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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동아일보 사람들- 국태일

Posted by 신이 On 10월 - 18 - 2018

 

국태일(鞠泰一, 1898~1961)은 1924년 5월 동아일보에 경리부 서기로 입사해 1931년 9월 경리부 부장까지 올랐다. 1935년 5월 동아일보를 떠났다가 1939년 7월 영업국장대리(차장)으로 재입사했다.  1939년 11월 영업국장이 돼 1940년 6월 조선총독부가 동아일보를 폐간시키기 위해 조작한 ‘경리부정’사건으로 구속되는 곤욕을 치렀다. 해방후 1947년 2월 전무가 돼 1961년 5월 별세할 때까지 14년간 최두선 사장을 도와 동아일보의 경영을 도맡았다. 별세할 때 동아일보 전무 겸 발행인이었다. 호는 아산(雅山).

 

국태일(鞠泰一) (담양, 1898~1961) ▲ 1924. 5 기자(경리부), 경리부장, 10년근속표창, 1935. 5 퇴사. ▲ 1939. 7 재입사, 영업국차장, 영업국장, 1940. 8 폐간. ▲ 1947. 2 전무취체역, 이하 권2 참조.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국태일(鞠泰一) (담양, 1898~1961) ▲ 폐간전 영업국장, ▲ 47. 2 전무취체역, 발행인, 61. 5 재임중 사망.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소위 ‘경리부정’ 조작사건  총독부 당국은 기원절 ‘자진폐간’에 실패하자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우연한 일로 6월 초, 일인 경찰 간부들이 요정 명월관에서 회식하다가 요리상을 덮은 백색갱지를 유심히 보고는 주인에게 출처를 물었으며, 그 주인은 동아일보에서 신문지 파지를 구입하였다는 대답을 했다. 이 대답에 귀가 번쩍 뜨인 경찰은 곧 이것을 사건화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신문용지는 통제 물자로서 배급제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배급해 준 용지를 불법 처분하였다는 구실로 본사 용도경리사무를 담당하고 있던 김재중(일명 우성, 전 대법원장 김병로의 장남, 작고)을 종로경찰서로 연행한 데 이어 다시 경리장부를 압수하고 김동섭 경리부장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결국은 배급 받은 신문지 파지를 임의로 처분하여 물가 통제를 위한 ‘가격정지령’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본사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도 아니요, 또한 항상 당국의 감시 대상이 되어 있는 처지여서 경리에는 특히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으므로 아무런 흠 잡힐 일을 한 게 없었다. 그러나 경찰 당국은 사소한 파지처분이 문제가 아니라 폐간의 구실을 만드는 일이 필요했으므로 경리장부를 샅샅이 따지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이러던 중, 경찰 당국은 본사가 예상 밖으로 많은 이익금을 올리고 있고, 해동은행 본점과 지점에 송진우 명의로 기만 원이 저금되어 있는 것과 본사가 보성전문에 유휴자금 2만 원을 대여하고 있는 것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파지처분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소위 ‘경리부정(經理不正)’으로 사건을 몰고 갔다. 이 문제로 영업담당 상무취체역 임정엽과 국태일 영업국장을 다시 구속했다.

(…)

이렇게 해서 종로경찰서 사찰과장실에서 이른바 ‘중역회의’가 열렸다. 백관수 사장이 사원들과의 약속대로 그의 손으로 폐간계에 서명날인 할 것을 거부하자 경찰당국은 발행인 겸 편집인의 명의를 중병 중인 임정엽으로 변경하도록 강요하여, 임정엽 명의로 폐간계를 냈다. 본사에서는 7월 26일 중역회의를 열어 이를 추인함으로써 폐간이 확정되었다.
경찰 당국은 강제폐간의 인상을 남기지 않으려 하였음인지, 8월 초 백관수 송진우 임정엽 국태일을 석방하고(김승문 김동섭 김재중 등 3명은 9월 상순에 풀렸음), 폐간일자를 8월 10일로 잡아 자진폐간의 형식으로 문을 닫도록 했으며 그 때까지 이를 세상에 알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경찰은 기자와 사원의 언동을 감시하고 미행하며 8월 10일까지 동아일보의 폐간을 보도 관제하였다.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해방후 동아일보 복간 초기에는 신문사에 일손이 부족해서 기자들이 몇 개의 출입처를 뛰어다녀야했다.
오랜만에 체육기자회 모임에 나갔다. 광화문세무서 조사계장으로 있으면서 축구선수로 뛰고 있는 김원오가 이런 말을 전하는 것이다. “동아일보 조병륜 서무책임자가 세무서에 직접 와서 동아일보사 법인세 등을 자진 납부하고 갔다”
건국 초기였기 때문에 국민들이 기뻐서라도 국가건설을 위해 세금을 내야 하겠지만 사람들이 자기 주머니 털어내는 것을 좋아할리 없건만, “광화문세무서 관내에서 제대로 세금 내고 있는 회사는 박흥식의 화신산업과 동아일보뿐”이라는 얘기다.
회사로 돌아와 조병륜 서무를 찾아 회사의 납세에 관해 세무서가 오히려 당황하고 있다는 얘기를 나누고 있는 중에 옆에서 듣고 잇던 국태일 전무가 느닷없이 한마디 던지는 것이었다. “김군, 문화사업은 왜 하지…?” 평소 말수가 적고 근엄한 그가 입을 열었다.
“신문사는 주식회사인만큼 신문 발행이라는 문화사업도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이다. 신문이 복간되어 돌아가고 있으면 회사로서는 당연히 세무보고를 하고 기왕이면 자진 납부하는 것이 도리”라고 했다. 건국의 기쁨을 맞아, 동아길보의 경우 자진납세 제1호가 된다면 이보다 더 보람이 있겠느냐고 덧붙였다.
조병륜 서무가 책상 서랍에서 봉투를 찾아 나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체육 출입 기자회 회비라고 했다. 당시 각 출입처 기자단 모임은 가입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었는데, 그 회비를 신문사에서 내주었다. 동아일보사에서는 기자단 회비 납부에는 두말 없었으나, 출입기단 간사는 절대 맡아서는 안된다는 단서를 달았다.
이 자리에서 나눈 대화에 호감이 갔던 모양이다 국 전무는 지우를 만난 듯 나를 보면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곤 했다.
그의 신문에 대한 지론을 간추려 보면 이렇다. “신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투자와 함께 신문자체의 투명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신문 운영의 실마리는, 신문에서 돈을 벌면 반드시 신문을 위해 써야 하고, 응분의 세금을 국고에 바쳐야만 기업으로서의 도리요, 기업을 존립시키는 소지“라고 했다. ”그러나 신문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영향력에 정비례하여 신문을 두려워하는 계층이 많다“고 했다. 이들의 위상이 신문의 갈 길을 막고 있다는 것이 그의 언론관이다.
오랜 세월을 두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체로 몇몇 기업들이 조세로 인해 단죄의 대상이 되었으나, 그중 동아일보사 거명이 없었던 것이 정평같다. 국 전무가 뿌리내린 신문기업 경영관 때문이 아닐까

(김진섭, 녹취 한국언론사, 대한언론인회 발행, 2001, 103~105쪽)

 

 

국태일씨는 소싯적에 씨름을 할 정도로 체격이 건장했고 말없이 과묵하면서도 뚝심이 셌다. 그는 한마디로 동아일보의 터줏대감 같은 사람이었다. 돈이 없으면 어떻게 해서든 돈 빌려와서 동아일보 살림을 꾸려갔다.

나는 회사에 드나들 때 국태일 씨 방에 들러서 농담도 하는 사이였다. 하루는 그 방에 갔더니 국씨 밑에서 일하는 강원도 출신 조병륜씨가 나에게 “김형, 나보고 세금을 내러 가래”라고 말을 걸었다. “무슨 세금? 다음에 내지”하고 대꾸하니 저쪽에 앉아있던 국태일 씨가 그 말을 듣고 “문화사업은 왜 하지?”하고 내게 질문을 던지면서 “문화사업도 돈벌이 아니냐. 돈벌이 하면 세금 내는 게 당연하지”하고는 조병륜씨에게 “담당자가 없으면 놓고 와도 좋지만 영수증은 꼭 받아오라”고 지시했다. 결국 조병륜씨는 세금을 내고 왔다. 나중에 조병륜씨가 세무서에 있는 친구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전해줬다. “야, 동아일보에서 돈은 왜 가지고 와. 현재 세무서는 법령 정비가 안돼 세금 받을 방법도 없지만 동아일보에서 자진해서 가져오는데 안받을 수도 없고. 지금 이 나라에서 세금 내는 곳은 동아일보와 화신산업 두 곳밖에 없다.”

어느 날에는 국태일 씨가 조병륜씨에게 “은행에 돈 예금하고 오라”고 시키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내가 “국 선생, 무슨 돈을 예금 하냐”고 물었더니 국태일 씨 대답이 “너희들 월급 줘야 하지 않나”였다. “그냥 나눠주시지” 했더니 “돈이란 것은 가지고 온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국태일 씨가 밖에서 차용한 돈을 일단 은행에 넣으라는 것 같았다. 국태일 씨 원칙은 당장 쓸 돈이라도 오전에 입금했다가 오후에 출금하는 것이다. 국태일씨 말은 “다만 一錢이라도 이자를 남겨야 한다. 이것이 장사의 근본이다. 문화도 사업이라고 했지. 사업은 이렇게 하는 거야”였다. 이 정도로 철저하기가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또 어느 날에는 조병륜씨가 내게 “내 밑에서 일하던 사원이 편집국 교정부로 가니 김형이 좀 잘 봐줘”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저쪽에서 들은 국태일씨는 “일이나 하지 무슨 그런 쓸데없는 얘기냐”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그만큼 엄격했다는 얘기다. 국태일씨는 기자들에게 “돈이 없어 예우를 못해주는 게 미안하다. 앞으로 돈 많이 벌면 많이 줄 테니 열심히 하라”고 얘기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기자들이 출입기자단 간사 맡는 것을 싫어했다. 또한 출입처에서 술 사주는 것도 먹지 말라고 당부했다. 대신 출입기자단 회비는 어떤 일이 있어도 꼬박꼬박 내줬다.

젊은 기자 하나가 시내 중심가에 있는 극장에서 수모를 당하고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와 사진부 백운선씨가 이들을 혼내주려 갔다. 극장 앞 다방에서 이들을 어떻게 혼내줄까 궁리를 하는데 백운선씨가 나보고 잠깐 기다리라고 해놓고는 나갔다가 들어와선 “김형, 다 됐어”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길가에 면한 그 극장 건물 귀퉁이가 금간 것을 클로즈업 해서 찍어온 것이었다. 신문에 기사와 사진이 나갔다. 그랬더니 그 극장에서 “앞으로 동아일보에는 광고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극장 광고는 돈줄이었다. 나와 백운선씨가 국태일씨를 찾아가서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했다. 그랬더니 국태일씨 하는 말이 “그런 놈한테는 광고 안 받아도 되니까 괘념치 말고 신문 잘 만드시오”였다. 통이 큰 사람이었다.

(김진섭, 2007년 11월 19일 인터뷰)

 

 

`신문사를 망치려고 하느냐, 왜 그렇게 사진을 크게 쓰느냐`

국태일(鞠泰一)
한국 언론인. 동아일보에 33살에 입사(1928) 해서 영업국장, 재정국장, 전무 겸 발행인으로 근무했다. 동아일보의 재정을 맡아서 사진 사용하는데까지 시어머니처럼 살림을 챙겼다. (…)

국태일 전무는 심심하면 불러서 “절대로 사진을 크게 쓰지 말라”고 했다.

(전민조 블로그,  https://blog.naver.com/dovan125/140151456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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