며 ‘각론(各論)이 강한 신문’으로 독자의 참여를 환영하는 ‘열린 신문’을 지향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동아일보사사 6권, 동아일보사, 2005)

 

[이달의 얼굴] 동아일보 편집국장 권오기 씨

말과 글을 겸전한 드문 언론인
안보다 바깥세계에 풍부한 접촉경험도

언론인을 입으로 말하는 언론인과 글을 쓰는 언론인으로 나눈다면 권오기 제31대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입과 글을 兼全한 언론인이다. 현역 언론인으로서 신문과 방송을 왕복하는 것이 그리 흔한 예는 아니다.
신문에 있으면서도 마이크에 일찍부터 친근했고 방송에 있으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동아일보 57년사상, 좀더 직접적으로는 동아일보가 방송을 겸영한지 14년 동안에 신문 과 방송을 고루 경험한 편집국장을 처음 맞은 셈이다.
이런 그의 독특한 경험은 ‘對談言論’의 진경을 우리나라 언론에서 기대해 볼만하다. 방송에서의 오랜 회고대담, 월간 신동아에서의 연재인터뷰… 이것이 신문에서 편집국장 초기작품으로서의 스노베 주한일본대사와의 전면대담 기획으로 연결되는 맥을 짚을 수 있다.
언론인 권오기의 또다른 특징적 경험은 안보다 바깥세계에 연결되어 있다는데 있다. 외무부출신 기자, 주일·주미특파원, 미국무성 언론인 훈련계획과 니만연속기획 참여 그리고 IPI 사무국장의 현직에 이르기까지. 사회경험의 태반은 바깥 세계와의 접촉으로 이어져 있다.
그는 지성의 언론인으로 그리고 사고와 행동과 관리에 있어 이성과 합리성을 존중하는 품위 있는 언론인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바깥 세계와의 축적된 경험이 창조한 제2의 천성이랄까.
너무 사회학적 접근인지는 몰라도 그의 20대까지의 생장과는 매우 대조적인 데가 있다. 전형적 오지문화권이요 유교문화의 마지막 아성인 안동 출신하고도 또 권씨요 내유경제권의 상징인 대구의 중학교육, 국내권력지망생의 집단인 법과대학을 거친 20대까지의 내륙지향형과 언론인 생활에서의 해외지향형과의 조화 있는 통합이 하나의 ‘그릇’으로서의 인간 권오기의 강점일 것이다.
원리에 투철하되 그 원리에 반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순화시키며 불만에 인내하되 그 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큰 길을 확신하되 작은 과업에도 대범하지 않다. ‘내외’로 어려운 역사적 현실적 여건 아래 있는 우리나라 언론 그리고 동아일보가 새로운 혁신을 꾀하고자 한다면, 그같은 인격의 야전사령관을 맞은 것은 하나의 전기요 기대이다.
권국장의 언론인상을 정형화시킨 70년대 이전에 비하면 74년 귀국 이후에는 현저하게 말과 글을 줄였다. 그 ‘모양’(그가 가장 즐겨 쓰는 말이다)을 그려내게 되었다.
행동의 특징 몇가지. 바둑 포커 같은 실내경기(?)보다는 테니스 같은 옥외스포츠를 즐긴다. 플레이보다도 이론이 더 높다는 중평이다. 술을 즐기되 술을 즐기는 정도보다 말을 더 즐기는 편. <炫>

(‘이달의 얼굴- 동아일보 편집국장 권오기 씨’, 신문과방송, 1977년 9월호 통권 82호, 94쪽)

 

[招待席]  84년도 고재욱기념언론상수상  동아일보 권오기 주필

『이것 보시오. 그 賞이라는 것…. 나보고 벌서 언론계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소리 같기도 하고….』 아시아신문재단(PFA)의 올해 高在旭기념언론상 수상자로 선정된 權五琦寒 東亞日報 주필은 그러면서 『지난 일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고있지만 흘러 보낸 과거가 그저 부끄러울 뿐』이라고 自愧論을 폈다.

『새삼스러운 얘깁니다만 우리 언론은 지금 안팎으로 문제가 있어요. 과거 10~20년 동안 우리사회를 보면 量과 質면에서 엄청나게 부풀고 다양해졌어요. 특히 경제라든가 여성지위 같은 것은 눈에 띄게 뚜렷합니다. 그런데도 지금 언론에 기여하는 여성들의 비중은 어떻습니까. 경제담당 논설위원의 숫자만 해도 自由黨때 그대로예요. 오히려 언론은 그 가지수에 있어서 훨씬 줄어들었었어요. 가장 덜 발전 된 것이 政治와 言論이라고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언론 쪽이 더 심해요.
均衡있는 사회발전이야말로 先進社會로의 길이라고들하고 또 그것은 바로 언론이 리드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선진사회라면 多樣社會 아닙니까. 세상은 지금 總論의 시대에서 各論의 시대로 바뀌어가고 있는데 언론은 여전히 總論만 하면서 한가지 목소리를 뽑아내고 있으니 어떻게 우리가 그걸 리드합니까.  「균형 있는 선진사회』를 아무리 외쳐도 언론을 이렇게 後進인 채로 밀쳐두고는 될 일이 아닙니다. 』 

權주필은 『언젠가 이 문제는 반드시 시정이 돼야한다』고 쐐기를 박았다. 언론을 어느 쪽의 「후원자」가 아니며」「적」으로 도매금매기듯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된다고 했다. 언론은 그 자체로서의 고유한 역할이 있는 것이고 그것을 존중해줄 때 비로소 국가사회도 발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바둑을 둘때 모양으로 두는 사람과 細技에 능한 사람의 두 유형이 있다면 그는 「모양」쪽이다. 잔 가지보다는 큰 흐름을 더 중시하지만 동시에 전체의 모양을 위해서는 사소한 失着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均衡과 方向感覺의 철저한 신봉자다. 「모양이 안좋다』고 말할때면 어딘가 失着이 있음을 직감하는 것이고 무엇을 뚫어지게 응시(그의 습성중의 하나다) 할때면 자신의 논리에 균형을 가다듬는 순간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그의 이처럼 남다른 균형감각은 다양한 경험의 축적이 낳은 결과일 것이다.언론계에 몸 담아온 28년동안 그는 「붓」(논설위원 편집국장 주필)과 「마이크」(동아방송 보도담당 부국장 겸 수석해설위원 . 回顧對談 「政界夜話」)를 번갈아 잡거나、동시에 잡기도 했고 駐日 · 駐美 특파원 美 하버드대 「니만」 펠로우、IPI 韓國委 사무국장 등 경력이 말해주듯 그의 經驗의 태반은 바깥 세계와의 접촉으로 이루어져왔다.

『20년전 東京의 신문들은 석간 12, 조간 24面, 하루 36面씩을 내면서 올림픽을 맞으려하고 있습니다. 「well informed public」이야말로 민주사회의 기초이고 발전의 원동력 아닙니까. 얼마나 정확하고 좋은 정보를 얼마나 더 많이 갖고 있느냐가 민주시민의 척도라고 본다면 우리는 되도록 많은 것을 알려야만 합니다. 그 정도의 애정과 의식은 있어야지요. 정보의 독점은 옳지 않습니다. 「빅 브라더」가 옳다는 것은 옳고 틀렸다는 것은 틀렸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시대는 지났어요. 구름 위에서 꾸짖는 것은 소용이 없어요. 현실로 이어주어야만 합니다. 서울의 시민들이 동경이나 뉴욕의 시민들보다 덜 알고 있는 이상은 서울이 그들을 따라 잡기란 힘듭니다.』

(‘초대석- 84년도 고재욱기념언론상수상 동아일보 권오기 주필’, 신문과방송, 1984년 7월 통권 163호, 46쪽)

 

 

[추도사] 고고한 複眼의 선비 권오기

서로가 기자로서 아직 철도 들기 전, 우리는 함께 뛰었다. 무작정 앞서서 뛰어야만 직성이 풀렸던 시절인데도 그는 느긋하게 처신했다. 신문사라는 데는 뭐든 서둘러야 했고, 특히 정치부는 정치판을 닮았는지 안에서조차 편가르기를 좋아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는 애써 그런 분위기에서 초연했다. 말하자면 고고(孤高)했다.

(…)

그런 그를 동아일보가 동남아 취재경험을 쌓게 한 뒤 주일특파원으로 발령했을 때 일본은 한국보다 한참 앞서가고 있는 선진국이었다. 그는 일본에 부임하고서도 한참 동안 회사가 정한 체재비를 받지 않고 출장비로 생활비를 받았다. “상주 특파원에게 합당한 처우를 하지 않는 한 체재비를 받을 수 없다”고 그가 버텼기 때문이다. 그때의 가장 큰 쟁점은 체재비를 올리라거나 하는 따위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보다 선진국인 일본에서는 자동차 주차비가 만만찮게 드는데 특파원이 알아서 하라고 하면 주차비 몫만큼 도둑질하라는 것이나 같다”고 주차비라는 항목을 따로 체재비에 신설하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결국 주차비에 대해 회사가 내규를 정한 뒤에야 해결되기에 이르렀다. 많고 적고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꼼꼼하게 따지고, 입구가 어딘가, 출구는 어딘가를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의 생활철학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는 꼼꼼한 선비였다.

5·16세력 사전조직 참여 요청 거절

시기는 그보다 앞서지만 그는 5·16 직후 혁명주체가 비밀리에 정당 사전조직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주체세력의 부름을 받은 적이 있었다. 비밀결사처럼 움직이고 있던 사전조직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거절한 그에게 주체세력은 “당신이 끝내 협조를 거절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릴 수도 있다”고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그런 정도의 협박이면 떨려서 대꾸도 못할 텐데 그는 태연하게 어떻게 없앨 수 있느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혁명을 한 군인이오. 당신 하나쯤 없애는 거야 식은 죽 먹기라는 것만 각오하시오.”
그 군인의 살벌한 말을 듣고 그는 위협을 느끼기는커녕 크게 웃었다.
“그렇게 단순하니까 혁명을 했군. …나도 포병장교 출신이라는 것만 알아두시오!”
그는 그렇게 협박을 묵살하면서 군사혁명세력의 사전조직 준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협박은 당한 사람이 위협을 느낄 때 효과가 있는 법이다. 협박하는 앞에서 웃어 버린다면 그 협박은 쓸모없는 무용지물이 아닌가. 먼 뒷날 그가 편집인협회를 이끌 때, 기자들이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폭행당한 것을 강력하게, 그러나 슬기롭게 대처해서 당국자의 사과를 이끌어 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당한 폭행(1966. 7. 20.)은 피할 수 없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1966년 무렵부턴가 그가 동아방송에서 당대 명사들과 대담 프로그램을 진행했을 때 김종필 당시 공화당 의장과도 5·16 당시의 회고담을 나눈 적이 있다. 대담프로가 끝난 뒤 잡담자리에서 우스개 삼아 그때의 일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고 그는 생전에 말한 일이 있다.
그때만 해도 그가 기자, 언론인이 권력과 어떤 관계라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 들었을 때이긴 하지만, 요컨대 그는 기자가 권력을 향해 한눈을 파는 것을 큰 탈선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또한 권력이 언론을 친구로 삼지는 못할망정 그런 폭력으로 무릎을 꿇게 하는 건 권력은 물론 언론에도 불행한 실패라는 역사의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버릇이었다.

자신을 혹독하게 단련하는 데 성공

그는 일본에 이어 미국에서도 특파원 생활을 했고, 특히 하버드대학 니만 펠로로 수학한 흔치 않은 기회를 가진 행운아였다. 그런 기회에 그는 자신을 혹독하게 단련하는 데 성공했다. 유수한 서구 언론인이나 석학들과 직접 부딪쳐서 훈도를 받을 수 있었고 깊은 교우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한국을 멀리서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게 했고, 나아가 대표적인 코스모폴리탄이 되게 만들었다.
그는 퇴임한 뒤 2003년에 9개월 동안 일본 아사히신문 와카미야(若宮啓文) 논설주간과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조명하는 대담을 가진 일이 있다. 와카미야는 그보다 16세 연하의 후배인데도 아는 것, 말하는 것 어느 면에서도 뒤지지 않는 정력으로 젊은 후배기자를 이끌고 나갔다. 이 대담을 묶어서 ‘한국과 일본국’이라는 책으로 낸 뒤 와카미야는 후일담으로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1년 동안의 대담을 통해 권 사장의 정열과 에너지가 대단하다는 걸 실감했다. 종횡무진, 이야기가 끝도 없이 흘러서 어떻게 될 건지 몰랐었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국’이라는 저서는 그가 탁월한 코스모폴리탄임을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대담은 그의 다양한 독서량에서 생긴 해박한 역사관, 그 역사를 단순화하지 않고 수(收)와 방(放)이라는 지그재그 또는 순환의 논리로 파악하는 안목은 역사학자도 갖기 어려운 탁견이라고 할 만하다. 이 대담에서 그가 강조한바, 외국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나라의 풍경을 보라거나 “사람을 보고 그 나라를 보라” 등은 국제화시대에 귀담아야 들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

동아일보 조간발행 역사적 결단

그런 역정을 거쳐 그가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한 뒤에 겪은 가장 큰 어려움은 석간으로 내던 동아일보를 조간 발행으로 바꾸는, 거의 역사적인 결단이었다. 동아일보는 조·석간으로 발행하던 때 말고는 석간체제가 굳어져 있었다. 이것을 조간체제로 바꾼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회사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 급선무였고 어려운 문제였다. 세계적인 추세나 시장의 흐름으로 보아도 신문은 조간체제라야 한다는 것이 대명제였다. 그러나 체질을 하루아침에 바꾼다는 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그는 당사자를 피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제작 부문과는 관련 없었던 미더운 간부를 일본에 보내 첨단 제작과정을 짧은 시간 안에 공부하고 오도록 했다. 그의 보고를 토대로 조간제작 준비는 속도를 냈고, 마침내 1993년 4월 1일자부터 동아일보는 새로운 조간신문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회사경영 분야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았지만 제작의 일상문제, 특히 제 책임을 못 했다고 보이는 기자들을 향해서는 엄한 꾸지람을 마다하지 않았다.

(…)

이 하찮은 내 글을 하늘에서 읽으면서 그가 타박을 하고 던져버릴 것 같다. “당신 글은 무슨 소릴 하려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 주섬주섬 잡다하게 긁어모으기만 했잖아.”
그렇다. 그를 잘 알고 제대로 된 글을 쓸 훌륭한 친구들이 많은데 내가 나선 것이 후회스러울 뿐이다. 이 글은 살벌한 시대를 초연하게 살다 간 외우(畏友)의 작은 단면일 뿐이다.

(조용중 전 연합통신 사장,  ‘추도사- 고고한 複眼의 선비 권오기’, 관훈저널, 2011년 12월 통권121호, 123~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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