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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아일보 사람들- 구연흠

Posted by 신이 On 10월 - 17 - 2018

 

구연흠(具然欽, 1883~1937)은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일제시기 사회주의운동을 벌였으며 1924년 5월부터 1925년 3월까지 동아일보에서 지방부장과 정리부장을 지냈다. 동아일보에서 퇴직한 뒤 시대일보에 입사해 영업국장 및 논설부장으로 근무하면서 신문기자단체인 무명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1925년 6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한 뒤 1927년부터 상하이에서 활동하다 1930년 9월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1935년 12월 만기출옥했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1937년 2월 사먕했다.

  

구연흠(具然欽) (서울, 1883~ ) ▲ 1924. 5 지방부장, 정리부장, 1925. 3 퇴사. 〔시대일보 편집국장〕

(역대사원명록, 동아일보사사 1권, 동아일보사, 1975)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 새로 발긔 되엿다

홍수와 가치 팽배하게 몰녀오는 신사상을 연구하야 조리잇는 갈피를 차저 보랴는 목뎍으로  신사상연구회가 생겨낫다. 위치는 경성 낙원동 173(京城 樂園洞 一七三)에 두고 실행방법으로는 강습과 토론을 하는 외에 도서와 밋잡지를 간행할 터이라 하며 발긔인의 씨명은 여좌하더라.

홍증식(洪璔植) 홍명희(洪命憙) 윤덕병(尹德炳) 김병희(金炳僖) 이재성(李載誠) 이승복(李昇馥) 조규수(趙奎洙) 이준태(李準泰) 강상희(姜相熙) 구연흠(具然欽) 홍덕유(洪悳裕) 윤우관(元友觀) 박돈서(朴敦緖) 김찬(金燦) 박일병(朴一秉) 김홍작(金鴻爵)

(동아일보 1923년 7월 11일자 3면)

 

 

상해영경(上海領警)에게 구연흠(具然欽被捉)

불란셔 조계에서 잡히어… 일차공산당관계자(一次共産黨關係者)

[상해십이일발제통] 조선○○운동에 중요인물이오 제일차공산당사건의 관련자로서 상해(上海)에 근거를 둔 구연흠(具然欽)(48)은 작 십이일 오후 여섯시 경에 상해 불조계배덕로(佛租界裴德路)에 잇는 것을 일본영사관 경찰서원이 불국관헌의 응원을 □□가지고 체포하야 엄중취조 중이라는 바 동인은 상해에 근거를 둔 ○○동맹회위원장(○○同盟會委員長) 상해한인청년동맹위원장(上海韓人靑年同盟委員長) 중국공산당 한인지부장(中國共産黨韓人支部長) 등의 중요 직책을 마튼 중요 인물로서 체포 당시에 다수한 비밀문서도 압수되엇다 한다.

(동아일보 1930년 9월 14일자 2면)

 

 

 수차(囚車)로 해륙(海陸) 넘어 구연흠(具然欽) 금야입경(今夜入京)

◇ 김명회(金明會)、하종환(河宗煥) 양명(兩名)도 호송(護送)

금조(今朝) 부산(釜山)에서 출발(出發)

[부산특파원전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의 거두로 일즉이 제일차공산당검거 당시에 교묘히 몸을 피하야 상해(上海) 방면으로 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잇든 구연흠(具然欽)(44)이가 지난 구월십일일 오후 네시경에 일중 경관 여섯명의 손에 잡히어 그동안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서에서 취조를 밧고 잇다가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의 구인장에 의하야 경성으로 잡히어 오게 되엇다함은 루보한바어니와 지난 십오일 상해를 떠난 구연흠은 하관경찰서(下關警察署) 만긔(萬崎) 신장(新場) 두형사의 호송으로 십팔일 아츰 부산(釜山)에 도착하야 정거장 구내에서 잠간 쉬인후 부산경찰서 삼전(森田) 중도(中島)이하 세명의 경관의 호송으로 금 십팔일 오전 열시사십분발 북행렬차로 경성을 향하야 떠낫다. 그 일행중에는 지난 팔월에 상해에서 일어낫든 모사건으로 역시 상해 총령사관 경찰에 잡히어잇든 함남 단천 출생(咸南端川出生)으로 현재 해삼위(海蔘威)에 이주해 잇는 김명회(金明會)(24)와 경남 동래군 철마면 이곡리(東萊郡 鐵馬面 耳谷里) 출생 하종환(河宗煥)(21) 등 두사람도 경성으로 호송되어 갓다.

(동아일보 1930년 10월 19일자 2면)

 

 

『어떠케오나 고국(故國)에 돌아오니 반갑다』

[구연흠(具然欽)의 창연(悵然)한 술회(述懷)] 감상(感想)을 말하면 무엇

검거의 그물을 피하야 멀리 상해로 다라난지 오년만에 잡히어오는 구연흠은 검은빗 조선두루막이에 중국신(靴)을 신고 머리에는 모자(帽子)도 쓰지 못한채 버들상자(柳箱) 한개를 손에 들고 호송경관에게 이끌리어 관부련락선에서 부산잔교에 조선 오는 첫발을 나려 노핫는데 그는 감개무량한 긔색으로 왕방한 긔자를 마즈며 다음과 가티 말하얏다.

『어떠게오든지 조선을 오게 되니 반갑습니다 남의 손에 잡히어 오는 사람이 무슨 별다른 감상이라고 말 할 것이 잇겟습니까 상해 법조계 극배덕로(棘裴德路)에서 잡힐 때에 여러가지 문서가 압수되어 적지안케 걱정이 됩니다』

라고 말하며 가티 오는 김명회와 하종환은 침울한 안색으로 별로히 말도 하니하고 웃저고리도 아니입고 모자도 못쓰고 잇는 모양이 보는 사람으로 하야금 잡힐때의 광경을 련상케 하얏다.

(동아일보 1930년 10월 19일자 3면)

 

 

구연흠(具然欽) 일행(一行) 삼인(三人)

엄계리 룡산(嚴戒裏龍山) 하차(下車)

정거장엔 마중나온 이도 만하

수차(囚車)로 경찰부(警察部)에 수용(收容)

지난 구월 십일일 중국 상해(上海)에서 동지 일본령사관 경찰서의 손에 검거된 제일차조선공산당(第一次朝鮮共産黨)의 거두 구연흠(具然欽)(48)은 작보한바와 가티 작 십팔일오전 열시사십분 부산역(釜山驛)발 경부렬차로 삼전(森田) 중도(中島) 상산(桑山) 등의 호송이 되어 동일 오후 열시이십구분 룡산역(龍山驛)에 도착하얏다. 미리 영등포(永登浦)까지 마중 나간  경긔도 경찰부고등과 류(柳) 월천(越川) 량 형사부장 등의 엄중한 호위알에 동역에서 하차하야 그와 가티 상해에서 이송 호위된 김명회(金明會) 하종환(河宗煥) 등으로 더부러 동역에서 바로 자동차로 경긔도 경찰부로 향하얏다.

(上) 하차(下車)하는 구연흠(具然欽)   (圓內) 구씨(具氏)의 여식구 장원 양(女息具 長源 孃)

(동아일보 1930년 10월 20일자 2면)

 

 

제일차공산당(第一次共産黨)에도 관계(關係) 구연흠(具然欽) 等 공판 개정(公判開廷)

한우(寒雨) 마지며 방청객(傍聽客) 쇄도(殺到)… 공개 오분(公開五分)에 방청금지(傍聽禁止)

제一차 조선공산당 관게의 구연흠(具然欽) 등 三(삼)명에 대한 치안유지법위반사건의 제一회공판은 예정과 가티 구일 오후 두시 경성지방법원에서 개정되엇다.

때아닌 겨울비 우수수 내리는 일은 아츰부터 방청객의 떼가 몰려와서 대혼잡을 일우엇는데 그중에는 구연흠의 부인 연씨(延氏)를 비롯하야 시내 숙명녀고에 재학중인 장녀 구장원(具長源)과 아홉살과 다섯 살 먹은 어린 딸들까지 멀리 청주(淸州)로부터 올라오고 그 외에도  만흔 친척들이 시골로부터 올라왓섯다.

정각 김천(金川) 재판장 삼포(森浦) 검사、김용무(金用茂) 이인(李仁) 양윤식(楊潤植) 등 삼(三) 변호사가 렬석 한후 재판장으로부터 피고들의 신분을 물은 후 피고 김명회와 별항과 가튼 문답이 잇슨후 개정 오(五)분만에 방청금지를 해버렷다.

◇ 출정 피고(出廷 被告) 구연흠(具然欽)(50) 하종환(河宗煥)(22) 김명회(金明會)(25)

 

◇사진은 구연흠(上)과 방청 온 그의 가족들(下)

(동아일보 1931년 12월 10일자 2면)

 

 

구연흠(具然欽)은 팔년징역(八年懲役)

공범(共犯) 양인(兩人)에겐 이년(二年)에

◇가족만 방청 허락코 심리

십육일(十六日)에 공판속행(公判續行)

구(九일) 오후 이(二)에 개정한 구연흠(具然欽) 등의 공판은 긔보와 가티 일반의 공개를 금지하고 피고들의 가족들에만 한하야 방청을 허락한 후 일(一)사천리로 심리를 진행하야 동 오(五)시에 심리를 마처 버렷고

그리고 삼포 검사로부터 구연흠(具然欽) 징역(懲役) 팔년(八年) 하종환(河宗煥) 동(同) 이년(二年) 김명회(金明會) 동(同) 이년(二年)의 구형을 한 후 양(楊) 변호사의 변론만을 마치고  폐정햇다.

그리고 이인(李仁) 김용무(金用茂) 량 변호사의 변론은 오는 십육(十六)일 속행 공관에서 할터인데 관결 언도도 동일에 하리라고 한다.

(동아일보 1931년 12월 11일자 2면)

 

 

구연흠(具然欽) 팔년(八年)… 구형(求刑)대로 판결(判決)

일(一)차공산당사건의 구연흠(具然欽) 등 삼(三)명에 대한 판결은 십육(十六)일 오전 십(十)시 경성지방법원에서 김천(金川) 재판장으로부터 알에와 가티 언도햇다.

피고(被告) 구형(求刑) 언도(言渡)

구연흠(具然欽) 팔년(八年) 육년(六年) 통산이백오십일(通算二百五十日)

김명회(金明會) 이년(二年) 이년(二年) 동 삼백일(同三百日)

河宗煥(하종환) 이년(二年) 이년(二年) 동 이백오십일(同二百五十日)

(동아일보 1931년 12월 17일자 2면)

 

 

범위(範圍)에 들 중형수(重刑囚)와 가망(可望)없는 특별사건(特別事件)

한국○○유일당(韓國○○唯一黨)사건의 구연흠(具然欽)은 소화 칠(七)년에 구(九)년의 언도를  받엇으므로 구(九)년형의 사(四)분지 일(一)인 이(二)년오(五)개월의 감형이 잇으리라 보고 작년 삼(三)월 삼십일(三十一)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언도 받은 조용하(趙鏞夏)는 이(二)년 육(六)개월의 언도를 받엇던바인데 형기의 반을 넘기지 못햇으므로 역시 형기의 사(四)분지 일(一)인 한 팔(八)개월의 감형이 잇으리라 한다.

(동아일보 1932년 2월 8일자 2면)

 

 

<유공자정보>
관리번호: 1584 
성명: 구연흠 
한자: 具然欽 
이명: 具滄海, 江載厚, 蒼崖 
성별: 남 
생년월일: 1883-10-06
사망년월일: 1937-02-28
본적: 서울  서울  京成府 慶雲町 29  
주소: 上海 法界 辣裵德 泰興坊 9
 

<공적정보>
운동계열: 중국방면 
포상년도: 2005 
훈격: 애국장 

공훈록:

1901년 대한제국기 궁내부(宮內府) 시종원(侍從院) 우시어(右侍御), 지방제도 조사원, 내부(內部) 주사(主事) 등을 지냈다. 1920년대 들어 사회운동에 투신한 그는 1922년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 1923년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에 가입하여 민족 계몽과 일제 식민지배를 타도하기 위한 항일운동에 진력하였다. 1924년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지방부장, 1925년부터는 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 영업국장 및 논설부장으로 근무하면서 신문기자단체인 무명회(無名會)에 가입하여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화요회그룹과 연관이 있는 불꽃사[火焰社]의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5년 6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입당한 뒤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 중앙검사위원이자 혁명자후원회 위원이 되었고, 3월에는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될 만큼 핵심역할을 담당하였다. 1927년 3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 모플 제2차 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모스크바에서 상해로 건너간 그는 1927년부터 크게 일어난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에 적극 참여하였다.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上海促成會)에 가입하는 한편, 1927년 9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장쑤성[江蘇省]위원회 법남구(法南區) 한인지부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 6월 대만·일본 등의 반제운동가들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반제동맹주비회를 결성했으며, 동년 11월부터 총무부 비서로 활동하였다.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가 해체되자,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의 총무부장으로 활동하면서 기관지 『앞으로』를 발행하는데 참여하였다. 1929년 11월 국내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해 광주학생운동을 선전하고자 상해 각 단체 연합회를 결성하고 동방피압박민족반제동맹주비회의 이름을 내걸고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대중적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상하이[上海]에서 3·1운동 기념시위, 6·10만세운동 기념시위, 8·29망국기념시위 등을 주도하다가 그해 9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징역 6년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5년 12월 만기 출옥하였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1937년 2월 28일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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