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섭(金東燮, 1908~1950 납북)은 1927년 11월 동아일보에 경리부 서기로 입사해 1937년 6월부터 1940년 8월 동아일보 폐간 때까지 경리부장으로 있었다. 해방 후 동아일보가 복간됐을 때 재입사해 1949년 7월까지 총무국장을 역임했다. 1947년 2월에는 동아일보 취체역이 됐다. 그는 해방 전 경리부장으로서 1940년 6월 조선총독부가 동아일보를 폐간시키기 위해 조작한 ‘경리부정’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으며 6.25 전쟁 중 북으로 끌려갔다.
김동섭(金東燮) (장단, 1908~1950 납북) ▲ 1927.11 서기(경리부), 경리부장, 1940. 8 폐간. ▲ 1945.12 재입사, 이하 권2 참조.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김동섭(金東燮) (장단, 1908~1950 납북) ▲ 폐간전 경리부장. ▲ 45.12 총무국장, 취체역 총무국장, 취체역, 재직중 납북.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소위 ‘경리부정’ 조작사건 총독부 당국은 기원절 ‘자진폐간’에 실패하자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우연한 일로 6월 초, 일인 경찰 간부들이 요정 명월관에서 회식하다가 요리상을 덮은 백색갱지를 유심히 보고는 주인에게 출처를 물었으며, 그 주인은 동아일보에서 신문지 파지를 구입하였다는 대답을 했다. 이 대답에 귀가 번쩍 뜨인 경찰은 곧 이것을 사건화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신문용지는 통제 물자로서 배급제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배급해 준 용지를 불법 처분하였다는 구실로 본사 용도경리사무를 담당하고 있던 김재중(일명 우성, 전 대법원장 김병로의 장남, 작고)을 종로경찰서로 연행한 데 이어 다시 경리장부를 압수하고 김동섭 경리부장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결국은 배급 받은 신문지 파지를 임의로 처분하여 물가 통제를 위한 ‘가격정지령’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본사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도 아니요, 또한 항상 당국의 감시 대상이 되어 있는 처지여서 경리에는 특히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으므로 아무런 흠 잡힐 일을 한 게 없었다. 그러나 경찰 당국은 사소한 파지처분이 문제가 아니라 폐간의 구실을 만드는 일이 필요했으므로 경리장부를 샅샅이 따지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이러던 중, 경찰 당국은 본사가 예상 밖으로 많은 이익금을 올리고 있고, 해동은행 본점과 지점에 송진우 명의로 기만 원이 저금되어 있는 것과 본사가 보성전문에 유휴자금 2만 원을 대여하고 있는 것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파지처분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소위 ‘경리부정(經理不正)’으로 사건을 몰고 갔다. 이 문제로 영업담당 상무취체역 임정엽과 국태일 영업국장을 다시 구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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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종로경찰서 사찰과장실에서 이른바 ‘중역회의’가 열렸다. 백관수 사장이 사원들과의 약속대로 그의 손으로 폐간계에 서명날인 할 것을 거부하자 경찰당국은 발행인 겸 편집인의 명의를 중병 중인 임정엽으로 변경하도록 강요하여, 임정엽 명의로 폐간계를 냈다. 본사에서는 7월 26일 중역회의를 열어 이를 추인함으로써 폐간이 확정되었다.
경찰 당국은 강제폐간의 인상을 남기지 않으려 하였음인지, 8월 초 백관수 송진우 임정엽 국태일을 석방하고(김승문 김동섭 김재중 등 3명은 9월 상순에 풀렸음), 폐간일자를 8월 10일로 잡아 자진폐간의 형식으로 문을 닫도록 했으며 그 때까지 이를 세상에 알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경찰은 기자와 사원의 언동을 감시하고 미행하며 8월 10일까지 동아일보의 폐간을 보도 관제하였다.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동아일보의 복간
1945년 12월 1일자로 동아일보는 다시 세상에 나왔다. 폐간된 지 5년 4개월, 해방된 지 3개월 반이 지나서였다.
사장 송진우(宋鎭禹), 주간 설의식(薛義植), 편집국장 고재욱(高在旭), 총무국장 김동섭(金東燮), 영업국장 김승문(金勝文), 공장장 이언진(李彦鎭) 등 폐간 전의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발행인은 김승문, 편집인은 설의식, 인쇄인은 이언진으로 등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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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자와 최두선 사장 취임
1947년 2월 20일에 열린 임시주주총회는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의결했다. 총회에서 의장 김성수는 ‘현재의 자본금 70만원으로는 도저히 신문사를 운영할 수 없으므로 자본금을 500만원으로 증자할 것’을 제안하여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최두선 사장의 선임과 동시에 전무에는 국태일, 취체역에는 김성수 고재욱 김승문 김동섭 임병철 고광표 장덕수 김준연 그리고 감사역에는 김재수 김철중이 선임됐다. 법정 등록인도 바뀌어 발행인은 국태일, 편집인은 고재욱이 되었고, 복간 이래 본보를 주도하여 온 설의식은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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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김구 사진 몽타주 사건
이 때 주필 겸 편집국장을 맡은 김삼규가 겸직하던 편집국장에는 1949년 12월 장인갑(張仁甲)이 임명됐다. 이보다 앞서 3월에는 영업국장 김승문(金勝文)이 사임하고 정균철(鄭均撤)이 후임 영업국장이 됐다. 7월 제25기 주총에서는 백관수 김삼규 김상만 등 3인의 취체역을 증원했고, 총무국장 김동섭이 물러나자 김상만을 후임으로 임명하였으며, 취체역을 사임한 김성수 전 사장을 고문으로 추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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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8 수복과 속간
적치(赤治) 3개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학살 또는 납북됐다. 동아일보 사원 가운데도 희생자가 있었다. 취체역 김동섭(金東燮), 편집국장 장인갑(張仁甲), 사진부장 백운선(白雲善) 등이 북으로 끌려갔고, 영업국장 정균철(鄭均轍), 논설위원 고영환(高永煥) 등은 그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논설위원 이동욱은 피랍 중 탈출했고, 전무 취체역 국태일, 공무국장 이언진은 적치하에 있었으나 무사했다.
(동아일보사사 2권, 동아일보사, 1978)
6ㆍ25전쟁납북피해진상규명및납북피해자명예회복위원회(위원장 : 정홍원 국무총리)는 제9차 전체회의(2013. 5. 6)에서 6ㆍ25전쟁 납북자 417명을 추가로 결정하였다.
동아일보 총무국장 김동섭은 1908. 9. 22. 서울 종로 출생으로 1950년 8월경 자택(서울 용산구 청파동)에서 정치보위부원에게 납치된 후 소식이 두절됨.
* 신고인 : 김관희(아들, 68세, 서울 동작구 거주)
(‘6.25 전시 납북자 추가 결정’, 통일부 보도자료, 2013년 5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